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 최치원 | ||||||||||
# 유 · 불 · 도교 아우른 한국유학 선구자
이곳은 해수욕장으로 명물이 된 지 오래지만 최근 APEC정상회담이 열린 ‘누리마루’로 명물 하나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수많은 발길들은 천 년 전 명물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나방처럼 바닷물에 몸을 담그기에 정신이 없다. 나도 모르게 발길을 멈춘 ‘海雲臺’. 바위에 대필(大筆)로 거침없이 구사된 각자(刻字). 일견 여사 필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작자가 누구인가. 어필이나 선필, 사자관, 도학자나 노장, 문인사대부의 필적으로 글씨를 구분하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그 자체가 글씨의 성격이나 서예미를 대체적으로 규정한다. 고운 최치원(857~908?)은 서예가 이전에 시문으로나 사상으로 우리 역사의 문을 연 사람이다. ‘삼국사기’에만도 문집 30권이 전한다고 기록할 정도로 방대하다. 이 중 당나라 유학시절인 25세(881년) 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적장 황소가 혼이 빠져 평상에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38세 때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로 아찬에 임명된 것에서 보듯 하대신라 사회의 혼란상을 유교기치로 개혁코자 한 경세가였다. 이처럼 그의 사상은 한국유학사에서 최초로 그 철학적 문제와 결부되어 불교 도교와 회통(會通)할 수 있고, 유교 입장에서 양교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기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러한 삼교회통의 그의 입장은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이하 ‘진감선사비’)의 명문에서 ‘석가여래와 주공 공자는 출발은 비록 다르나 귀착한 곳은 하나이다. 지극한 이치를 체득함에 있어 양자를 겸응(兼應)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물이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謂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故也)’라고 한 데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그래서 조선 도학자들은 오히려 이것을 문제삼아 혹독한 비판을 하였다. 다시 퇴계의 언설을 빌리면 ‘최치원은 불교에 아첨한 사람인데 외람되게 문묘에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崔孤雲以全身●佛之人 濫厠祀禮)’고 할 정도였다. 최치원 글씨의 기준은 당연 ‘진감선사비’다. 그것은 그가 당에서 돌아온 지 3년 만인 31세(887) 때 문장을 짓고 쓴 유일한 비문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이 비의 글씨에 대해 아직 우리서예사의 자생성문제가 본격 거론되지 않는 점이 아쉽지만,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은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안진경 유공권에 이르기까지 당해의 전형적인 필법을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미의식에 가장 알맞게 유려한 필치로 소화해냈다고 하는 걸작이다. 이 비는 한 세기 앞선 김생(711~790 이후)의 ‘낭공대사비’의 횡장(橫長)하면서도 다이내믹한 필적과 비교할 때도 점획과 결구, 운필 면에서 해서의 전형답게 종장(縱長)의 균제미(均齊美)가 뛰어나 매우 대조적이다. 또한 국운이 기울고 있었지만 이것을 바로잡을 기세로 9세기 난만한 통일기의 미감을 긴장감 있게 마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그런데 최치원의 글씨를 이야기함에 있어 이 작품 하나로 개인은 물론 시대미감을 모두 대신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글씨의 경우 어떤 사람이든 초년 중년 말년은 물론 서체나 용도, 크기에 따라 다르게 구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최치원의 학서(學書) 폭과 깊이는 물론 그 정신까지도 바로 이 비의 두전(頭篆)에서 짐작된다. ‘진감선사비’의 두전은 사실 한 몸에 붙어있지 않다면 그의 필적이라고 한눈에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 정도로 개성적이다. 두전이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한 균일한 점획과 대칭구도의 이양빙(李陽氷, 712 ?~?) 소전(小篆)만도 아니고 본문 해서와도 판이하기 때문이다. 즉 ‘唐海東故眞鑑禪師碑’(당해동고진감선사비)로 읽혀지는 전액(篆額)은 당시 유행서풍은 물론 그 연원을 따지자면 멀리 위(魏) 정시연간(240~248)의 ‘삼체석경(三體石經)’에서 보이는 ‘설문해자’의 고문(古文)이나 ‘한간(汗簡)’은 물론 오(吳)의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와 북위의 ‘휘복사비(暉福寺碑, 488년)’ 필법과 자형에까지 거슬러간다. 특히 이 비의 전액은 삼체석경의 유엽전(柳葉篆)은 물론 과두전(과두篆)필의까지도 행서를 구사하듯 자유롭게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당나라 서풍과는 분명 다른 독자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비는 한 사람이 동일 시점에 쓴 두전과 본문이지만 나 자신마저도 어색하게 느껴진 적이 있을 정도다. 즉 인식에 있어 너무 익숙한 본문과 너무 생소한 두전의 간극은 전서에서 해서로 변천된 역사만큼 넓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 해서가 아니면 최치원의 필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 우리시대의 눈이다. 고려 문신 정포(1309~1345)는 이미 700년 전 ‘대(臺)는 황폐하여 흔적도 없어졌는데 오직 해운대만 말하네(荒臺漫無址 猶說海雲臺)’라고 읊었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 필자의 존재조차 가물가물해진다. 이 경우는 최치원이 머문 자리마다 남긴 마산 ‘月影臺’(월영대), 진해 ‘靑龍臺’(청룡대), 쌍계사 ‘雙谿石門’(쌍계석문), 문경 ‘夜遊岩’(야유암)도 마찬가지다. 이미 ‘세종실록’ ‘남명집’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동금석원’ 등 역사가 최치원과 관계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는 논문에서는 ‘진감선사비’ 글씨와 다르다고 소극적이거나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자(大字)로 구사된 마애각자들이 설사 소해(小楷) ‘진감선사비’와는 다른 점획과 결구, 필의와 서풍으로 보일지라도 마애각자 모두에서 유유자적한 선비의 흉중일기(胸中逸氣)와 도량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사실 북위의 정도소(?~516) 글씨에서 봄직한 웅장한 점획과 만상을 다 끌어안은 듯한 안정된 결구는 마애각자 모두에서 일치되게 발견되는데, 공교롭게도 이곳들은 모두 최치원이 지방관으로 전전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었던 곳임을 감안한다면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인 것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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