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독도] 옛지도에 '독도는 조선땅'의 주석

Gijuzzang Dream 2008. 7. 18. 14:31

 

 

 

 日 학자 “옛지도에 ‘독도는 조선땅’ 주석”

나이토 명예교수 '외무성 주장 반박' 논문 내
"17세기 영유권설 근거 없고 러일전쟁 때 편입 시도도"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을 명기하는 이유 중 하나로

"외무성 홈페이지에 게재된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표기) 관련 내용을 충실히 교육하기 위한 것"

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2월부터 홍보용 소책자 형태로 등장한 외무성의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

그만큼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일본의 권위있는 독도 연구가 중 한 사람인 나이토 세이추(사진) 시마네대 명예교수는

최근 영남대 독도연구소 발행의 <독도연구> 제 4집에 게재한

'다케시마 문제의 문제점- 일본 외무성 다케시마 비판'이라는 논문을 통해

외무성 주장의 논리적 허점을 낱낱히 지적했다.

외무성은 제 1항목에서 "나가구보 세키스키의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 (1779년 초판) 등
울릉도와

다케시마를 한반도와 오키제도 사이에 정확하게 기재하는 지도가 다수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옛날부터 다케시마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나이토 교수는 이에 대해

"나가구보 세키스이의 지도에는 분명히 울릉도와 다케시마가 기재돼 있지만

다른 나라 비슷하게 취급해 채색도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 <삼국통람도해> (1785년)의 부록 <삼국접양도> 에는 다케시마에 대해 '조선의 것'이라는

주석을 다는 등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했고,

에도시대의 관찬지도(정부지도)에도 다케시마는 나와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일본은 울릉도로 건너 갈 때의 정박장이나 어채지로 다케시마를 이용해,

늦어도 17세기 중엽에는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외무성의 주장도

"근거에 대한 아무런 기술도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17세기 중엽 영유권설'의 구체적인 증거로

1618년 돗도리번 주민 2명이 번주를 통해 막부로부터 울릉도 도해면허를 받았다는 부분도

"1618년은 공식문서에 나오지 않은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또 '1905년 다케시마를 시마네현에 편입해 다케시마 영유 의지를 재확인했다'는 항목과 관련해,

일본 정부의 관리들이 조선 쪽에 강치잡이 대하원(독도 이용 청원)을 내려고 했던 업자를 유인해

영토편입 대하원을 내게하는 공작을 펼쳐, 러일전쟁을 위해 독도를 편입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 한겨레 | 2008.07.17
 

 

‘독도는 일본땅’ 주장 일본 역사학자 ‘0명’

 

한일 근대사연구 50년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

 

 ‘한-일 근대사 연구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일본 도쿄 미타토구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 입구에 선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

지난 5월말 최교수가 방문했을 때 외교사료관의 간부가 직접 나와 마중하기도 했다.

논문 한 편도 없고, 오히려 ‘일본땅 아니다’ 4명

‘영유권 권위’ 에도시대 관찬지도에 독도 없어
 

“여든이 넘은 늙은이가 일본에 오면

꼭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 공문서관, 도립도서관, 동양문고에 들러

한-일 관계 역사자료를 뒤지고 있다는 사실이 후학들에게 자극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한-일 근대사 연구의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최서면(80· 한국연구원장) 명지대 석좌교수는

외출 때면 지팡이에 의존해야 하는 불편한 몸이지만 현장주의 정신은 오히려 왕성해지는 것 같다.

올해 들어서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일본에 들러 ‘한-일 근대사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일본 정부의 자료를 들추거나 한-일 관계 고문서를 찾아내고 있다.

 

일본 근대 외교 자료를 집대성한 외무성 외교사료관의 자료를

일본 사람보다 많이 읽은 한국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 최 교수는,

일본인 자신이 기록한 문서를 통해 감춰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한-일 관계사의 사실과 진실을 규명하는 데 50년이 넘는 세월을 바쳤다.

 

지난 5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한겨레>와 네 차례, 8시간에 걸쳐 장시간 마라톤 인터뷰를 한 최 교수는

자신이 평생의 화두로 삼고 있는 독도와 안중근 의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일본은 새삼 독도가 자신들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내가 독도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일본 쪽 자료를 보면 일본 것이라고 하기 힘든데

왜 자꾸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선 일본 국제법 학자들 10여명이 일본 외무성 자료를 가지고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역사학자 중에서는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반면, 독도가 일본 것이 아니라는 역사학자는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대 명예교수 등 3~4명이나 된다.

영유권 다툼에서 제일 권위가 있는 게 정부가 편찬한 관찬지도인데

도쿠가와 막부가 펴낸 관찬지도 네 종류에도 독도와 울릉도가 나오는 지도는 한 장도 없다.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시비를 가리자고 하는데 한국 정부가 결심만 하면 가기 전에 이길 것 같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원전주의로 판결하는데 일본이 가지고 있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될 것이다.”

 

일본 과거사 청산없어 잘못 되풀이
감정적 대응보다 연구로 승부를

 

- 독도 문제는 활동가보다는 연구자가 더 많아야 한다는 게 지론인데?

“독도 문제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가진 자는 늠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못 가진 자는 늘 히스테리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선 명심해야 한다.

일본 사람들이 내놓는 얘기가 새로운 게 있으면 대응해야겠지만 구태의연한 것이라면

못 가진 자의 욕구가 그러려니 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독도 문제는 영토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 감정을 생각해서 자주 거론할 문제가 아니고 신중해야 한다.

따라서 정부 발표는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역사적 상호 토론을 통해

어느 것이 더 역사적 비중이 있는지 비교 · 연구하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독도 연구자들은 대개 일본의 연구를 까는 데서 시작해서 까는 데서 그치고 마는 경향이 있어

그들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본이 애초 독도보다는 울릉도를 집어먹기 위해

‘다케시마 문제’라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잘 알고 울릉도와 독도를 함께 연구해야 한다.

 

한 지방대학에서 몇 해 전 독도연구소를 설립한다며 강연해 달라고 하기에

울릉도연구소면 몰라도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동해연구소로 바뀌었더라.

또한 영토 문제에 대응하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야 한다.

잡학을 해야 한다. 페니실린이 쓰레기통에서 나왔지 연구실에 나온 게 아니잖은가.”

 

 

- 내년이 안중근 의거 100돌이고 내후년이 한-일 병합 100돌이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돌을 지금부터 준비하는 게 의인을 맞는 우리의 자세가 아니겠느냐.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일본에서 안중근 자료를 만나다 보면 더 훌륭한데 이것밖에 모르나 하는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역사적 의의를 생각할 때 그가 목숨을 걸고 내건 동양평화론이야말로 위대한 선견이라고 생각한다.

 

한-중-일이 서로 침략하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이 사상은

21세기 아시아공동체론으로 발전하고 있다. 얼마 전 중국 쓰촨성에서 큰 지진이 났을 때

한국과 일본이 조건 없이 지원하고 전염병에 공동대처하려는 움직임 등이 바로 동양 평화 사상이다.

 

최근 외교사료관에서 안중근 자료를 들춰보다 안 의사가 의거 뒤 1909년 10월26일 밤 11시

일본 총영사관에 넘겨지기 전 러시아의 조사를 받은 기록을 찾아냈다.

러시아의 기병대위가 “이토가 죽었다”고 하자

안 의사는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러시아정교 십자가를 향해 십자가를 그은 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줘서 이 대업을 이루게 됐습니다”라고 말한 부분이다.

 

또한 주권을 잃어버린 100돌을 2년 앞두고 우리가 이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을 해 봐야 한다. 1970년대 운양(운요)호 사건 100돌 때 서울에 갔는데

앞다투어 극일한다고 난리치던 신문들이 정작 한 줄도 보도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라고 관심을 촉구한 일이 있다.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 일본이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본은 우리나와 달리 정치가들의 과오를 스스로 청산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즉, 100년에 이르는 군벌의 잘못을 국민이 심판하지 못하고 외국인이 심판한 게 일본의 전후였다.

다만 그들은 공과 사를 가릴 줄 안다는 점은 우리도 배워야 한다.

토론을 할 때는 스승을 거침없이 공격하다가도 일단 결의하면 이의 없이 따르는 점은 무섭다.”

 

 

- 그동안 일본에서 수많은 자료를 발굴했는데?

“발굴한 자료를 얘기하자면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 것 같다.(웃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기록이 담긴 북관대첩비 발굴은

“야스쿠니에 북관대첩비가 방치돼 있다”는 구한말 유학생의 비분강개하는 글이 계기가 됐다.

그래서 78년 일요일 비문을 찾으러 야스쿠니 신사에 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비둘기집 근처에서 초라한 비석이 하나 있어 비문을 읽어봤더니 그게 북관대첩비였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구한말 유학생은 임시정부 외교부장을 지낸 조소앙이었다.

 

1974년 안 의사의 수기를 입수하게 된 것도 우연히 고서점에서 보낸 목록에서

‘안응칠 역사’라는 목록을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서점에 연락했더니 <임나일본부설>을 쓴 유명한 식민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 교수가

이미 사 갔다고 하더라. 그에게 가서 “안중근은 일본에게는 지식으로 알 필요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민족교육의 교과서로 필요하다”며 양도할 것을 부탁하자 “네 박력에 졌다”며 넘겨주었다.

= 도쿄/글 · 사진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북관대첩비 · 안중근수기 발견, 최서면 교수  

 

 

50년간 한-일 외교에 막대한 영향력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막후 ‘외교 조언’
장면 박사에 DJ소개 정계입문 열어줘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의 80평생 살아온 길은

파란만장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해방공간에서 연희전문대 시절 김구 선생 밑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한민당의 외교 · 정치부장을 지낸

우익인사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돼 1948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은 그의 다채로운 삶의 서막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석방된 그는

노기남 주교와 장면 박사 등 천주교 인사의 보살핌 속에

천주교 조직 일을 하다 57년 이승만 정부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1988년 귀국한 뒤에도

한-일 근대사 자료 발굴과 연구를 위해 자주 일본을 왕래하는 등 50년 넘게 현장을 누비고 있으며, 풍부한 인맥을 바탕으로 한-일 외교의 막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애초 이탈리아로 건너가 한국을 소개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 일본 국회도서관 아시아자료관에서 한국 자료를 섭렵하던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 부끄러움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그 길로 5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국회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읽자

사서들이 “다른 손님이 이 책을 찾는데 본 일이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1990년대에는 외교사 사료관에 7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하며 자료 발굴에 매달렸다.

이 때 자료가 국사찬위원회를 통해 500장이 넘는 두툼한 <한일관계 사료 목록>으로 편찬됐다.

 

그는“세상에서 나 혼자밖에 모르다는 흥분의 연속이었으며, 행복감이 7년간 이어졌다”고 말했다.

북관대첩비와 안중근 수기 발견뿐아니라 이준 열사 사망의 진실,

을사보호조약에 고종 황제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실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공개됐다.

 

이런 풍부한 한-일 근대사 자료 섭취는

한국과 한-일 근대사를 알고 싶어하는 일본인과 외국학자들을 위한 강연으로 이어졌고,

강연은 다시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총리 등 일본의 유력 정관계 인사와의 인맥쌓기를 낳았다.

“강연하다보니 재일 한국인 논객 중 일본에 참고가 되는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일본의 정계인사들이 우리가 잘못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물으러 오기도 했다.”

 

그는 이런 인맥을 바탕으로 한-일 외교사의 이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여러 조언을 하는 등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50년대 후반 알고 지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장면 박사에게 소개해 정계입문의 길을 열어주고

70년대 일본 방문 때 후쿠다 다케오 당시 대장상을 소개해준 것도 최 교수였다.

 

“정치동물인 최서면하고 학자 최서면을 따로 떼어내 둘로 나누면 최서면은 죽어버린다”

온종일 도서관에 파묻혀 살다가도 저녁 때면 후학들과 어울려 역사를 이야기하며

말술을 마다 않고 줄담배를 피우는 그를 보면 '괴물'이라는 그의 별명이 실감난다.

- 도쿄/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동해, 일본해 아닌 한국해"

18세기 러시아 지도에 한국해로 표기돼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한국의 반일 감정이 거센 가운데

독도가 위치한 동해가 '일본해'가 아닌 한국해임을 입증하는 러시아 지도가 공개됐다.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스티
통신은 16일 "한국 정부는 독도 영유권 분쟁과 관련

'일본해'가 '한국해'로 수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며 러시아 정부가 이를 확인해 주길 원한다"면서 

동해가 일본해가 아닌 '한국해'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있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1737년 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
에서 발행한 '청소년들을 위한 지도책'에 삽입된

아시아 지도에 '한국해'로 표기돼 있고

1745년 같은 기관에서 발행한 '러시아 지도책' 또한 한국해로 명시돼 있다.
이 지도들은 이후 러시아와 외국 지도 제작의 기본이 되었고

유명한 러시아 항해사 비투스 베링의 캄차카반도 탐험 당시에도 이 지도가 사용되었다.

통신은 19세기부터 현재까지 '한국해'라는 명칭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국인들은 일본의 '일본해'라는 명칭 주장이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유산으로 여기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문제의 바다를 항상 '동해'로 표기해 왔다고 전했다.

일본해 명칭 변경은

현재 한국과 일본 간의 독도 영유권 분쟁과 맞물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사안이다.

한국 민간단체의 요청으로 이미 서유럽 언론들은 '동해(일본해)'라고 표기하고 있고

한국은 러시아도 이렇게 표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한편 러시아 외무부는 일본 정부가 2012년 편찬되는 사회 학습 해설서에

양국 간 분쟁이 되고 있는 북방영토(러시아명 쿠릴열도)가 일본 영토이며

러시아가 불법 점유하고 있다는 내용을 싣도록 추천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일본의 북방 섬인 홋카이도
(北海道)와 불과 10㎞ 거리에 있는 쿠릴열도

2차대전 종전 직전 옛 소련군이 조차했으며

일본은 쿠릴열도 4개 섬을 모두 반환할 것을 촉구하는 반면

러시아는 돌려주더라도 2개 섬만 돌려줄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양국이 마찰을 빚어왔다.

일본은 북방 4개 섬을 이미 2006년에 자국 영토로 기술한 고교 교과서를 검정에 합격시켜

러시아 정부의 강한 반발을 샀는가 하면,

홋카이도 G8(주요 8개국) 정상회의 홈페이지에 이들 4개 섬을 일본 영토로 표기한 지도를 띄우고,

정상회의 행사장 벽에 관련 지도를 내거는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러시아 대표단은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당시 정상회담에서

영토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못한 것이 양국 관계에 지장이 되고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앞으로 성실하게 협상을 계속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이번에도 러시아 정부는 일본 측의 태도에 조용히 대응하기로 결정하고

"일본 정부의 비건설적 태도가 실망스럽다"는 표현 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는 러시아 정부의 이런 태도는 

독도분쟁으로 연일 집회를 열고, 일본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하는가 하면,

해안경비대가 독도 주변 순찰을 강화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대응과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라고 보도했다.
- 러시아국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

- 연합뉴스 |  2008.07.16 남현호 특파원hyun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