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아리랑]
‘세계사적 개인’이었던 민주주의자 여운형 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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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에 스스로 노비 해방시키다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묘꼴이었다. 몽양(夢陽) 선생 생가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원역 굴다리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고, 어욱새 더욱새 덕갈나무 메마른 가랑잎만 소소리 바람 뒤섞이어 으르렁 스르렁 슬피 우는 몽양 생가 터무니에서 영산마지(담배)만 죽이는데, 저만치 꺼무한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을밋을밋 가보니 빗돌이었다. 해포 앞서 세운 ‘몽양고택유허비’였는데, ‘양평애향동지회’라고 오목새김되어 있었다. 그런데 얄망궂은 것이 빗돌을 세운 사람들 이름도 없고 빗글을 짓고 쓴 사람 이름도 없다. 한 행사에서 조국을 위해 연설하는 몽양 여운형 얼키설키한 몽양 선생 항일투쟁 발자취를 성글게 추려놓은 빗글 끝에 달랑 ‘이기형’이라고만 훈민정음으로 새기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기형(李基炯)이라면 ‘몽양 여운형’이라는 평전을 낸 극노인이다. 25년 전이고, 올해 92살. 8·15 바로 뒤 신문기자를 하여 해방공간 속내를 어지간히 알고 계신 분이다.
‘몽양 여운형’에 나오는 대문이다. 안채는 돌층계 위에 높게 자리 잡았다. 담 안 안채 후원에는 디딜방아가 있었다. 담 밖 사랑채 앞에는 앞마당이 붙었고 다시 조상대대 분묘가 있는 산으로 연결되었었다. 이 집은 본시 재실로 영회암(永懷庵)이라는 택호를 가지고 있었다. 6·25 때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폭격에 불타버리는 비운을 맞았다.” 독립운동 유공자 2등. 1등 유공자는 이승만이었으니, 뜻있는 이들은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가터 가는 쪽을 알려주는 알림표 하나 없고 생가터임을 밝혀주는 알림판도 없으며 ‘역사양평’을 자랑하는 숱한 알림책자며 좀책 그 어디에도 몽양 여운형 선생 성명 삼 자는 없다. 미· 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민족자주, 민족주체 정치인 몽양의 중도통합 노선을 이루어냈더라면 이 겨레에게 분단 비극은 없었으리라는 생각 또한 부질없는 짓인가. 친일 민족반역자들과 손잡고 반쪼가리 나라 세운 이승만 붙좇는 자들한테 돌아가신 몽양 선생은 저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이럴 수는 없다.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비록 복권은 되었다지만 여태도 시퍼런 수구반공논리가 판치는 이 땅에서 몽양을 기리는 이들이 차마 애타는 마음으로 세워놓은 조그만 빗돌이라는 것을 알 것 같으니, 아아, 민족사의 큰 별을 낳고 길러준 양평 사람들은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뼈저린 뉘우침도 없는가. 네 둘레를 둘러봐도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몽양 선생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몽양 여운형은 진서 공부를 하는 틈틈이 온갖 운동으로 체력단련을 하며 서울에 있는 배재학당, 흥화학교, 우체학교를 옮겨다니다가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졸업을 한 달 앞둔 우체학교를 그만두었다. 한 달에 27원을 받는 관공리 자리가 다짐된 졸업장이었다.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인 ‘단연동맹(斷煙同盟)’을 얽어내고 광동학교를 세워 교장이 되었으며 골골샅샅 돌아다니며 애국계몽 연설을 하였다.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노비를 해방시킨 것이 22살 때였는데,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다. 그러므로 서방님이니 아씨니 하는 말부터 입에 올리지 마라. 사람은 날 때부터 똑같다. 상전과 종으로 나누는 것은 어제까지 풍습일 뿐이다. 오늘부터는 그런 낡은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제 뜻대로 살아가라.” 1918년 8월 상해에서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고 대표 겸 총무가 되었으며 12월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조선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미 대통령 특사 크레인에게 전달하였다. 노령과 간도를 순회하며 그곳에 있는 이동휘(李東輝) 장군 등 민족운동 지도자들과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하였고, 상해임시정부 외무부 위원과 상해한인거류민단 단장이 되었다. 12월 동경 제국호텔에서 일제 지도자들 면전에 대고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사자후를 토하였다. 광동정부 손문 총통과 조선독립과 피압박 민족 해방 문제를 놓고 토론하였으며,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레닌, 트로츠키와 회담하며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였다. 1929년 7월 왜경에 체포되어 1932년 7월까지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우가키 총독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였고,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되었다. 1936년 8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신문사가 문을 닫았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떡꺼떡,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1944년 8월 ‘건국동맹’을 얽었고, 10월에는 고향 양평에서 ‘농민동맹’을 얽었다. 8·15를 맞아 ‘건국준비위원회’를 얽어 위원장이 되었으며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이 되었고, 4월 평양으로 가서 김두봉, 김일성과 회담하였다. 5월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고, 10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11월 사회노동당 임시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당하여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다. 조선독립이 왜 필요한가를 역설하는 몽양의 연설은 2시간 넘어 이어지고 있었다. 장강대하로 흘러가는 물너울처럼 거침없는 몽양의 웅변이었다.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당연한 요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조선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과거의 약탈살육을 중지하고 세계를 개척하고 개조로 달려 나가 평화적 대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들 조선(祖先)은 칼과 총으로 서로 죽였으나 이후로 우리는 서로 붙들고 돕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신은 세계의 장벽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꼭 전쟁을 하여야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싸우지 아니하고는 인류가 누릴 자유와 평화를 못 얻을 것인가? 일본인들은 깊이 생각하라.”
대일본제국 척식국장 고하(古賀)는 몽양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총독부에 불을 지르겠다. 내 계책이 성공되지 않은 데서 그대에게 가장 높은 경의를 가지고 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수야(水野)가 동경에 와 있었는데, 몽양이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며 한 말이다. 몽양 일행을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 한 다음 야전이 말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은 일본이 살려고 먹은 것이다. 조선을 내놓으면 일본은 죽는다. 일본의 생사가 달린 조선을 일본은 그대로 내놓을 수 없다. 그대의 일은 망상이다. 그대의 연설이 얼마나 웅변이요, 그대의 연설이 얼마나 철저하여도 일본은 할 수 없다. 조선이 독립을 하려거든 실력으로 싸워라. 생명을 희생해서 찾아라. 거저는 안 내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인물을 하나 발견한 것이 나의 동경에 온 소득이다. 그대는 과연 인물이다. 일본인 중에 오직 그대가 인간적이요 양심적인 거짓 없는 참말을 하였다. 내 마음이 상쾌하다.”
외국인은 국빈이 아니면 절대 보여주지 않고 일본인 가운데도 대신급이 아니면 보여주지 않는 곳이다. 몽양에게 이곳을 둘러보게 한 것은 국빈 대접을 한다는 뜻이다. 궁성 안에서 점심까지 대접받고 돌아오는데 기자가 소감을 물었다. 그때 몽양이 했다는 말이다. 꼴 베는 이가 들어가고 꿩 잡는 이가 들어가서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니 백성들이 말하기를 동산이 작다고 하였다. 그런데 제선왕(齊宣王)이 40방리에 동산을 가졌는데 사슴 죽인 사람을 살인죄와 같이 벌하며 임금 혼자서 즐겨하니 백성들이 말하기를 동산이 너무 크다고 하였다. 만일 일본에 성군(聖君) 정치가 있다면 이런 것을 다 백성에게 개장해야 할 것이다.” 몽양을 수행했던 최근우(崔謹愚)는 이렇게 평하였다. 전중(田中) 육상(陸相)과 만나는 자리는 군사령관 회의 중이었기 때문에 우도궁(宇都宮)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하여 관동, 청도, 대만 각지 군사령관과 수야 정무총감과 야전 체신대신 등, 고하 척식 국장 등 정계, 군계의 거두들이 열석하였다. 내가 전중이와 몽양을 속으로 비교하여 보니 저편은 연장자요 주권국 대신이요, 군국권위의 배경이 있는 이요, 여기는 나이 젊고 식민지 한민(寒民)이요, 피압박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석은 몽양 혼자 압도적으로 압력을 내어 내리누르며 정의로 싸우는데 나는 처음 느끼는 통쾌감이었고, 정의가 무섭다는 것을 그때 목도하며 깨달았다. 수야가 강우규 의사 폭탄 인사를 받을 때에 수야의 꼴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고 통쾌하다. 그때 수야의 거동은 몽양 앞에 어린애 같았다.”
여러 벗들도 만족히 알고 선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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