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아리랑]
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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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 8만명 종로행진 계획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문제다. 작년에 생산공장에 참가하여 본 여러 동무들은 다 아시는 바이지만 우리는 재작년 봄에 이 태항산 청천(淸泉) 저 비탈에 화전을 이루고 600묘나 되는 땅에 붉은 무와 감자 호박을 심고 가을에 도라지를 캐고 도토리를 주었던 연고로 우리는 양식과 채소 등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다. 좋은 양복에 훌륭한 구두를 받쳐 신고 맛나는 음식에 호화한 생활을 지내던 동무들은 이제 와서는 이와 같이 몸에 이가 꾀고 헌옷을 입고 버선 없는 맨발 초신에 춥고 발시리며 배가 고픈 이 생활로 적을 대항하는 외에 화전농업까지 하느라고 두 손바닥이 부르트고 허리가 아프게 되니 한숨이 자연히 계속하여 나오면서 마치 그 고생을 이기지 못하는 것같이 보였고 그 생활을 자각적으로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나 표현으로 되는 동무도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1945년 봄 어느 날. 해방 1주년 기념으로 펴낸 <애국투사 연설집>에 나오는 무정 장군 육성이다. <1945년 봄 태항산에서 호소함>. 저-기서는 도라지 도라지 태항산 비탈에 옥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의용군 식량이 되누나- 여기서는 ‘도라지 도라지 강원도 금강산에 백도라지!’ 이와 같이 산허리와 산등에서 울려나오는 도라지 타령으로 우리는 저 산의 도라지를 다 캐어내고 저 산에 도토리를 몇 알 남지 못하고 다 주워 메었으며 그야말로 가죽나무 밑에서 기다리는 도토리 한 알 밤 나는 것이 우리 고국에서 기다리는 그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기쁨이 못하지 않았고 보기만 하면 얼른 손을 뻗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도토리 한 알을 우리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 즉 우리의 적을 소멸하는 힘이 한 알 분량이 증가됨으로 알았고 도라지 한 뿌리를 캐서 바구니에 넣으면 일본제국주의자를 반항할 힘이 한 뿌리 분량이 증가한 줄 알게 되는고로 작년 봄에 양식 곤란이 우리를 포위하고 산면(山面)에서 들어온 왜적이 우리를 토벌하는 환경에 우리는 이 도라지와 도토리의 덕을 보았다. (…)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입는 문제 먹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게 됨으로 작년보다 고생이 좀 덜하게 되었으니 (…)
우리는 언제든지 어느 모퉁이에서든지 적에게 총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얼어죽을 각오를 하며 굶어죽을 각오를 하여야 우리에게는 적을 소멸할 용기가 생길 것이고 방법이 생길 것이며 최후로 적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
혁명자의 최고로 되는 혁명적 우애성을 발휘하여 서로 붙들어 주고 서로 돕는 정신으로 몸이 약한 동무를 많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맡은 사업을 더 속히 원만히 힘있게 완성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를 두드려 부수기 위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투쟁에 온몸을 바치기로 서원하고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 보이는데, 본 이름은 알 길이 없다. 성이 김씨라니 김무정이다. 해방을 맞아 국내로 들어온 날짜도 9월 20일쯤, 11월 27일쯤, 12월 3일쯤, 12월 말부터 46년 1월쯤까지 여러 가지다. 홍군, 곧 모택동이 거느리는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던 연안(延安)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였으므로 무정을 비롯하여 김두봉(金枓奉, 1889~1961), 최창익(崔昌益, 1896~1957), 허정숙(許貞淑, 1902~1991), 박일우(朴一禹, 1904~?), 이유민(李維民, 1914~?), 박효삼(朴孝三, 1903~?), 김창만(金昌滿, 1913~?) 같은 이들을 ‘연안파’라고 부른다. 시가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장부대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완강하게 막은 것은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조선이라는 나라를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구빨치 출신 노스님이 말해주던 김명시(金命時) 장군과 함께 한 무정 장군의 종로거리 행진은 조선의용군의 당당한 위용을 인민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데서 온 울분의 발로로 보인다. 무정이 거느리던 조선의용군이든 김구(金九)가 거느리던 대한광복군이든 철저하게 개인 자격으로만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점령군으로 왔음을 밝힌 미군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방군으로 왔다는 붉은군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조선독립군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방군이건 인민군이건 다 같은 조선민족 군대니 서로 합쳐 인민의 행복을 위한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정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순정(純正)한 군인으로 이른바 정치감각이 무디었던 무정의 좌절은 필연적 명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련 군사고문관이 하였다는 말이다. 포병이 알아야 할 복잡한 고등수학을 몰랐지만 오로지 실전으로 닦은 경험만으로 그런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였다는 장군이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였던 이재유(李載裕, 1905~1944), 보천보대첩의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장군과 함께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혁명투사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장군이다.
함북 경성(鏡城)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나왔다. 34년부터 비롯된 368일에 이르는 2만5000리 9654킬로 홍군 대장정에 함께 하였는데, 산맥 18개를 넘고 24개 강을 건너는 죽음의 행군이었다. 거기다가 국민당 장개석군의 악랄하고 집요한 추격과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온몸을 빨아들이는 늪지와 독충과도 싸워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팔로군 작전과장을 거쳐 팔로군에서 맨처음 창건된 포병연대 연대장이 되었다. 42년 11월 태항산 근거지에서 문을 연 화북조선청년학교 교장을 맡았고, 해방 당시에는 조선의용군 총사령 겸 독립동맹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렇게 유명짜한 백발백중 상승장군이라면 장대한 체수에 인상도 험악했겠지요.” 상호는 그렇지 않아. 멋지게 기른 콧수염에 위엄 있는 얼굴이었지만 뭐랄까, 사천왕이 아니라 그저 마음씨 좋은 삼촌 같은 인상이야.”
박혜강이 간추린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 나온다. 그러나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마음씨 좋은 시골 아저씨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인상인 무정이 정말로 팔로군이었을까. 어떻게 수많은 전투를 치루어왔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될 정도였다.”
1948년 평양사범대학에 다녔던 이가 한 하숙방에 있던 무정 장군 친조카한테 들었다는 말이다. 1972년 나온 <남북의 대화>에 나온다. “그는 간혹 ‘삼촌은 원래는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독립운동 하러 중국에 들어갔다가 어떻게 연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저렇게 됐다’고 변명하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 말에 의하면 무정은 김일성의 독재와 횡포를 몹시 미워해 술을 마시면 폭음을 하고 그렇게 취해서 들어오면 김일성 욕을 마구 퍼붓고 불평을 한다는 거예요. 무정은 그후 6·25동란의 패전 책임을 그에게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1951년 숙청당합니다만.” 그러나 표면화되어 나타난 권력의 갈등은 엿보이지 않았다. 무정은 호탕한 성격과 순수한 군인의 기풍을 보여주고 있어서 초창기의 북한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흠모를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무정 장군은 만주에서 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말을 너무 많이 탔기 때문에 머리가 앞뒤로 움직이는 거야’라고 나름대로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는 무정의 과거 행적을 높게 평가하는 것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9월 인민군 후퇴 때 수도(평양) 방위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12월 압록강변 만포 별오리에서 열린 노동당 정기대회에서 불법살인과 명령불복종 등 혐의로 처형될 지경에 놓인 것을 팔로군 출신 옛 중국 전우들이 구해주어 중국으로 갔다고 한다. 51년 7월쯤 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 문득 자취가 사라져버린 대부분 남로당 출신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무정 또한 행적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장군과 같은 연안파로 ‘조국해방전쟁’에 나섰던 최태환 말이다. 전북 순창 회문산과 운장산에서 빨치산투쟁을 하였던 사람이다. ‘외팔이부대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던 인민군 중좌 출신 증언으로, 무정 말이다. 나는 대포를 쏘아 묵사발을 만들 것이다. 그가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말이다.” 가새표 쳐버린 연안파가 우리 겨레 해방운동사에서 하였던 구실은 무엇이었을까. 박헌영과 마찬가지로 남북에서 함께 버림받은 무정 장군 생애를 되살려내는데 이 글이 한 작은 실마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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