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청도(洪淸道)’='충청도(忠淸道)'
충청도(忠淸道)는 한 때 홍청도(洪淸道)로 불렸다. 충주와 청주의 머리 글자를 딴 지명이지만 충주 대신 홍주(지금의 홍성)를 넣은 것이다.
그 주인공은 중종의 셋째부인이자 인종의 계모인 문정왕후다. 명종의 친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정치보복의 섭정을 시작한다. 명종의 왕위계승에 반대하던 인종 인맥 대윤(大尹)파와 사림파를 제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1547년 (명종 2년) 양재역 객사에서 벌어진 섭정비방 대자보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약빙의 아들이자 대윤파 수장 윤임의 사위인 이홍윤이 “명종이 쫓겨날 것”이라고 또 비판하자 그 보복으로 충주지역 이약빙의 문인 300명 이상을 죽이고 충청도의 지명에서 ‘반란의 도시’ 충주를 뺀 것이다. 1728년(영조 4년) 경종을 지지하던 남인들은 경종의 독살설을 제기하며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자 영조와 노론은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평영남비, 平嶺南碑)' 를 세워 영남 출신의 관직등용을 배제했다. 영남지역 전체가 반역의 지역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이들은 영조의 손자 정조가 즉위하고 삭탈관직 80여 년 만에 남인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족쇄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 기질 등이 문제시돼 공직등용을 기피당했다. 개국공신 정도전이 이성계 앞에서 함경도 사람을 이전투구(泥田鬪狗, 진흙 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맹렬하고 악착스럽다)라고 평했다가 얼른 석전경우(石田耕牛, 돌밭을 일굴만큼 억척스럽다)라고 말을 보탠 일화는 유명하다.
평안도 지역 역시 국경과 인접해 있어 반란의 위협 때문에, 또 ‘학문도 예의도 모르는 지역’이란 평가 때문에 차별대우를 받아 능력에 관계없이 관직 진출이 어려웠다. 이시애 · 홍경래 난 등은 그 반작용이었다. 권력과 지역의 함수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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