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친일유산 - '성덕대왕 신종'에 정체불명 설화 덧붙여 '에밀레 ' 명칭

Gijuzzang Dream 2008. 9. 9. 09:04

 

 

 

 

 

 친일 유산 - 일제강점기 때 '성덕대왕 신종'에

 '에밀레 종' 설화 덧붙여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 神鐘)은 8세기 중엽 석불사와 함께 신라문화를 대표하는 소중한 유물이다.

우리민족의 탁월한 미의식을 깊이 천착했던 일본인 유종열도 이 鐘을 두고

‘美에 있어서 동양무비(東洋無比)의 鐘’이라고 극찬하였다.

 

또 이탈리아학자가 한국의 제철기술을 보기 위해 포항종합제철을 방문하러 왔을 때,

성덕대왕 신종을 보고 종을 만든 과학적 기법과 엄청난 크기, 아름다운 종소리에 감탄하며

1200년 전에 이미 고도의 제철기술을 가진 후손들이

자신에게 자문을 구한다는 말에 의아해 했다는 일화가 있다.

최근에는 일본 NHK 방송국이 「세계의 종소리」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으뜸이라고 하는 종소리들을 직접 답사하고 녹음했는데.

그 결과 신종(神鐘)의 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되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그 어떤 종과도 비교될 수 없는 고도의 과학성과 뛰어난 예술성,

웅장하고도 긴 여운을 남기며 심금을 파고드는 소리의 우수성이 증명된 것이다.

 

현대의 주종장(鑄鐘丈)들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신종(神鐘) 재현에 노력하고 있으나

재현에는 아직 못 미치고 있다. 1976년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에 간 ‘友情의 鐘’과

1985년 새로 만든 서울 ‘보신각 종’이 神鐘의 재현이라고 했지만

외모는 神鐘과 거의 닮게 만들었으나 소리에 있어서는 神鐘에 근접조차 못했다.

과학은 1200년 전과 비교가 안되게 발전하였지만 神鐘과 같은 종소리를 흉내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종신(鐘身)에 1037자의 명문(銘文)과 18.9톤의 무게(그 무게를 수백 년 동안 견디고 있는 작은 걸쇠)

모든 것에는 현대의 기술이 따라가지 못하는 소중한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유물에게 굴절된 역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으니,

다름 아닌 우리가 즐겨 불러주는 神鐘의 다른 이름(異稱)이자 오명(汚名)인 ‘에밀레 종’이라는 명칭이다.

神鐘에 대한 연구는 여러 편이 있으나,

대개 「에밀레 종 설화 연구」와 설화의 내용을 과학 실험으로 밝혀내는 것에 머물고 있어

이 설화를 神鐘의 설화로 인정해 버린 결과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1925년 이전까지는 어디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에밀레 종’이라는 명칭은

이제 신종의 진짜 이름처럼 굳혀지고 말았다.

심지어 神鐘의 재료에서 사람의 뼈 성분을 찾아내는 웃지 못 할 우스운 실험까지 한 것이다.

 

우리 학계가 꾸준히 친일의 역사를 밝혀내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에 붙여진 정체불명의 설화도

하루 빨리 그 진원지를 찾아내어 神鐘의 명예를 회복 시켜야 할 것이다.


이 종에 대한 본인 조사에 의하면 학력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聖德大王 神鐘이라고 하면 ‘에밀레 종’으로 알고 있으며, 전설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한 답으로는 동화책(T.V, 라디오 동화 포함)에 의해서 이거나

학교수업을 통하여 혹은 여행지에서 가이드의 해설을 통해서 등 이었다.

이렇게 神鐘을 ‘에밀레 종’으로 알게 된 계기가

바로 광범위한 곳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동화를 통한 교육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인터넷 자료 창을 열어보면 ‘성덕대왕 신종’ : ‘에밀레 종’ 은 1: 5 정도이다.

또 서점에서도 거의 대부분의 동화책에서 ‘에밀레 종’ 은 빠지지 않고 실려 있으며,

아기와 끓는 쇳물 등의 삽화로 독자에게 각인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에밀레 종’의 전설은 흉악범죄가 난무하는 21세기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내용이다.

외국인들로부터 세계 제일의 아름다운 소리로 인정받은 우리 유물의 조성 배경 설화에

이런 잔인성을 부여하고 영원히 그 잔인성을 상기시키는 명칭이니 이보다 더 神鐘을 모욕할 수는 없다.

 

 

神鐘의 몸체에 새겨져 있는 1,037자의 銘文은 이렇게 시작한다. (원문 생략)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여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

神鐘을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 ...중략...

속은 텅 비었으나 널리 울려 퍼져서 그 메아리 다함이 없으며,

무거워서 굴리기 어려우나 그 몸체는 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중생들의 이고득락(離苦得樂) 또한 이 종소리에 달려있다...

풍속과 민심(民心)은 金玉을 중시하지 않고 세상에서는 문학(文學)과 재주를 숭상하였다.

태자로 책봉했던 중경(重慶)이 715년 뜻밖에 죽어 영가(靈駕)가 되었으므로

죽음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일

찍이 어머니가 돌아 가셔서 해마다 그리운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또 부왕(성덕대왕)이 승하 하였으므로 궐전(闕殿)에 임할 때마다

슬픔이 더하여 추모의 정이 더욱 처량하고, 명복을 빌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구리 12만 근을 희사하여 대종 일구(大鐘 一口)를 주조코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기 전에 문득 세상을 떠났다.........”

이 부분은 경덕왕이 神鐘을 만들려고 결심한 배경이다.

경덕왕은 어머니와 부왕에 대한 인간적인 그리움과 추모의 정으로

신종을 만들어 명복을 빌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을 만들지 못하고 승하하자

8세로 등극한 아들 혜공왕이 경덕왕의 뜻을 이어받아 종을 만든다.

 

이 내용에서 미루어볼 때, 어린 아기를, 그것도 단순한 어미의 말실수 한마디 때문에

끓는 쇳물에 던져지게 된다는 설화의 내용은 신종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다.


‘성덕대왕 신종’이 ‘에밀레 종’으로 바뀌게 된 시기는 명백히 일제강점기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의 어떠한 곳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한 자료는 없다.

따라서 계획적이고 의도된 것임을 알게 하는 단서는

1925년 8월 5일자 총독부 기관지「每日申報」창작문예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렴근수의 어밀네 종 원문. 매일신보 1925, 08, 05.


1910년 이 후「每日申報」는 일제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던 신문이다.

이 신문의 창작문예란에 렴근수라는 무명인의 이름으로 「어밀네 종」童話가 올라있다.

그리고 얼마 후 친일 극작가 함세득이 많은 살을 붙인 희곡을 써서 현대극장에 올린다.

 

렴근수의「어밀네 종」과 함세득의「어밀레 종」사이에는 제법 큰 내용의 차이가 있다.

「어밀네 종」은 神鐘과는 전혀 무관함이 나타나 있는 대신,

함세덕의「어밀레 종」은

렴근수의「어밀네 종」을 골격으로 하고 神鐘의 銘文내용으로 살을 붙여서

설화의 사실성을 강하게 부각하였으며, 일본인을 등장시켜 일본이야말로

우리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요 낙원이라는 인식을 주입시킨 것으로

드러내어놓고 하는 친일행위의 내용이 그것이다.

 

함세덕은 유치진과 함께 1930년대 리얼리즘 연극을 주도했던 탁월한 대중작가였다.

총독부는 이런 인물을 조선역사 왜곡에 적극 이용하였던 것이다.

대중성이 강했던 영화나 연극의 교육적 효과는 즉각적이면서도 영원히 각인된다.

어린이가 읽는 동화, 어른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연극으로

이 설화를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다면적인 구상 속에 온갖 식민정책이 동원되었던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 왜곡의 마수가 神鐘에게 뻗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순한 동화처럼 씌어졌던 렴근수의 단편 동화「어밀네 종」은

「에밀레 종」이야기가 그림 이효석의 단편「荒野」와「옷둑이」동요가「어밀네 종」과 함께 실린

매일신보 전면. 최초로 나타난 자료이며, ‘어밀네’란 단어를 최초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이효석의 단편「황야(荒野)」와 「옷둑이」동요가

「어밀네 종」과 함께 실린 매일신보 전면.


이 난에는 이효석의 단편「황야(荒野)」도 실려 있으며,

우리아이들이 즐겨 부른 동요「책상 위의 오뚝이 우습고나야...」도 입선으로 올라 있다.

에밀레종 이야기가 이미 국내에 더러 알려져 있었던 이야기라면 신인 등단의 지면에 입선 될 리가 없다.

고전자료는 물론 근대의 어디에도 없었던 글이기 때문에

신문의 창작 문예란에 입선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1999년 국립경주 박물관에서 낸 종합조사보고서인 『성덕대왕 신종』에서

神鐘의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밝혀내고 있다.

역사와 미술사, 과학기술의 측면에서 세밀하게 밝혀 놓았음에도

왜 굳이 논고의 첫 장에 실은 역사 자료에서 「에밀레 종 傳說考」를 넣어놓았을까?

 

신종의 역사를 밝혀내는 조사보고서에서조차 ‘에밀레 종’ 설화를 언급하고 있다면

우리후손들은 이 설화를 신라 때부터 내려온 설화라고 굳게 믿게 될 것이다.

神鐘은 조성 과정과 배경에 대하여 鐘身에다 기록으로 자세히 남겨 놓고 있다.

무엇을 더 망설일 것인가?

「성덕대왕신종」에 ‘에밀레’라는 친일 그림자가 더 이상 드리워지지 않도록

어린이 교육 현장에서부터 관광 가이드 교육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문화재청 김해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년순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8-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