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홍청도(洪淸道)=충청도(忠淸道)

Gijuzzang Dream 2008. 7. 11. 18:41

 

  

 

 

‘홍청도(洪淸道)’='충청도(忠淸道)'

 

 

 

 

 

 

 

충청도(忠淸道)는 한 때 홍청도(洪淸道)로 불렸다.

충주와 청주의 머리 글자를 딴 지명이지만 충주 대신 홍주(지금의 홍성)를 넣은 것이다.

 

그 주인공은 중종의 셋째부인이자 인종의 계모인 문정왕후다.
인종이 의문사한 후 이복 동생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친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정치보복의 섭정을 시작한다.

명종의 왕위계승에 반대하던 인종 인맥 대윤(大尹)파와 사림파를 제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1547년 (명종 2년) 양재역 객사에서 벌어진 섭정비방 대자보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약빙의 아들이자 대윤파 수장 윤임의 사위인 이홍윤이 “명종이 쫓겨날 것”이라고

또 비판하자 그 보복으로 충주지역 이약빙의 문인 300명 이상을 죽이고

충청도의 지명에서 ‘반란의 도시’ 충주를 뺀 것이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은 한 때 ‘반역의 고장’이었다.

1728년(영조 4년) 경종을 지지하던 남인들은 경종의 독살설을 제기하며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자

영조와 노론은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평영남비, 平嶺南碑)' 를 세워

영남 출신의 관직등용을 배제했다. 영남지역 전체가 반역의 지역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이들은 영조의 손자 정조가 즉위하고 삭탈관직 80여 년 만에

남인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족쇄가 풀리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내내 함길도(함경도) 출신은 태조 이성계가 이 지역 출신이었지만

그 기질 등이 문제시돼 공직등용을 기피당했다.

개국공신 정도전이 이성계 앞에서 함경도 사람을

이전투구(泥田鬪狗, 진흙 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맹렬하고 악착스럽다)라고 평했다가

얼른 석전경우(石田耕牛, 돌밭을 일굴만큼 억척스럽다)라고 말을 보탠 일화는 유명하다.

 

평안도 지역 역시 국경과 인접해 있어 반란의 위협 때문에,

또 ‘학문도 예의도 모르는 지역’이란 평가 때문에

차별대우를 받아 능력에 관계없이 관직 진출이 어려웠다.

이시애 · 홍경래 난 등은 그 반작용이었다. 권력과 지역의 함수관계다.

- 2008-03-18 문화일보, 최영범 / 논설위원 [오후여담]


 

 

 

 

 

반계 유형원은

도명이 자주 바뀌는 폐단을 비판하여

우리나라는 종전부터 주군(州郡)은 사람으로 인하여 그 등급이 오르고 내려지는 까닭에

변경함에 상도(常道)가 없고

각도는 주(州)를 따라 그 이름을 정하기 때문에 또한 자주 변경되는 것이나,

즉 충청도의 경우

충주가 현으로 강등되면서 홍청도(洪淸道)가 되고

청주가 현으로 강등되면서 공홍도(公洪道)가 되며,

공주가 현으로 강등하게 되면서 또 고쳐서 홍충도(洪忠)로 하는 것과 같이

도명을 바꾸므로 갈래가 많아 인식되지 않으니

차라리 천고(千古)에 변함이 없는 산천의 이름을 따서 도명을 고정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향토사료연구 제6집>

 

고려말 1388년(창왕 즉위년)에는 충청도의 지명이 양광도(楊廣道)였으며,

조선시대 충청도의 명칭으로

충공도(忠公道), 충홍도(忠洪道), 청공도(淸公道), 청홍도(淸洪道), 공충도(公忠道),

공청도(公淸道), 공홍도(公洪道), 홍충도(洪忠道) 등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단위 자체를 해체하거나 도명을 영구히 교체한 것이 아니라

약 10여 년이 경과하면 원래의 충청도로 환원되곤 하였다.

 

태조 4년(1396)에 양광도를 충청도와 경기도로 분리하였고

조선 전기 충청도 관찰사의 근무처인 충청감영의 본영은 충주(忠州)에 있었다.(충청도)

중종 25년(1530)에 홍주(홍성)가 홍주부로 승격되어 관찰사가 파견되기도 하였지만,(홍청도)

임진왜란이 지난 선조 31년(1598)에는 감영을 충주에서 공주(公州)로 이전하였으며,

1603년부터 충청도 관찰사가 공주목사를 겸하였다.(공청도)
충청도 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옮긴 이유는
공주의 지리적 조건 즉 임진왜란을 통하여

서울 방어를 위한 지리적 요충지로서 공주가 재인식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충청도의 명칭은 공홍도, 충홍도, 공충도 등으로 수차례에 걸쳐 개칭되다가

순조 34년(1834)에 공청도에서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고종 33년(1896) 칙령 제36호로 13도제로 개편됨에 따라

충청도는 충청북도, 충청남도로 분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