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김단야(金丹冶)

Gijuzzang Dream 2008. 9. 26. 00:13

 

 

 

 

[현대사 아리랑]

 

 붉은 광장에 떨어진 붉은 꽃, 김단야(金丹冶)

 

약관의 스물, 독립운동계 맹장으로

 

우리나라의 초기 조선사회주의운동사에서 박헌영과 쌍벽을 이룬

김단야. <역사비평사 제공>

"김단야(金丹冶 · 경북 김천 출생 · 46세)씨.
대구고보를 졸업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1920년에 체포되어 2년 형을 마치고, 동 25년에 조선공청을 조직하여 동 간부가 되었으며 동년에 제1차공산당 관계로 모스크바에 망명하여 레닌대학에 입학, 동 28년에 동교를 졸업하고, 동 29년에 국제당의 사명을 받아 조공재건 운동으로 귀국하였다가 발각되어 다시 모스크바로 망명하였던 바, 동년에 다시 국제당 원동부(遠東部) 위원으로 임명되어 조공재건 운동에 활동하였으며, 기후(其後)는 금일까지 해외에서 활약을 계속 중이라고 한다.

조선의 편산잠(片山潛)이라 하여 어떠할까.

씨는 박헌영씨와 막상막하의 공산당 지도자이다.

그 명민(明敏)과 열을 보아서 신철(辛鐵)씨와 함께 공산당의 명물의 일인으로 굴지(屈指)하여야 될 것이다."


1945년 12월 25일 나온 <해방전후의 조선진상>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문이다.

 

 


17세 때 동맹휴학 주동, 퇴학당해


다음은 <조선인민보> 1946년 5월 2일치에 나오는 기사이다.

‘아들 소식 들으러 서울까지’  ‘이별 17년, 지금은 막부서 활동’  ‘김단야씨와 그 아버지’라는 제목이다.

진서를 한글로 고쳤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요즘 식으로 손보았음을 밝혀둔다.

위대한 혁명투사인 그리운 아들을 찾는 아버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조공 재건의 사명을 띠고 암암리에 활약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외국으로 망명한 김단야씨의 소식을 찾아 서울에 올라온

김종원(金鐘원, 신문기사 원문 자체에 한자가 없이 한글로만 표시)씨(70)는 작(昨) 19일 본사를 찾아

그리운 내 아들의 옛모습을 회상하며 혁명투사 때의 아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 애를 만난 지는 서울에서 열린 첫 박람회 때인데 그때 만난 것이 5년 만이었소.

차부동(車部洞·경북 김천군 개령면)에 있는 내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 처가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했고,

그저 내 아들의 모습이 깊이 보고만 싶었지요.

헌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는 꼴이 독일꾼같이 보이는데도 어쩐지 꼭만 자갈 위에 핀 해당화만 같고

고난의 암해(暗海)에서 혈투하는 용사같이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면 볼수록 일제의 무서운 총칼이 눈앞에 번뜩이는 것만 같고 해서 몸서리가 납니다.

그래서 너는 머무를 것이냐 국경을 넘어갈 테냐 하고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국경을 넘겠다고 명언(明言)합디다. 눈물도 없고 말도 없는 이 상봉의 종결이 그동안 16년,

작년 겨울 그 어미는 죽고 말았습니다. 해방은 맞이하였으나 아들을 못 만난 그 어머니의 설움은

나에게도 전염이 되었는지 아들 생각이 나서 서울에 와 보니

자세한 것은 모르고 막부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태연(泰然 · 김단야 본명)이 동무들도 많이 만나보고 안심했소.”

이곳까지 말한 70 노인의 얼굴에는 저으기 만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투쟁의 전도는 아직 멀다고 깨달은 투사의 아버지는 내 아들을 부르면서도

조선의 고민을 한몸에 얼싸안은 듯 아들 아닌 아들의 동무를 반겨 투쟁의 빛나는 승리를 축복하였다.

 

 

63년 전 나온 책과 64년 전에 나온 신문 기사를 읽어 보는 마음은 애젖하기 짝이 없다.

안타까워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때 사람들이 막부(莫府)라고 부르고 쓰던 모스크바에서 조국 해방을 위하여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망팔(望八) 늙은 아버지는

그러나 다시는 ‘자갈 위에 핀 해당화만 같’은 아들과 만나지 못하고, 

자랑스러운 아들 이야기를 하던 때로부터 8년 전에 이미 아들은 죽어버렸던 것이다. 죽임을 당하였다.

일본제국주의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고 소비에트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다.

김단야가 상해로 망명한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해가 저물어 가던 12월이었다.

갓 스물이 된 시퍼런 청춘이었다. 이제 나이 스물이면 막 대학생이 되었거나 재수생이 되어

이미 따논자리를 지켜내려는 기성인들이 쳐놓은 온갖 불합리한 사회제도 앞에 절망할 나이지만,

김단야는 이미 독립운동계의 맹장이었다.

조선공산주의운동 초창기 지도자들이 다 그러하듯 화려한 운동 경력을 지니고 있던 일급 수배자였다.

코민테른의 초기 조선사회주의운동에 관한 보고서.

박헌영 등의 활동사항이 기록돼 있다. <경향신문>

그는 1900년 경북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에서 태어났다.

김천군은 이제 금릉군이고, <조선인민보> 기사에 나오는 차부동 수레차(車) 자는 동녘동(東)자가 잘못 박힌 것으로 보인다.

서당에서 진서 공부를 하며 보통학교 3군데를 옮겨다니다가 대구로 갔다. 기독교계인 계성학교 고등보통과에 들어갔는데, 퇴학당했다.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하다고 보는 미국인 교장을 몰아내자는 동맹휴학을 주동했다는 이유였으니, 17살 때인 1916년 11월이었다.

다음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고쿠(正則) 영어학교에서 6개월간 공부하다가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교에 들어갔다.

1919년 초 서울에 있는 여러 중등학교 대표자로 이루어진 비밀결사에 들어갔다. 3·1운동에 들어 맹렬하게 움직였고, 지하 유인물 <반도의 목탁>을 만들어 길거리에 뿌렸다.

만세시위를 조직했다가 체포되어 태형 90도를 선고받았다.

곤장 90대를 맞고 나와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에 들어 만주로 보낼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으다가 왜경에 쫓기게 되었다.

그러자 상해로 건너가 항주에 있는 배정(培正)학교에 들어가

중국어와 영어 공부를 한다.

이르쿠츠파 공산당 지휘를 받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결성에

들어가 집행위원이 되는 것이 1921년 3월이었는데, 동갑내기인 박헌영 · 임원근과 함께였다.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상해 트로이카’


김단야 · 박헌영 · 임원근을 가리켜 ‘상해 트로이카’라고 부른다.

‘트로이카’는 세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를 가리키는 러시아말이니,

이때부터 세 사람은 평생 동지가 된다. 1922년 4월 3일, 국제공청 명령에 따라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서울로 옮기기 위하여 압록강이 바라보이는 안동으로 갔던

‘상해 트로이카’는 왜경에 잡히게 되고, 기나긴 ‘고난의 행군’에 들어가게 된다.

 

평양형무소에서 1년 10개월 동안 징역을 살고 나온 김단야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각종 청년단체를 조직하며

조국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한 투쟁에 복무한다.

1934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민족부 책임자가 되어 모스크바에 눌러앉게 되기까지

상해와 모스크바와 서울을 오가며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던 그가 모스크바에 눌러앉게 되는 데는

박헌영의 체포가 있다. 김단야가 코민테른에 제출한 박헌영 체포 정황 보고서다.

“이춘(박헌영)이 체포된 날, 이춘은 매우 늦은 시각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춘의 부인은 이 일로 해서 매우 겁에 질려 있었다.

이춘의 부인 주세죽(코레예바)이 나의 거처로 와서 이춘이 체포된 사실을 알렸다.

우리는 이춘이 체포된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함께 이춘이 접선하던 여인에게로 갔다.

우리가 이 여인이 거처하는 집에 도착한 지 5분 정도가 지나자,

체포된 이춘과 경찰들이 타고 온 자동차가 집으로 들이닥쳤다.

이 사실을 눈치챈 나는 그 집이 매우 번잡했고,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기 때문에 몰래 도망칠 수 있었다.

이춘은 경찰들이 엉뚱한 집으로 데려온 점을 추궁하며 자신을 구타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검거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나는 다음 골목을 돌아 인력거를 잡아타고 도망쳤다.”

살인적 고문과 추궁에도 불구하고 동지를 지켜주려는 박헌영의 배려로

범 아가리를 벗어나게 된 김단야였다. 엉뚱한 곳으로 경찰들을 끌고 다니는 박헌영의 슬기에

도망칠 시간을 번 김단야는 상해를 벗어나 모스크바로 간다. 1933년 7월 5일이었다.

동행한 여인이 있었다. 박헌영 부인인 주세죽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내외가 된다.

30년대 초 상해에는 또 하나의 트로이카가 있었다.

고명자 · 주세죽 · 허정숙이 그 삼두마차로

고명자는 김단야 부인이고, 주세죽은 박헌영 부인이며, 허정숙은 임원근 부인이다.

김단야한테는 어렸을 때 고향에서 혼인한 여성이 있었으니, 주세죽은 세 번째 부인이 된다.

그런데 주세죽은 왜 사상적 동지인 남편 박헌영을 떠나 김단야와 재혼을 한 것일까?

여기에는 주세죽의 깊은 절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박헌영이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는 사람으로 보았던 것이니,

이미 미치광이 흉내를 내어 일제 감옥을 탈출한 전력이 있는 때문이다.

주세죽 마음자리에서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박헌영 마음은 어땠을까.

나중 이야기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박헌영 쪽 사람들은 크게 노여워하며

당 차원에서 문제를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단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는 박헌영이었으니,

죽은 사람으로 여겨 지워버린 것이었다. 아들인 원경(圓鏡)이 한 말이 있다. “참 독한 사람이지요.”

박헌영 부인 주세죽과 세 번째 결혼

김단야의 평생 동지였던 박헌영(오른쪽)과

그의 부인 주세죽. 박헌영의 부인이었던 주세죽은 훗날 남편의 평생 동지였던 김단야와 재혼한다. <경향신문>

모스크바 외국노동자출판부에서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1933), ‘어떻게 꼴호즈원은 유족하게 되는가’(1934) 같은 한글 팸플릿을 찍어내며 조국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한 싸움에 복무하던 김단야는 소비에트 비밀경찰에게 체포되니, 1937년 11월 5일이었다.

 

전 공산당원이라는 김춘성(이성태)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 앞으로 보낸 ‘상신서’ 탓이었다.

김단야는 ‘일본 경찰의 밀정’이라는 것이었다.

김단야만이 아니었다. 김단야와 친한 동지들인 박헌영 · 조봉암 · 김찬 · 김한 모두 일제 밀정이라고 하였다.

 

김단야는 사형 판결을 받은 다음 곧바로 처형되었으니, 적 손에 죽었다면 영예로운 전사가 되겠지만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비에트 붉은경찰 손에 죽은 이런 경우는 무어라고 해야 되는가.

그리고 김단야의 절친한 벗이며 아내 주세죽 전 남편이었던 박헌영 또한 18년 뒤 똑같은 운명에 떨어지게 되니, 김단야가 당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김단야와 함께 체포된 주세죽 죄목은 ‘제1급 범죄자의 아내로서 사회적 위험분자’라는 것이었다.

5년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았는데, 형기를 다 채운 다음에도

1946년 5월 3일까지 3년 더 ‘보호관찰’당하여야 되었다.

조선으로 보내주거나 모스크바에 있는 딸 비비안나와 함께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스탈린 동지에게 청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단야와 주세죽 사이에는 비탈리이라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엄마 주세죽 품에 안겨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한다.

박헌영과 주세죽 사이에 낳은 딸 비비안나가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1946년 7월 18살 때 모스크바에서였다.

“아버지가 엄마 소식을 묻지 않던가?” 주세죽이 물었고 비비안나가 대답하였다.

“아무런 말씀도 없었어요.”

‘일제 첩자’라는 기가 막히는 죄명 아래 학살당한 사람은 김단야와 박헌영만이 아니다.

수많은 남로당 출신 독립투사들이 그러하였고, <낙동강> 작가 조명희가 그러하였으며,

<아리랑노래> 주인공 김산 곧 장지락이 그러하였다.

상해 임정 초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 장군도 러시아에서 독일 간첩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다.

붉은광장에 떨어진 붉은꽃들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니, 역사란 무엇인가?
- 김성동

- 2008 11/25   위클리경향 8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