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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무정(武亭) 장군 -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Gijuzzang Dream 2008. 9. 26. 00:12

 

 

 

[현대사 아리랑]

 

 

 

 

 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

 

조선의용군 8만명 종로행진 계획

무정 장군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동무들! 오늘 아침에 말씀드릴 것은 금년에 있어서 우리가 응당 하여야 할 생산공장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문제다. 작년에 생산공장에 참가하여 본 여러 동무들은 다 아시는 바이지만

우리는 재작년 봄에 이 태항산 청천(淸泉) 저 비탈에 화전을 이루고 600묘나 되는 땅에

붉은 무와 감자 호박을 심고 가을에 도라지를 캐고 도토리를 주었던 연고로

우리는 양식과 채소 등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다.
(…)

좋은 양복에 훌륭한 구두를 받쳐 신고 맛나는 음식에 호화한 생활을 지내던 동무들은

이제 와서는 이와 같이 몸에 이가 꾀고 헌옷을 입고 버선 없는 맨발 초신에 춥고 발시리며

배가 고픈 이 생활로 적을 대항하는 외에 화전농업까지 하느라고 두 손바닥이 부르트고

허리가 아프게 되니 한숨이 자연히 계속하여 나오면서 마치 그 고생을 이기지 못하는 것같이 보였고

그 생활을 자각적으로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나 표현으로 되는 동무도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완강하게 막아


중국 산서성 진성현 남쪽에 솟은 태항산(太行山) 중턱에 있는 조선의용군 총사령부 앞 연병장이었다.

1945년 봄 어느 날. 해방 1주년 기념으로 펴낸 <애국투사 연설집>에 나오는 무정 장군 육성이다.

<1945년 봄 태항산에서 호소함>.

“이 태항산 바윗돌 벼랑가에 덤불 속으로 슬렁슬렁 그냥 다니면서 도라지를 줍는 때에

저-기서는 도라지 도라지 태항산 비탈에 옥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의용군 식량이 되누나-

여기서는 ‘도라지 도라지 강원도 금강산에 백도라지!’ 이와 같이 산허리와 산등에서 울려나오는

도라지 타령으로 우리는 저 산의 도라지를 다 캐어내고 저 산에 도토리를 몇 알 남지 못하고

다 주워 메었으며 그야말로 가죽나무 밑에서 기다리는 도토리 한 알 밤 나는 것이

우리 고국에서 기다리는 그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기쁨이 못하지 않았고

보기만 하면 얼른 손을 뻗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도토리 한 알을 우리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

즉 우리의 적을 소멸하는 힘이 한 알 분량이 증가됨으로 알았고

도라지 한 뿌리를 캐서 바구니에 넣으면 일본제국주의자를 반항할 힘이 한 뿌리 분량이 증가한 줄

알게 되는고로 작년 봄에 양식 곤란이 우리를 포위하고 산면(山面)에서 들어온 왜적이

우리를 토벌하는 환경에 우리는 이 도라지와 도토리의 덕을 보았다. (…)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입는 문제 먹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게 됨으로

작년보다 고생이 좀 덜하게 되었으니 (…)

‘연안파’의 핵심멤버인 김두봉 장군 부부(가운데)와 소련군 장성들이 오찬을 함께 하는 모습.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우리는 언제든지 어느 모퉁이에서든지 적에게 총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얼어죽을 각오를 하며 굶어죽을 각오를 하여야 우리에게는 적을 소멸할 용기가 생길 것이고 방법이 생길 것이며 최후로 적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

 

혁명자의 최고로 되는 혁명적 우애성을 발휘하여 서로 붙들어 주고 서로 돕는 정신으로 몸이 약한 동무를 많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맡은 사업을 더 속히 원만히 힘있게 완성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를 두드려 부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일본제국주의자를 반대하는 데 복종시키자! 모든 것을 우리 손으로 꾸려나가자!!

무정(武亭, 1904~1951)은 이름부터가 우선 무인 냄새를 짙게 풍긴다.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투쟁에 온몸을 바치기로 서원하고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 보이는데,

본 이름은 알 길이 없다. 성이 김씨라니 김무정이다.

해방을 맞아 국내로 들어온 날짜도

9월 20일쯤, 11월 27일쯤, 12월 3일쯤, 12월 말부터 46년 1월쯤까지 여러 가지다.

홍군, 곧 모택동이 거느리는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던 연안(延安)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였으므로

무정을 비롯하여 김두봉(金枓奉, 1889~1961), 최창익(崔昌益, 1896~1957), 허정숙(許貞淑, 1902~1991),

박일우(朴一禹, 1904~?), 이유민(李維民, 1914~?), 박효삼(朴孝三, 1903~?), 김창만(金昌滿, 1913~?)

같은 이들을 ‘연안파’라고 부른다.

무정은 해방이 되자 자신이 거느리던 조선의용군 8만 명을 데리고 서울로 들어와

시가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장부대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완강하게 막은 것은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조선이라는 나라를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구빨치 출신 노스님이 말해주던 김명시(金命時) 장군과 함께 한 무정 장군의 종로거리 행진은

조선의용군의 당당한 위용을 인민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데서 온 울분의 발로로 보인다.

무정이 거느리던 조선의용군이든 김구(金九)가 거느리던 대한광복군이든

철저하게 개인 자격으로만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점령군으로 왔음을 밝힌 미군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방군으로 왔다는 붉은군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조선독립군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방군이건 인민군이건 다 같은 조선민족 군대니 서로 합쳐

인민의 행복을 위한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정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순정(純正)한 군인으로 이른바 정치감각이 무디었던 무정의 좌절은

필연적 명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압록강 포사격 시범서 백발백중


“만약 스탈린그라드 작전에서 무정 같은 장군이 있었다면 2차대전이 조금은 빨리 끝났을 것이다.”
무정이 압록강 밑 용암포 앞바다에서 포격 시범을 보였을 때 쏘는 대로 백발백중하는 포사격 솜씨를 보고

소련 군사고문관이 하였다는 말이다.

포병이 알아야 할 복잡한 고등수학을 몰랐지만 오로지 실전으로 닦은 경험만으로

그런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였다는 장군이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였던 이재유(李載裕, 1905~1944), 보천보대첩의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장군과 함께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혁명투사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장군이다.

조선독립동맹 지도부가 월북 후 1945년 12월 평양에서 촬영한 사진.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무정 장군이며 그 다음이 김두봉 장군이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함북 경성(鏡城)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나왔다.

34년부터 비롯된 368일에 이르는 2만5000리 9654킬로 홍군 대장정에 함께 하였는데, 산맥 18개를 넘고 24개 강을 건너는 죽음의 행군이었다. 거기다가 국민당 장개석군의 악랄하고 집요한 추격과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온몸을 빨아들이는 늪지와 독충과도 싸워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팔로군 작전과장을 거쳐 팔로군에서 맨처음 창건된 포병연대 연대장이 되었다.

42년 11월 태항산 근거지에서 문을 연 화북조선청년학교 교장을 맡았고,

해방 당시에는 조선의용군 총사령 겸 독립동맹 집행위원이 되었다.


“호랑이 같았지요?”
“뭐가?”
“무정이 장군 말씀예요.

그렇게 유명짜한 백발백중 상승장군이라면 장대한 체수에 인상도 험악했겠지요.”
이 중생이 말하였을 때 구빨치 출신 그 늙은 스님은 도머리를 쳤다.
“천만에. 그렇지 않아. 훌쩍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하고 엄장큰 체수가 장수감인 것은 맞지만,

상호는 그렇지 않아. 멋지게 기른 콧수염에 위엄 있는 얼굴이었지만 뭐랄까,

사천왕이 아니라 그저 마음씨 좋은 삼촌 같은 인상이야.”
무정과 만난 적이 있던 최태환(崔泰煥, 1929~ )도 비슷한 증언을 하였다.

 

박혜강이 간추린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 나온다.
“나는 무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호랑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마음씨 좋은 시골 아저씨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인상인 무정이 정말로 팔로군이었을까.

어떻게 수많은 전투를 치루어왔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될 정도였다.”


6·25 때 제2군단장으로 참전

 

1948년 평양사범대학에 다녔던 이가 한 하숙방에 있던 무정 장군 친조카한테 들었다는 말이다.

1972년 나온 <남북의 대화>에 나온다.

“그는 간혹 ‘삼촌은 원래는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독립운동 하러 중국에 들어갔다가

어떻게 연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저렇게 됐다’고 변명하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 말에 의하면 무정은 김일성의 독재와 횡포를 몹시 미워해 술을 마시면 폭음을 하고

그렇게 취해서 들어오면 김일성 욕을 마구 퍼붓고 불평을 한다는 거예요.

무정은 그후 6·25동란의 패전 책임을 그에게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1951년 숙청당합니다만.”

비슷한 이야기는 최태환 수기에도 나온다.
“당시 무정은 김일성과 앙숙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었다.

그러나 표면화되어 나타난 권력의 갈등은 엿보이지 않았다.

무정은 호탕한 성격과 순수한 군인의 기풍을 보여주고 있어서

초창기의 북한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흠모를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무정 장군은 만주에서 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말을 너무 많이 탔기 때문에

머리가 앞뒤로 움직이는 거야’라고 나름대로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는 무정의 과거 행적을 높게 평가하는 것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6·25 때는 총사령관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제2군단장으로 참전하였고,

9월 인민군 후퇴 때 수도(평양) 방위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12월 압록강변 만포 별오리에서 열린 노동당 정기대회에서

불법살인과 명령불복종 등 혐의로 처형될 지경에 놓인 것을 팔로군 출신 옛 중국 전우들이 구해주어

중국으로 갔다고 한다. 51년 7월쯤 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

문득 자취가 사라져버린 대부분 남로당 출신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무정 또한 행적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장군과 같은 연안파로 ‘조국해방전쟁’에 나섰던 최태환 말이다.

전북 순창 회문산과 운장산에서 빨치산투쟁을 하였던 사람이다.

‘외팔이부대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던 인민군 중좌 출신 증언으로, 무정 말이다.
“나는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서 싸웠다. 만약 조국의 독립을 침해하고 간섭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대포를 쏘아 묵사발을 만들 것이다. 그가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말이다.”

남로당과 마찬가지로 남에서도 북에서도 무질러 없애버린 연안파이다.

가새표 쳐버린 연안파가 우리 겨레 해방운동사에서 하였던 구실은 무엇이었을까.

박헌영과 마찬가지로 남북에서 함께 버림받은 무정 장군 생애를 되살려내는데

이 글이 한 작은 실마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항일투쟁사 ‘3김 장군’으로 불리다

1938년 조직한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의 전신이다. <웅진하우스 제공>


“대한 사람 대한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나는 이런 소위 국가를 들을 때마다 의분을 금치 못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잘 보호해서 우리 삼천만이 40년의 노예생활을 하였더란 말인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믿는 것은 오직 나의 팔과 다리 그리고 삼천만 합심협력 일치단결뿐이다.

독립을 위하여서는 하나밖에 안 남은 한쪽 다리마저 서슴지 않고 바칠 결심이다.

저 압록강 건너 만주벌판에는 우리 인민의 군대 8만 조선의용군이

한때도 쉬지 않고 총을 닦고 칼을 갈며 3000리 국토를 노리고 있다.
조선의 인민을 또다시 신식 노예의 구렁텅이로 집어 넣으려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리고 그들을 덮고 있는 극악반동분자들의 날개를 쳐부수려고 시기 도래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8만 의용군은 건재, 호가장 전투의 용사 김학철씨 담’

<조선인민보> 1946년 3월 19일치에 실려 있는 김학철 말이다.

말 밑에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 감상이 달려 있다.
‘피를 토하는 듯 불타오르는 분노를 억제 못하고 눈물로 부르짖는 사람은

저 호가장 전투에서 전 세계에 그 용맹을 떨친 우리 의용군 투사 척각(隻脚, 외다리) 김학철 용사다.’

김원봉 · 김일성과 함께 꼽아


‘호가장 전투’라는 것은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군이 치렀던 항일전투 가운데 가장 극적으로 치열했던 싸움을 말한다.

김세광 대장 이하 29명의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가

화북 석가장에서 가까운 원씨현 호가장(胡家莊) 마을에서 민중대회를 마치고

규율에 따라 즉시 떠나려던 계획을 바꿔 하룻밤 머무를 때였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난 안도감과 주민들 열렬한 환영에 들떠 먼거리 보초병을 세우지 않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왜병이 호가장 마을을 둘러쌌다.

마을을 완전히 둘러싸고 공격해 오는 왜병 숫자는 500명이었다. 29명과 500명.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철동(朴喆東) 대원이 왜병 포위망을 앞장서 뚫어 열고 마을 뒷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29명 전원이 최후를 결의하고 싸우는데 급보에 접한 팔로군이 달려왔다.

왜병은 물러갔고 싸움은 멈추었다.

이 싸움에서 제2분대장 손일봉, 왕현순(王賢淳), 한청도(韓淸道), 이만갑(李萬甲), 박철동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김학철(金學鐵) 대원이 왜병에게 붙잡혀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8·15와 함께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때 싸움에서 입은 총상으로 한쪽 다리를 잃게 되었다.

불과 29명으로 500명을 상대하여 영웅적으로 싸워낸 이 전투를 높이 평가한 중국공산당에서는

기관지 <해방일보>에 ‘추도 조선의용군 희생동지 특간’이라는 제목으로 추도특집을 싣고

중국인의 귀감으로 삼고자 소학교 교과서에 수록하였다.


김학철은 분노한다. <조선인민보> 1946년 7월 10일치에 실린 김학철 부르짖음을 들어보자.

“조선민족은 양개 진영으로 나뉘었다.

항일진영과 조일(助日)진영, 혁명진영과 반동진영, 구국진영과 매국진영, 이리하여 싸웠다.

독립동맹은 항일진영 주력 가운데의 하나다. 조선의용군은 그의 행동부대다.

동맹은 뇌수고 군은 수족이다. 조선의용군의 역사는 항일투쟁의 역사다.

선혈로 목용감고 포성의 자장가를 들으며 그리고 굳었다.
10월 10일 중국 전야(戰野)에 산재한 해외 조선혁명 세력은 뭉치어 항일투쟁의 정궤(正軌)에 올랐다.

곳은 화북(華北), 명칭은 독립동맹. 해외 20여 년 결속을 지은 최후의 일막이었다.
학병 · 지원병 등 동족의 피를 흘리는 것만도 서럽거늘

하물며 그것을 사주하고 그것을 구가하는 민족의 양심을 상실한 도배가 있었음에랴.

매국멸족의 파렴치한이 있었음에랴.”

호가장 전투 29명 대 500명


신제국주의 세계분할 책동에 따라 ‘해방당한’ 조국에 목발 짚고 돌아온 김학철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일제 때와 똑같이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친일민족반역자들에게

격렬한 노여움을 드러내지만, 그에게는 힘이 없다.

함께 싸워줄 조선의용군 동지들도 없고 무엇보다도 무정 장군이 없다.

북조선에 개인 자격으로 들어갔다는데, 동만주 항일빨치산 출신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소문만 들려온다.

조선의용군에서 참가했던 작가 김학철옹의

생전 모습. <경향신문>

1916년 북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학철은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조선의용군에 들어갔다.

그는 태항산에서 중공 팔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던 생체험을 소설로 담아낸 작가였다.

 

1930년대 북간도를 중심으로 벌어진 항일 무장투쟁을 다룬 장편 3부작 <해란강아 말하라>와 태항산 투쟁사를 전기문학 형식으로 그려낸 <항전별곡>을 펴내었던 그는 혼란한 서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연변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반동작가’로 몰려 10년간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했고, 4인방이 몰락한 다음에야 다시 붓을 잡아 혁명성장소설인 <격정시대>를 써낸다.

얼마 전 타계한 그의 유언은 “화장하여 원산 앞바다에 뿌려달라”는 것이었다.

“1929년경 중공군이 국민군과 싸울 적에 무정 장군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당시 상해에 있던 우리와 조선 동지들은 그를 추도하며 애도하였다. 그러나 그후 천진에 있을 때

학병기피로서 동지(同地)에 들어와 활동하던 젊은 동무의 연락으로 무정 장군 전사의 소식은

허설임을 알고 연안에 가서 무정 장군을 만나 그후부터 다시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만주벌판에서 말달리던 여장군 김명시(金命時, 1907~?) 말이다.

<해방일보> 1945년 12월 28일치에 실려 있다.

‘해방투쟁의 혈투사, 화북서 온 여투사 김명시 회견기’라는 제목인데,

김명시를 가리켜 ‘여장군’이라고 하였다.

‘조선의용군 총사령인 무정 장군에 직속한 여장군으로서 손에 총을 들고

산중에서 들에서 전진(戰塵)에 묻혀서 남자 동지와 함께 민족해방의 항일의용군의 전선에

용감히 투쟁하여 오던 조선의 커다란 자랑인’ 김명시 여장군은 말한다.

“무정 장군은 우리가 소식을 모르고 있는 동안 팔로군에 가담하여

장태준(張泰俊), 양영(梁榮) 두 조선 동지와 함께 저 유명한 팔로군의 서금(瑞金)에서 연안(延安)까지

2만5000리 행군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세 동무는 모두 사단장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양영 장군은 장강 연안에서, 장태준 장군은 복건성에서 적탄에 희생되고

동포 세 장군 중 무정 장군 한 분만 연안에 오게 되었다.

무정 장군은 연안에 와서 중공군의 포병단을 창설하고 그 단장으로서

위대한 중국혁명에 최후까지 참가하여 활약하였는데

모택동 동무도 중국 군인 몇백 명보다도 무정 장군 같은 군인 한 사람이 귀하다고까지 말하였다.

무정 장군은 7·7북지사변 직후 반일항전을 목표로 조선의용군 편성에 착수하여

연안에 군정대학을 창설하고 일본군진을 탈주하여 우리 의용군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조선학병,

지원병, 강제응모병, 군속 등을 적구(賊區) 또는 근거지에 있는 우리의 분맹(分盟) 지하조직을 통하여

이 군정학교에 흡수하여 실천적으로 교양하며 군사적으로 훈련하여 의용군에 편입하였는데

이때 김원봉(金元鳳)씨 정예 부하 20명도 연안으로 들어오니 이 의용군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때 조선여성동맹의 선봉이었던 허정숙(許貞淑) 동무도 연안 군정대학에서 교무를 보고 있었다.

이리하여 8·15 당시까지 우리 조선의용군의 수는 OO여 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금년에 들어와서 나날이 변하는 세계정세에 비추어서

이 정세에 가장 적절한 전술전략과 투쟁방침을 결정하며

일군의 항복이 불원하다는 판단으로서 의용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진격하여

조선의 일제와 일전하여 이를 완전히 소탕할 계획과

조선독립의 노선과 방침을 결정하기 위하여 국치 기념일인 금년 8월 29일을 기하여

조선독립동맹 제3차 전체대회를 연안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되어

각지의 대표동지들은 속속 연안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독립동맹 결정에 따라 그 수족인 조선의용군 선발대가

보무당당한 강철대오를 짓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환영의 꽃다발이 아니라 무장해제였다.

남쪽에서 미군정사령부가 대한광복군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군정사령부 또한 조선의용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성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이른바 연안파에서 세웠던 조선신민당 또한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과 합당하여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이 위원장을 맡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연안파가 동만주 항일빨치산을 중심으로 한 갑산파에 흡수통합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갑산파(甲山派) 핵심은 소련 제2극동전선 소속 88정찰여단 김일성부대 80명이었다.

김학철 투쟁 체험 소설로 담아

김두봉 등 독립운동가들이 머물렀던 자리.

중국 연안 근교에 있는 이곳은 현재 폐허로

남아 있다. <경향신문>

항일투쟁사에서 조선인민들이 꼽아주었던 ‘장군’ 세 사람이 있으니, 김원봉 장군과 무정 장군과 김일성 장군이다.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있지만 그들 투쟁은 봉오동대첩과 청산리대첩 이후 이어지지 않았고, 김원봉, 무정, 김일성 3김 장군만이 조선인민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1김만 살아남았고

2김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1949년 평양에서 간행된 <조선민족해방투쟁사>와 1953년 발간된 <조선신민주주의혁명사>에까지 나오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쟁사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독립동맹 부주석 최창익(崔昌益, 1896~1957)이 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되고,

주석 김두봉(金枓奉, 1889~1962)이 58년 3월 ‘종파분자’로 지목되어 축출되면서 사라져버린다.

조선의용군 8만 병력이 평양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8만 명이 과장된 것이라면 8000명이라고 해도 좋다.

남북 조선 정치 지도자 가운데 훈련된 무장병력을 거느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사에 가정은 쓸데없는 것이지만 외다리 조선의용단원 김학철이 안타까워 했던 까닭이

이 대목 아니었을까. 반공이데올로기로 철갑을 두른 남쪽에서도 그들의 빛나는 항일투쟁사는

괄호쳐져 버리었으니, 중음신(中陰身)이 되어버린 조선의용군들이다.

김원봉 장군 한테는 ‘소시민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 영웅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었고,

무정 장군한테는 ‘불법살인과 명령불복종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6·25때 중공군이 썼던 것으로 유명한 것이 ‘인해전술’이었다.

꽹과리를 쳐대며 끊임없이 밀고들어오는 ‘자살특공대’ 앞에 대책이 없는 미군이었다고 하는데,

구빨치 출신 노승한테 들은 이야기는 다른 것이다.

수류탄 한 발씩만 쥐고 사람의 바다를 이루어 밀고 들어왔던 것은

중공군이 아니라 조선의용군이었다는 것.

수만 명 조선의용군 존재에 부담을 느꼈던 중국공산당과 조선로동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것.

무정 장군이 돌아간 것이 1951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디서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공산당 고문서 보관소에 있을 ‘무정 장군 파일’은 언제 공개될 것인가.
- 김성동

- 2008 11/11, 11/18   위클리경향 799호, 80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