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 내몽고 횡단 4000km 학술 르포 中 동북공정 무너뜨릴 칼과 방패를 찾아서
▼ 제2부 찰흙밭, 玉밭, 광물밭, 그러나 高原이라는 약점이…
홍산은 도대체 어떤 조건을 갖췄기에
후기 신석기문화인 흥륭와문화(서기전 6000년쯤)-조보구문화(서기전 5000년 무렵)-홍산문화(서기전 4000년 전후)-소하연문화(서기전 3000년경), 그리고 초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서기전 2200~1500년)와 유목문화인 하가점 상층문화(서기전 1300년경), 정주문화인 능하문화(서기전 800년경)를
낳을 수 있었는가.
내몽고자치구의 면적은 22만㎢인 한반도의 5배,
9만9000여 ㎢인 한국의 11배가 넘는 110만㎢다. 그러나 인구는 한국의 절반 정도인 2350여만에 불과하다.
내몽고자치구의 지방조직은 자치구-시(市) · 맹(盟)-현(縣) · 기(旗)-향(鄕) · 진(鎭) · 촌(村)으로 이어진다.
과거 몽고족은 ‘맹(盟)’과 ‘기(旗)’로 부족을 엮었기에,
내몽고자치구에는 아직도 시와 동급인 ‘맹’, 현과 격이 같은 ‘기’가 있다.
내몽고자치구에는 수도인 호화호특시를 비롯해
9개 시(市)와 3개 맹(盟)이 있는데, 적봉시는 9개 시 가운데 하나다.
적봉시의 면적은 한국에 육박하는 9만㎢이지만
인구는 450만에 불과하다.
한국의 부산광역시는 초량구 등을 거느린 순수 부산시 지역과
순수 부산시 바깥에 있는 기장군 등의 군(郡)을 함께 거느리고 있다.
적봉시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순수 적봉시 지역에는 ‘홍산(紅山)문화’란 이름을 낳은 홍산구 등
3개 구가 있고, 그 외곽에 7개 기(旗)와 2개 현(縣)이 있다.
이 적봉시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된 곳이
순수 적봉시 동쪽에 있는 ‘오한기(敖漢旗)’다.
오한기에는 흥륭와, 조보구, 소하연, 하가점이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는 토기와 함께 옥으로 만든 수많은 장식물(玉器)이 출토됐다.
충북 크기에서 한반도보다 많은 유적
오한기의 면적은 충청북도보다 약간 작은 8300㎢인데
이 오한기에서 발굴된 유적이 한반도 전역에서 발굴됐거나 발견된 유적보다 훨씬 많다.
남북한 전체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적지는 300곳 정도이고, 유물이 발굴된 곳은 60개소 정도다.
청동기 유적지는 600곳 정도이고, 발굴지는 200곳이 채 안 된다.
그런데 오한기에서 조사된 신석기 유적지는 1000여 곳이 넘고, 청동기 유적지는 2000여 곳이 넘는다.
오한기의 인구는 60만에 불과하므로 아직 ‘파보지 못한 땅’이 많다.
대부분의 지역이 농지나 초지이므로 개발을 위해 파보면 더 많은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구석기인들은 산 중턱의 동굴에서 살았기에 ‘동굴인’으로 불리지만
신석기인, 특히 후기 신석기인은 물이 가까이 있는 평지에 내려와 움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오한기를 포함한 적봉시 전체가 해발 600여 m의 고원 평지라는 사실은
문명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는 이야기가 된다. 문명은 물이 있는 평지에서 일어난다.
두 번째로 이 곳은 토기를 제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췄다.
기자는 이곳에서 많은 토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우연히 발견했다.
적봉시 오한기 왕가영자(王家營子)향의 서대(西臺)마을에서 서북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서대(西臺) 유적지’가 있다.
서대 유적지에서는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 소하연문화, 하가점 하층문화, 하가점 상층문화
그리고 중국 전국 시대 때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됐다고 한다.
조보구문화를 제외하고는 적봉지역에서 발흥한 모든 문화 유적이 발굴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서기전 5세기~3세기인 전국 시대 유물을 끝으로 이후의 유물은 나오지 않는다는데,
이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떠났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살아오던 터전을 떠난 이유는 전쟁이나 자연재해, 질병일 수도 있지만
기후변화 때문일 수도 있다. 춥고 건조한 고원에서는 농경이 불가능하고 유목만 가능하다.
유목민은 가축이 먹을 수 있는 풀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지만 일정한 경계 안에서 움직인다.
유목을 하더라도 중심지는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서대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목축이 불편해지면 이들은 살던 곳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이주한다.
서대마을에 쏟아진 비
이렇게 되면 중심지도 흙으로 덮이게 된다.
신석기 시대에는 정주민의 중심지였고 유목이 시작된 후로도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철기 시대를 맞을 무렵 그 기능을 상실한 곳이 서대마을이다.
지금 적봉지역의 연 강수량은 300㎜에 불과해 사시사철 건조하다.
서대유적지를 찾아가던 날, 하늘이 꾸물꾸물해지더니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소낙비가 내렸다.
번개를 동반한 큰 비였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내몽고 지역에는 예년과 달리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당국이 크게 고민한 것은 대기오염과 더위였다.
중국은 이 문제를 ‘인공강우’로 해결하려고 했다. ‘구름씨’를 뿌려 인공적으로 비가 내리게 한 것이다.
비가 내리려면 대기 중에 있는 수증기를 잡아당겨 물방울을 만드는 결정체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름씨’다. 중국은 드라이아이스 입자로 만든 구름씨를
항공기로 뿌리거나 포탄으로 발사했다는데,
정작 오라는 베이징 지역에는 비가 적게 오고, 북쪽인 내몽고지역에 자주 내렸다는 것이다.
목마른 토지라면 모처럼 쏟아진 빗물을 재빨리 흡수해야 한다.
그러나 오랜만의 해후라서 그랬는지, 땅은 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몽고에서 인마(人馬)가 다니는 도로는 비가 오면 대개 물길이 된다.
물이 흐르는 곳은 그 지역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는 뜻인데,
낮은 곳은 대부분 흙이 씻겨 내려가 자동차와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단단한 것만 남는다.
바위처럼 단단한 것만 남았기에 물을 흡수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렇게 흘러간 물은 얕은 곳에 모여들어 증발될 때까지
물웅덩이를 만든다. 이 웅덩이가 바로 오아시스다.
칭기즈 칸은 웅덩이에서 목욕을 하는 등 더럽히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물은 이 곳에서 생명과 다를 바 없다.
불에 구운 여신상
비가 쏟아진 지 10여 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비포장도로는 순식간에 큰 개울이 됐다.
물길을 거스르며 조심조심 차를 몰아 서대마을에 도착하자
비가 뚝 그쳤다.
서대 유적지를 찾아 나선 답사단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길이 왜 그렇게 미끄러운가.
기자는 샌들을 신고 있었기에 더욱 미끄럽게 느껴졌다.
서대 유적지는 1987년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내몽고 공작대가 발굴했다.
유물은 박물관으로 옮겨갔지만 그 터라도 보려고 간 것인데,
막상 도착해 보니 유난히 많이 온 비 때문인지 풀이 우거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역시 유적지는 서리가 내린 다음에 보아야 한다. 한겨울이 곤란하다면 초봄에 둘러보는 것이 좋다.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흙으로 만들어 불에 구운 여신상(女神像)이 발굴됐다고 한다.
적봉 일대의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심심찮게 여신상이 발견된다.
왜 고대인들은 여신상을 만든 것일까. 남신상은 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후기 신석기 사회에서는 지금처럼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가 없었다.
짐승처럼, 새끼는 모두 여성이 키우던 시절이었다.
남성은 ‘씨’를 줄 뿐 자녀 양육에는 관여하지 않으니, 새끼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새끼는 같은 ‘씨’에서 나온 것도 있겠지만 다른 씨에서 나온 것도 적지 않으니,
아버지를 따져봤자 의미도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장성한 아들도 그를 키워준 어머니의 통제를 받는다.
이를 ‘모계(母系)사회’라고 한다.
모계 사회는 다산(多産)을 중시했지만, 다산은 모계사회의 전유물이 아니다.
현대의학이 일어나기 전까지 부계(父系)사회에서도 다산은 아주 중시됐다.
현대의학이 일어나기 전 상당수의 신생아는 홍역 등을 앓다가 희생됐다.
홍역을 이겨냈더라도 성장 도중 질병에 걸리거나 상처에 파상풍이 감염돼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성한 후에는 타 부족과의 싸움이나 동족 내의 싸움, 또는 사냥을 하는 과정에서 죽기도 했다.
사냥과 싸움에서 이겼더라도 그 과정에서 입은 큰 상처가 덧나 죽는 경우도 많았다.
기생충과 전염병에 의한 희생도 무시할 수 없었다.
'병(病)은 곧 죽음’인 사회였으니
생명을 이어가려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했다.
이 위험은 홍역 예방약을 내놓고,
파상풍은 병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기생충은 사실상 박멸시킨 현대의학이 등장한 후
소멸됐다.
병으로 인해 사람이 죽는 확률이 떨어지자
비로소 인류는 다산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모계집단에서 구성원이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이
농경이다. 농경이 잘되려면 비가 적절히 내려야 한다.
따라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일이 중요해지는데,
이 제사는 ‘큰 어머니’로 추앙받는 여성이 치른다.
학자들은 여성 리더가 하늘과 통하는 제사장을 맡던 풍습이 지금은 무녀(巫女)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근친혼과 난혼이 횡횡한 모계사회
제사장이 여성이면 신(神)도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신석기인들은 여신상을 만들어 제를 올렸다.
이러한 여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여제사장은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제사장은 집단을 이끄는 군장(君長) 역할도 겸했다.
제사장과 군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시절이 후기 신석기 사회다.
군장과 제사장 역할을 맡은 여성 리더는
집단 내의 남성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시사회는 인구를 늘리는 것이 아주 중요했으므로
여성 리더가 집단 내 모든 남성을 독점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집단을 지키려면
다른 여성에게도 출산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모계사회는 일처다부(一妻多夫)가 아니라
다처다부(多妻多夫)의 사회다.
‘관계’는 대개 집단 안에서 이루어지므로
근친혼(近親婚)이 된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이니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남매도 관계를 맺는다.
때로는 부모 자식이 관계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난혼(亂婚)이다.
근친혼과 난혼을 다반사로 하는 다처다부 사회이면서
중년 여성이 리더십을 쥐고 제사장 역할도 겸하는 것이 신석기 후기 사회였다.
토기를 만들 수 있는 고운 흙
이러한 집단은 불을 다루며 생활했다. 불을 이용해 난방뿐만 아니라 화식(火食)을 했다.
직접 불에 구워 먹기도 하고, 불로 물을 끓이고 그 물의 열기로 음식을 익혀 먹기도 했다.
굽는 것보다는 삶거나 찌는 것이 더 맛이 좋다.
삶거나 찌려면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 도구가 바로 토기다.
그런데 토기는 아무 흙으로나 다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지금도 도자기를 만드는 흙은 따로 있으니, 고대 사회에도 토기를 만드는 흙은 따로 구해야 했다.
모래나 돌이 섞이지 않고 존득존득하게 이겨지는 ‘찰흙’이 그것이다.
이런 흙으로 만든 토기는 불에 올려놓았을 때 터지지 말아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흙이 많은 곳이 신석기인들의 정주지가 된다.
서대 유적지에서는 웃자란 풀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므로 답사팀은 사방을 조망하다가 내려왔다.
바로 그때 서울대 체육교육과의 이애주 교수가 “앗!” 하는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중요 무형문화재 27호인 ‘승무(僧舞)’ 보유자 이 교수는
한국 춤의 원류를 찾기 위해 줄기차게 이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서대 유적지로 올라갈 때 기자는 이 교수에게
“교수님이 넘어지면 국보(國寶)가 깨질 수 있습니다”라는 농담을 했었다.
그런데 하산길에 넘어졌으니 답사단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며 “국보 깨진다~”고 소리를 질렀다.
몸이 가벼운 이 교수는 재빨리 일어나 쑥스러워 하며 옷을 털었다. 그런데 흙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단국대 몽골학과의 이성규 교수가 “이것 좀 봐. 이렇게 흙이 고우니 미끄러지지 않을 수 없지”
하며 혀를 찼다. 이 교수가 가리킨 곳은 빗물이 흘러 생긴 길 옆 도랑인데,
그곳에는 빗물을 타고 흘러온 아주 고운 흙이 고여 있었다.
문외한이 봐도 도자기를 빗는 데 적합한 흙이었다.
기자는 이 흙물에 샌들 신은 발을 담갔는데,
그때 발톱 밑으로 들어간 흙물은 1주일이 지나도 빠지지 않았다.
발톱 밑으로 들어갈 정도로 고운 흙이 서대 유적지를 포함한 적봉 일대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우연한 발견…. 비가 오지 않았고 이애주 교수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기자는 이 곳에 토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많다는 사실을 빨리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운 흙이 대한민국에 피해를 준다. 몽고 초원은 가을부터 봄까지 지독한 가뭄이 이어진다.
이른 봄 강한 편서풍이 불기 시작하면 이곳에 깔린 고운 흙이 일제히 떠올라
베이징 지역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까지 날아온다. 이른바 ‘황사(黃砂)’다.
이곳에서는 까마귀가 가장 크므로 까마귀를 숭배했는데,
이러한 의식은 이들이 옥을 이용해 새를 새긴 옥기를 만든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리더의 무덤터를 천제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전통은 고구려로 이어졌다.
집안의 장군총은
고구려를 연 추모(주몽이라고도 한다)의 무덤인 동시에 천제를 올리는 제사터였을 가능성이 높다.
서대 유적지와 초모산 유적지는 공통적으로 근처에 제법 큰물이 흐르는 구릉지에 있었다.
높은 준봉(峻峰)의 꼭대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은 낮은 언덕에 하늘과 소통하는 무덤터와 제사터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동산 주변에 움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가까운 언덕 꼭대기를 하늘 제사터로 삼는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은 몽골이다.
몽골에는 동네 인근의 언덕이나 동산에, 붉은 천을 내건 ‘오보’라는 돌무덤을 만들어놓고
양 등을 잡아 제물로 바치고 천제를 올린다.
장군총도 이와 유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장군총은 산속이 아니라 압록강 옆의 구릉에 있다.
장군총 아래쪽에는 광개토태왕릉을 비롯해 크고 작은 능이 밀집해 있다.
초모산 유적지에서는 돌에 새긴 사람 얼굴상(石彫人像)이 발견됐다.
그리고 전체 홍산문화의 상징이기도 한 옥기(玉器)도 출토됐다.
초모산 유적지에서 나온 대표적인 옥기는 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뚫린 네모형 옥기다.
왜 적봉지역의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숱한 옥기가 출토되는 것일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적봉지역을 포함한 전 내몽고 지역이 ‘옥(玉)밭’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옥이 매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풀린 옥기 제작의 비밀
옥은 돌보다 무르다. 옥을 물에 넣고 돌로 갈면 원하는 모양을 쉽게 만들 수 있다.
돌을 갈아서 ‘간석기’를 만들 듯, 옥 원석(原石)을 물에 넣고 갈면 쉽게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다.
홍산문화인들은 돌에다 사람 얼굴을 새기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돌보다 무른 옥을 이용해 갖가지 모양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몽고 전체가 옥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원시인들이 옥기를 만든 사실을 아주 신기해했다. 그러다 보니 과도한 해석이 쏟아졌다.
신석기인들이 만든 C자 모양의 옥기를 보고,
중국인들은 ‘용(龍)을 새긴 것’이라는 황당한 해석을 내놓았다.
오한기 서쪽에는 사해(査海) 유적지가 발굴된 요녕성 부신(阜新)시가 있다.
사해 유적지는, 발굴 당시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주거지로 알려졌는데,
이 곳에서도 C자형 옥기와 용 모양 돌무지가 발견됐다.
그러자 중국은 재빨리 이곳을 중화제일촌(중국에서 제일 먼저 생겨난 촌락),
이 돌무지와 옥기를 중화제일용과 중화제일옥으로 명명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케 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도 옥기가 숱하게 출토되자 이 해석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그리고 “당시는 다산을 숭배하는 사회였으니 C자형 옥기는 동물이나 인간의 태아를 본뜬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면서 용을 새겼을 것이라는 주장도 자취를 감췄다.
중국인들은 C자형 옥기를 이용해 홍산문화를 용을 숭배하는 중국 문명에 접속시키려다 포기한 것이다.
적봉지역의 신석기인들은 다양한 옥 장식품을 만들었다.
이 전통이 좀 더 발전한 형태로 전해진 것이
신라와 백제, 가야의 금관이나 금동관에 달려 있는 곡옥(曲玉)이다.
적봉지역의 신석기인들은 하늘과 소통하기 위해 석관묘 안에 새를 새긴 것이 분명한 옥기도 넣었다.
이 옥기를 중국인들은 ‘중국 최초의 봉황(鳳凰)’이라고 해석했으나,
이 새는 봉황보다는 삼족오(三足烏)에 가까운 모습이다.
봉황은 용과 더불어 중국의 상징이라는 생각에서 이 옥기를 봉황으로 해석한 것 같다.
그러나 봉황은 홍산문화의 후예인 거란족이 리더의 상징물로 사용했고,
지금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상징하는 문양이 되었다.
신석기인들에게 토기와 옥기 이상으로 중요한 도구는 석기(石器)다.
구석기인들은 돌을 돌로 때려서 만든, 면이 날카로운 ‘뗀석기(打製石器)’를 사용했으나,
신석기인들은 돌을 돌로 갈아서(간석기) 훨씬 많은 종류의 석기를 개발했다.
돌화살촉을 만들고 돌도끼를 만들었다. 간석기의 등장은 음식물의 변화도 가져왔다.
과거에는 곡식 껍데기를 벗기는 것이 힘들었으나
간석기는 이를 쉽게 해결해주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사진처럼 판판한 면을 가진 간석기 위에 곡식을 올려놓고 둥근 밀대 모양의 간석기로 밀어주면,
곡식 껍데기가 쉽게 벗겨지는 것이다.
껍데기를 제거한 곡식 덕분에
사람들은 음식을 훨씬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다.
숯으로 만드는 청동기
흙과 불과 돌과 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토대 위에서
서서히 청동기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에 흙을 다루는 기술이 중요했다면, 청동기 시대부터는 불을 다루는 기술이 중요해진다.
청동의 원료인 구리나 아연 주석은
삼족기의 물을 끓일 때보다 훨씬 높은 온도의 불을 때야 녹아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불은 나무를 태워서는 얻을 수 없고 숯을 이용해 피워야 한다.
숯으로 강한 불을 만드는 것이 청동기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광물을 품은 광석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공교롭게도 적봉에는 광물을 품은 돌이 많았다.
좋은 예가 홍산문화라는 말을 만든 ‘홍산(紅山)’이다.
홍산은 적봉시 홍산구에 있는 산인데, 광물을 함유한 바위가 많아 붉은 색을 띠고 있다.
광물을 품은 돌이 많으니 숯을 만들 줄만 안다면 청동기 제작은 비교적 쉬워진다.
청동기를 만들려면 녹아 나온 광물을 원하는 모양대로 굳히는 용범도 제작해야 한다.
신석기인들은 돌을 가는 기술을 갖고 있었으므로 용범 제작은 어렵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이 반복되면서 하가점 하층문화가 등장했다.
그러나 청동기는 석기에 비해 무르기 때문에 농기구로 사용할 수는 없다.
청동기가 등장했더라도 농사는 여전히 석기로 지어야 한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청동기를 등장시켰지만,
주력 도구는 여전히 간석기인지라 ‘동석(銅石) 병용기’ 시절로 부른다.
농경이 중요한 경제생활이던 시절, 청동기는 간석기의 보조품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경제를 키우는 핵심 수단이 되면 청동기는 석기를 제치고 주요 도구로 떠오른다.
돌화살촉과 돌도끼를 만들려면 돌을 오랫동안 갈아야 한다.
그러나 합금술이 발전하고 강한 불을 만들 수 있고 매끈한 용범을 제작할 수 있다면,
청동 주물을 이용해 단기간에 많은 청동화살촉과 청동도끼를 생산할 수 있다.
청동화살촉과 청동도끼는 돌화살촉과 돌도끼에 비하면 강도가 약하지만 살상력은 똑같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가벼운 무기’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다른 종족 지역으로 쳐들어가 그들이 축적한 것을 빼앗아 오는 것이
농경과 수렵을 하는 것보다 세력을 더욱 빨리 늘리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전쟁으로 등장한 부계사회
전쟁이 반복되면서 종족 내에서 전쟁을 하는 남성의 지위가 강화됐다.
자기 종족의 남성을 하나로 묶어 다른 종족을 쳐들어가 승리한 남성은 영웅이 됐다.
이러한 남성은 다른 종족의 공격을 받으면 가장 먼저 피살되므로,
평소에도 자기 종족의 남성을 묶어 보초를 서게 하면서 전체 남성을 관리한다.
여성 리더와는 성격이 다른 또 다른 리더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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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비중이 커지면 이러한 남성은 군장의 지위를 차지하고, 여성 리더의 역할은 제사장으로 축소된다.
청동무기를 이용해 정복전쟁을 하는 시기에는 남성 군장과 여성 제사장이 종족을 함께 이끌었다.
이때 패배한 쪽에선 남성 군장뿐만 아니라 여성 제사장도 피살되므로
여성 제사장은 자기 종족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게 된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여성 제사장은 남성 군장의 보호를 받게 돼
남성 군장의 힘이 여성 제사장의 힘을 능가하게 된다.
이 시기 남성 군장은 패배시킨 종족에게서 붙잡아온 여성을 독점하는 권한을 갖는다.
남성 군장에게는 자기 세력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니, 그는 여러 여성에게 ‘씨’를 퍼뜨린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아비가 분명하니, 그는 아이들을 하나로 묶으려 한다.
원시적인 성(姓)이 등장하고 일부다처(一夫多妻)와 부계사회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남성 군장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여타 남성도 자신이 붙잡아온 여성을 독점하면서 자기 세력을 넓힌다.
그러나 그는 남성 군장에게는 고개를 숙여야 하니, 남성 사이에 계급이 등장한다.
그리고 배반을 하지 않도록 의(義)를 강조하면서 복잡한 철학이 등장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도 발전한다.
청동무기를 이용한 전쟁이 한창이던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제자백가가 등장해
각종 이론을 내세운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삼국유사’ 첫머리의 고조선조에 비교해 풀이하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신시로 내려온 환웅은
청동병기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종족이거나 청동병기를 사용하는 남성의 대표일 수 있다.
이러한 환웅족을 만난 웅녀는 곰 토템을 갖고 있는 신석기 종족의 여성 리더일 것이다.
초기 단군은 힘이 없었다
웅녀족의 규모가 훨씬 컸기에 환웅족과 웅녀족은 싸우지 않고 결합한다.
환웅은 자기 종족을 이끄는 남성 군장 노릇을 하고, 웅녀는 군장과 제사장을 하며 자기 종족을 이끈다.
그리고 둘은 관계를 갖고 아이를 낳는데, 그가 바로 단군이다.
그러나 환웅족과 웅녀족의 자치권은 매우 강했기에 단군은 두 종족을 아울러 지배하지 못한다.
이렇게 힘없는 단군이 수백 수천년간 계속 탄생한다.
그러면서 외부 공격으로 두 종족은 하나로 뭉치기 시작하는데,
이때 두 종족 대표의 피를 이어받은 단군이 리더십을 잡기 시작한다.
제대로 된 단군조선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삼국유사’는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연 시기를
‘여고동시(與高同時)’로 표현했다.
‘여(與)’는 ‘더불어’라는 뜻이고 ‘고(高)’는 중국문명을 만든 요 임금의 이름이므로,
여고동시는 ‘요 임금과 같은 시기’라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적어놓았는데,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해는 경인년이 아니라 무진년이다.
한국은 무진년으로 정정한 때를 단군조선의 개국 시기로 삼았는데, 이때가 서기전 2333년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를 발굴한 중국 고고학계는
하가점 하층문화가 일어난 시기를 서기전 2200년쯤으로 보고 있는데,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의 출현 시기와 엇비슷하다.
동석 병용기인 하가점 하층문화는,
환웅족과 웅녀족이 만나 오랫동안 동맹을 이어간 시기일 수 있다. 이때 단군은 있었으나 환웅족은 환웅족 리더가,
웅녀족은 웅녀족 리더가 각자 통치했으므로
단군은 힘이 없었다.
북진묘의 ‘태백’
적봉지역이 건조해지고 추워지자 이들은 따뜻한 능하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이때 능하지역에 있는 세력과 싸우게 된다.
이 전쟁을 통해 두 종족은 하나가 되면서 두 종족의 피를 이은 단군이 리더가 된다.
단군이 이끈 고조선족은 능하지역의 신석기인들을 패배시키고
이들의 여성과 아이와 재산을 차지해 순식간에 세력을 불린다.
능하지역의 절대 강자가 된 것인데, 이때가 서기전 8세기 무렵이다.
‘삼국유사’는 환웅이 내려온 곳을 태백산이라고 한 후 ‘지금의 묘향산이다’는 주를 달아놓았다.
많은 사람은 이 주를 무시하고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홍산지역에서 신석기인들이 하늘과 소통하기 위해 적석총을 쌓고 천제를 올린 곳은
비교적 큰물이 돌아가는 야트막한 동산의 꼭대기였다.
그렇다면 태백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이지 백두산이나 묘향산 같은 특정 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평양이 평안남도에 있는 평양이 아니라,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여러 곳에 있었던 지명이라는 사실은 이미 보편화된 상식이다.
고대인은 평지에 모여 살았으므로 그들이 사는 편평한 곳이 바로 평양이다.
고대인들은 이동을 했다. 이동하면서 평양이라는 지명과 함께 개울과 산 이름도 갖고 갔다.
그렇다면 요서와 요동에는 군데군데 태백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야 한다.
서대 유적지와 초모산 유적지를 찾아오기 전에 답사단은
요녕성 금주(錦州)시 북진(北鎭)에 있는 북진묘(北鎭廟)를 방문했다.
북진묘의 북쪽에는 몽골어를 음차해서 적은 ‘의무려산(醫巫呂山)’이라는 산맥이 있다.
의무려산은 서울의 북한산처럼 화강암이 드러난 멋진 석산(石山) 덩어리다.
의무려산의 자태는 북진묘에서 가장 멋지게 보인다.
북진묘의 ‘묘(廟)’는 종묘의 묘자와 같으니, 북진묘는 의무려산 산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원나라와 명나라, 청나라의 황제는 종종 이곳을 찾아 의무려산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이곳을 중수한 다음 이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이 북진묘 안으로 들어가서 첫 번째로 만나는 건물 안에는 북진묘의 내력을 적은 거대한 비석이 있다.
단군조선은 요서지역에서 도읍했다
이 비석은 너무 커서 위쪽의 글자를 읽을 수 없는데,
이 비석 오른쪽 하단부에 ‘무엇을 일컬어 태백이라고 한다’는 뜻을 가진 ‘호태백(乎太白)’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왼쪽 하단부에는 ‘삼한(三韓)’이라는 글귀도 있다.
북진묘의 내력을 설명한 비석에 왜 태백과 삼한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일까.
태백이 의무려산을 가리킨다면, 태백은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적봉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노노아호산을 넘어 능하지역으로 이동해
그곳에 있던 신석기인을 정복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이 커지자
이들은 보다 큰 산을 영산(靈山)으로 모신다.
이러한 영산을 가장 큰 산이라는 뜻으로 ‘태백산’으로 표기한다.
노노아호산은 제법 숲이 있는 산이니 이들은 이 산을 태백산으로 모셨을 수 있다.
그러나 능하지역에 포진한 단군조선은 화하족의 공격을 받아 동쪽으로 이동한다.
그에 따라 도읍터인 평양과 영산인 태백산도 이동한다.
이들은 능하지역의 동쪽에 있는 의무려산 자락으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의무려산 남쪽에 있는 지금의 금주(錦州)시 일대의 광활한 평야가 평양이 되고,
의무려산이 태백산이 된다.
의무려산은 요하의 서쪽인 요서지역에 있다.
화하족의 공격이 거듭되자 단군조선은 요하라고 하는 천연 방어선을 이용하기 위해
다시 요동으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휘하세력에 대한 지배권을 잃으면서 사라졌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했다가 평양으로 옮기고
백악산 아사달과 장당경을 거쳐 아사달로 옮겼다고 돼 있는데,
이는 단군조선이 도읍지를 옮긴 기록이다.
단군조선과 화하족의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이유가 어찌됐든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화하족은 청동무기를 개발해 정복전을 치르면서
상대적으로 비옥한 황하 하류로 진출했다.
역시 청동무기를 개발한 단군조선족은 보다 따뜻한 능하지역으로 진출했으니
이들은 난하 인근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청동무기로 무장한 두 세력의 만남은 전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중국 기록물은 단군조선족과 화하족이 긴장한 상태로 만나게 된 사건으로 기자의 망명을 거론한다.
앞에서 밝혔듯 기자는 상나라 사람이다.
그는 화하족의 정권이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바뀌는 격변기에 화하족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기반을 잃은 그는 조선으로 망명했다.
기자의 망명은 곧 화하족이 단군조선 땅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암시였다.
전쟁의 시대
중국 기록에 나오는 화하족의 두 번째 동진자는 연(燕)나라 진개인데, 그는 망명이 아니라 공격을 해왔다.
이때 기자조선은 진개 세력에 협조했던 듯 큰 피해를 보지 않았으나 단군조선은 치명타를 맞았다.
이때부터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향력을 넓히는데,
이때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연나라 내부 정치투쟁에서 튕겨져 나와 기자조선 땅으로 망명해온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위만조선을 연다.
이 위만조선을 향해 공격을 가한 것이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인 한(漢)나라다.
한나라의 공격으로 위만조선은 사라지고 능하지역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민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능하지역은 한나라 수도인 장안에서 아주 먼 곳이다.
한나라의 지배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능하지역에서 철기로 무장한
단군조선의 후예가 일어나 내부를 통일하고 외적을 척결하기 위해 경쟁한다.
이 싸움에서 부여가 주도권을 행사하다가 마침내 고구려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고구려가 단군조선의 강역을 회복하기 전 하가점 상층문화의 후예들도 활발히 움직인다.
이들은 유목을 했기에 기동성이 남달랐다. 따라서 영역 확장이 빨라 화하족과 충돌한다.
능하문화의 형제인 하가점 상층문화인들은 능하문화의 후예보다 화하족과 더 많이 충돌했다.
왜 하가점 상층문화의 후예는 화하족과 그렇게 많이 충돌했는지에 대해서는 3부에서 다루기로 한다.
적봉은 황하 중류를 능가하는 후기 신석기문화를 일궜고, 청동기문화도 먼저 발현시켰다.
그러나 청동무기 제작에서 뒤짐으로써 화하족과의 싸움에서 밀렸다.
홍산문화인들이 청동무기 제작이 늦었기에 화하족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은 아니다.
지리적 조건이 불리했기에 이들은 화하족에 밀리게 되었다.
앞에서 정리했듯이 적봉은 평지였으며, 토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있었고,
옥기를 제작하는 옥 원석이 있었으며, 청동기를 만드는 광물도 있었다.
사람들은 불을 다루는 기술을 발전시켜 숯불을 개발해 화하족보다 먼저 청동기를 제작했다.
그러나 적봉은 해발 600m의 고원이라는 결정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고원은 지구적인 기후 변화로 인해 추워지면 농경이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적봉에 남아 유목을 하는 세력과 능하지역으로 이동해
농경과 함께 목축을 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황하문명에서는 다수가 자기 자리에 남아 농경을 하고 소수가 티베트로 들어가 유목을 했으나,
적봉에서는 상당수 능하로 내려와 농경을 했으니
적봉에 남아 유목을 한 세력은 자연조건상 인구가 더디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민족은 와해되지 않는다
주력이 포진한 황하문명은 황하 하류로 세력을 확장했다.
황하 중하류는 중원(中原)이라고 불리는 대평원이니 농경을 하기에 좋아 화하족의 문화는 더욱 발전했다.
인구가 많았던 화하족은 극심한 혼란기인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전쟁술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고조선족은 이러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인구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런 상태에서 화하족과 맞붙게 됨으로써 이들은 패배했다.
기후 변화가 끼친 영향은 이렇게 컸다. 그러나 큰 문화를 만든 세력은 쉽게 와해되지 않는다.
능하지역에서 패배한 고조선족의 후예는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밀려갔지만 그 지역을 깨우기 시작한다.
적봉에 남아 유목생활에 들어간 또 다른 고조선족은 초원길을 따라 이동 범위를 넓히면서,
‘기동력’이라고 하는 새로운 힘을 만들었다. 동북아는 또 다른 싸움에 들어간 것이다.
- 2008.09.01 통권 588호(p673~722) 신동아, 권말부록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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