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불설대보 부모은중경>과 단원의 <씨름>

Gijuzzang Dream 2007. 11. 16. 17:44

 

 

 

 

 

 

 

 

 

정병모(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교수)

 


“그 때에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시고 남방으로 나아가시다가

마른 뼈 한 무더기를 보시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하시어 마른 뼈에 예배하셨습니다.”


 부처님이 마른 뼈 무더기에 오체투지를 하였다.

 

제자인 아난과 대중이

왜 뼈 무더기에 절을 하는지를 물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느라 서 말 서 되나 되는 피를 흘리고

애를 키우느라 여덟 섬 넉 되나 되는 젖을 먹이기 때문에

뼈가 검고 가볍다. 이 뼈 무더기를 보면, 오랜 조상이나

부모님 생각이 나서 예배한다고 부처님이 대답하였다.

 

문제는 “오체투지”라는 구절이다.

오체투지는 팔, 다리와 머리를 땅에 대어 자신을 한껏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행위이다.

분명히 경전에 부처님이 오체투지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려시대인 1378년 이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불설대보 부모은중경』의 <여래정례>에서는

부처님이 합장을 한 채 단지 고개를 숙이는 정도로 그쳤다.

차마 부처님을 땅에 엎드리게 하지 못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도 오랜 세월동안 고려시대의 도상을 답습하는데 그쳤다.

그런데 1795년 용주사에서 간행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여래정례>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드디어 경전 내용대로 부처가 땅바닥에 오체투지하였다.

기존의 권위에서 탈피하여 참된 모습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경전의 내용대로 부처님이 엎드리는데는 무려 400여 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부처님의 겸손한 행위를 강조하는 광배의 빛이 강렬해지고,

그 주의에 대중이 많아지며, 구름의 장식성도 훨씬 풍부해졌다.

이처럼 조용하면서도 화려한 반란을 주도한 이는 누구일까 김홍도일 가능성이 높다.

이 판화의 밑그림을 누가 그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의 양식이나 간행 당시 용주사의 상황으로 보건대, 작가를 김홍도로 추정하는 것이다.

김홍도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여래정례>가 김홍도의 <씨름>과 구성방식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마름모꼴로 이루어진 권속들과 구경꾼,

땅에 엎드리는 부처님과 씨름꾼, 왼쪽 위 두 명의 제자와 오른쪽 아래 두 명의 구경꾼의 놀라는 표정,

가운데 아래의 등을 보인 제자와 소년 등이 상응된다.

 

<여래정례>는 <씨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려시대 이후 400여 년 동안 그다지 변하지 않던 <여래정례>의 도상이

용주사판에서 과감한 변신을 이룬 것은 풍속화의 성과를 불화에 활용하였기에 가능했다.

또한 그러한 점은 이 변상도의 작가가 화승이 아니라 화원, 즉 김홍도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만일 밑그림의 작가가 정통 불화를 그리는 화승이라면, 이처럼 과감한 변화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도석화에 풍속화적인 기법을 적용한 화가도 김홍도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용주사판 <여래정례>에서 일어난 조용한 반란은

김홍도의 풍속화처럼 어떤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림 용주사에 간행한 <여래정례>와 유사한 구도를 보여준 김홍도 <씨름>.

아마 이 그림이 <여래정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