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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다시 읽기]

(25)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 Ⅱ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5

 

 

 

 

 

 (25)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 Ⅱ

인조반정을 ‘찬탈’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조선을 후금과의 대결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절실했던 명은 고민을 거듭했다.

‘찬탈’을 자행한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응징하여 상국으로서 명분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이미 바뀌어버린 조선의 현실을 수용하여 실리를 택할 것인가?

인조와 반정공신들 또한 초조했다.

반정 직후 명에 보낸 주문(奏文) 속에서

‘광해군이 명에 대한 사대(事大)를 소홀히 하고 배은망덕했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명 조정이 ‘찬탈’을 운운하자 그들은 바짝 긴장했다.

명 조정이 만일 ‘명분’을 선택하여 인조에 대한 책봉을 거부할 경우,

집권의 정당성을 얻지 못하고 좌초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은 명 조정이 인조를 승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모문룡은 진강을 점령하는가 하면

휘하를 이끌고 의주, 철산 등을 옮겨다니며 ‘요동 수복’을 꾀했다.

사진은 의주성 남문.

 

 

명, 실리를 택하다

 

‘조선 사태’에 대한 처리 방향을 놓고 고민을 거듭하던 명 조정은 절충안을 내놓았다.

1623년 8월 명의 예부상서(禮部尙書) 임요유(林堯兪)는,

신료를 파견하여 조선 신민(臣民)들의 의견을 청취한 다음

인조에 대한 책봉 여부를 결정하자고 건의했다.

여론 조사를 통해 ‘명에 대한 광해군의 배은 망덕’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인조반정을 ‘찬탈’로 규정하여 성토하자고 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고 인조가 명에 협조하여 후금과의 싸움에 앞장서겠다는 자세를 보일 경우,

‘찬탈’이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리자고 했다.

 

명 조정은, 당시 가도( 島)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毛文龍)의 부하 진계성(陳繼盛)을

서울로 들여보냈다.

진계성은 조선에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광정(李光庭)을 비롯한 831명의 의견을 청취했다.

 

진계성이 면담한 사람들의 의견은 거의 한결 같았다.

그들은 ‘1619년 심하전역에서 유정(劉綎) 등이 전사하고 명군이 패한 것은

조선군이 후금군에게 군사 기밀을 누설했기 때문’이고, ‘광해군은 후금과 화친했다.’고 진술했다.

또 ‘광해군이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기 위해 명 사신들을 숙소에 억류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반정 당일 일본군을 끌어들이고 궁궐에 방화했다.’는 소문은 유언비어임을 지적하고,

인조의 인품이 훌륭하고, 광해군은 잘 보호되고 있다고 진술했다.

 

예부상서 임요유는 1623년 12월8일 황제에게,

인조를 승인하여 책봉하자는 내용으로 상주(上奏)했다.

그는 진계성의 보고 내용을 토대로 ‘광해군의 배은망덕’과 인조의 ‘충순’을 확인했다고 평가하고,

일단 인조를 국왕으로 인정하되 그가 모문룡과 합세하여 후금을 공격하여 공적이 드러난 뒤에

정식으로 책봉하자고 주청했다. 말하자면 ‘조건부 책봉’이었다.

후금의 도전 때문에 곤경에 처한 명의 현실을 고려하여 명분이 아닌 실리를 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실리의 크기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모문룡, 인조반정을 찬양하다

 

비록 ‘조건부 책봉’이지만 인조가 명으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인정받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은 모문룡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의 부하 진계성이 서울에 들어가 ‘조선 사태’의 전말을 조사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주청사 일행이 가도에 들렀을 때

모문룡은 반정의 발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명 조정에 보낸 주문에서도 인조를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으로 연결되는 육로가 끊어진 상황에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가도에 머물던 모문룡의 의견은 명 조정이 인조를 승인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문룡은 무슨 까닭으로 인조반정을 긍정하고 인조를 책봉하자고 했을까?

 

모문룡의 존재는 1620년대 조선과 명, 조선과 후금, 명과 후금 사이의 관계를 결정했던

‘아킬레스건’이었다. 한마디로 모문룡 때문에 조선과 후금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고,

궁극에는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달리 말하면 ‘시한폭탄’이었던 셈이다.

 

모문룡은 1621년(광해군 13년) 7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으로 잠입하여 진강(鎭江)을 탈취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의주를 마주보고 있는 진강-오늘날의 단둥(丹東) 부근-은

전략 요충이었다. 육로를 통해 선양 등 만주 내륙으로,

수로를 통해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등지로 연결될 수 있었다.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모문룡의 진강 점령은 명과 후금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1618년 푸순성이 함락된 이후 명군은 후금군에 연전연패했다.

승전보에 목말랐던 명은 모문룡의 진강 점령을 기첩(奇捷)이라 불렀다.

마치 요동 전체를 수복이라도 한 것처럼 고무되었다.

후금은 자신들의 안마당에서 허를 찔린 것에 격앙되었다.

후금은 곧 대병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모문룡은 도주하여 조선의 미곶(彌串)으로 상륙했다.

그가 상륙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을 때 광해군은 경악했다.

광해군은 모문룡이 조선과 후금 관계에서 화근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예상대로 모문룡은 휘하를 이끌고 철산(鐵山), 용천(龍川), 의주(義州) 등지를 옮겨다니며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때로는 압록강 너머의 만주 지역으로 포를 쏴대며 후금군을 자극했다.

모문룡 때문에 후금군의 침략을 받을 판이었다.

 

실제 1621년 12월, 후금군은 모문룡을 처치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와 의주와 용천을 기습했다.

모문룡은 조선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탈출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의 휘하 578명이 피살되었다. 그가 ‘화근’임을 분명히 입증한 사건이었다.

광해군은 이후 모문룡을 설득하여 철산 앞 바다에 있는 가도로 들어가게 했다.

그가 육지에 있는 한 후금군의 침략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문룡이 가도로 들어간 뒤에는 가능한 한 그와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다.

모문룡은 가도에 동강진(東江鎭)이라는 군사 거점을 마련했다.

거점을 유지하기 위해 ‘군량 보급’ 등 조선 조정에 여러 가지 요구 사항을 내밀었다.

광해군은 최소한만 수용할 뿐 그에 대한 지원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후금과 사단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모문룡이 광해군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인조정권, 모문룡에게 코가 꿰이다

 

명은 모문룡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가도로 들어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명 조정은 가도의 동강진을 후금의 서진(西進)을 견제하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러려면 가도에 대한 군량과 군수 물자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했다.

당시 천진(天津)이나 산동에서 가도로 가는 해로가 있었지만 거리가 만만치 않은 데다

파도가 험악 했다. 자연히 명은 조선의 도움을 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모문룡에 대한 지원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열 받은 모문룡이나 명 조정이 조선을 손봐주고 싶어도 육로가 끊어진 상황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집권했다.

모문룡은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책봉승인’에 목을 맨 주청사 일행에게 인조반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공짜란 없는 법이다. 모문룡은 명 조정이 인조를 승인하도록 애써주는 대가로

가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려 했다.

그는 반정이 성공한 직후 부하 응시태(應時泰)를 서울로 보내 사정을 탐색했다.

인조는 응시태를 접견한 자리에서

‘광해군이 명의 은혜를 망각하고 모문룡의 지원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모문룡과 합심하여 이 오랑캐들을 소탕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문룡의 입장에서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인조 스스로 광해군을 성토하고 자신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이었다.

모문룡으로서는 표정 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의 새 정권은 반정에 대한 명의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

모문룡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해마다 엄청난 양의 양곡을 가도로 보냈다.

가도에 머물던 명의 난민들이 수시로 평안도 지역으로 상륙하는 것도 묵인했다.

자연히 후금과의 군사적 긴장은 날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자신의 집권을 승인 받는 대가로 모문룡이라는 ‘시한폭탄’을 끌어안았던 것이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06-27,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