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핼리혜성
핼리혜성, 조선의 멸망을 암시하다
1910년 초 영국과 미국의 신문들은 마치 지구의 종말이 다가온 듯한 기사를 마구 쏟아냈다. 그로 인해 방독면과 독가스 해독약이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미국에서는 비상시에 마실 공기를 채워놓기 위해 자전거 튜브를 사재기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지구촌을 이처럼 공황 상태로 몰아넣은 주인공은 바로 그 해 4월에 모습을 드러낸 핼리혜성이었다. 핼리는 당시 기록에 남아 있던 24개 혜성의 궤도를 계산하여, 1531년과 1607년, 1682년에 출현한 바 있는 3개의 혜성이 같은 혜성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76년 후인 1758년 이 혜성이 또 나타날 거라고 예측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1758년 크리스마스 밤에 긴 꼬리를 드리운 혜성이 나타났다. 이로써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알 수 없는 꼬리별 혜성에도 주기가 있다는 것이 비로소 밝혀졌으며, 이 혜성은 그의 이름을 따 '핼리혜성'이 되었다. 친구인 아이작 뉴턴 때문이었다. 뉴턴은 1680년 10월과 11월에 관측된 혜성이 태양 뒤로 사라졌다가 12월에 다시 나타나자 의구심을 품었다. 태양을 중심으로 궤도를 그리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직접 혜성의 궤도를 그려보던 뉴턴은 태양의 보이지 않는 힘이 혜성을 그렇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즉, 뉴턴은 널리 알려진 사과 이야기보다는 혜성 덕분에 중력의 개념을 체계화시킬 수 있었던 셈이다. 그것은 그 몇 년 전에 발표된 혜성의 꼬리에 대한 스펙트럼 조사 결과 탓이 매우 컸다. 시안은 청산가리 같은 시안 화합물을 만드는 성분인데, 이로 인해 핼리혜성의 독가스 소동이 벌여졌던 것이다. 핼리혜성의 관측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혜성은 비 혜(彗)와 별 성(星), 즉 '빗자루 별'이란 뜻이다. 또 긴 머리카락을 지닌 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Komete’에서 유래한 영어 'Comet'는 '머리카락 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혜성의 출현이 갖는 의미 또한 비슷했다. 왕의 죽음이나 전쟁, 전염병, 기아 등등 모든 불행한 일의 징조가 바로 혜성의 팔자였다.
조선에서는 특히 반란이나 쿠데타의 징조로 혜성을 해석하곤 했는데, 혜성이 흰 빛을 띠면 장군이 역모를 일으키며 꼬리가 길고 클수록 재앙이 크다고 생각했다. 바로 혜성의 그 이상한 모습과 행태 때문이었다.
옛 사람들은 지구의 물질과 인간의 세상사는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세계이지만, 하늘과 천체는 특별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어 완벽하다고 믿었다. 이처럼 완벽하고 평화로운 우주의 질서를 깨뜨리며 불현듯 출현하는 천체가 바로 혜성이었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5월 4일 혜성이 처음 나타난 뒤 5월 27일 마지막 관측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5일 뒤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6월 2일 은밀하게 아뢸 것이 있다며 임금의 알현을 청했다. 세조가 사정전에서 그들을 면담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김질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바로 그 유명한 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의 전모가 그 자리에서 밝혀진 것이다.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사들과 몇몇 무관들이 계획한 단종복위 운동이었다. 그때 별운검으로 임명된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창덕궁 연회장이 협소하여 별운검을 들이지 않기로 하면서 거사는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일주일 후 모두 처형되었다. 그들 중 박팽년과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는 후대에 사육신으로 기록되었다.
그럼 사육신 사건과 그 무렵 관측된 핼리혜성 사이에는 과연 어떤 연관성이 숨어 있을까. 김질이 세조를 알현한 그 날 실록을 보면 성삼문이 자신을 처음 불러 “근일에 혜성이 나타나고 사옹방(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연회에 쓰이는 모든 식사 공급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 관청)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니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하고 운을 뗐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나타난 핼리혜성의 징조부터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애초 혜성 출현에 대한 성삼문의 인식은 반역에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김질의 고발로 붙잡힌 뒤 세조가 왜 김질에게 그런 말을 했는가 하고 묻자 성삼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혜성으로 인해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을까 염려했다는 의미인 것 같다. 어쨌든 조선 개국 후 처음 등장한 핼리혜성은 당시 조정의 가장 민감한 정치 사안인 단종 복위라는 엄청난 사건의 뇌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 두 번째로 관측된 이 핼리혜성은 중종 때의 최고 간신으로 손꼽히는 김안로의 재등용과 때를 같이 하고 있다. |
김안로는 1506년(중종 1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관직에 등용되어 사간원 정원ㆍ홍문관 부교리ㆍ직제학ㆍ부제학ㆍ대사간 등의 요직을 맡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신진 개혁세력인 조광조 일파가 숙청된 후 이조판서에 오른 그는, 아들 김희가 효혜공주와 혼인하여 중종의 부마가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그 후 남곤이 죽자 유배지에서 자신의 배후 세력을 움직여 심정을 제거하고 마침내 1531년 유배에서 풀려나 재등용된다. 다음날 10여 자에 이르는 긴 꼬리에 흰 빛깔의 혜성이 나타났다.
권력을 되찾은 김안로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허항ㆍ채무택 등과 함께 옥사를 수차례 일으켜 정적과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은 자들을 제거해 나갔다.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오른 그가 세자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휘두르는 칼에 공신들도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심지어 문정왕후의 친오빠인 윤원로ㆍ윤원형 형제도 그에 의해 쫓겨나는 형국이었다. 그에게 날마다 개고기 구이를 만들어 바치는 아첨꾼들마저 생겨날 정도였다. 이팽수와 진복창이 대표적인 인물로 이들은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환심을 사서 관직에 등용되었다.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계비인 문정왕후의 폐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결국 1537년(정유년) 사약을 받고 말았다. 그 후 김안로는 허항ㆍ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이라 불리었다. 중종은 뜻밖의 병란을 우려하여 서울의 군사력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또 변방보다 내부를 먼저 걱정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는 신하도 있는 등 조정은 불안에 떨었다. 그때 나타난 혜성이 바로 김안로의 재등용을 경고하는 하늘의 메시지였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날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다음과 같은 논조를 덧붙였다. 김안로가 등용되자마자 혜성의 요괴로움이 바로 나타나니, 하늘이 조짐을 보임이 그림자와 메아리보다도 빠른 것이다.” 1607년(선조 40) 8월 9일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초어스름에 처음 관측된 핼리혜성은 그해 9월 14일 ‘구름이 짙게 끼어 혜성을 살필 수가 없다’는 기록을 끝으로 실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창덕궁의 복구가 시작되고 전쟁이 끝난 뒤 처음으로 일본에 조선통신사가 파견되는 등 전후의 어수선한 혼란으로부터 점차 안정의 기반을 다지던 무렵이었다. 또 바로 전 해 선조가 그토록 기다리던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는 등 왕실의 경사도 겹쳐 있었다.
바로 다음날 숙종은 여러 신하들과 접견한 자리에서 혜성의 변고를 두려워한다는 뜻을 알리고, 형조판서에게 감옥의 죄수를 속히 판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선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1759년 3월 6일이었다. 이때는 영조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있던 시기였는데, 혜성이 계속 나타나자 천체의 재앙을 늦추는 방도는 오직 세자 저하께서 몸을 돌이켜 수성하는 데 있을 것이라는 요지의 상소가 올라왔다. 상소한 바를 마땅히 가슴에 새기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그런 마음가짐은 그때뿐이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2년 후 사도세자는 영조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관서지방에서 유람을 즐겼다. 이후 계속되는 돌발적인 행동으로 영조의 불신이 점점 커져 결국 사도세자는 1762년 8일 동안이나 뒤주 속에 갇혀 있다가 죽게 된다. ‘성변등록’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혜성의 이동경로 및 꼬리 길이ㆍ모양ㆍ색깔까지 그림과 함께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소중한 자료에 속한다. 혜성은 더 이상 예측 불허의 불길한 꼬리별이 아니었다. 또한 그 무렵에는 우주와 천체에 대한 근대적 과학지식이 차츰 늘어나고 있었다.
그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의 학자도 혜성에 대해 과학적인 시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인 최한기는 1867년에 저술한 ‘성기운화’라는 저서에서 혜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혜성이 저녁에 나타났는데 빛은 희고 꼬리의 길이는 2척 가량이었으며 북극과의 거리가 32도라고 묘사하고 있다. 또 4경에 혜성이 서쪽으로 사라졌는데, 헌종은 측후관을 임명하여 윤번으로 숙직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점차 또렷하게 드러날수록 옛날 사람들이 짚어낸 혜성의 팔자와 매우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핼리혜성처럼 태양을 중심축으로 다시 돌아오는 주기혜성은 200년을 기준으로 하여 단주기혜성과 장주기혜성으로 나누어진다. 태양으로부터 약 45억~75억㎞ 떨어진 해양성 궤도 바깥쪽의 카이퍼벨트로서, 이곳엔 행성 형성의 잔재인 수천만 개의 얼음핵이 모여 있다. 태양으로부터 3만~10만AU(1AU는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로서 약 1억5천만㎞)에 위치한 오르트구름이 고향이다. 해왕성이 태양으로부터 약 30AU 거리에 있으니, 그보다 1천배 이상 멀리 떨어진 곳이다. 오르트구름을 흔들면 구름의 일부분이 깨어지면서 수많은 혜성들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 혜성들은 대부분 태양계 외곽으로 빠져나가고, 몇몇만이 태양의 중력에 끌려 태양계로 진입하는 장주기혜성이 된다. 그 중 600여 개는 궤도가 파악되어 언제 다시 지구를 스쳐 가는지 알 수 있으며, 매년 10~20개의 혜성이 새로 발견된다. 태양을 한 바퀴 돌 때마다 혜성의 몸체인 핵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76년마다 꼬박꼬박 지구를 방문하는 핼리혜성도 15만년 후에는 가스 등의 분자가 모두 증발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운명이다. 외계생명체론을 주창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태양계의 탄생 초기에 지구로 날아온 혜성에 탄소와 물이 함유되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인체를 구성하는 필수 단백질인 아미노산 같은 분자들이 만들어졌다는 것.
실제로 지난 2005년 6월 미항공우주국(NASA)의 혜성 탐사선인 딥임팩트가 370㎏의 충돌선을 직경 14㎞의 혜성인 템펠-1에 충돌시켰을 때 13일 동안 약 25만 톤의 물이 혜성에서 쏟아져 나오는 게 관측되었다. 그 긴 꼬리 속에 그대로 지니고 있는 셈이다. 전 세계가 독가스 소동에 휘말리며 핼리혜성의 출현에 주목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 무렵 조선왕조실록의 어디에도 혜성의 출현에 관한 기록은 없다. 혜성의 출현에 더 이상 미신적인 징조를 부여하지 않게 된 탓일까. 아니다. 1910년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재위하고 있던 때로서, ‘순종실록’은 ‘고종실록’과 함께 일제 통치 때인 1927년 4월부터 일본이 설치한 이왕직의 주관 하에 편찬작업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총책임 및 감수는 당연히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자기들 입맛에 맞게 편찬될 수밖에 없었다. 4개월 후인 그 해 8월 29일(양력) 순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와 시의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짐의 오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이날 전격적으로 단행된 한일병합으로 인해 조선 왕조는 건국된 지 27대 519년 만에 막을 내렸다.
- 이야기 과학 실록 (16-17) 2008년 07월 31일, 2008년 08월 07일 -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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