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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을 중심으로 좌·우로 벽체를 내고 오른쪽은 목사 준비실, 왼쪽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매우 독특한 건축구조와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특히 목재의 치목수법과 가구기법은 전통적 기법에서 근대시기 건축기술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한옥교회의 현존사례가 극히 드문 현실을 감안하면 이 건물의 희소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어 2002년 9월 13일 등록문화재 42호로 등록·관리하고 있다. 중앙부분에 있는 나무 주초 위에 세워진 두개의 고주로 남녀의 공간을 구분한 칸막이 교회이다. 초기 기독교 한옥교회의 근대화에 따른 건축적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기 한옥교회는 건물 전면에 별도의 문을 두어 남녀신자를 구분하였던 것이다.
대들보와 퇴보를 걸면 상부가구도 편리할 뿐만 아니라 내부도 신랑(nave)과 측랑(aisle)으로 구분되어 공간의 활용도 용이하다. 더욱이 강단 쪽의 고주 하나를 생략함으로써 회중석에서 강단을 향하는 시선의 장애를 없애고 강단 앞부분에 충분한 공간을 만들고 있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여건과 기능에 충실한 계획 수법으로 볼 수 있다. 목조 건축에 있어 이러한 감주법(減柱法)은 구조에 대한 기술적 축적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으로 당시의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지붕부는 고주에 결구되어 있는 대들보 위에 중보가 얹히고 그 상부에 종보가 얹히는 구조로 중앙의 고주는 종보 하단까지 이어져 종보를 직접 받는다. 보와 보 사이는 동자주로 받고, 종보 상부에는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서까래는 추녀에 뿌리를 결구시킨 말굽서까래 배열을 하고 있어 일제시대 한옥의 절충적인 배열기법을 보여준다.
1923년 준공 당시는 기와지붕이었으나 함석지붕으로 교체되었다가 문화재로 등록된 후 기와지붕으로 복원되었다. 바닥은 목재 널마루를 깔아 신자들이 방석을 깔고앉아 예배를 보도록 하였다. 내부의 붉은 벽돌 주위의 회반죽 마감과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킨 연등천장은 목조건축의 간결한 구조미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정방형 평면을 취함에 따라 건물의 조형성이 전통적인 비례를 벗어나 있지만, 기능에 따른 평면구성과 상부의 가구 구조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 나타난 한옥교회의 건축방법을 보여준다.
1918년 가을, 이곳에 파송된 정달성 목사는 그해 12월부터 한옥 2칸을 얻어 집회를 시작하였다. 이후, 이인법 목사가 1923년 현 위치에 한식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38년간 강경성결교회로 사용하였다. 이후,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늘어난 신자수용을 위해 홍교동 소재의 구 은행청사를 매입하여 교회를 이전하고, 교회 건물은 개인에게 주택까지 겸하여 70만환에 매각하였다. 그 후 교회 건물만 당시 성결교회 시무였던 윤반임 목사가 다시 매수하여 1년간 성결교회로 사용하다가 송기섭 목사의 소개로 감리교로 교파를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 2008-12-01, 문화재청, 문화재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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