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열왕후의 죽음과 황새들의 패싸움
사자나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의 경우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한다. 하지만 유순한 초식동물에게서도 폭력성을 발견할 수 있다. 무리 내 서열을 가리거나 암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또 먹잇감이 풍부한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도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사육 상태의 밀폐된 공간에서는 스트레스로 인해 싸우다가 도망갈 곳이 없으므로 동족 간의 살해사건이 간혹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기록들은 공교롭게도 인조와 효종 때에 몰려 있다. 과연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636년(인조 14) 1월 10일 인조실록에 의하면 “경상도 대구 지방에 큰 황새들이 모여들어 패를 갈라 남북으로 진을 치고 날개를 벌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서로 싸웠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8ㆍ15 광복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흔히 번식하던 텃새였다. 마을 어귀에 황새가 둥지를 틀면 사람들은 혹시 거기를 떠나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정성껏 보살피곤 했다. ‘부부 간의 금슬을 좋게 하는 행운의 새’로 여겼기 때문이다. 즉, 황새는 우애와 화목을 상징하는 길조였다. 그런데 이같이 평화스러운 황새들이 왜 패를 갈라 동족 간에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것일까. 1635년 12월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소현ㆍ봉림ㆍ인평ㆍ용성대군 등 4형제를 둔 인열왕후는 42세의 나이에 또 왕자를 출산하다 아기와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다. 칭기즈칸의 정통 후계자였던 차하르 몽골까지 평정한 후금은 정묘호란 때 맺은 조선과의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꿔야 한다면서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한 것이다. 더불어 후금의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에 오를 속셈을 조문사절단을 통해 내비치고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도 사신의 목을 베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위기감을 느낀 후금 사신들은 허겁지겁 본국으로 달아났는데, 후금 사신들이 도성을 빠져나갈 때 기와조각과 돌을 던지는 백성들도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과 후금은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조선 순조 때의 학자 유희가 지은 ‘물명고’에 의하면, 황새는 다른 새들에 비해 다리가 늘씬하고 키가 크기 때문에 큰 새란 뜻으로 ‘한새’로 불리다가 황새가 되었다고 한다. 인열왕후의 성씨와 황새의 어원이 같다는 점에서 실록에 기록된 황새들의 갑작스런 패싸움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평안도 대동강 가에서 강오리가 서로 싸워 죽은 것도 있고 거의 죽게 된 것도 있었다. 이때부터 밤마다 매일 싸우더니 10여 일이 되어서야 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4월 1일에는 “청파의 돌다리 아래에서 뭇 개구리가 서로 싸워 죽은 것이 많았다.”라는 동물들의 이상스런 패싸움이 연이어 보고되고 있다.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조문사의 국서를 거부할 때부터 이미 결전을 다짐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고립무원의 그곳에서 40여 일을 버티던 인조는 마지막 보루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한강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이렇게 볼 때 병자년 초의 황새와 강오리, 개구리의 치열한 동족 싸움은 서로 죽고 죽이는 인간들의 전쟁과 많이 닮았다. 실제로 좁은 사육장 외의 야생 상태에서도 동물들이 같은 종족을 살해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는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동족이 더 많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본능일 수도 있고, 같은 종을 잡아먹을 경우 그 속에 있는 병원체에 취약하다는 생존상의 약점도 한몫하고 있다. 생사를 가르는 싸움 끝에 설사 이긴다 해도 상처가 나면 자신도 더 이상 사냥을 하지 못해 굶어 죽으므로 서로 간의 치명적인 싸움은 피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숫사자들이 새끼를 잡아 죽이는 행위이다. 한때 사자들이 백수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새끼들에 대한 스파르타식 교육 덕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정복한 선주민 출신의 노예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스파르타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그들의 반란에 대비하기 위해 시민 모두를 강력한 전사로 훈련시켰다. 이처럼 건강하게 자란 아이들은 7세가 되면 가정을 떠나 침식을 같이하며 국가에서 시키는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사자에게서도 스파르타식의 강한 양육법이 발견되었다. 숫사자가 새끼를 물어 절벽에서 떨어뜨리면 약한 새끼는 죽고 강한 새끼만이 살아남아 다시 암사자의 품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목격된 것이다. 숫사자는 강한 새끼만을 선택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새끼 모두를 살해하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뜨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늙은 우두머리 숫사자에게 젊고 힘센 떠돌이 숫사자가 도전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생긴다. 새 두목이 된 젊은 숫사자는 그때부터 이상한 행동을 시작한다. 새끼들을 사냥하듯이 몰아서 물어뜯거나 높은 벼랑에서 떨어뜨려 모두 죽여 버리는 것이다. 새끼를 기르고 있는 암컷은 아무리 새로운 두목이라 해도 교미를 하지 않으므로 그 같은 끔찍한 살해를 저지른다. 이때 암컷은 자신의 눈앞에서 새끼가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고도 얼마 후면 순순히 젊은 숫사자의 짝짓기에 응하는데, 자신이 적극적으로 유혹하고 나서는 암컷도 있다. 스파르타 교육을 시킨다고 착각한 사자의 사례는,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운 좋게 살아남은 새끼를 어미가 몰래 데리고 간 것뿐이었다. 사자 이외에도 자신의 유전자를 퍼트리기 위해 남의 새끼를 죽이는 동물이 있다. 침팬지나 불곰이 바로 그 주인공들. 무리 생활을 하는 침팬지의 경우 우두머리가 바뀌면 새 우두머리가 암컷들의 새끼를 죽여 버린다. 그래야 암컷에게 다시 발정기가 찾아오며, 자신의 새끼를 잉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동족을 처절하게 살해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나온 침팬지가 다른 무리의 영역을 어슬렁거리다 발각될 경우 건장한 수컷들에게 붙잡혀 입으로 물어뜯기고 돌에 맞아 살해당하기 십상이다. 무방비 상태의 동족을 이처럼 치명적인 공격으로 죽이는 경우는 인간 외에 침팬지가 유일하다.
수컷 불곰 역시 암컷이 데리고 다니는 새끼를 잡아 죽이곤 한다. 때문에 새끼를 키우는 암컷은 다른 수컷을 몹시 경계한다. 그런데 불곰의 수컷은 그저 죽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인 새끼를 그 자리에서 뜯어먹기까지 한다. 도롱뇽은 먹이가 부족할 경우 부화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동족을 잡아먹을 만큼 포식성이 강하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철칙이 있다. 않는다. 도롱뇽은 양서류 특유의 냄새를 통해 자신의 부모와 형제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수릿과에 속하는 사나운 새들은 먼저 알을 깨고 나온 새끼가 나중에 알을 깨고 나온 형제를 무참하게 공격해서 죽인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어미 새가 이 살육의 현장을 보고도 못 본 척 눈감아준다는 사실이다. 허약한 자식을 여러 마리 키우는 것보다는 제일 강한 새끼 하나를 키우는 것이 종족 보존을 위해 더 유리하기 때문에 생겨난 습성인 것 같다. 이는 어미의 영양 상태가 부실해서 새끼를 키울 수 없거나 혹은 적에게 발각되어 새끼가 잡아먹힐 위험이 있을 때 어미가 새끼를 잡아먹어서 다음에 더욱 건강한 새끼를 낳기 위한 종족 보존의 본능적인 행위에 속한다. 혹은 배우자를 차지하고 무리 내 서열을 가리기 위해서, 그리고 가끔은 먹잇감으로 삼기 위해 동족 간에도 폭력을 행사하곤 한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646년(인조 24) 3월 2일에 나온다. 그런데 이번 기록은 이전의 기록들과는 달리 동족이라 할지라도 동물을 색깔별로 구분해 놓았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 때인 서기 10년, 모천이라는 개울에서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무리를 지어 서로 싸우다 검은 개구리가 모두 죽었다.
청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고 세운 전승비인 삼전도비.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검은색은 북쪽을 상징하고 붉은색은 남쪽을 상징한다. 당시 고구려의 북쪽에 부여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를 놓고 사람들은 머지않아 고구려와 부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부여가 망할 거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 후 정말로 유리왕의 아들인 대무신왕이 서기 22년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시켰다.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 조정은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세자빈 강씨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으로 상당히 어지러웠다. 세자빈 강씨는 청나라에 들어온 서양 문물을 접하고는 조선도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 되었다. 또한 청나라도 조선과 문제가 생길 때마다 소현세자를 통해 해결하거나 담판을 짓곤 했다. 더구나 김자점과 짜고 자신의 아들인 숭선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안달이 난 후궁 귀인 조씨의 모함으로 인해 인조와 소현세자 일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실록에도 독살로 의심하는 내용이 기록될 정도였는데, 이에 세자빈 강씨는 시아버지인 인조에게 강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1646년 1월 3일 수라상의 전복구이에서 독이 발견되자 인조는 세자빈 강씨의 짓으로 의심했다. 아무런 증거도 없었고 조정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인조는 강씨를 후원 별당에 감금해 버린다. 강씨는 마침내 인조에 의해 폐출되어 사사되고 만다. 또한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 가 두 명이 병에 걸려 죽게 된다. 푸른색이 동쪽을 상징하고 검은색이 북쪽을 상징하는 것을 감안해 볼 때, 동쪽(조선)과 북쪽(청나라)의 싸움으로 인해 결국 소현세자 일가만 풍비박산이 나고 만 셈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전과는 달리 동물들이 세 무리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홍청도 공산현에 물오리가 세 무리로 나뉘어서 각기 좌우 진을 만들고 진퇴하며 싸움을 하였는데, 모였다가는 흩어지고 한 것이 1개월이 넘었다”고 적혀 있다. 또 그로부터 두 달 후인 5월 10일에는 “홍청도 회덕현에 청색ㆍ백색ㆍ흑색 두꺼비들이 봇도랑에 모여 며칠 동안이나 뛰어오르며 서로 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충주 대신 홍주(지금의 홍성)를 넣어 한때 홍청도라 불렀다.
그 발단은 대윤파의 잔당을 없애기 위해 명종 때 소윤파 윤원형이 일으킨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로 인해 충주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약빙이 처형당했는데, 후에 그의 아들인 이홍윤이 역모 사건에 휘말리면서 충주 지역의 문인 300여 명이 죽음을 당한다. 그 후 반란의 도시라는 이유에서 충주를 뺀 홍청도라는 지명을 사용했다.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 그러나 새로운 문물에 심취한 소현세자와 달리 그는 철저한 반청주의자였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임을 당한 직후 세자로 책봉된 효종은 1649년 5월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받았다. 따라서 친청파들을 척결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대표적인 친청 세력이 바로 김자점이었다.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키고 세자빈 강씨의 처형에 앞장섰던 김자점은 귀인 조씨가 낳은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를 결혼시키는 동시에 사은사로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정치적인 입지를 굳혔다. 북벌론이 대두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역관을 통해 청나라에 그 사실을 고발해 버렸다. 그로 인해 다시 광양으로 유배된 그는 귀인 조씨와 짜고 아들 김익으로 하여금 숭선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다 결국 1651년에 처형당하고 만다. 새로운 강대국 청나라의 등장으로 인한 삼전도 치욕과 그 이후 복잡하게 얽힌 소현세자의 의문사 및 김자점의 역모사건으로까지 이어진다. 특히 효종 대에 동물들이 세 무리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것은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과 청나라,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조정의 친청 세력 간의 암투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야기 과학 실록 (18-19) 2008년 08월 14일, 08월 21일 - ⓒ ScienceTimes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물들이 자기의 종족을 향해 공격하고 죽이는 행위는 거의 볼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야생 동물들이 동족 간에 패싸움을 벌인 희귀한 장면을 서술하고 있다.
황새는 우애와 화목을 상징하는 길조였다.
황새는 지금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국제보호조이지만,
왜냐하면 황새는 예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또는
대구에서 황새가 패싸움을 벌이기 바로 전 달인
이 소식이 전해지자 후금은 조문사를 보내 문상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에 분개한 조정의 대신들과 인조는 후금 사신이 가지고 온 국서를 거부했으며,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
그뿐만이 아니었다. 1636년 3월 6일에는
급기야 그 해 12월 1일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홍타이지(청 태종)는
인조는 청나라 군대가 서울에 들어오기 불과 이틀 전에 남한산성으로 겨우 몸을 피했다.
치욕적인 역사를 그린 삼전도비 옆의 조형물
호랑이나 사자 같은 포악하고 무서운 육식동물일지라도 동족은 잡아먹지 않는다.
또한 포식동물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지만 신체상에서 일방적인 차이가 날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스파르타식 교육이란 고대 그리스의 유력한 도시국가였던 스파르타의 교육방식을 뜻한다.
새로 태어난 신생아가 허약하면 들판에 버려서 죽게 하고, 건강한 아이만 부모가 양육할 수 있었다.
숫사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퍼트리기 위해 다른 새끼들을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의 착각이었다.
사자는 힘센 숫사자 한 마리가 여러 마리의 암컷과 새끼를 거느리는 무리 생활을 한다.
이처럼 잔인한 행동을 하는 까닭은 암컷과 교미해서 자신의 새끼를 낳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침팬지는 자신의 유전자 전달이라는 이기적인 목적 이외에도
침팬지는 동족을 치명적인 공격으로 죽이기도 한다.
이 같은 동족 포식을 하는 대표적인 동물이 도롱뇽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같은 형제들끼리는 결코 잡아먹지
하지만 형제자매들을 서로 물어 죽이는 동물도 있다.
한편 햄스터나 쥐 같은 설치류들은 어미가 새끼를 잡아먹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처럼 동물은 영역을 지키거나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서
조선왕조실록에서 병자호란 이후 동물들이 동족 간에 패싸움을 벌인 기록은
“평안도 안주 지방에서 푸른 개구리와 검은 개구리가 5일 동안 싸웠다.”
색깔이 다른 개구리 무리가 서로 싸운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그럼 인조 때의 개구리 무리 간의 싸움은
병자호란 때의 삼전도 치욕 이후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그의 이러한 태도와 위치는 숭명반청 세력인 서인 정권과 인조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러다 8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소현세자가 두 달 뒤인 1645년 4월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푸른 개구리와 검은 개구리의 싸움이 기록된 지 2주 후인 그해 3월 15일
효종 대에는 동물 동족 간의 패싸움이 두 차례 기록되어 있다.
1650년(효종 1년) 3월 11일 효종실록에는
여기서 홍청도란 지금의 충청도를 가리킨다.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를 딴 지명이 충청도인데,
소현세자빈 강씨의 묘소 영회원.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은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반청 분위기를 확산시키며 북벌 계획을 추진했다.
효종의 즉위 이후 김자점은 반청 인사들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있던 중
인열왕후의 죽음 이후 시작된 동물 동족 간의 패싸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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