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아리랑]
‘세계사적 개인’이었던 민주주의자 - 여운형 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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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과 쌍벽 이룬 조선의 혁명가
몽양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수많은 살해 위협에 시달렸으니, 큰 것만 골라도 12번이다. 민족사의 큰 별이 떨어진 비극의 그날 하오 1시. 몽양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경찰관 파출소 앞에 서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나와 몽양 차를 가로막았고, 급하게 멈출 수밖에 없는 차 속에서 몽양과 신변보호인 박성복(朴性復) 그리고 ‘독립신보’ 주필로 건준 간부였던 고경흠(高景欽)과 운전수가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두 발 총소리가 나면서 몽양은 풀썩 쓰러졌다. 한지근(韓智根) 이라는 모진 놈이 몽양이 탄 자동차 앞뚜껑 위로 올라가 권총 두 방을 쏘았던 것이다.
이기형옹의 회상이다. 그것은 넘어져 가는 고래등 기와집을 떠받치는 큰 기둥을 찾아 불잡는 바로 그것이었다.
빛나는 두 눈, 넓고 반듯한 두드러진 이마, 우뚝한 코, 복스럽고 큰 두 귀, 처지지도 빠지지도 않은 아래턱 윤곽 등 어느 하나 빠지는 데 없고 빈틈없는, 원로 언론인 김을한의 표현을 빌리면 그야말로 ‘미스터 코리아’였다. 그의 조부가 한번 보자 ‘왕재(王材)’라고 탄성을 올린 것도 과찬만은 아니었다고 수긍이 갔다. 키는 보통이 훨씬 넘고 골격은 굵고 운동으로 다져진 짜임새 있는 몸매에 더할 데 없이 당당한 체격이었다. 누구는 그 얼굴, 그 체격을 한마디로 ‘우람하다’고 표현했다. 몽양은 길을 걸으면 길에 꽉 찼고 연단에 오르면 단상에 꽉 찼다.”
박헌영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사적 개인’이었다. ‘여운형론’을 쓴 김오성(金午星)은 말한다. 원칙과 정책, 전략과 전술의 쌍벽을 가진 것으로 민족적인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분이 들이친 뒤에 다른 한 분이 어루만져 수습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좋은 콤비이냐? 두 지도자는 서로 상이한 부면을 담당하면서 원칙적인 일치를 얻어 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몽양이 한 말을 든다.
내 주장을 포기하고 그 여러 사람의 주장을 따르겠다.” 상해 프랑스 조계에 조동호,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김동삼, 조용은, 신규식, 신석우, 여운홍, 현순, 최창식, 이광수, 신익희, 유치진, 이규홍 등 수십 명과 함께 독립운동 기관을 세우자는 의논을 할 때였다. 몽양은 세 가지를 반대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몽양은 ‘정부’는 안 되고 ‘당’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무리 임시정부라고 하더라도 명색이 ‘정부’가 되면 정부 체면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민심을 강화시키고 일본에 대한 반항의 뜻이 크므로 ‘정부’로 해야 된다는 것이었으니, 몽양 주장은 현실론이고 다른 이들 주장은 추상론이었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조선에서 오래 쓴 적이 없고 잠깐 있다가 곧 망해버린 이름이므로 되살려 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한’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한으로 망하였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태왕(李太王)이 죽은 뒤에 대한문 앞에 인민의 곡성이 창일하였다. 이것을 보면 민심이 아직도 황실에 뭉쳐 있으니 민심 수습상 황실을 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8조에 ‘대한민국은 황실을 우대함’이라는 조문을 넣었다. 이처럼 봉건사상과 관료주의에 전통관념 껍질을 벗지 못한 상해임정이었다. 그들은 대한문 앞 인민들 곡성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망국의 울음도 아무 때나 울면 잡혀가므로 참고 있다가 고종 인산이라는 기회를 얻어 터져나왔던 울음이지, 황실을 그리워한 울음이 아니었다. 이만규(李萬珪)가 쓴 ‘여운형투쟁사’에 임정 난맥상이 나온다. 안창호(安昌浩)가 오고 이동휘(李東輝)가 오고 이승만(李承晩)이 왔다. 이승만이 오기 직전에 그이의 위임통치 문제가 떠돌아 상해 여론이 물끓듯 하였다. 그가 민주국민회의 명의로 조선을 위임통치하여 달라는 청원을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이 나자 신채호(申采浩)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북경 기타 지역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였다.
몽양은 이 일을 안창호에게 물었다. 안창호는 “이승만의 하는 일을 나는 모른다”고 하였다. 몽양은 다시 “듣건대 국민회의 명의로 보냈다면서 회장이 모르느냐?”고 반문하니 안이 역시 “모른다”고 하였다. 몽양은 다시 안더러 “그렇다면 이승만의 일은 오해를 풀 수가 없지 않은가. 민단 주최로 환영회를 할 터인데 그 석상에서 설명을 구하고 다시 재신임을 요청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그 후 이승만은 민단 주최 환영회에 출석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몽양이 손중산(孫中山) 혁명의 일로 광동에 간 동안 민단 총무 장붕(張鵬)이 주최한 민단 환영회에는 출석하여 화관 씌우는 영예를 받았다.
몽양은 모택동(毛澤東)과 몇 번 만났는데, 모택동 혁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며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 번째는 일본 공산당 거물인 편산잠(片山潛)과 함께였고 두 번째는 손문(孫文) 대리인 구추백(瞿秋白)과 함께였다.
레닌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의구가 생기며 같은 공산당끼리도 원만치 못한 일이 더러 있다. 비록 혁명가라 할지라도 사람인 이상 감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일본과 조선이 악수를 한다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터이니 힘쓰라.” 레닌이 말하였다. 농민들이 지니고 있는 민족주의를 공명시켜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그대로 지지할 게 아니라 개조시킬 필요가 있다.” 손문을 만난 몽양이 “선생 머리가 벌써 희어졌다”고 하자 손문이 말하였다. “사람의 머리는 늙을수록 희어지고 혁명은 늙을수록 붉어진다.” 조선 같은 데는 노동독재를 실행하여서는 아니된다. 맑스주의는 소련에서는 레닌주의가 되고 중국에서는 삼민주의가 되었으니 조선에서는 두 나라와 달리 하여야 한다.
세계 각국 어디서든지 맑스주의는 그 형태를 변화시켜서 실행되고 있다. 소련까지도 신경제정책이니 5개년계획이니 하며 시대와 처소에 적응시켜 고쳐가며 실행한다. 전체가 공산주의를 해야만 되게 되면 곧 공산주의를 실행할 것이요, 수정하여야 될 것이면 곧 수정하여 실행할 뿐이다. 결코 언제든지 일부 소수인을 위하는 운동자는 되지 않을 것이며 조선이 독립되면 나라 일을 민중 전체의 의사대로 해나갈 터이다.” ‘인민’이란 말이 너무 과격하니 그냥 ‘조선민주주의공화국’으로 하자던 몽양이었다.
무정(武亭) 장군이 한 말이 있다. 우리는 신뢰한다. 선생이 만일 혁명을 하다가 죽는다면 조선이 독립한 후 내가 귀국하여 시체라도 지고 삼천리 강산을 돌아다니며 선전하겠노라.” 조선의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의 응답이 나왔다. 또 조선 혁명가를 꼽는 항목에는 여운형 195표, 이승만 176표, 박헌영 168표, 김구 156표, 김일성 72표가 나왔다.
혁명에 흘리신 거룩한 피는 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 있나니… 반동의 총탄에 쓰러진 몽양 여운형 선생의 위대한 죽음을 슬퍼하는 이 노래! 몽양의 유해를 둘러싸고 젊은 청년들이 흐느껴 운다. 고히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 선생. 우리는 기어코 원수 갚으오리다. 몽양 선생 추모의 노래는 오고가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 2008 10/14 위클리경향 7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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