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 미황사 부도밭 (浮屠殿) 미황사를 찾는 답사객들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 만나는 우리나라 최대 부도밭이다. 그러나 1987년까지만 해도 이 부도밭은 숲 속에 고즈넉하게 숨어 있었으나 그 후 옛 통교사터에 부도암을 짓고 부도밭에 담장을 둘러치는 바람에 옛 정취가 없어져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느낌에 아쉬움만 남기도 한다. 미황사에는 두 곳에 부도군이 있다.동쪽에 21기의 부도와 5기의 탑비, 다시 서쪽으로 1백m 쯤 되는 곳에 6기의 부도, 이렇게 2개로 나누어진 부도밭에는 탑비와 부도, 사적비를 합해 모두 32기가 들어있다. 5개의 탑비는 설봉당대사비(8대종사, 1739년), 벽하대사사리탑비(7대종사, 1764년), 송파대사비((1764년), 낭암대사비, 금하대선사비(1764년)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탑비는 설봉당(1739년)에서부터 낭암대사비(1840년)까지 101년 동안 5기가 건립되었고 부도는 옥암당(1721년)에서부터 백월당(1842년)까지 121년 동안 약 28기가 조성되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를 다른 예와 함께 종합해 보면 1842년 이후에는 탑비나 부도 그 밖의 다른 어떤 유적이나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물론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탱화가 조성되기 전까지이다. 현판의 경우에서도 이러한 점은 발견된다. 연대가 밝혀진 현판은 '영암미황사대법당삼존개금급단청중기(1822년)'와 '달마산미황사대종중성기(1834년)'로 모두 1842년 이전의 유물들이다. 이처럼 미황사에서는 1840년대 이후부터 1943년 이전까지 조성된 그 어떤 유적이나 유물들이 표면적으로 발견되지 않지만 영허의현이 1858년에 달마산 극락원에 아미타 신앙의 법회인 만일회를 개설하였다거나 당호만 쓰여진 부도들 가운데 1840년대 이후에 입적하신 분들이 4분이 조사되어 그 관계가 분명치 않다. 그것은 아마도 서정리에 사는 박말수씨가 150년 전이라고 증언하는'궁고(軍鼓)폐사설화'와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1840년대 이후 미황사는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미황사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져 역사는 길지 않다. 모두 조선 후기 1700년경부터 세워졌다. 부도로 모셔진 스님들은 조선 후기 대흥사와 미황사 대중의 존경을 받는 큰스님들로서 조선후기 화엄의 대가로 꼽히는 연담유일 스님을 비롯해서 대흥사 13대종사의 한 분인 벽하, 설봉 그리고 정련, 정암, 송파, 낭암 … 등 당시의 내노라하는 스님들이다. 이 부도전으로 하여 당시 미황사의 사세나 이곳을 중심으로 수행했던 스님들의 수행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특히 미황사의 부도에 돋을새김을 한 문양들이 독특하고 아름답다. 기단부에 거북ㆍ 게ㆍ 문어ㆍ 물고기 등의 어류가 새겨진 매우 독특한 양식을 한 것이 있는데, 해안이라는 이 지역의 특수성이 불교미술에 반영된 매우 특이한 예라 하겠다. 미황사 부도의 멋은 현재 유홍준 문화재청장의《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비교적 널리 소개되었지만, 또 주지 금강스님도 미황사 부도를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두륜산 대흥사 자락에서 태어난 그는 부도가 더 많이 훼손되기 전에 원형을 남겨야겠다는 뜻에서 1989년부터 탑본(榻本)을 시작했으며, 1996년에는 서울과 대구, 부산을 돌며 탑본전(榻本展)을 열어 미황사 부도를 알렸다. **********************************
*** 미황사 부도밭 (浮屠殿)
미황사를 찾는 답사객들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 만나는 우리나라 최대 부도밭이다.
그러나 1987년까지만 해도 이 부도밭은 숲 속에 고즈넉하게 숨어 있었으나
그 후 옛 통교사터에 부도암을 짓고 부도밭에 담장을 둘러치는 바람에
옛 정취가 없어져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느낌에 아쉬움만 남기도 한다.
미황사에는 두 곳에 부도군이 있다.
동쪽에 21기의 부도와 5기의 탑비,
다시 서쪽으로 1백m 쯤 되는 곳에 6기의 부도,
이렇게 2개로 나누어진 부도밭에는
탑비와 부도, 사적비를 합해 모두 32기가 들어있다.
5개의 탑비는
설봉당대사비(8대종사, 1739년), 벽하대사사리탑비(7대종사, 1764년),
송파대사비((1764년), 낭암대사비, 금하대선사비(1764년)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탑비는 설봉당(1739년)에서부터 낭암대사비(1840년)까지
101년 동안 5기가 건립되었고
부도는 옥암당(1721년)에서부터 백월당(1842년)까지
121년 동안 약 28기가 조성되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를 다른 예와 함께 종합해 보면
1842년 이후에는 탑비나 부도 그 밖의 다른 어떤 유적이나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물론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탱화가 조성되기 전까지이다.
현판의 경우에서도 이러한 점은 발견된다.
연대가 밝혀진 현판은 '영암미황사대법당삼존개금급단청중기(1822년)'와
'달마산미황사대종중성기(1834년)'로 모두 1842년 이전의 유물들이다.
이처럼 미황사에서는 1840년대 이후부터 1943년 이전까지 조성된
그 어떤 유적이나 유물들이 표면적으로 발견되지 않지만
영허의현이 1858년에 달마산 극락원에
아미타 신앙의 법회인 만일회를 개설하였다거나
당호만 쓰여진 부도들 가운데 1840년대 이후에 입적하신 분들이 4분이 조사되어
그 관계가 분명치 않다.
그것은 아마도 서정리에 사는 박말수씨가 150년 전이라고 증언하는
'궁고(軍鼓)폐사설화'와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1840년대 이후 미황사는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미황사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져 역사는 길지 않다.
모두 조선 후기 1700년경부터 세워졌다.
부도로 모셔진 스님들은
조선 후기 대흥사와 미황사 대중의 존경을 받는 큰스님들로서
조선후기 화엄의 대가로 꼽히는 연담유일 스님을 비롯해서
대흥사 13대종사의 한 분인 벽하, 설봉 그리고 정련, 정암, 송파, 낭암 … 등
당시의 내노라하는 스님들이다.
이 부도전으로 하여 당시 미황사의 사세나 이곳을 중심으로 수행했던
스님들의 수행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특히 미황사의 부도에 돋을새김을 한 문양들이 독특하고 아름답다.
기단부에 거북ㆍ 게ㆍ 문어ㆍ 물고기 등의 어류가 새겨진
매우 독특한 양식을 한 것이 있는데,
해안이라는 이 지역의 특수성이 불교미술에 반영된 매우 특이한 예라 하겠다.
미황사 부도의 멋은
현재 유홍준 문화재청장의《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비교적 널리 소개되었지만,
또 주지 금강스님도 미황사 부도를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두륜산 대흥사 자락에서 태어난 그는
부도가 더 많이 훼손되기 전에 원형을 남겨야겠다는 뜻에서
1989년부터 탑본(榻本)을 시작했으며,
1996년에는 서울과 대구, 부산을 돌며 탑본전(榻本展)을 열어
미황사 부도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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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 부도밭에 계시는 스님네들은 적적할 틈이 없습니다. 客들이 쉬지않고 찾아들어 번잡하게 휘젓고 다니는 까닭입니다.이미 너무 많은 소문이 나서 그 유명세를 단단히 치르고 있습니다.
△ 미황사 부도밭에 계시는 스님네들은 적적할 틈이 없습니다.
客들이 쉬지않고 찾아들어 번잡하게 휘젓고 다니는 까닭입니다.이미 너무 많은 소문이 나서 그 유명세를 단단히 치르고 있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소문이 나서 그 유명세를 단단히 치르고 있습니다.
△ 저기
△ 해가 비추임에 따라 이렇듯 달라지기도 하지요.
△ 부도밭에서 있는대로 건져 올린 요것들, 요것들을......
능숙한 솜씨야 두 말할 필요도 없지요.
-- 기주짱 정리
- ♬~♪~♬ 영화 '보리울의 여름' 中 '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