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1630년 무렵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후금이 요구했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들과의 교역에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도( 島)의 한인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들에게 물자를 공급하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특히 후자는 후금이 조선을 ‘평가’하는 핵심 관건으로
사실상 명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였다. 인조정권은 곤혹스러웠다.
정묘호란 당시 조야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루어졌던 화친은
‘명과 조선의 부자(父子)관계만 유지할 수 있다면 후금과의 형제관계는 받아들일 수 있다.’
는 전제 위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북경으로 가는 육로가 끊긴 상황에서 조선과 명의 관계는
가도와의 왕래를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바로 거기에 조선의 고민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도는 모문룡 시절이래 내내 조선를 들볶았고,
조선 또한 ‘부자 관계의 상징’인 가도를 외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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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애물단지, 가도
후금도 한동안은 양측의 관계를 묵인하는 듯이 보였다.
조선을 거쳐 가도에서 들어오는 명나라 물자가 필요했던 데다,
수군이 없는 상황에서는 가도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금이 1629년 기사전역(己巳戰役), 1631년 대릉하 전투 등을 통해
명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으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본토 방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명은 가도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다시피했고,
그 때문에 가도의 고립과 곤궁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럴수록 가도의 한인들은 조선에 더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가도를 이미 ‘손안에 들어온 물건(掌中之物)’이라고 여겼던 후금이
조선에 대해 압박의 강도를 높이는 것은 당연했다.
조선의 지원만 없다면 가도의 한인들은 대거 후금으로 투항할 것이고,
가도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가도가 무너진다면 후금은 얼마나 홀가분할 것인가. ‘뒤를 돌아보아야 할 걱정(後顧之憂)’ 없이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산해관으로 나아가 명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수 있었다.
후금이 조선을 공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 대한 공격을 구상하면서 후금은 명이 자신들의 배후를 역습하는 상황을 우려했다.
하지만 산해관 바깥이 후금군에 의해 봉쇄된 상황에서 명의 육군이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명이 조선을 지원하려 할 경우 천진(天津)이나 등래(登萊)에서 수군을 동원할 것이고,
명 수군은 분명 가도를 중간 거점으로 삼아 조선을 지원하거나 요동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이
후금의 판단이었다.
‘가도를 내버려 두라.‘''는 후금의 압박 속에서도 조선은 끝내 가도에 대한 은밀한 지원을 멈추지 못했다. 명과의 ‘부자관계’를 차마 끊지 못한 데다, 유사시 명의 지원을 끌어들일 수 있는 ‘거점’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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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정에 정통한 후금
조선은 가도에 대한 지원을 은밀하게 한다고 했지만 후금은 그 전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조선 사람 가운데 후금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632년 12월, 철산(鐵山)의 아전 이계립(李繼立)은
조선이 가도의 한인들에게 물자를 대주고 있다는 사실을 용골대에게 밀고했다.
후금 자체가 본래 첩보 활동에 뛰어난데다 청북 지역에 대한 조선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불거질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같은 사정은 함경도 쪽에서도 비슷했다.
조선의 북변 거주자들과 호인들 사이의 교통을 통해서도 조선 정보가 새 나가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요동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두만강 부근에서는
번호(蕃胡)라 불리는 호인들과 조선인들의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번호들이 국경을 넘어와 조선인들을 납치해 가기도 했고, 그들 자신이 조선으로 귀순하기도 했다.
물론 강을 건너 여진 지역으로 도망가는 조선 사람들도 있었다.
누르하치가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을 모두 평정한 뒤에도 양자의 접촉은 끊이지 않았다.
실제 1629년 11월의 ‘양경홍(梁景鴻) 역모’는 이 같은 접촉 배경에서 빚어진 사건이었다.
양경홍은 북인의 잔당으로 인조반정을 맞아 한옥(韓玉), 신상연(申尙淵), 이극규(李克揆),
정운백(鄭雲白) 등과 함께 경원(慶源)으로 귀양갔다.
양경홍 등은 현지에 살던 양사복(梁嗣福) 양계현(梁繼賢) 부자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을 이용하여 후금군을 끌어들여 모반을 시도했다고 한다.
양계현은 젊었을 때 포로가 되어 여진 지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인물이었다.
공초(供招) 과정에서는 ‘정운백이 한윤(韓潤)에게 서신을 보내, 만약 오랑캐를 이끌고 오면
마땅히 앞장서 인도하고 투항하겠다.’고 했다는 진술이 나와 수사 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다.
한윤은 이괄(李适)과 함께 반란을 주도했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로 당시 후금에 망명 중이었다.
우습구나 삼각산아 (笑矣三角山)
옛 임금은 지금 어디 있나 (舊主今安在)
지난번에 강도 만나 (頃者遇强盜)
강화도에 가 있다네 (往在江華島)
수사 과정에서 공개된, 양경홍이 지었다는 시의 내용이다.
반정으로 쫓겨난 지 6년 이상이 지났지만 인조정권을 ‘강도’로 표현할 만큼 적개심이 여전히 높다.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지만, 조선 조정은 이 사건 이후
후금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 함경도 주민들의 동향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후금은 실제로 평안도와 함경도 등지에 살던 불평 불만자들을 끌어들여
조선어 역관으로 활용했다.
양계현은 부친 양사복이 처형된 뒤에 후금으로 귀화하여 조선을 왕래하는 역관이 되었다.
양계현을 통해 조선의 민감한 내부 사정이 후금에 알려졌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1630년대 조선을 드나들면서 악명이 높았던 중남(仲男), 정명수(鄭命壽) 등도 비슷한 계기로
역관이 되었다. 후금은 이래저래 조선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후금, 명을 흉내내기 시작하다
명을 능멸할 정도로 힘이 커진데다 조선 사정까지 훤하게 알고 있었던 후금의 요구 수준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1632년 9월, 용골대는 추신사(秋信使) 박난영(朴蘭英)을 만났을 때
홍타이지의 ‘불만’ 사항을 전달했다.
‘조선은 명의 사신이 오면 모든 관원이 말에서 내려 영접하면서
왜 후금 사신에게는 말 위에서 읍(揖)만 하느냐?’는 힐문이었다.
이제 후금 사신도 명 사신과 동동한 수준으로 영접하라는 요구였다.
1632년 10월에 왔던 후금 사신 만월개(滿月介)는 한 술 더 떴다.
그는 평양에 이르러, 조선이 후금에 보내는 예단(禮單)의 수량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뒤 다시 명을 거론했다.
‘명에는 봄가을의 사신말고도 성절사(聖節使)까지 보내면서 우리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고 따졌다. 그는 더 나아가 ‘명 사신들을 접대할 때는 금은으로 된 그릇을 쓰면서
후금 사신들에게는 사기 그릇을 쓴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곧 이어 서울로 향하던 후금 사신 소도리(所道里) 일행은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
‘명사 수준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조선 국경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비변사는 ‘부자관계와 형제관계가 같을 수는 없다.’고 설득하는 한편,
만월개 일행에게 푸짐한 선물을 안겼다.
어떻게든 명과 후금 사이에서 현상을 유지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1632년 무렵, 조선이 취한 대외정책은 일견 절묘했다.
명과 후금 모두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름대로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조선은 삼국 관계에서 ‘독립변수’가 아니었다.
명이나 후금 어느 한쪽에서 문제가 불거지면 조선은 곧바로 ‘선택의 기로’로 내몰렸다.
1632년 명에서 일어난 공유덕(孔有德)의 반란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공유덕의 반란’ 때문에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다시 위기를 향해 치닫게 된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2-20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