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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 서평]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Gijuzzang Dream 2008. 9. 17. 01:22

 

 

 

 

 

 

 

 

 [서평]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진정한 의미의 ‘연산군을 위한 변명’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 변원림 지음, 일지사, 288쪽 

 

 

일찍이 캉유웨이(康有爲)는 1891년에 펴낸

‘신학위경고’에서 유가경전 모두 전한 말기의

유흠(劉歆)이 위조한 위경(僞經)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는 종래의 성리학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창견(創見)이었다.

그는 뒤이어 나온 ‘공자개제고’에서

공자가 경전을 저술한 목적은 당시의 정치체제를 개혁하려는 데 있다며 공자를 봉건정을 혁파코자 한 야심만만한 개혁가로 규정해 더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궈모뤄(郭沫若)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지난 20세기 중반에 펴낸 ‘10비판서’에서

유가사상은 인민해방 대세를 좇은 진보사상이고,

공자는 당대의 혁명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공자를 당대 최악의 반동사상가로 낙인찍은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이내 묻히고 말았다.

지난 세기말 일본의 기무라 에이이치(木村英一) 등은 정밀한 고증을 통해

‘논어’를 상세히 분석한 뒤 공자를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개혁가로 규정하며

캉유웨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필자가 지난 2003년에 ‘연산군을 위한 변명’(지식산업사)을 통해

연산군은 결코 황음무도한 미치광이 폭군이 아니었고,

중종반정은 반역에 불과했다는 창견을 제시한 배경도

사실 캉유웨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광해군을 백성의 이익을 앞세운 조선조

최고의 외교수완가로 평가한 마당에 일각에서 전직 대통령을 연산군에 비유하며

지나친 이상론을 펼친 것이 필자의 기필(起筆)을 자극했다.

 

사료 비판 소홀한 학계에 일침

 

연산군을 폭군으로 매도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근인을 왕권(王權)에 대한 신권(臣權)의 도전에서 찾은 필자의 주장은

‘훈구 대 사림’의 갈등구도로 파악한 기존의 통설에 대한 강력한 반론에 해당했다.

 

이에 대해 김범은 지난해에 펴낸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에서

양대 사화를 삼사의 월권과 능상(凌上)을

교정코자 한 연산군의 ‘폭력적 정치숙청’으로 규정하며

필자의 주장을 간접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연산군의 권력을 ‘절대왕권’으로 전제한 뒤 갑자사화의 배경을

연산군의 ‘패행(悖行)과 사치’, 폐위의 원인을 ‘광기 어린 폭정’에서 찾았다.

 

이는 중종반정을 ‘반역’이 아닌 ‘반정’으로 평가한 과거의 성리학적 견해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지난 1997년에 나온 김돈의 ‘조선전기 군신권력관계 연구’ 등과

마찬가지로 사료선택에 신중치 못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나온 변원림씨의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일지사)은

사료비판을 소홀히 하는 국내 학계의 잘못된 관행에 정문일침(頂門一鍼)을 가한

일대 쾌거에 해당한다. 그는 국내 학계의 통폐를 이같이 지적했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이 말도 되지 않는 ‘연산군일기’의 내용을 모두 사실로 믿고

있으니 이들의 무비판적인 학문 연구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국내 학계가 연산군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리고 있는 단서를

1962년에 출간된 이상백의 ‘한국사’에서 찾고 있다.

후대의 야사를 모아놓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안정복의 ‘열조통기’ 등을 근거로

면밀한 고증도 없이 반정공신들이 귀양 간 세력과 연결해 연산군을 몰아낸 것으로

기술한 것이 왜곡의 시작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는 반세기가 다 되도록 이상백의 결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국내 학계의 행태와 관련해 필자를 이같이 두둔하고 나섰다.

 

“지난 2003년에 이르러서야 신동준이 처음으로 반정공신들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아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연산군을 지나치게 변명하고 있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 변씨가 정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역저를 펴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듯싶다. 필자는 저자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독일의 에를랑겐 대학에서 ‘사상사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튀빙겐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한 재독 사학자다.

그는 이번 역저에서 고금동서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연산군일기’의 내용이 얼마나 두서없이 날조된 것인지를 정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연산군의 패륜행보에 대한 기술이

‘고려사’에 나오는 충혜왕 및 우왕 등과 꼭 닮아 있고,

심지어 연산군보다 한 살 많은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정적(政敵)들의 악의적인

기술과 흡사한 점 등을 밝혀낸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다.

 

필자가 경기도 일대에 널리 분포했던 금표(禁標)와 관련해

갑자사화에 연루된 권신들의 소유지였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과 관련해

변씨가 구체적인 사료를 들어 이를 뒷받침한 것은 탁월한 학술적 성과에 해당한다.

독일에서 연마한 탄탄한 ‘사상사학’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독살’보다 ‘병사’ 가능성에 무게

 

그의 연산군에 대한 분석은

기본적으로 연산군의 치세를 크게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재위 8년까지의 전기와

갑자사화 이후 폐위되는 12년까지의 후기가 그것이다.

 

그는 연산군의 전기 행보를 두고 국방에 힘을 기울이고,

권세가들의 군왕에 대한 능멸을 차단하며 힘없는 백성을 위해 애쓰고,

예술을 사랑하는 명군의 행보로 파악했다.

후기에 들어와 문득 폭군으로 오해될 만한 면모를 보이다가

끝내 폐위된 것과 관련해서는 왕권과 신권의 첨예한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으면서

양전(量田 · 논밭 측량)과 노비추쇄(奴婢推刷 · 도망한 노비를 붙잡아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내던 일) 시도 등을 논거로 들었다.

 

‘연산군일기’의 기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잔치를 너무 적게 열며 검소한 모습을

보인 데서 군신 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고 분석한 것은 탁견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연산군의 후기 행보와 관련한 ‘연산군일기’의 악의적인 기록에 대해

이같이 개탄하고 있다.

 

“연산군은 도덕군자였음에도 ‘연산군일기’는 재위 9년 이후의 기록에서

그를 색광(色狂)으로 묘사해놓았다. 그가 알면 관 속에서도 돌아누울 일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몇 가지 사소한 점에서 필자와 관점을 달리하고 있다.

연산군이 말년에 궁의 담장을 높이 쌓고 관원들을 자주 부르지 않은 것을 두고

저자는 은둔의 행보로 파악했으나 필자는 이를 왕권강화 차원의 행보로 해석했다.

 

필자가 처음으로 제기한 연산군의 ‘독살 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월산대군이 35세, 성종이 38세에 죽은 점을 근거로

열악한 유배생활로 인한 ‘병사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었다.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인의 평균 수명이 남자의 경우 불과 40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이런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진실규명 차원에서

연산군의 유골에 대한 DNA 분석을 제의한 것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데 저자는 연산군이 말년에 병사 5만명을 훈련시킨 것을 두고

5만의 군사는 오히려 너무 적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으나 이는 지나친 감이 있다.

저자는 각주에서 자신이 독일에서 펴낸

‘1950년대 한반도에서 일어난 미국의 예비전’을 논거로 들었으나 청일전쟁 당시

인구 4000만의 일본이 총력을 기울여 동원한 군사가 10만명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연산군의 詩 위작 가능성

 

필자는 ‘연산군일기’에 수록된 130여 수의 자작시 중 일부 시에 대해

변작(變作) 가능성을 제기한 데 반해 변씨는 아예 위작(僞作) 가능성을 들고 나왔다.

 

연산군이 재위 11년 4월3일에 지은 시를 두고

“신동준도 연산군이 스스로 잔인함을 인정한 것으로 번역했다”고 지적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필자도 ‘잔박(殘薄)’을 ‘관후(寬厚)’로 바꾸어야만 앞뒤 구절이 모순이 없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반정세력은 연산군을 왜곡하기 위해 군왕이 지은 시마저 멋대로

 조작하는 무모함을 서슴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저자가, 연산군의 시에 대한 필자의 ‘변작 가능성’ 제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위작 가능성’까지 제기한 것은 사료선택에서 필자보다 훨씬 앞서 나간 결과로

볼 수 있다.

동일한 논지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연산군을 ‘명군’으로 평가하는 데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 데 반해 저자가 연산군을 과감히 ‘당대의 명군’으로

평가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연산군에 대한 총체적 평가에서 필자가 결과에 보다 무게를 둔 데 반해

저자는 동기를 더 중시한 데 따른 차이로 짐작된다.

 

저자는 연산군을 ‘당대의 명군’으로 평가하는 이유를 이같이 밝히고 있다.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용렬한 군주를 성군으로 칭송했으니

연산군이 폭군의 이름을 얻은 것은 오히려 대왕다웠음을 알리는 것이다.”

 

조선조를 쇠망으로 이끈 성리학의 통폐를 통찰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연산군을 ‘대왕’에 준하는 인물로 호평한 것은

이나바가 ‘택민주의(澤民主義)’를 언급하며 광해군을 칭송한 것에 비유할 만하다.

저서의 이번 역저는 진정한 의미의 ‘연산군을 위한 변명’에 해당한다.

필자는 저자의 출현으로 독수고성(獨守孤城)의 신세를 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만부부당지용(萬夫不當之勇 · 수많은 장부로도 능히 당할 수 없는 용기)의 원군을

얻은 셈이다.

- 2008.09.01, 신동아 통권 588호(p654~657)

- 신동준 21세기정치연구소 소장 xindj@hanmail.net

 

 

 

 

 

 

연산군은 정말 폭군이었을까

 

재독사학자 변원림씨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출간
"권력 투쟁에 패배한 군주일뿐" 주장

 

주지육림에 빠져 실정을 거듭한 폭군, 사사로운 정으로 사화를 일으키고 신하들을 도륙한 임금.

<조선왕조실록>과 이에 근거한 기록들이 묘사하는 연산군(재위 1494~1506)의 모습이다.

현대의 TV사극이나 영화 등에서도 연산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런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재독 사학자 변원림(60)씨는 최근 펴낸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일지사 발행)에서

연산군은 폭군이 아니라 신하들과의 권력투쟁에 패퇴한 군주라며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시도한다.

변씨는 연산군을 몰아낸 이들의 구미에 맞게 서술한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의 신빙성을 회의하면서 그 내용의 모순점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실록에는 연산군이 이극균의 아들들을 죽였다는 기사가 나왔다가

나중에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앞뒤안맞는 기사가 등장하기도 하고,

딸 휘순공주의 결혼과 관련된 2개의 기사에 기록된 쌀의 수치가 큰 차이가 나는 등

부정확한 기술이 상당하다.

실록에 "전하가 동궁으로 계실 때 서연을 조금도 폐한 일이 없어 삼경과 사서를 모두 읽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도 후대로 갈수록 연산군을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왕세자로 폄훼하는 기록도

쏟아진다는 것이다.

 

또 저자는 연산군의 사치를 과장하는 기록도 작위적이고 상투적이라고 분석한다.

가령 실제로 누각을 세울 만한 장소가 없는 창경궁 후원에

1,000명이 앉을 만한 서총대라는 누각을 세웠다는 기록이나,

경회루 앞 연못에 3개의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 등은 연산군을 모함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연산군의 폐위는 여진의 발호와 왜구의 침입 등 국방 불안에 대비한 연산군의 변경 축성사업,

군역을 늘리기 위한 공신 소유 노비에 대한 조사 등에 반발한 성리학자들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연산군이 왕권 강화에 성공해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양반들을 제어하고

국방정책을 완성했으면 임진왜란을 방비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성리학자들이 자신들의 말에 순종한 용렬한 군주만을 성군으로 칭송하는데 비해,

연산군이 폭군의 이름을 받는 것은 오히려 그의 대왕다왔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2008-08-15

- 한국일보, 이왕구 기자 fab4@hk.co.kr 

 

  

 

 

 폭군 연산군은 조작?

 

연산군은 재위 6년째 8월에 이런 시를 지었다.

"백성에게 배고픈 기색 있어 깊이 걱정하며 / 윗사람 업신여기는 풍속 통탄스럽고 /

때때로 생각건대 그 진실한 충심 보고 싶으니 / 매일 생각하되 거짓된 마음 막고자 하네."

 

연산군은 정말로 폭군이었을까?

 

올해 환갑을 맞은 재독(在獨) 역사학자 변원림 박사는

'폭군' 연산군을 뒷받침하는 '연산군일기'를 근본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변 박사에게 연산군일기가 묘사하는 연산군의 모습이

재위 9년을 고비로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을 심상치 않게 받아들였다.

즉, 즉위 8년까지만 해도 앞 시가 보여주듯이

연산군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 변방 방어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권세가들이 왕을 업신여기며 백성을 착취하는 일을 통찰한 명군(明君)이다.

하지만 이런 군주가 재위 9년을 고비로 무자비한 폭군으로 변해간다.

심지어 연산군일기 11년 9월 기사에는 임금이 몇 년 전에 앓기 시작한 미친병이 도져

밤에 소리를 지르며 후원으로 달려가는가 하면, 무당을 불러 기도하고

스스로 무당이 되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다고 했다.

 

변 박사는 재위 9년 이후 연산군일기가 그린 연산군 모습이

고려사가 고려 우왕을 그린 모습과 대단히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주체들이 편찬한 고려사는 우왕을 왕씨로 인정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신돈의 아들이라고 했으며, 그랬기에 정통성 없는 그를 쫓아낸 이성계 일파의 행동을

역성혁명으로 치켜 세웠다.

 

변 박사는 연산군일기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세운 세력,

특히 이른바 반정(反政) 주역들인 박원종과 성희안 일파가 득세하던 시대에 편찬된 점을 주목한다.

반전세력은 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연산군을 폭군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산군은 도대체 어떤 임금이었을까?

변 박사는 19세에 즉위한 연산군이 즉위 초반기에는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가

재위 7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친정 체제 구축에 들어갔다고 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권력 투쟁이 전개됐다.

연산군은 왕권을 직접 행사하려 했고 기득권 세력인 노대신들과 대간 그룹은 이에 격렬히 저항했다.

 

변 박사는 태종과 연산군을 대비했다.

즉, 태종은 "작록이란 인주(人主. 임금)의 대권이니 신하들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는 정책을

밀어붙인 데 반해, 연산군 치세에는 왕이 직접 관직을 주는 일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대간 또한 사사건건 연산군이 임명한 관리들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런 모습들로 볼 때 신하들이 연산군의 대권을 빼앗으려 한 셈이 된다.

 

나아가 폭군 연산을 만든 또 다른 축인 '사치'에 대해서도

대부분 조선시대 다른 왕이라면 으레 하는 연회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연산군이라고 해서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고 변 박사는 주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갑자년에 연산군이 일으킨 이른바 옥사라는 것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변 박사는 세조 치세 말년에 권신들에게 빼앗긴 왕권을 회복하려 한 조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비슷한 맥락에서 연산군이 그가 적대시한 관리들에게 축출되었다는 학계의 통설도

거부한다. 변 박사에 의하면 연산을 몰아낸 박원종과 성희안은 무인(武人)이다.

연산군의 국방 정책으로 인한 정계 불안과 사회불만을 기회로 이들은

"남아가 태어나서 일등공신이 되어 영화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쿠데타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조선의 왕권은 "연산군의 패배로 종막을 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변 박사는 강조한다.

 

최근 선보인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일지사)은

연산군과 그의 시대를 종래와는 사뭇 다른 각도에서 고찰한 변 박사의 생각을 집약한 단행본이다. 

- 연합뉴스, 2008.08.15

-  김태식기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