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영산강유역 고대문화와 옹관

Gijuzzang Dream 2008. 10. 1. 19:34

 

 

 

성곽 보존·관리에 대한 한 가지 생각
 

 

전남 나주시 반남면 일대의 낮은 구릉(해발 20~30m)에는 대형의 고분들이 산재하여 있다.

사적 제76· 77· 78호로 각각 지정된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고분군이 그들인데,

일제 강점기인 1917-8년에 일본인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등에 의해 조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고분의 내부시설은 목관이나 석실이 아닌 대형의 ‘옹관(甕棺)’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고분들은 나주 반남면을 비롯하여 다시면 복암리(사적404호)와

인접한 영암 시종, 함평 월야 등 영산강 하류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모, 금동신발, 환두대도(둥근고리 큰 칼), 철기류 등

다양하고 수준높은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또한 복암리 3호분에서도 옹관묘, 석실묘 등 총41기의 매장시설과 함께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 역시 중요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이 지역에 강력한 정치적인 세력이 존재하였다는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옹관고분’하면 영산강 고대문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상징적인 유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옹관이라 함은 독[甕]이나 항아리[短頸壺] 같은 일상생활에서 쓰던 50㎝ 내외의 토기를

관(棺)으로 대신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통 유아의 시신을 묻거나 성인의 2차장(二次葬)에 쓰였다.

그 시원은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신석기시대까지 올라가지만

우리나라는 청동기시대부터 주로 쓰이기 시작하여 철기시대와 삼국시대를 거쳐

최근까지도 면면하게 이용되어 왔음이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옹관을 시설하는 방식은 청동기시대에는 옹을 세워 위를 판석으로 덮었으나

철기시대 이후에는 보통 2개의 옹의 입구를 합구(合口)하여 옆으로 눕혀 묻었으며,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목관이나 석관, 석실 등을 시설한 다른 분묘와 함께하거나

종속(從屬)되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다.



 

반면, 영산강유역에서는 이와 같은 여타 지역의 양상과는 현저하게 다른

매우 독특한 옹관이 일정시기에 나타났다가 소멸한다.

소위 ‘전용옹관(專用甕棺)’이라고 부르는 이 옹관은

일상용기가 아닌 순수 관(棺)으로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그 외형은 ‘U'자형에 가까우며, 보통 2개의 옹을 합구하여 안치하는데

그 크기가 2~3m, 무게가 200-300㎏되는 초대형이다.

이것이 나타난 시기는 대략 3세기 후반이며

5세기 전후에는 이 지역의 주된 묘제로서 직경(또는 한 변)이 30~40m에 이르는 대형 고분으로

발전하여,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은 수장급의 위세품(威勢品)도 부장된다.

그리고 5세기 후반경이 되면 백제의 주묘제인 석실분(石室墳)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렇다면, 근 200여 년간 대형의 전용옹관을 제작 · 사용하였고

영산강유역만의 고유한 묘제로 발전시켰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고대사학계와 고고학계의 많은 노력과 연구의 진전을 통해

옹관고분세력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 실체와 제양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히 규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고대의 문헌기록이 거의 없다는 한계와

고고학 자료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고고학자료는 우리들이 노력을 경주한다면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경우이지만

옹관고분 자체에 대한 자료만이 일제와 80년대 국립박물관, 90년대 지역 대학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확보되었을 뿐

이들 세력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생활유적은 거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이 때문에 지역학계에서는 국가적인 지원과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학계의 바람이 커서였는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05년 말,

옹관고분의 중심지인 나주에 터를 잡고 문을 열게 되었다.

나주연구소는 문을 엶과 동시에 중장기 사업계획을 마련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대형옹관 고분을 조성한 세력의 실체를 고고학적으로 구명(究明)하고

더 나아가 영산강유역 고대문화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업의 세부계획을 수립하면서

옹관고분에 대한 조사는 기왕에 조사· 연구된 자료들이 있으므로 자제하기로 하고

보다 다양한 연구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옹관고분세력의 거점지역인 치소(治所)나 주거· 취락지,

생산유적 등에 대해 중점적으로 조사키로 하고 하였다.


2006년에는 우선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관련 있는 유적 즉, 복암리고분 조성세력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회진성(會津城)과 취락지 또는 생산유적이 잔존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적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2007년 이후에는 전용옹관을 생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마(窯) 유적에 대한 발굴도 계획하고 있다.

앞으로는 옹관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타 시·군으로도 조사의 외연을 넓혀갈 예정이다.


이와 같이 연차적이고 집중적인 조사가 진행된다면 (전용)옹관고분을 비롯한

영산강유역고대문화를 규명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이 지역 고대문화의 성격규명을 위한 종합적인 연구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연구소의 일차적인 비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조사할 대상지에는 대부분 민가들이 들어서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은 사유지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지역주민의 양해가 없으면 조사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대형화되지 않은 옹관묘들은 지속적으로 멸실되어 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농지나 묘지 개간이다.

 

옹관묘의 특성상 낮은 구릉지에 분포하고 있고 깊이 묻혀있지 않기 때문에

농민들이 부지불식중에 훼손하기도 하고 귀찮은 존재(?)로 여겨 의도적으로 폐기하기도 한다.

지표조사 중에 만난 굴삭기 기사가 여러 곳에서 공사를 하면서 옹관을 폐기하였었다는 경험담은

이를 반증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연구소는 금년에만 2건의 긴급발굴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지역민들이 발견·신고를 하여 조사는 하였지만

이러한 긴급발굴은 당초의 조사계획을 뒤로 미루게 하는 원흉(?)이 되고 있다.


이제 나주문화재연구소는 옹관고분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가고 있다.

‘옹관고분사회’와 영산강유역 고대문화의 성격 규명은

무슨 소명(召命)과도 같이 우리 직원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게 되었다.

문헌기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인 조사가 필수적인데

얼마나 오랫동안 외롭고 힘든 현장작업(孤苦學)을 수행해야 되는지 예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이지역의 고대사와 문화를 복원해내는 작업의 일환이기에

사초(史草)를 쓰는 사관(史官)의 심정을 가지고 모든 조사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또 언제 어디서 세상 밖으로 드러날지 모를 옹관을 지키는 파수꾼도 되어야 한다고

머릿속에 되뇌어본다.

- 문화재청 부여문화재연구소장 심영섭

- 2008-09-26 문화재청, 문화유산e야기

 

 

 

 

 

대형전용옹관(大形專用甕棺)의 제작 실마리 풀다

- 대형전용옹관 소성실험 실시 -

 

영산강 유역의 특징적인 문화유산인 대형전용옹관(專用甕棺)의 소성(燒成, 토기를 굽는 작업)실험을

12월 18일부터 12월 24일까지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범)에서 실시한다.

대형전용옹관은 매장(埋葬) 전용으로 특별하게 제작된 토기관으로

어른을 뉘어서 안치(신전장, 伸展葬)할 수 있는 충분한 크기이다.

(현재까지 보고된 대형전용옹관 최대크기는 2m 정도)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대형전용옹관은 동시기의 돌로 만든 무덤을 만든

다른 지역과는 달리 대형의 토기를 이용해 대형고분의 중심매장시설로 사용하고 있어

고고학뿐만 아니라 고대사 연구의 핵심이 되고 있다.

대형전용옹관의 연구는 묘제와 개별유물, 고분 축조집단의 성격 및 해석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매장의 주체가 되는 대형전용옹관의 제작기술의 연구는 미진하여

이 지역 대형전용옹관을 사용하는 집단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되어 왔다.

대형전용옹관 제작기술의 연구는 몇몇 유적, 소량의 옹관편을 대상으로

과학적 분석과 관찰조사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유용한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관련연구자들이나 심지어 대형 옹기를 굽는 장인들조차도

대형전용옹관의 제작기술을 파악하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이에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대형전용옹관의 고대기술과 제작과정을 복원 · 재현하고자

『대형옹관제작 고대기술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추정옹관가마의 발굴조사에서부터 출토된 대형전용옹관에 대한

포괄적인 과학적 분석과 대형전용옹관 제작기술에 대한 실험고고학적 연구에 이르기까지

진행되는 종합적인 조사 · 연구 프로젝트로

한국은 물론 일본 · 중국 등에서도 유례가 없는 최초의 실험고고학적 프로젝트이다.

올해 4월부터 영산강 유역 37개 유적 출토 대형전용옹관 170여 기에서 227편의 시편을 채취하여

태토(胎土, 도자기를 만드는 흙 입자), 소성온도 등의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과학적 분석 작업을

실시하고 있다. 더불어 분석대상 전용옹관에 대한 제작기법을 육안으로 조사하고

일부 주요 옹관의 3D Scan, X-Ray, CT촬영 등의 조사를 실시하여

대형전용옹관의 제작기법에 대한 폭넓은 자료를 확보하였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대형전용옹관의 성형실험을 실시하여

대형전용옹관 대·소옹(소성전 대옹 203cm, 소옹 121.9cm)을 완성(10월)하였고,

성형과정에서 테쌓기(진흙으로 여러 크기의 고리를 만들어 똬리 모양으로 쌓아 올려 가면서

토기를 만드는 방법), 손누름 흔적, 저부에 생긴 둥근 구멍 등의 제작기법을 밝힐 수 있었다.

 

아울러 현재 학술적으로 옹관가마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는 오량동 유적의 가마에 대한

정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이에 대한 충실한 고증을 거쳐 옹관가마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실시되는 이번 대형전용옹관 소성실험은
12월 18일 옹관작업장에서

가마까지 바닥에 깐 모래 위로 대형전용옹관을 굴려서 가마 안에 넣는 과정(이동 실험)을 시작으로,

19일 물벽돌(건조벽돌)을 이용하여 가마의 아궁이 제작을 완료하였다.

20일부터는 본격적인 소성을 닷새간 진행하게 된다.

소성은 소나무를 이용한 환원소성(還元燒成, 산소공급을 차단하여 토기를 굽는 작업)이며,

나흘간은 약한 불(약 600℃ 이하의 피움불과 돋음불)을 지피고,

마지막 닷새째는 큰불(700~900℃)을 지피게 된다.

가마에 큰불을 지피기 전에는 대형전용옹관 소성의 성공을 기원할 의식도 지낼 예정이다.

향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대형전용옹관의 과학적 분석자료를 토대로

제작실험을 진행하고, 제작실험 결과물을 재검증하기 위한 과학적 분석 작업을 실시할 예정이며,

시문구(무늬새기개), 회전판 등 도구에 대한 관찰과 더불어

제작지에서 사용처(옹관고분)로의 이동 문제까지 복원할 계획이다.

담당자 :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이종훈, 조미순
전화번호 : 061-337-9962 

 

 

 

▲ 1. 대형전용옹관 시료채취 모습

▲ 2. 대형전용옹관 분말시료채취 모습

 

 

▲ 3. 대형전용옹관 성형제작 모습(테쌓기)

 

▲ 4. 대형전용옹관 성형제작 모습

 

 ▲ 5. 제작된 대형전용옹관(대옹, 소옹)

 

▲ 6. 가마제작 완성 후 모습

 

▲ 7. 대형전용옹관 가마 이동

 

 

▲ 8. 대형전용옹관 가마 내부 재임

- 문화재청, 2008-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