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홍산문명 VS 황하문명의 4000년 전쟁 (1부)

Gijuzzang Dream 2008. 9. 17. 13:10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

 

 

내몽고 횡단 4000km 학술 르포

中 동북공정 무너뜨릴 칼과 방패를 찾아서

 
 
● 황하문명과 분리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일어난 홍산문명
● ‘알타이語族’은 람스테드의 실수, 이제는 홍산語族이다
● 전쟁으로 꽃핀 청동기문화, 난하에서 만난 홍산과 황하문명
● 고원 초원의 한계, 일정한 수 이상의 인구를 수용하지 못한다
● 왕소군과 문성공주 사례로 본 중국의 역사의식
● 몽골을 지배한 흉노-선비-돌궐-요-금-몽골-청은 같은 뿌리
● 홍산은 토기와 옥기와 청동기가 발전할 수 있는 조건 갖췄다
● 지구적인 기후 변화로 둘로 갈린 홍산 세력
● 북위-요-금-원-청의 역사는 중국이 아닌 홍산문화인의 역사
● 元은 홍산문화인의 역사를, 淸은 홍산문화인의 영토를 중국에 바쳤다
● 얄타회담으로 기사회생한 한국과 몽골, 국가연합을 거론하다

 

 

▼ 제1부 : “이제는 알타이語族이 아니라 홍산語族이다”

 

요나라 때 제작된 봉황 장식품.

거란은 한국과 친연성이 강한 종족이었다.

기자는 한국에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2003년 여름,

동북공정의 속내를 드러낸 중국 ‘광명일보’의 시론(試論)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점’을 입수 번역해,

신동아 2003년 9월호에 보도함으로써

한국의 반(反)동북공정 운동을 촉발시킨 바 있다.

 

중국은 고구려사만 가져가려고 하지 않는다.

고구려의 모태인 고조선부터 몽땅 가져가려는 것이

동북공정의 목표다.

이를 위해 중국은 정교한 논리를 만들었다.

 

중국은 한국이 ‘단군조선을 신화 속의 나라로 여긴다’는 데

착안해, 단군조선의 실재를 간단히 부인한다.

그리고 중국 고대국가인 상(商)나라 사람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에서 고조선이 시작한다고 정리한다.

 

이러한 기자조선을 중국 연(燕)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이 뒤집고 위만조선을 여는데,

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4개 군(郡)을 설치한 이가 중국 한(漢)나라 무제다.

한 무제가 세웠다는 한4군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에

고구려족이 많이 사는 ‘고구려현’이 있었다고 하는데,

고구려족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이니,

고구려는 중국의 고대 변방국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동북공정의 핵심 논리다.

 

적봉 중앙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 강.

홍산문화의 젖줄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대흥안령 산맥의 지류이다. 이곳은 비가 적은 고원이라

여름에만 겨우 풀이 자란다.

이러한 논리를 간파한 기자는

단군조선의 실존을 밝히기 위해

2006년 10월호 신동아에

‘고조선은 중국 내몽고자치구에 있었다’는 기사를

작성해 보도했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도움을 받아 고조선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중국의 역사기록을 통해 증명해 보인 것이다.

 

또, 신동아 2008년 4월호에는

고조선이 있었던 곳을 직접 답사해

‘고조선의 심장부를 가다/

웅녀(熊女)의 자취, 우하량의 곰뼈를 찾아라’라는

르포를 내놓았다.

 

협의의 홍산문화, 광의의 홍산문화

 

이러한 보도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우리 사회에 제법 알려진 것이

‘홍산문화(紅山文化)’와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 下層文化)’라는 말이다.

홍산문화는 중국 내몽고자치구 적봉(赤峰)시 홍산(紅山)구에서 발견된

서기전 4000년 전후의 신석기문화인 동시에

적봉시와 그 주변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후기 신석기문화 전체를 일컫는 통칭이다.

 

통칭으로서의 홍산문화는 서기전 7000년쯤의 것으로 보이는 ‘소하서문화’,

서기전 6000년 무렵의 ‘흥륭와문화’,

서기전 5000년경 일어난 ‘조보구문화’,

서기전 4000년 앞뒤의 ‘홍산문화’,

그리고 서기전 3000년 전후에 꽃핀 ‘소하연문화’ 등을 포괄한다.

물론 소하서 이전에 있었던 신석기문화도 포함한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적봉시 오한기(敖漢旗) 살력파향(薩力巴鄕)의 하가점이라는 마을에서 발견된,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문화다.

여기서 ‘이 지역’이란 통칭으로서의 홍산과 같은 곳을 말한다.

그 후 유사한 청동기 유물이 적봉시 경내 여러 곳에서 발견되면서, 하가점 하층문화는

홍산문화의 뒤를 이어 이 지역에서 크게 일어난 초기 청동기문명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오래된 유물일수록 깊은 곳에서 발견된다.

적봉지역(홍산지역)에서는 하가점 하층문화가 나온 곳보다 덜 깊은 곳에서

서기전 1300년쯤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물이 발견됐는데,

이 유물을 만든 문화를 가리켜 ‘하가점 상층문화’라고 한다.

 

하가점 상층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으나,

유물 가운데 말방울 등 유목민이 사용한 것이 많았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는 유목민이 사용하는 청동기가 발굴되지 않았으나

상층문화에서는 유목민 특성을 보여주는 유물이 주로 출토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해석이 정주(定住) 생활을 하던 하가점 하층문화인들이

유목 생활을 하는 하가점 상층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대 화하족과 고조선족의 경계였던

난하와 중국 기록에 나오는 조선성,

낙랑의 위치.

그리고 비파형 동검문화가 일어난 능하지역.

적봉시 남쪽에는 몽골어를 한자로 음차해

적은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이라는 산맥이 있다.

이 산맥 동남쪽에서는 대릉하와 소릉하란

강이 발해만으로 흘러가므로

‘능하(凌河)지역’으로 통칭된다.

이 능하지역에서 서기전 800년쯤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물이 다량 발굴됐다.

능하지역의 청동기는

하가점 상층문화의 청동기와 달리

유목민의 유물은 적고

제작기법이 훨씬 더 발달해 있었다.

 

기후변화로 南下

 

홍산지역은 해발 600m의 고원 평지지만,

노노아호산과 발해만(바다)으로 둘러싸인 능하지역은 저지대 평지다.

따라서 농경이 가능해 이곳에 살던 청동기인들은 정주생활을 했다.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적봉 일대에서 신석기문화가 대단히 오랫동안 꽃피었다는 것은

이곳이 고원이긴 하지만 농경을 하는 정주생활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농경을 했다는 것은 그 지역이 비가 적절히 내렸고 날씨 또한 그리 춥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서기전 1300년 무렵부터 유목민 문화가 등장하니

이는 큰 기후변화가 일어나 비가 적게 오고 추워졌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상당수는 홍산문화의 변두리인 노노아호산 남쪽의 따뜻한 능하지역으로 이동해

발달한 정주 청동기문화인 ‘능하문하’를 일으키고,

적봉지역에 남은 세력은 초지에서도 생활이 가능한 유목문화로 들어갔다.…’

 

능하문화 지역은 윤내현 교수가 중국역사 자료 분석을 통해

고조선 지역이라고 밝힌 곳과 일치한다.

상당수 중국 사료는 능하 주변에 ‘조선’과 ‘낙랑’이라는 곳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윤 교수는 고조선과 한4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그곳에 있었기에 그러한 지명이 생겼다고 분석했다.

 

이 시기 중국인의 조상인 화하족(華夏族)이 황하 중류에서 일으킨 황하문명이

황하 하류로 세력을 넓혀왔다.

그리하여 고조선족 문화와 화하족 문화는 황하 하류 북쪽에서 만나게 됐는데,

이때 두 세력이 경계선으로 삼았던 곳이 ‘난하(?河)’라는 강이라고 윤 교수는 설명했다.

 

지금의 능하지역은 한반도보다 강우량이 적다.

그러나 고대에는 많은 비가 내렸던 듯 난하 유역은 매우 넓다.

윤 교수는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고조선족과 화하족이 큰 강인 난하를 경계로 삼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윤 교수의 제자이자 중국 길림대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은 복기대 박사는

탐험가인지 고고학자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대담한 답사를 많이 하여,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 빗대 ‘복기애나 존스’로 불린다.

‘복기애나 존스’도 능하지역을 한국 상고사 연구에서 주목해야 할 곳이라고 강조한다.

 

이유는 이곳에서 황하 중류에서 출토되는 중국식 동검과는 다른 비파형동검과 다뉴세 문경 등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물은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때문에 ‘복기애나 존스’를 포함한 상당수 한국 학자와 일부 중국 학자들은

이를 능하지역에 있던 고조선의 영향력이 만주와 한반도로 확장된 것으로 해석한다.

 

만주와 한반도는 전세계 고인돌의 50% 정도가 몰려 있는 ‘고인돌의 왕국’이다.

만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크고 정교하지만 한반도 고인돌은 거칠고 작은 편이다.

그러나 하가점 하층문화와 능하문하 지역에서는 고인돌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인돌은 능하문화인들이 동진(東進)하기 전,

만주와 한반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고인돌은 홍산문화가 아니다

 

능하문화가 꽃피기 전, 한반도와 만주에서도 군데군데 신석기문화가 존재했다.

만주에 있는 대표적인 신석기문화 유적지로는

요녕성 심양시 황화북대가 용산로 1번지에 있는 신락(新樂) 유적지가 꼽힌다.

신락이라는 마을이 있었던 이곳은 1973년, 한 전자회사가 공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서기전 5000년 것으로 보이는 신석기 유물이 다량 발굴돼 일약 심양을 대표하는 유적지가 됐다.

 

한국의 중심부인 서울에서는 암사동 유적지가 유명하다.

신락 유적지와 암사동 유적지에 살던 신석기인들은 토성을 쌓고 움집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이들이 생활한 곳에서는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지 않는다.

청동기를 만들려면 구리와 아연광이 섞인 돌이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노천 구리·아연 광산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의 신석기인들은 이러한 노천광을 발견하지 못했다.

 

만주와 한반도는 구리 · 아연을 품은 돌을 찾아낼 수 있는 능하문화인들이 들어오면서

청동기 시대로 들어갔다. 능하문화인들이 만든 청동기는 대부분 무기였다.

청동 농기구는 만들지 못했는데, 이는 농기구로 쓰기엔 청동이 너무 무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나 청동 화살촉과 청동검, 청동 도끼는 물러도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

능하문화인들은 용범(鎔范)을 이용해 청동제 무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었으니,

돌을 갈아서 돌화살촉과 석검(石劍), 돌도끼를 만드는 세력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비파형동검 문화와 고인돌 문화가 만나 하나가 됐다.

고인돌 밑을 발굴하다 보면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파형동검은 만주와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세형동검으로 모양이 바뀐다.

능하문화에서는 고인돌 없이 비파형동검이 제작됐으나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고인돌과 함께 세형동검이 제작됐다.

 

전쟁과 쿠데타 시대 연 청동기

 

능하문화인들이 만주와 한반도로 세력을 넓힌 것은 정복전쟁의 일환이었다.

청동제 무기를 대량생산하게 되면 사람들은 농경만으로 재산을 늘리지 않는다.

정복전쟁을 통해 다른 종족을 약탈하는 것이 농경보다 빠른 재산 증식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약탈은 식량이나 재물에 한정하지 않는다. 여성과 아이도 납치한다.

여성을 납치하는 것은 자기 씨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였다.

어린아이는 자기 종족으로 키우거나 여의치 않으면 노예로 부린다.

이러니 청동무기 제조술을 가진 종족은 순식간에 재산과 인총(人叢)을 늘릴 수 있다.

이때 몇몇 세력은 청동무기 제조술을 가진 세력에게 저항하지 않고 협력한다.

일종의 부족 연맹을 만드는 것이다.

 

부족 연맹에 참여한 세력은 일단은 굴복하지만, 잠재적으로는 쿠데타 가능 세력이 된다.

전체를 리드하는 세력이 방심하거나 여러 부족을 너무 강하게 지배해 반발을 사면,

이들은 여론을 등에 업고 리딩 세력을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러한 일은 중국 화하족에 대한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청동기 시대로 진입하면서 화하족은 ‘하(夏)’라고 하는 최초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이 폭정을 일삼자,

나라 조정에 협력하던 상족(商族)의 대표 탕(湯)이

여론의 지지를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다.

그리고 상족이 화하족 전체를 지배하는 상(商)나라를 열었다.

 

상나라의 마지막왕인 주왕(紂王)도 하나라 걸왕에 못지않은 학정을 일삼았다.

그러자 상나라에 협조해온 주족(周族)의 리더인 무(武)가 혁명을 일으켜 주왕을 죽이고

주(周)나라를 열었다.

 

상에서 주로 왕조 교체가 일어나던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기자조선을 만들었다고 하는 기자(箕子)다.

기자는 상나라 주왕의 삼촌으로, 주왕의 독재에 항거해 바른말을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주왕의 미움을 사 투옥됐는데 이때 주족의 무(무왕)가 혁명을 일으켜 집권했다.

주나라 무왕은 기자를 석방한 뒤 “함께 정치를 하자”고 했으나,

기자는 “나는 상나라의 녹을 먹은 사람이다”며 거절하고 조선 땅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화하족의 영역에서 왕조가 바뀌는 갈등이 있었다면,

고조선의 강역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화하족은 갑골문이라는 글자를 만들고 이를 한자로 발전시켰다.

고조선족도 기록을 위해 문자를 만들었을 것이나 지금 전해지는 것은 없다.

 

기자가 조선 땅으로 망명하자

주 무왕은 서운한 마음에 ‘말로만’ 기자를 조선 왕에 봉했다는 것이 중국의 ‘사기’에 실린 내용이다.

다른 영역으로 망명한 사람을 자기 나라 사람인 것처럼 왕으로 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극히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만 나올 수 있는 역사 서술인 것이다.

 

이 때문에 윤내현 교수는 기자를 받아들인 고조선의 리더는

기자를 난하 부근의 한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임명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중국 기록에 나오는 ‘기자조선’인데,

(지금 중국은 ‘기씨조선(箕氏朝鮮)’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기자조선은 단군이 이끈 고조선의 변방에 있던 한 제후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윤 교수의 주장이다.

 

고조선의 열국 시대

 

그 후 주나라는 청동기문화를 발전시키다가

서기전 8세기 흉노의 일파로 보이는 견융족의 공격을 받아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이 ‘도주’를 계기로 주나라 왕실의 힘이 크게 약해진다.

그러자 주나라 왕실에 종속돼 있던 제후국들이 독립해 패권을 다투는 춘추 시대가 열린다.

춘추 시대는 전쟁의 시기였으므로 무기를 주로 제작하는 청동기문화는 극성기에 이른다.

 

그리고 서기전 5세기 초 보다 큰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는 전국 시대로 들어가는데,

전국 시대 말기 화하족은 철제 병기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철제 병기는 청동 병기에 비해 훨씬 강력했으므로 전쟁의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이러한 혼란을 겪으면서 화하족은 진(秦)나라로 통일됐다.

 

그러나 능하지역의 고조선족은 화하족만큼 큰 분열을 겪지 않았으므로,

청동병기의 개발과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철기 개발이 늦었다. 전쟁술의 발전도 더뎠다.

이러한 때인 서기전 3세기(전국 시대) 중국 연(燕)나라 장수인 진개가 군대를 이끌고

고조선 땅 2000여 리를 쳐들어왔다.

그로 인해 고조선은 치명타를 입고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연나라의 진개 군은 고조선에 대해, 주나라를 공격한 견융 세력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진개의 공격으로 고조선이 능하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잃자 고조선의 지배를 받던 작은 나라들이

일어나 중국의 춘추 시대처럼 패권을 다투는 열국 시대가 열렸다.

 

  부여-백제계 도래인이 일본에 건너가

  세운 동대사. 도래인이 온 후

  일본 건축물은 상당히 커졌다.

이러한 열국 가운데 기자조선이 있었고,

부여와 고구려 동예 옥저 등이 있었다.

이 중 가장 강력한 나라는 기자조선과 부여였다.

열국 간의 갈등이 계속되던 서기전 194년쯤,

진개와 같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기자조선으로 망명한 후 신임을 받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위만조선을 열었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서기전 108년 철기로 무장한

한(漢) 무제(武帝) 군대의 공격을 받아 패망하고,

한 무제는 위만조선의 영역에 4개 군(郡)을 설치했다.

한 무제의 공격을 계기로 고조선 영역 안에 있는 다른 열국들도 철기문화를 갖추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부여-백제 계열

 

한4군 설치를 계기로 고조선 영역의 국가들은 내부 통일과 외적 철퇴라는 두 가지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게 됐다. 이 목표는 부여에 이어 고구려가 절대 강자로 떠올라

내부통일을 하고 한4군을 밀어냄으로써 비로소 완수됐다.

고구려는 내부통일을 하고 한나라군을 궤멸시키며 고조선의 옛 땅인 능하지역을 수복했다.

 

부여에 이어 고구려가 통일전쟁과 반(反)외세 전쟁을 하는 동안 경쟁에 패한 세력은

‘일종의 무주공산’인 만주와 한반도로 이주했는데, 이들을 따라 철기문화도 들어갔다.

그로 인해 마한 · 진한 · 변한 등 철기를 다루는 나라가 갑자기 생겨났고,

이어 백제 · 가야 · 신라라는 고대왕국이 등장했다.

한반도로 들어온 세력 가운데 일부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일본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도래인(渡來人)’이라고 한다.

도래인들은 청동기문화 말기부터 일본으로 건너갔으므로

일본에는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거의 동시에 도입됐다.

 

도래인들이 건너갈 때 일본에서는 ‘조몬(繩文)문화’를 만든 신석기인들이 살고 있었다.

조몬문화는 새끼줄 무늬 자국을 새긴 듯한 토기를 만든 신석기문화다.

도래인들은 조몬문화인들을 제압하고

바로 청동기-철기문화인 ‘야오이(彌生)문화(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3세기 사이)’를 열었다.

 

청동기는 돌을 자르지 못하지만 철기는 바위를 자른다.

철기의 생산력은 청동기보다 월등히 강하므로

철기 시대에는 과거에 보지 못했던 강력한 전제군주가 등장한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군주가 죽으면 후손들은 권위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봉분을 만든다.

고분(古墳)문화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만주와 한반도, 일본에서 모두 일어났다.

고분문화가 생기면서 일본에서는 천황제가 일어난다.

일본은 조몬문화 시대부터 천황제가 있었다고 주장하나,

천황제는 고분 시대를 거치면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수도의 이름을 ‘부여’로 삼았고 한때 국호를 ‘남부여’로 한 적이 있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를 보면 유독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전쟁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고구려와 백제는 많이 싸웠다.

흥미로운 것은 고구려와 백제는 똑같이 ‘동명(東明)’을 시조로 모셨다는 점이다.

 

중국어와 한 뿌리에서 나온 티베트어

 

고구려는 고구려를 세운 추모(주몽)를 동명성왕으로 모시지만, 동명은 부여에서 모시던 신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에서 나온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고구려족을 중심으로 뭉친 고구려가 부여 세력을 공격하면서 둘은 갈라진 듯하다.

궁지에 몰린 부여 세력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주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백제가 탄생했을 수 있다.

이러한 백제 세력의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도래인은 부여-백제계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역사적 사실이 이렇다면 한민족과 일본족, 그리고 만주족(여진족)의 문화는

능하문화-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홍산문화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 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한국어와 일본어, 만주어는 공통된 어순(語順)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언어는 몽골어, 터키어 등과 함께 알타이어로 분류된다.

몽골어, 터키어도 한국어와 어순이 같다.

 

반면 한국과 오랫동안 접하고 살아온 중국어 어순은 한국어 계열과 다르다.

중국어와 어순이 같은 것은

중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는 티베트어 그리고 미얀마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어와 티베트어, 미얀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서기전 4000년까지 같이 살다가 갈라졌다고 한다.

 

몽골공화국과 중국의 신강위구르자치구 사이에 있는 알타이산맥 주변의 언어는 같은 계열이다.

지금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밀을 재배하면서 계속 황하 중류에서 살았으나,

티베트-미얀마어를 사용하게 된 사람들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두 언어가 나뉘었다는 것이다.

 

유목을 한 사람들은 해발 4900m인 티베트고원으로 들어가 고립 생활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여기에서

일부가 갈려 남쪽으로 내려가 미얀마의 지배세력이 되면서 지금의 미얀마어가 탄생했다고 한다.

 

미얀마어와 티베트어, 중국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한국어와 만주어, 일본어를 쓰는 사람도 통역이 없으면 대화를 하지 못한다.

언어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더라도

헤어진 상태가 오래되면 단어가 크게 달라져 어순이 같아도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알타이語의 탄생 배경

 

그런데 한국어 계열과 어순이 같은 언어가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몽골과 터키 지역에 존재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 의문과 관련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 ‘알타이어족(語族)’이란 말이다.

알타이어족은

핀란드의 언어학자인 구스타프 존 람스테드(Gustaf John Ramstedt, 1873~ 1950)가 만들었다.

 

터키어 계열은 터키에서만 사용하지 않는다. 터키어 계열에는 ‘타지키스탄어’를 제외한

중앙아시아의 모든 언어가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몽골공화국(외몽고)과 중국의 신강위구르(新疆維吾爾)자치구를 가르는 경계선에는

해발 4000 여m대의 준봉들이 이어진 ‘알타이산맥(Altai Mountains. 중국어로는 ‘阿爾泰山’ 표기)이 있다. 이 알타이산맥 동쪽에는 몽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살고,

서쪽엔 투르크어(터키어 계통)를 쓰는 사람이 살고 있다.

 

람스테드는 1912년부터 이 지역을 여행하며 두 언어를 비교한 결과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하고,

두 언어를 알타이산맥의 이름을 따서 ‘알타이어족’으로 명명했다.

이로써 람스테드는 우랄-알타이어족에서 알타이어족을 떼내는 공적을 쌓게 됐다.

지금 러시아 알타이산맥 부근에 ‘알타이공화국’이 있는데,

이 공화국에도 알타이어계를 사용하는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람스테드는 1919년부터 1930년까지 무려 11년간 일본 주재 핀란드대사를 지냈다.

이때 그는 일본어와 한국어, 만주어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세 언어가 몽골어, 투르크어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해

세 언어를 알타이어족에 포함시켰다.

 

몽골공화국(외몽고)과 중국 내몽고자치구 사이에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이 있다.

대흥안령산맥은 홍산문화가 일어난 적봉 북쪽까지 내려와 있다. 대

흥안령산맥 서쪽에는 몽골어와 투르크어 계열이 있고

동쪽(동남쪽)에는 한국어와 만주어, 일본어가 있는 것이다.

만약 람스테드가 대흥안령산맥 좌우의 언어가 유사하다는 것을 먼저 발견했다면,

그는 이 언어집단을 ‘대흥안령 어족’으로 명명하고

이어 터키어 계열을 이 어족에 포함시켰을 수도 있다.

 

람스테드의 실수

 

람스테드가 대흥안령산맥 주변을 알타이산맥 좌우보다 늦게 살펴본 것이 혼란을 만들었다.

대흥안령산맥보다는 알타이산맥이

이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고향이라는 ‘상(像)’을 만들어준 것이다.

람스테드가 활동할 당시

대흥안령산맥 서쪽인 일본과 조선(한국), 만주는 꽤 많은 사람이 살고 문화도 번성했다.

그러나 알타이산맥 좌우는 유목문화만 남아 있는 황량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발전한 곳보다는 목가적인 곳을 고향으로 여기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일까. 적잖은 사람들은 알타이 지역을 한민족 문화의 발원지로 보려고 했다.

 

람스테드는 객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타계하기 전

 ‘알타이어족이라는 용어를 먼저 만들었다고 하여, 알타이산맥 쪽에서 생겨난 언어가 대흥안령산맥 쪽으로 퍼져나갔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을 주목하지 않았다.

 

유목민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오르도스 청동기가 대량 출토된 황하 만곡부.

알타이는 터키 · 몽골어로 황금을 뜻하는

‘알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라 왕족의 상당수는 금을 뜻하는 김(金)씨 성을 가졌고,

신라 고분에는 금관 등 많은 금 장식품이

나왔다.

이러한 사실에 주목한 일부 학자들은 신라 지배층은 황금의 산인 알타이산맥 쪽에서

이동해왔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알타이산맥은 몽골의 서쪽에 있는데,

몽골은 적봉지역보다 높은 해발 1000여m의 초원지역이다.

그리고 알타이산맥을 지나면 동유럽까지 끝없는 평원이 이어진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은 적으니, 말(馬)만 있으면 1000~2000㎞도 간단하게 이동할 수 있다.

초원은 바다보다 이동하기가 좋은 공간이다.

 

서기전 8세기에서 2세기 사이, 지금의 이란 북쪽 지역에 말을 잘 다루는 스키타이족이 일어나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했다. 스키타이족은 금 공예술이 발달했고, 청동기 제작술이 뛰어났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서기전 480~420년쯤)는

스키타이 지역을 방문한 후 기록을 남겨놓았다.

때문에 유럽에서는 일찌감치 스키타이문명에 주목해,

스키타이족은 최초로 청동기문명을 연 종족으로 이해됐다.

 

이란 북쪽도 대평원 지대이기에 유목 문화가 존재했다.

스키타이 청동기는 말방울 등 기마민족의 특성을 띠는 것이 많았는데

이 문명은 초원을 통해 산지사방으로 전파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오르도스 청동기 만든 흉노족

 

화하족은 황하 중류에서 서기전 16세기부터 초기 청동기문명인 ‘이리두문화’를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夏)나라다.

이리두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와 함께 석기를 주로 사용하고

청동기를 장식품 등 보조로 사용하는 동석(銅石) 병용기 문화였다.

그리고 상(商)나라가 등장해 보다 발전한 청동기문화인 ‘이리강문화’를 열었다.

중국의 청동기문명은 상나라 때부터 본격화했다.

 

이러한 이리두문화에 이어 주(周)나라가

가장 발달한 후기 청동기문명을 열고 춘추전국 시대를 맞았다.

황하는 화하족이 포진한 낙양 인근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상류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내몽고자치구의 ‘오르도스(鄂爾多斯)’시에서 ∩자 모양으로 꺾인다.

오르도스는 ∩ 모양으로 꺾이는 황하 바로 남쪽에 있기에 황하에 푹 둘러싸인 형태다.

 

오르도스에서 황하를 건너면 바로 내몽고자치구의 수도인 호화호특(呼和浩特) 시가 나온다.

오르도스 시를 감싸고 황하가 돌아가는 것을 ‘황하 만곡부(彎曲部)’라고 한다.

‘황하 만곡부’ 또는 ‘오르도스’에서 서기전 8세기 무렵 제작된 유목민계 청동기가 많이 발굴됐다.

 

오르도스는 알타이산맥의 동남쪽에 있는데, 초원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오르도스와 알타이산맥 사이는 먼 거리가 아니다.

화하족이 만든 중국 청동기의 특징은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생긴 가설이 스키타이에서 일어난 청동기문명이 초원길을 통해

오르도스와 능하지역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이 등장한 배후에도 알타이 지역이 한민족의 원류일 것이라는 시각이 작용했다.

 

사람이 살려면 반드시 물과 소금이 있어야 한다. 알타이 지역 북동쪽인 바이칼호 부근은 물이 많다. 바이칼 호수에는 알흔 섬이 있는데 이 섬에는 지금도 고대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알흔섬을 중심으로 한 바이칼호 일대에서 한민족 문화가 일어나

동남쪽으로 전래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생겨났다.

이 또한 알타이를 한민족 문화의 원류로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알타이는 원형을 보존한 곳

 

알타이 지역은 대표적인 과우(寡雨)지역이다.

그로 인해 고비사막이라는 아주 황량한 곳까지 생겨났다.

이런 곳에서는 오래전에 도입된 문화가 존재할 수는 있어도 독자적으로 문화가 일어나긴 힘들다.

그렇다면 알타이산맥을 한민족 문화의 원류로 볼 것이 아니라

대흥안령산맥을 뿌리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대흥안령산맥 바로 남쪽이 해발 600여m의 적봉지역이고,

이곳에는 1만여 년 전부터 대단한 신석기문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청동기문화도 잉태했으나 건조한 곳으로 바뀐 탓인지

서기전 8세기 이후에는 유목문화의 특성만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유목문화가 초원길을 따라 몽골 초원을 가로질러

알타이산맥 지역으로 확산됐을 수도 있다.

 

적봉에 살던 신석기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찍 말을 가축화했을지도 모른다.

말이 있었다면 이들은 적봉이 건조해지기 전에 몽골 초원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갔을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각을 갖는다면 적봉은 하가점 하층문화-능하문화(비파형동검문화)를 거쳐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정주문화’를 전파하고,

하가점 하층문화-하가점 상층문화를 거쳐 몽골 초원을 지나 알타이산맥 서쪽으로

유목문화를 전파한 중심이 된다. 홍산문화를 일으킨 적봉이 한민족 문화의 원류이자

일본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화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나온 세력이 서쪽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로는

흉노의 분파인 훈족이 동유럽까지 진출한 것과,

돌궐에서 갈려 나온 투르크가 소아시아로 진출해 터키를 세운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소아시아에는 이란계 사람들이 이룬 스키타이문화가 있었다.

 

스키타이족도 초원길을 통해 사방으로 문화를 전파했다.

그렇다면 오르도스는 스키타이와 하가점 상층문화가 만난 접점일 수 있다.

이란계 문화가 동쪽으로 영향을 준 증거로는

중동에서 일어난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거쳐

국의 신강위구르자치구와 영하(寧夏)회족 자치구까지 전파된 점을 들 수 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 유럽인의 피를 전파한 것은

예니세이 강 상류인 미누신스크(Minusinsk) 지역에서 발굴된 카라스크 문화일 가능성이 높다.

카라스크에서 발굴되는 돌무덤은 유럽의 돌무덤과 흡사하다.

중앙아시아는 적봉에서 일어난 홍산문화와

이란에서 일어난 중동문화, 미누신스크에서 일어난 유럽문화가 섞인 곳이지,

한국 문화의 원류일 수는 없다.

종족에게 언어는 종교나 혈통보다 우세한 것이므로

중앙아시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홍산문화로 봐야 한다.

 

홍산은 동북-중앙亞의 뿌리

 

홍산이 동쪽에 있는 한국어와 만주어 일본어, 서쪽에 있는 몽골어와 투르크어 계통에

영향을 줬다면, 알타이어족 대신 ‘홍산어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람스테드의 예를 따른다면 ‘대흥안령어족’이란 말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홍산문화가 널리 쓰이고 있으니 ‘홍산어족’이 더 나을 듯하다.

이러한 주장은 단국대 몽골학과 이성규 교수 등이 이미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능하문화가 바로 고조선 문화라는 주장은 능하문화는 물론이고

하가점 하층문화, 홍산문화가 발굴되기 이전에도 있었다.

1931년 단재 신채호는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이 원고는 훗날 하나로 묶여 ‘조선상고사’)’ 첫머리에서

‘조선족과 흉노족은 우랄어족에 속하는데,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 · 선비(鮮卑) · 여진 · 몽고 · 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 · 헝가리 · 터키 · 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다’라고 적시했다.

 

신채호의 주장은 ‘성호사설’을 쓴 이익을 필두로 한 조선 북학파의 주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북학파는 소중화(小中華)를 추구한 성리학자들과 대립했다.

소중화를 표방한 성리학자들은

조선을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화하족의 후예인, 중국의 아류로 집어넣으려 했다.

그러나 북학파는 실학을 중시해

중국이 중심이고 나머지는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을 극복하고,

중국과 오랑캐는 똑같다는 ‘화이일야(華夷一也)’라는 세계관을 갖고자 했다.

 

북학파의 ‘화이일야’ 세계관

 

화이관을 따르면 한국은 항상 중국에 눌려 지내야 하는데,

이러한 사관이야말로 동북공정이 바라는 바다.

그러나 중국이 오랑캐로 표기한 우리도 세계의 중심이었고 앞으로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역사관을 가진다면, 동북공정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화이관은 노예적인 역사의식이고, 화야일야는 황제적인 역사관을 갖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물은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신석기문명의 주역을 3황(皇)5제(帝)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적봉지역에서 일어난 거대한 신석기문명인 홍산문명에 대해서는

한 자의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홍산문명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 쪽 기록에 흐릿한 형태로 남아 있다.

 

화하족이 홍산문화의 후예를 만나 기록을 남긴 것은,

청동기 문화가 활짝 핀 서기전 7세기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후 2500년 이상, 홍산문화의 후예를 그들과 다른 역사 존재로 여겨왔다.

그런데 지금 홍산문화의 후예가 살던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홍산문화를 화화족 문화에 접목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동북공정과 서북공정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홍산문화에 대한 탐구와 이해는 동북공정을 부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품는다면 홍산문화의 A to Z를 추적해야 한다.

고대사회에서 종족은 끊임없이 이동했다. 따라서 한국인의 역사관은 반도를 극복해야 한다.

이제 홍산으로 뛰어들어가 보기로 하자.

- 2008.09.01 통권 588호(p673~722) 신동아, 권말부록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