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4) 임진왜란, 누르하치, 그리고 조선, Ι

Gijuzzang Dream 2008. 7. 20. 20:39

 

 

 

 

 

 (4) 임진왜란, 누르하치, 그리고 조선,  Ι

 

 

조선이 中華에 빠진 틈타 누르하치 여진 통합

 

 

1592년의 임진왜란은 병자호란보다 44년이나 먼저 일어났지만,

 

1583년 군사를 일으켜 주변의 여진족 정복에 나섰던 누르하치에게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것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여진족 안에서 아구다 같은 패자가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 했던 명이, 왜란 이후 관심을 조선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누르하치는 명이 한눈을 파는 사이 주변세력에 대한 정복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조선 또한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누르하치의 실체를 목도하고, 그의 위력을 절감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假道入明을 내걸다

1592년 4월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조선 조정은 상주(尙州)와 충주(忠州)에 각각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이 이끄는 병력을 보내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병력수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데다

일본군이 지닌 신무기 조총(鳥銃)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16세기 당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치르며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던 데 비해,

조선군은 오랫 동안 이어진 평화의 시간을 보내면서 도무지 전쟁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승부는 뻔한 것이었다.

4월28일. 믿었던 신립의 패전 소식이 알려지면서 서울 도성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곧바로 서울을 버려야 한다는 파천론(播遷論)이 등장했다.

이윽고 4월30일. 선조(宣祖)를 모신 행렬은 경복궁을 나와 북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수행하는 신료들이 채 100명도 되지 않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일본군이 거침없이 북상하고, 조선 국왕이 북으로 쫓겨오고 있다는 소식은

명에도 커다란 고민거리를 안겨 주었다.

같은 해 6월. 조선이 청원사(請援使) 이덕형(李德馨)을 보내 원병 파견을 요청하기 이전부터

명 조정은 이미 일본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도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내세운 슬로건은

‘가도입명(假道入明)’이었다. 조선에서 길을 빌려 요동(遼東)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일본군의 궁극적인 공격목표가 명나라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명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왜란이 일어난 직후 요동을 비롯한 명 내부에서는 희한한 유언비어가 돌았다.

‘조선이 고의로 일본군을 끌어들여 요동을 차지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명 조정은 당연히 원병 파견을 망설였다.

명 조정은 임진왜란 무렵까지, 조선을 결코 만만한 나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조선은 ‘강국 고구려의 후예’였다.

그런데 그 막강했던 고구려의 후예인 조선 국왕이 일본군이 침략하자마자 도성을 버리는가 하면, 조선 어디에서도 일본군에 저항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명의 의구심은 어쩌면 당연했다.

 

명은 심지어 피란길에 오른 국왕 선조를 ‘가짜’라고 의심했다. 명 조정은 과거 사신을 따라 조선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송국신(宋國臣)이란 인물을 불러들였다.

그가 선조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를 보내 선조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는 ‘해프닝’까지 벌인 이후에야 명은 조선에 군대를 투입했다.

 

 

명군, 조선에 들어오다

 

일본군이 평양에 입성한 직후인 7월.

명의 원군이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요동도사(遼東都司) 소속의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3000명의 병력이었다.

그들은 7월17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지키던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참패했다.

2만명이 넘었던 고니시의 병력에 비해 턱도 없이 모자란 전력으로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조승훈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압록강을 건너 도주했다.

그는 명 조정에 ‘조선이 명군에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무리하게 진격을 종용한 것이 패인’

이라고 보고했다. 명 조정은 조승훈의 패전 소식에 경악했다.

일본군의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그들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건너오는 상황을 우려했다.

 

요동과 조선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였다.

요동이 이(齒)라면 조선은 그것을 보호하는 입술(脣)이었다.

만약 조선이 무너지면 일본군은 요동의 벌판으로 밀려들 것이고,

요양(遼陽)과 산해관(山海關)은 물론 북경까지 위협에 노출될 판이었다.

다급해진 명 조정은 병부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요동 방어를 위한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조선에 보낼 병력을 새로 충원하기 시작했다.

 

요동 출신의 기병만을 투입했다가 일본군의 조총에 혼쭐이 났던 조승훈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강남 출신의 화기수(火器手)들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복건(福建)이나 절강(浙江) 출신의 화기수들이 요동까지 오려면

최소 수개월이 걸렸다. 그동안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건너온다면?

명에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명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응급 조처를 취했다.

일본인들과 도자기 무역을 했던 경험이 있는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으로 보냈다.

일본군을 평양에 묶어두라는 것이었다. 심유경이 가진 것은 세치 혀 뿐이었다.

평양성으로 들어간 심유경은 능수능란하게 유세(遊說)하여 고니시를 구워 삶았다.

9월1일부터 50일을 기한으로 휴전이 이루어졌다.

당시 평양성의 일본군이 처한 상황도 열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명, 李如松을 투입하고 누르하치를 이용하려 하다

 

명은 조선에 투입할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이여송(李如松)을 지명했다.

이여송은 이성량(李成梁)의 장남이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북 내륙인 영하(寧夏)에 가있었다.

1592년 3월에 일어난 보바이( 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영하의 반란은 9월에 진압되었다. 이여송은 부리나케 요동으로 달려왔다.

그렇게 분주했던 이여송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무장으로서의 그의 성가(聲價)가 높았음을 시사한다.

 

1592년 12월. 조선에 다시 들어온 4만 8000명의 명군 가운데는 이여송 말고도

이여백(李如栢) 등 그의 동생들도 끼여 있었다.

송응창은 요동에서 조선으로 들어갈 원정군을 정비하면서 이성량에게 누차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고 자문을 구했다. 22년 동안 요동에서 ‘오랑캐’들을 제어하는데 종사했던

이성량의 위상이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의 원군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1592년 9월,

조선 조정은 북경에서 날아온 소식 때문에 술렁거렸다.

성절사(聖節使) 유몽정(柳夢鼎)이 가져온 자문(咨文)에

‘누르하치의 병력을 조선에 원군으로 보낸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을 보면, 윤두수(尹斗壽)가 누르하치의 군대가 들어오는 순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명의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심유경이 누르하치를 끌어들여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획책한다고 비판하고,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유성룡(柳成龍)의 기록은 조금 다르다.

그는 ‘서애집(西厓集)’에서 ‘당시 건주위(建州衛) 달로(撻虜)가 병력을 이끌고 와

조선을 구원하겠다고 장담했다’고 적었다.

유성룡도 누르하치의 원조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화근’이라 여겨 단호히 반대했다.

누르하치의 본심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이 건주여진의 실체를 다시 인식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건주여진을 ‘달로’라 지칭한 유성룡의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조선 지식인들은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오랑캐’의 원조를 받아들일 지 여부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조선의 반대로 누르하치의 조선 원조는 실현되지 않았다. 누르하치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자신을 견제하고 감시해 왔던 이성량의 아들들이 조선으로 들어가고,

명의 관심이 온통 조선으로 집중된 상황에서

모든 역량을 주변의 여진세력을 공략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무렵, 하늘은 분명 누르하치의 편이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 2007-02-01 서울신문 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