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 고대사의 블랙박스, 나주 복암리

Gijuzzang Dream 2008. 8. 13. 00:42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8)-(9)

 

 

 

나주 복암리 - 고대사의 블랙박스 열리다

 

영산강 유역 잊혀진 역사 ‘옹관’으로 모습 드러내다

1995년이었다.

전남 나주시는 영산강 중류,
즉 나주 다시면 너른 들에 자리잡고 있는

복암리 고분군(당시 전라남도 기념물 136호)에 대한 정비복원을 계획했다.

특히 이 가운데 3호분은 어느 종가의 선산이었는데,

주변 경작으로 계속 분구가 유실되어 나가자 복원계획을 세운 것이다.

기초조사는 전남대 박물관이 맡았다.

“그때까지는 3호분을 비롯해 4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칠조산(七造山)이라고 했어요.

분구(봉분)가 7개가 있었다는 얘긴데, 3기는 1960~70년대 경지정리로 삭평된 상태였죠.”

(임영진 전남대 교수)


■ ‘처녀분이다!’

1996년 우연히 발견된 복암리 3호분의

96석실. 석실 안에는 4기의 대형옹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옹관 밑에는

금동신발과 환두도(둥근고리칼) 등

영산강 유역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줄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그 해 11월27일부터 한 달간 실시된 당시의 조사(1, 2, 3호분)는 말 그대로 정비복원을 위한 기초조사였다. 정식발굴이 아니었으니 어쩌면 요식행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3기의 무덤 주변에서 무덤 주위를 두른 주구(周溝 · 묘역을 구분하거나 배수, 혹은 신성불가침의 상징으로 만든 도랑 같은 유구)가 계속 확인됐고, 고분과 고분 사이에서도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기초조사에 이렇듯 중요한 변수가 생기자 나주시와 시공업체도 당황했다.

“정비사업은 96년 말까지 마무리돼야 했는데 유물과 유구가 잇달아 나오고…. 법적으로는 정식발굴예산을 받을 수 없었고…. 시공업체도 저도 고민이었죠.”

임 교수가 묘안을 짜냈다.

“조사를 제대로 해보려면 시간과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래서 안절부절못하는 시공업체에 한 가지 제안을 했어요. ‘어차피 복원을 하려면 남은 분구(봉분)의 표토를 걷어내야 한다. 그러니까 나중에 해야 할 표토제거작업을 미리 하는 셈 치자’고….”

다행히 시공업체도 인력과 장비는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제거해야 할 표토였으므로 미리 파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남의 집 선산이었던 3호분 위에 있던 민묘들이 대거 이장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1996년 5월 어느 날,

현장에서 전남대 박물관 조교였던 조진선(현 전남대 교수)이 스승(임영진 교수)에게 달려왔다.

“3호분 남쪽 중앙부분에 베어낸 소나무들이 쌓여 있었어요. 포클레인이 그 나무들을 정리하면서

표토를 살짝 걷어냈는데 바로 큰 판석들이 보였어요.

 

포클레인 기사가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바로 물러났습니다. 천만다행이죠.

그런데 판석들 사이에 아귀가 맞지 않았는지, 그 틈 사이에 조그만 돌들을 끼워놓았어요.

그런데….”(조진선)

틈새에 박아놓은 조그만 돌이 포클레인 작업의 충격에 튕겨져 나가는 바람에 작은 틈이 보였다.

“주먹 두 개 크기의 틈이 노출됐습니다. 손전등으로 내부를 비춰봤는데 잘 안 보였어요. 그래서 함척(函尺 · 측량을 위해 쓰는 자)을 넣어 봤는데, 아 글쎄, 하염없이 들어가는 거예요. 깊이가 180㎝도 넘었습니다. 곧바로 임 선생님께 달려갔습니다.”

27살 박물관 조교가 감당할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부리나케 현장으로 뛰어 올라간 임영진 교수는 돌 틈 사이로 내부를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옹관인지, 뭔지 여하간에 유물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숨이 멎는 듯했다.

‘처녀분이다!’

임 교수는 첫눈에 이 석실분이 도굴되지 않은 ‘석실분’임을 직감했다.

“우선 어느 가문의 선산이잖아요. 가문이 제대로 관리해온 선산이었기에 도굴의 위험은 없다고 봐야죠.

그리고 토사가 퇴적된 상태에서 노출됐잖아요. 토사가 쌓여 있었으니 도굴은 없었다고 봐도 됩니다.”

(임 교수)

임 교수는 흥분에 휩싸였다. 영산강 유역은 369년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에 병합되었고,

5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영향을 받은 석실분이 유행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따라서 석실분이 차지하는 의미는 컸다.

“우리 고대사에서 수수께끼의 영역이 워낙 많지만 특히나 영산강 유역은 공지나 다름없지.

삼국사기 같은 사료에서도 영산강 유역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지.

이 일대에 산포된 고분들만이 유일한 자료예요.”(조유전 토지박물관장)

“그것도 석실분의 경우 발굴을 통해 밝혀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함평 신덕고분이나 광주 월계동 고분, 해남 조산 고분 등 모든 고분들이 도굴로 파헤쳐진 상태여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었습니다.”(임 교수)

그런 상황에서 도굴되지 않은 석실분이 확인되었으므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자료가 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임영진 교수는 정식발굴을 위해 백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정비계획은 예정대로 96년 말까지 끝내야 한다고 하고….

그러나 학자의 양심상 이 중요한 유적을 그냥 둘 수 없고….

이미 노출된 유적이므로 도굴에 대한 보안대책도 세워야 하고….”

조바심이 난 그는 한병삼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위원장(작고)을 어렵사리 복암리 현장으로 ‘모셨다.’

당시 한병삼은 “이런 유적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이 맡아야 한다”면서

국가 차원의 발굴을 강조했다.
이 조치로 7월8일부터 2개월 동안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박물관 합동조사가 시작되었다.

 


■ 금동신발의 출현

역시 큰 발굴은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전남대 박물관팀과 함께 문제의 석실분(96석실분이라 명명)을 조사한 당시

윤근일 문화재연구소 학예관(현 기전문화재연구원장)의 회고.
“임영진 교수가 확인한 문제의 96석실분을 조사하기 전이었는데,

갑자기 집중호우가 내려 돌 틈사이로 쏟아지는 거예요. 얼마나 진땀이 나던지….”

 

드디어 석실을 열고 들어가자 윤근일을 비롯한 조사단은 깜짝 놀랐다.

“대형옹관이 앞뒤 2개씩 4개나 있잖아요. 옹관은 남은 길이 98~180㎝ 정도였어요.

옹관 안에는 6구의 인골이 확인되었고,

금은장삼엽환두도(金銀裝三葉環頭刀 · 금은으로 장식한 세 잎사귀 모양의 둥근고리칼)와

각종 토기류, 철대도 · 철촉 등 철기, 행엽(杏葉 · 말띠드리개) · 재갈 · 호등(壺등 · 발걸이의 일종) 등

마구(馬具)가 쏟아졌어요.”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다.

무덤방의 앞쪽 오른쪽(연도 동쪽) 옹관 밑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가 포착된 것이다.

“진흙 속에 묻힌 유물이 노출됐는데, 그것이 금동신발임을 직감했어요.

이미 익산(입점리)에서도 비슷한 금동신발을 발굴해본 적이 있었으니까….”(윤근일)

하지만 큰 난관에 봉착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의 어느 신문 기자가 현장을 찾아와

‘호시탐탐’ 특종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문화재 담당기자들의 취재경쟁은 대단했지. 예전에 천마총 발굴 때 일이었어요.

그렇게 보안을 지켰는데, 마치 현장중계하듯 발굴기사가 어느 신문에만 나갔잖아.

발굴단원끼리 서로 의심하는 사태에 이르렀는데, 아 글쎄

나중에 보니 경주 우체국교환실장이 그 신문기자의 부인이잖아요.

당시 발굴단이 문화재관리국에 전화로 보고할 때는 우체국 교환을 통해야 했으니까….

그랬으니 발굴기사가 라이브로 신문에 중계됐지. 허허.”(조 관장)

“맞습니다. (복암리 발굴 때도) ○기자가 얼마나 현장 앞을 서성대는지…. 살 수가 있어야죠.

석실 안에는 금동신발은 노출돼 있는데, 기자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요즘엔 특히 보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요.”(윤근일)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기자)

“한 가지 꾀를 냈지. 기자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랬지.

‘○기자, 더운데 뭐 그렇게 버티고 있어요. 아무것도 없으니 바람이나 좀 쐬고 와요’라고.

그러자 그 기자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자전거를 빌려 나주 시내로 바람 쐬러 나갔어요.

거짓말을 한 셈이니 미안한 일이었어요.”

기자를 따돌린 뒤 윤근일은 속전속결, 작전을 펼친다.

“함석판을 이용해서 금동신발이 묻힌 진흙을 고스란히 떠서 석실에서 나왔어요.

그러고는 렌터카를 불러 직원편으로 금동신발을 서울로 보냈어요. 바로 보존처리실로 직행했지.”

(윤근일)

윤근일은 지금도 그 기자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그 외에도 에피소드는 줄을 잇는다.

 

 

■ 대형 옹관이 남긴 해프닝

“옹관의 경우 어떤 것은 하나의 옹관으로 된 단옹식(單甕式)이고,

어떤 것은 대옹과 소옹을 만들어 접합한 합구식(合口式)입니다.

합구식의 경우엔 밖에서 작은 옹관과 큰 옹관을 따로 만들어

무덤에 들어간 뒤에 하나로 맞춰 놓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물 수습단계에서는 이 두 옹관이 빠지지 않았어요. 얼마나 큰지.

그래서 한꺼번에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키가 170㎝이 넘는 옹관(대옹 98.2㎝, 소옹 72.2㎝)이

무덤길에 걸려 나오지 못했어요.”

발굴단은 하는 수 없이 나주의 석공(石工)을 불러 무덤길(羨道)에 조성된 기둥을 갈아서

길을 넓힌 후에야 옹관 4개를 무사히 빼낼 수 있었다.

96석실에서 발굴한 옹관 4기는 양념에 불과했다.

복암리 3호분 전체에서 대형옹관이 쉴 사이 없이 쏟아졌다.

“28기나 되는 대형옹관이 나왔어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합구식 옹관 중에는 3m에 가까운 경우(15호 옹관·284m, 대옹 152㎝ 소옹 136㎝)가 있었고,

단옹인데도 2m에 가까운 것(11호 옹관·194㎝)이 있었어요.”(윤근일)

대형옹관과 관련된 해프닝이 1998년 옹관의 복원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줄을 잇는다.

당시 현장책임자였던 김낙중(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의 회고.

“복암리 현장에서 복원작업을 벌였는데요. 옹관이 너무 크고, 또 수가 많아서

대형 컨테이너 두 대를 붙여 가설 사무실을 만들어 그 속에서 작업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복원한 뒤였다.

“11호 옹관(194㎝), 2호 옹관(190㎝) 같은 대형옹관(단옹)을 복원하기는 했는데,

아 글쎄, 이걸 밖으로 가져 나갈 수 없는 거예요.

컨테이너 문 높이가 180㎝밖에 되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고민 고민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죠.”

“그래서 기중기로 컨테이너를 통째로 들어 트레일러에 싣고 그대로 박물관으로 옮겨왔잖아. 허허.”

(조 관장)

“트레일러에 실을 때는 컨테이너를 다시 반으로 절개했어요.

어떤 옹관의 경우 무게가 400㎏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고,

그런 옹관을 28기나 복원했으니 무게가 어떻겠어요.

기중기로 옮길 때 컨테이너 밑이 빠질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김낙중)

이런 우여곡절, 천신만고를 겪은 끝에 이 복원옹관들은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 해프닝들은 그야말로 추임새에 불과했다.

복암리 3호분은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거대한 블랙박스였으니 말이다.

 

 

머한 · 백제 고분 틈새 일본식 무덤의 정체는?

1996년 영산강 유역에 자리잡은 나주 복암리 3호분의 발굴성과는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럴 만했다. 3m에 가까운 대형옹관이 잇달아 출토되고(26기),

금동신발과 장식대도, 은제관식 등 영산강 유역과 백제·일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어디 유물만이랴.

하나의 분구(봉분)에 41기의 무덤이 아파트처럼 조성된 복암리 3호분.

동일집단이 3~7세기 사이 400년 동안 조성했다. 마한계 옹관묘에서 왜계로 평가되는 초기 횡혈식 석실분, 그리고 백제 석실분까지 차례로 조영됐다. 고분박물관으로 일컬어진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3호분 한 분구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들이 나왔지. 목관묘-옹관묘-석곽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곽묘, 뭐 이런 식으로 줄줄이 나왔어…. 어때요. 옛 사람들이 후손들을 생각해서 타임캡슐을 묻어둔 것 같지 않아?”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그러고 보니 옹관의 생김새가 마치 캡슐 같기도 하다.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 무덤의 박물관

“전용옹관 발생단계인 3세기 옹관묘에서부터 7세기 백제의 전형적인 석실분까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한 집단이 400년에 걸쳐 조영한 것이잖아요. 가히 고분박물관이라 할 수 있어요.”

(윤근일 기전문화재연구원장)

“사실 우리 고대사에서 영산강 유역은 공지(空地)나 다름없어요.

삼국사기 등 어떤 사료에서도 이 지역에 대한 설명은 없거든….”(조관장)

다만 이 일대는 마한의 영역이었고,

백제 근초고왕 때(369년) 병합되었을 것이라는 통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도 사료에 분명하게 나온 게 아니라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즉 “(왜가) 병사를 일으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枕彌多禮)를 없애고 백제에 주었고,

근초고왕 부자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를 맞이했다”는 기록이다.

두계 이병도는 왜의 기병(起兵) 기사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근초고왕 부자가 369년 전남지방을 원정, 마한의 잔존세력을 소탕했다는 부분은 사실로 보았으며,

이후 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남만의 침미다례’를 마한 연맹체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소국(해남 혹은 강진으로 추정)으로 본 것이다.

이 통설에 따라 5세기 말까지 이 지역만의 특징으로 남아 있는 대형 옹관묘도

백제 간접지배의 배경 아래 유지된 토착사회의 특징으로 해석됐다.

또한 5세기 말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석실분은

백제의 직접통치에 따라 파견된 백제관리의 묘제라는 것도 통설이었다.


■ 수수께끼로 가득찬 영산강 유역의 고대사

그런데 복암리 3호분과 영산강 유역의 수수께끼를 풀 때 빼놓아서는 안 될 두 가지 착안점이 있다.

우선 앞서 잠깐 언급했듯 3~5세기 말까지 영암 · 함평 · 무안 등 영산강을 따라 유행한

대형옹관고분이 첫번째 착안점이다.

특히 나주평야 한복판인 대안리 · 신촌리 · 덕산리 일대에 집중된 36기의 무덤군이 있는데,

이를 반남(潘南)고분군이라 한다.

특히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확인됐는데,

이 일대를 다스리던 수장이었음이 확실하다.

이런 금동제는 백제식이 분명하지만, 왜계와 가야계 유물도 엿보인다.

 

과연 반남고분군은 당대 국제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백제와의 관계는 어땠을까.

또 하나, 착안점은 대형옹관고분(반남고분 등)이 쇠퇴하는 5세기 말에 등장하는

초기 횡혈식 석실분이다. 이는 백제식 석실분과는 다소 다른,

일본 규슈지역의 무덤 양식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특히 5세기 말~6세기 초, 즉 갑자기 등장했다가 50년도 안 돼 홀연히 사라지는

전방후원분의 존재는 한·일 학계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고분이라고도 한다)이 무엇인가.

3세기 중엽 시작되어 5~6세기 때 절정에 이르며, 7세기 소멸하기까지

일본열도의 대표적인 묘제가 아닌가. 그런 일본식 묘제가 영산강 유역에서

지금까지 14기 정도가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이 묘제는 50년도 되지 않아 사라지고 만다.

수수께끼다. 영산강 유역에 무슨 일본식 묘제이며, 왜 단 50년도 안 돼 사라졌을까?

어쨌든 일본인이 영산강 유역에 진출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임나일본부설도 모자라 이제는 영산강 유역까지 왜가 장악했다?

역사기록은 불충분한데 심상치 않은 고고학 자료는 나오고….

논점은 백제의 영산강 유역 장악시기와,

이른바 마한 혹은 마한의 잔존세력이라 하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실체,

그리고 이 일대에서 등장하는 왜계의 무덤과 유물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 마한이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복암리 3호분이 발굴된 것이다.

“동일집단이 400년간 옹관묘(3세기 중엽~5세기 중엽·마한계) →

초기 횡혈식 석실분(5세기 후엽~6세기 초·일본 규슈의 전방후원분과 유사) →

백제 석실분(6세기 중엽~7세기)으로 이어지는

일목요연한 무덤을 구축했으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윤근일 원장)

복암리 3호분 발견을 계기로 공지였던 영산강 유역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봇물을 이뤘다.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형국으로 쏟아놓은 연구성과인지라 들춰보면 볼수록 미궁에 빠질 지경이다.

곤혹스럽지만 한 번쯤 정리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선 임영진 전남대 교수는

영산강 유역의 토착세력이 백제식 석실분이 도입되는 6세기 중엽까지는

백제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독자세력의 역사적 실체는 ‘마한’이라는 것이다.

이는 AD 500년대까지 영산강 유역은 백제와는 관계없다는 것이며,

369년 근초고왕대의 마한 완전 합병이라는 통설을 깨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석실이 대부분 하천에 인접한 평지 혹은 저구릉상에 자리잡고 있고,

평면형태가 세장방형(가는 직사각형 형태)으로 변화하고

연도의 위치가 중앙에 자리잡으면서 문틀 같은 시설을 갖추는 것 등을 꼽는다.

그런데 이는 백제식이 아니라 북규슈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 세밀한 해석을 내린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백제의 마한 합병은 3차례에 걸쳐 이뤄진다고 봅니다.

3세기 후엽과 4세기 중엽, 6세기 중엽인데요.

이 과정에서 백제에 복속하지 않은 마한의 일부 세력이 일본(규슈)으로 망명했을 겁니다.

그런데 5세기 4·4분기에서 6세기 2·4분기의 일본 규슈지역에서는 정치적인 파동이 일어납니다.”

즉, 규슈지역에서 아리아케해(有明海) 일대에 존재하던 지쿠시군(筑紫郡) 세력이

북규슈로 세력을 확대했다가, 오사카 · 나라 · 교토를 중심으로 한 야마토(大和) 왕권에 통합되는

격동기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 백제의 핍박을 피해 망명했던 북규슈 지방의 마한인들이

본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U턴했다는 얘기다.

함평 신덕고분. 영산강 유역에는 5세기 말부터 약 50년간 이런 일본식 묘제라 할 수 있는

장고분(전방후원분)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축조자는 토착세력일 가능성이 있다.

“백제의 압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마한인들은 같은 뿌리의 영산강 유역권의 마한세력과 지속적으로 인적·물적 교류를 유지했을 겁니다.

영산강 유역에 분포된 장고분(전방후원분)들은 바로 그런 망명 마한인들이 귀향해서 남긴 무덤이라고 봐야죠. 그러니 왜계 무덤을 썼던 거고.”(임교수)

그런데 이 장고분들은 당시 영산강 유역의 중심권인 나주 반남에서 벗어난 외곽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또한 장고분은 단 50년가량만 유지된 채 소멸되고 만다.

“본향으로 돌아온 마한인들은 영산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토착세력의 승인을 받아 중심이 아닌 주변에 땅을 빌려 살았겠죠. 그러다 현지에 묻히고, 무덤도 1회성으로 끝나고….”

백제의 남하 → 마한세력 일부 규슈 망명 → 영산강 유역에는 여전히 마한 존재

 → 규슈지역의 정치적 격동기 발생 → 망명한 마한 세력들 본향으로 귀향.

그럴듯한 해석이다.

임영진 교수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6세기 중엽까지 여전히 영산강 유역에 백제와는 ‘별도의 정치체’인 마한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5세기 말부터 유행한 왜계 횡혈식 석실분(전방후원분 등)은 백제의 남하에 망명한

일부 마한세력이 규슈지역의 정치적 격동기에 휘말려

다시 본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귀향함으로써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고고학 자료를 보면 분명 백제와는 다른 문화가

6세기 중엽(이때부터 백제의 직접통치가 시작됐다고 함)까지 이어진다는 것.

또 그 과정에서 왜계 성향의 묘제와 유물이 나온다는 점 때문에

임교수의 주장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 과연 백제는 없었을까

하지만 100% 옳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전문가들도 많다.

영산강 유역에서 왜계의 요소가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지역의 핵심요소인 백제의 영향과, 주변변수인 가야와 신라의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복암리 3호분에서 보듯 옹관묘를 쓰던 토착세력이 왜계 구조를 지닌 석실분(5세기 후엽)을 쓰고,

다시 백제석실분(6세기 중엽)을 씁니다.

그리고 일본식 묘제라는 전방후원분(장고분)에서도 백제의 요소가 분명히 보입니다.

나주 신촌리 9호분 단계(5세기)에도 금동관과 환두대도, 목관 같은 백제의 요소가 보이고

복암리 3호분 출토품인 금동관과,

전방후원분인 함평 신덕고분에서 보인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흔적,

그리고 월계동 1호분 출토 은피관정(머리를 은판으로 감싼 관못) 등도 역시 백제계입니다.”

(김낙중 국립부여연구소 학예관)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은 형태만 전방후원분일 뿐

이른바 위세품(세력을 과시하는 물건)은 백제나 가야의 것이고,

일반유물은 토착세력의 사용품들입니다.”(이정호 동신대 교수)

“복암리 3호분을 봐요. 마한 옹관묘→왜계 석실분→백제 석실분 등으로 이어지는

무덤을 조성한 사람들은 동일집단, 즉 토착세력이라는 뜻이지.

3호분 96석실분처럼 왜계의 석실분인데 그 안에는 마한의 옹관묘를 썼고,

후에 백제식 석실분으로 바뀌었는 데도

그 안에는 옹관묘 전통인 다장(多葬 · 무덤에 시신을 여럿 안치하는 장례풍습)이잖아.”(조유전 관장)

영산강 유역의 문화를 이룬 사람들은 결국 백제의 영향을 받았고,

왜와 신라·가야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은 토착세력이지,

왜계의 묘제와 유물에만 너무 경도되어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2008년 7월 초. 조유전 관장과 기자는 남도의 폭염을 뚫고 타임머신을 탔다.

2000년 전 무역항(해남 군곡리)에서 출발한 여행은

1700년 전 마한계 수장의 무덤(반남고분군)을 지나,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은 장고분(전방후원분) 가운데 하나인 해남 용두리 고분을 거친 다음

1700년 전부터 400년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나주 복암리에서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다. 1996년 복암리에서 고대사의 블랙박스가 열렸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12년이 지났는 데도 뿌연 안개 속을 헤맬 뿐이다.

자칫하면 블랙박스를 연 것이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격이 될 수 있다. 온갖 설만이 난무하는….

“어렵지. 사료는 너무 없고, 학자들은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갖가지 주장을 펴고 있고….

무엇보다 고고학 자료로 수수께끼로 가득찬 고대사를 과연 100%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게 어렵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돼요.”(조관장)

과연 마한의 실체는 무엇일까.

마한이 일각의 주장대로 6세기 중엽까지 전남지역에서 백제와는 무관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백제는?

쉽지 않겠지만 영산강 유역 문화에 큰 파동이 일었던 5세기 후엽으로 되돌아가보자.

그리고 논란의 핵심에 놓인 마한의 역사에 대해 한번 더듬어보자.

- 경향,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2008년 08월 08일/ 08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