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작가 홍명희가 월북한 까닭은?
대하소설 '임꺽정'으로 이름을 날린 벽초 홍명희(1888~1968)가 월북한 까닭은 무엇일까?
작가 홍명희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김구 선생 등과 함께
참석한 후 북한에 눌러앉아 같은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탄생과 함께
부수상 자리에 오른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북한에 남게 된 까닭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내며
부수상이었던 홍 선생을 자주 만났다는 고려인 정상진씨는 2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홍 선생이 북한의 친일파 완전청산을 높이 사 북한에 남게 됐다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정씨는 "어느 날 홍 선생을 찾아가 북한에 남게 된 이유를 묻자
'나에게는 공산주의자냐 민족주의자냐란 잣대보다는 애국자냐 친일분자냐란 잣대가 중요하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후 친일파를 끌어안고 춤췄다. 하지만 김일성은 친일파를 철저히 제거했다.
이승만은 일본과 싸운 적이 없지만 김일성은 일본과 싸웠다'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홍 선생은 '나는 공산주의를 모른다. 다만 공산주의자들이 한 일(친일파 숙청)은 지지한다'
고 말하기도 했다"면서 "홍 선생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지도 않은 채 무소속으로 지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1955년 소련파 숙청 이후 소련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홍 선생이 그 뒤 북한 정권의 변화
(김일성 독재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게 됐는지 등에 대해선 모른다"고 말했다.
정씨는 특히 "양반지주 계급 출신인 홍 선생이 월북해 부수상에 올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태준, 황철, 문예봉, 최승희, 김순남 등 남한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1948년부터 다음해까지 월북했다"면서
"홍 선생이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남한 문화예술인들의 월북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홍 선생은 '명예직' 부수상 자리에 있으면서 산하 기관장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은 적이
없었으나 나는 홍 선생의 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아 정부 청사에 들어갈 적마다 그를 찾아
많은 담소를 나누곤 했다"면서 "홍 선생은 소설 '임꺽정'을 완성하려 무척 애를 썼다"고 말했다.
한편 정씨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때
홍 선생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연 김구 선생이 '북한에 잔류할 생각이 없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칭찬할 수 있지만 남한 동포를 버릴 수는 없다"고 밝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 2008.07.03, 연합뉴스 유창엽 특파원 yct9423@yna.co.kr
김정일 16세 때 김일성, 홍명희 뱃놀이 장면 촬영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58년 5월 1일 김일성주석과 벽초 홍명희의 뱃놀이 사진을 찍다.
역사소설 <림꺽정> 저자인 월북작가 벽초 홍명희 집안에서는 벽초와 고 김일성주석이 평양시 교외의 한 호수에서 뱃놀이하는 사진을 가보(家寶)로 보관하고 있다.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한 조용한 호수에서 김 주석이 밝게 웃으며 직접 노를 젓고 마주앉은 벽초 역시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사진을 찍는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흑백의 사진은 1958년 5월1일 국제 노동자절 행사가 끝난 후 촬영한 것으로 김 주석의 전용사진사나 관련 간부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해(2004년 12월 중순) 간부들에게 처음으로 이 사진을 자신이 직접 찍었다고 46년만에 밝혔다.
3월 18일 평양방송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김 주석과 벽초의 인연을 회고하던 중 "수령님께서 홍명희 선생과 단둘이 한 배에서 직접 노를 저으시는 역사적인 화폭을 담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은 내가 찍은 것이다"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당시 내각 부수상으로 일하던 벽초가 일부 종파분자들의 모함으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김 주석이 이를 헤아려 바쁜 중 시간을 내 호수로 데려갔다고 설명했다. 김 주석이 벽초에게 나이 많은 분이 언제 배를 타 봐겠는냐, 오늘 함께 배를 타며 푹 쉬자면서 직접 노를 잡았다는 것이다. 어느 덧 배가 잔잔한 호수 한 가운데 이르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 위원장은 사진기를 들고 있던 간부에게 빨리 그 장면을 촬영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 간부가 노를 저을 줄 몰라 결국 김 위원장이 직접 노를 저어 김 주석과 벽초가 탄 배 근처로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충북 괴산 출신인 벽초 홍명희는 1948년 월북 후 내각 부수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 대산 홍기문은 <이조왕조실록>을 완역한 유명한 국학자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조평통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손자인 홍석행은 현재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함경북도당 책임비서이고, 홍석형의 동생 홍석중은 <황진이>를 쓴 유명한 소설가이다. - 연합뉴스, 2005-3-23
소련 크렘린궁에 간 부수상 홍명희
1949년 3월 북한 수상 김일성(가운데),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김일성 뒤), 부수상 홍명희 등 북한정부 대표단이 소련의 스탈린을 방문하기 위해 크렘린궁에 들어서고 있다. - 조선일보, 2005-4
북한 TV, 홍명희 생전 모습 방영
조선중앙텔레비젼은 1일 기록영화를 방영하면서 김일성 주석과 함께 1957년 4월 북한을 방문한 폴란드 정부대표단과 회담하는 홍명희(왼쪽)의 모습을 내보냈다. - 연합뉴스, 200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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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학문 최고봉 홍명희가문 3代
북녘에서 학문의 명가(名家)를 일궜던 벽초 홍명희의 3대가 남한에서 주목받고 있다. 역사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벽초(1888~1968년)는 ‘월북 작가’라는 딱지로 인해 분단 이후 오랫동안 논의가 금지된 기피인물이었다. 소설 간행은 물론 학문적 연구도 일절 불허되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중반 ‘임꺽정’이 출간되고 월북 작가들에 대한 해금이 이뤄지면서 벽초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연구가 진척되면서 벽초는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에 노력한 민족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평가되었다. 또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신문학의 창시자로 재조명을 받았다. 이와 함께 ‘임꺽정’은 근대문학의 고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잡았다.
최근 남한에서 출간된 북한 소설 ‘황진이’는 벽초의 손자 홍석중(1941년~)의 작품. 황진이를 소설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지난달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탁월한 역사적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소설적 서사와 야사, 속담과 살아있는 비유를 풍성하게 구사했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평. 그러나 할아버지 홍명희로부터 이어받은 학문과 문학의 전통이 ‘황진이’의 소설적 성취를 이뤘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홍석중은 해방 후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북으로 가서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했으며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다음주 출간되는 계간 ‘역사비평’ 가을호가 특별연구로 홍명희의 아들이자 홍석중의 아버지인 홍기문(1903~92년)을 다뤄 눈길을 끈다. 벽초와 ‘임꺽정’ 연구의 권위자인 상명대 강영주 교수는 ‘국학자 홍기문’이라는 글을 통해 그의 삶과 학문을 집중조명했다. 강교수는 우선 홍기문의 국학 연구를 주목하고 있다.
3·1운동을 거치면서 뚜렷한 민족의식을 갖게 된 홍기문은 민족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국어를 연구하게 된다. 그는 투옥된 벽초의 서가에서 주시경의 ‘말의 소리’, 김두봉의 ‘조선말본’ 등과 일본어로 된 언어학 이론서를 찾아 읽으며 우리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다. 해방 후 ‘정음발달사’ ‘조선문법 연구’ ‘향가해석’ ‘리두연구’ 등과 같은 국어학사에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의 치열한 연구활동 덕분이다. 월북 이후에는 사회과학원 부원장을 맡아 ‘박지원작품선집’을 국역했으며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된 ‘리조실록’ 번역작업을 총괄지휘했다.
강교수는 이와 함께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순국한 홍범식의 유지가 아들 벽초와 손자 기문으로 하여금 민족의 언어, 역사를 탐구하게 하는 국학자의 길로 이끌었음을 밝히고 있다. 벽초 홍명희와 홍기문은 ‘나라가 파멸하고 임금이 없어지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는 홍범석의 유언을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고 강교수는 적었다.
이 글은 또 16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홍명희와 기문 부자가 맞담배를 피웠다는 일화와 함께 학문에서는 사제지간으로, 사회정치활동에서는 동지로 살아간 부자간의 이력을 전하고 있다.
홍기문이 첫부인과 1남3녀를 두고 다시 신여성인 사회주의운동가 심은숙과 결혼, 홍석중 등 4남1녀를 낳은 사연도 소개한다. 강교수는 국어연구가이자 신간회 · 카프 등에 참여하며 사회운동을 벌인 홍기문을 시대적 요구와 학문을 일치시키려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홍기문을 민족지사인 할아버지 홍범식, 아버지 벽초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한다.
이처럼 홍명희 일가의 역사는 한국근현대지성사의 변천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게 강교수의 설명이다.
한편, 벽초 홍명희에게는 큰아들 홍기문(起文)과 작은아들 홍기무(起武)가 있었는데, 홍기무는 초대 감찰원장이었던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의 사위로서 한국전쟁 중에 숨어있던 장인을 찾아내어 북으로 납치해 갔다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 경향, 2004-08-16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 북한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힌 홍명희의 묘비
홍명희선생 손자 北 소설가 홍석중씨 만해문학상 받는다
![]() ![]() ![]() ![]() ![]() 북한에서 출판된 홍석중의 『황진이』 삽화
홍명희-홍기문-홍석중 3대
금강산은 하얀 �을 이고 장전항의 바람과 함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관광객들의 설레는 마음과 더불어 북녘땅이라는 긴장감 또한 금강산의 묘한 풍경이었다. 몇 차례의 저작권 관련회의가 있었지만 설마 <황진이>의 작가 홍석중선생이 회의에 참가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지난 3월18일이었다. 그의 꼿꼿한 이마가 할아버지 벽초의 이마를 닮았다는 것도 그제야 정확히 알았다.
고백한건대 금강산을 갈 때마다 사실 나는 '임꺽정'의 작가이며 반일애국자였던 벽초 홍명희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해방 후부터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까지 금강산은 개명의 논의로 몸살을 앓았다. 가령 그것이 '천리마산' 등으로 불렸다면 지금쯤 그 느낌이 어떠했을까. 항일빨치산들의 주장을 뒤로하고 '금강산'이라는 이름을 지킨 사람이 바로 벽초다. 그가 "인민들이 불교를 빌려 금강산이란 이름을 지었을 때 그들에겐 사회주의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라 하여 이름을 바꾼다면 이것은 인민들의 선택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이 무릎을 쳤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이름을 지킨 바로 그 금강산에서 남북 최초로 저작권 위임에 대한 문서가 전달되었다.
홍석중 선생의 서명도 있었다.
남쪽 사회에서 서명이란 일상적이지만 북에서 개인작가의 서명이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집도, 땅도, 창작물도 사회의 공동소유가 되는 체제에서 서명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홍석중 선생은 “3일 동안 수표 연습을 했다”며
서명의 중요성과 함께 자신이 살고 있는 체제에 대해 가감없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사실 북녘의 저작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90년대부터였다.
북녘을 정확히 알자는 운동이 있었고 이때 구속을 무릅쓰고 도서와 영상물이 소개되었지만,
일부 분단을 빌미삼아 저작물의 도용이 있었다.
남쪽의 연구 성과물인 것처럼 혹은 자신이 창작한 작품처럼
어투와 껍데기만 슬쩍 바꾼 채 출판된 것들이 없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반통일을 주장할까 겁이 났다.
마치 우리 사회의 정직하지 못한 지식인들이 일본 것을 베낀 채 일본문화 개방에 반대하듯이
이들이 남북 문화교류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정치와 외교 같은 큰 분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저작권 문제 하나라도 풀 수 있다면 통일에 반대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통일부에 ‘북한주민 접촉승인서’를 내고 저작권 관련 서류를 든 채
무작정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을 찾아간 게 2000년 6·15선언 직후였으니까,
남-북 간 저작권 위임증서를 이끌어내기까지는 꼬박 5년이 걸렸다.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친구들의 덕이야 이루 표현할 수 없지만
<임꺽정>을 출간한 사계절 출판사의 호의적 태도와 북녘 작가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저작권사무국 장철순 부국장의 깊은 관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홍석중 선생은 아버지 대산 홍기문의 기억도 더듬어 주었다.
<리조왕조실록>의 책임 번역자였던 대산의 연구실에는
아침마다 수십 명의 젊은 학자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꼼꼼히, 이것은 ‘이두’를 이용해서, 이것은 직역보다는 조선사람의 감성을 먼저 생각해 보면서,
밤 이슥하도록 연구실에서는 아버지와 후학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어찌 이렇게 10년이 넘어 번역된 <리조왕조실록>이 북녘만의 성과물일 것인가.
남북을 따지기 이전에 우리는 하나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아니던가.
분명 <리조왕조실록>을 비롯해 <고려사>와 <발해사>,
대산이 평생을 두고 연구하고 그의 후학들이 번역한 <조선고전문학선집>은 민족 전체의 자랑이다.
남북이 함께 공유하고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다.
홍석중 선생 자신도 역사소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첫 작품 <높새바람>을 썼다고 한다.
<황진이> 또한 사라져가는 언어와 민족문화의 복원을 위해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며 써낸 것이라 했다.
시범사업으로 먼저 해결하기로 한 작품이 <임꺽정> <고려사> <황진이>라는 게 범상치가 않다.
홍명희, 홍기문, 홍석중 삼대가 남북을 이어주는 큰 가교라는 생각으로
이별의 눈물을 감춘 채 고성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 신동호, 시인 / 2005-03-27,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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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林巨正)
벽초 홍명희의 대하역사소설 '임꺽정' 개정판(사계절출판사) 삽입그림 중 한 장면, 만화가 박재동 화백 그림
임꺽정은 조선 명종조 사람이다. 이때는 윤원형과 이량 등 척족이 발호하고 흉년이 계속되며 관아의 수탈이 횡행한, 의적이 등장하기에 완벽한 시기였다.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는 1888년생. 1910년 당시 금산 군수였던 아버지 홍범식이 일제의 병탄에 항거하여 순국하자 이 땅을 떠나 중국, 남양 등지를 떠돌았고 귀국 후에는 3·1운동의 선봉에 선 선각자였다.
그가 ‘임꺽정’을 집필한 것은 1930년 전후 일제강점기의 한가운데였다. 총 1120여 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방대한 분량의 저작에서 홍명희는 서울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송도, 강서 구룡산, 영변 묘향산, 백두산, 금강산에 이르며 남으로 장흥, 보성, 순천, 지리산, 양주, 화개, 하동, 창녕, 문경새재 등을 아우르는 드넓은 지역을 오가며 임꺽정의 행로를 그려 낸다.
임꺽정과 일곱 의형제의 활약상을 따라가며 읽노라면 소설은 한국판 삼국지나 수호전처럼 흥미진진하며 홍길동, 전우치의 후예인 듯 기이한 임꺽정의 행적, 걸출한 무술은 무협지처럼 우리를 빠져들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임꺽정’은 전투와 싸움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 속에 생생하게 재현된 임금과 왕비, 옹주와 후궁, 세자와 왕자들이 빚어내는 궁중의 사연들, 고관대작들이 벌이는 사화는 우리의 역사 공부를 돕는 한편 오롯이 살아 있는 당대 민중 한사람 한사람의 삶은 우리의 가슴을 애잔하게 적신다.
그 속에는 사랑이, 치정이 있고 배반과 음모가 있으며 방랑과 좌절과 암투가 있다.
힘센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가난한 이들이 죽일 듯 미워하며 영위해 나가는 한 생은 엄숙하고 진지하다. 여인과 남정네가 등장하는 그림은 선 곱고 화려한 채색화 같고 어린아이와 나이든 이가 어우러져 그리는 그림은 투박하나 선명한 민화처럼 다가온다.
“민족 자료의 집대성이요, 조선 어휘의 일대 어해(語海)”라 평했던 이효석의 말처럼 ‘임꺽정’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과 잊고 있던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넘친다. 소설을 읽으며 꺽정과 곽오주, 천왕동이와 함께 산을 타며 호랑이와 숨 막히는 일전을 벌이고 토끼와 여우, 노루를 쫓으면서 우리는 500년 전 조선의 벽화 속으로 들어간 듯, 꿈속의 한 장면을 만난 듯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알려진 대로 홍명희는 광복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가 1948년 분단을 막고자 월북한 후 남하하지 못하였다. 그는 격동기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그 중심에서 온몸으로 시대를 앓던 작가였으며 소설 ‘임꺽정’은 그의 그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보여 주는 대작이다.
‘임꺽정’을 두번 세번 거듭 읽으면 역사란 무엇인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 모습인지, 나는 대체 누구인지, 고민하고 고민하는 작가의 맨얼굴이 다가오고 우리 시대와 우리 자신에 대해 통렬한 반성이 인다.
짧고 빠르고 간결한 표현이 미덕인 이 시대. ‘임꺽정’은 1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과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여전히 재미있게 읽힌다. 홍명희의 천재성일까, 임꺽정의 힘일까.
이 작품은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각 1권씩과, 「의형제편」 3권, 그리고 미완으로 남은 「화적편」4권을 포함하여 전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 서하진 작가, ⓒ 동아일보 & donga.com, [책 읽는 대한민국/ 21세기 新고전 50권]
“홍명희의 ‘임꺽정(林巨正)’은 서구적 부르주아”
홍명희 소설 '임꺽정(林巨正)'은 무협소설?
“홍명희의 <임꺽정>도 내용 구성에 있어 충분히 무협소설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1928-1939년까지 1,120여 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임꺽정전> (사진제공=채륜)
이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의 주장이다. <임꺽정>은 백정의 아들 임꺽정이 6명의 산적과 의형제를 맺고, 청석골에서 의적활동을 하는 내용의 역사소설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 중 하나다. “<임꺽정>을 무협소설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한국적 무협소설인 무예소설의 하나로 구분할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학식 있는 백정 양주팔이 도인 이천년을 만나 천문지리와 음양 술수를 전수 받는다. 피장편에는 임꺽정이 한 동네에 사는 이봉학, 박유복과 함께 갖비치에게 글을 배우며 의형제를 맺는다. 이중 이봉학은 활쏘기, 박유복은 창던지기, 임꺽정은 검술의 달인이 된다. 이런 음양 술수와 무예에 대한 내용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무예소설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의형제를 맺는 인물들의 과정을 서술한다. 이는 현대 무협소설에서 주인공이 여러 명의 조력자들과 함께 임무를 완성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소설적 기법과 흡사하다. 또한 이들이 하나의 방파를 이루고 한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유사하다. 이는 불합리한 봉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벌이는 민중들의 투쟁의식을 표현한다. 이처럼 의, 협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현대 무협소설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다. 한국무협소설의 전 역사를 다룬다. 풍부한 사진자료와 무협소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인상적이다. - 매일매일 재미있는 책읽기 '북데일리' www.book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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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 생가(일완 홍범식 고택)
충북 괴산군에 위치한 동부리 고가(古家)로 불리는 홍범식, 홍명희 생가 복원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내년이면 원래의 모습을 보게 될 전망이다.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번지 일대에 위치한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 생가에는 지난 2002-2005년까지 4년간 39억원을 들여 9동의 건축물에 대한 보수와 정비 작업을 벌이고 있다.
괴산군과 괴산향토사연구회(회장 이춘택)는 동부리 고가의 보수정비사업 추진 상황에 대해 지난 2001년 지방재정투융자심사를 완료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2002년 고가 및 부지를 매입했으며, 9월 응급 보수공사를 착공해, 2003년 5월 담장을 정비한 뒤 수목을 제거하는 작업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또 2002년 12월 정비 기본계획 용역을 완료하고 충북도로부터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 받았으며 2003년 인접 토지를 매입했다고 설명했다.
군과 연구회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위해 내년도 예산에 국고보조문화재보수사업예산을 신청한 상태이며 올 6월 부지내 토지를 매입하고 8월에 안채, 사랑채, 배면광채보수공사에 착공해 내년 6월 완료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올 9월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신청을 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군과 연구회의 설명대로라면 동부리 고가는 대문채, 중문채, 행랑채, 광채, 화장실 등 없어진 건물을 복원하고 보호구역내의 사유지 매입 후 편의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것으로 보수정비공사가 완료될 전망이다.
한편 괴산군은 동부리 고가의 보전 이유에 대해 먼저 순국 열사 금산군수 홍범식(1871-1910)의 생가이며 충북 최초의 괴산 만세운동 유적지라는 점 그리고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 생가이며 중요민속자료로 민족 건축사의 의미에서 보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홍명희 생가 언제 지어졌나 복원 작업 중 명문기와 출토돼 시기 추정 가능
'辛酉 仲百金 日匠首 金'라고 쓰여진 망와는 고가가 지어진 시기, 중건된 때를 추정할 수 있다.
홍명희 생가는 언제 지어지고 중건됐나. '동부리 고가'로 불리는 홍명희 생가를 정비하는 중 명문기와가 나와 지어진 연도와 중건된 시기를 추정할 수 있어 관심이 되고 있다.
명문기와는 2점이 나왔는데, 수키와에는 '雍正八月 戊申四月'이라 써있다. '옹정 8년'은 조선 영조 6년으로 1730년에 해당하고, '무신 4월'은 영조 4년(1728)에 해당하므로 2년의 차이가 있는데 '正戊申'이 맞는 것으로 추정하면 영조 4년(1728)에 창건 또는 중건되었다고 괴산군향토사연구회가 밝혔다.
또 망와에 쓰여진 '辛酉' 는, 광해군 13년(1621), 숙종 7년(1681), 영조 17년(1741), 순조 1년(1801)과 이듬해인 함풍(咸豊) 11년인 신유년 홍참판이 살았던 철종 12년(1861) 가운데 어느 때 중건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는 추론이 있다.
한편 괴산군지에 의하면 인산리(동부리) 고가는 선조(宣祖) 때 김정승(金政丞)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종(1835∼1849) 때 기병사(奇兵使)가 인수하여 살다가 철종 11년(1860)부터는 홍참판이 살았다고 되어 있다. - 이성인 기자 ⓒ 2004 오마이뉴스, 200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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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선생의 동부리 고가(생가, 홍범식 고택)/ 제월리 고가
홍명희 선생이 태어나 인근 괴산군 제월리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던
괴산군 동부리의 홍명희 생가(홍범식고택)가 새롭게 단장되고 있다.
지난 2002년 복원 사업이 시작된지 4년여 만에 흔적만 남아있던 사랑채, 안채가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50%의 공정을 보이고 있는 복원 사업은 올해말까지 우물과 장독대, 담장 등이 고증을 거쳐 복원된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조금 늦어졌지만 올해 말까지는 완료할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괴산 제월리에 있는 또 한 채의 홍명희 선생 생가가
문화재청으로부터 문화재 등록 예고 됐다.
1845년 건립돼 현재는 사랑채만 보존된 괴산 제월리 생가가 문화재로 등록될 경우
괴산에 있는 두 곳의 홍명희 선생 가옥이 각각 충청북도와 문화재청의 문화재로 등재되게 된다.
"최병하/근대문화재전문위원: 우리 현대사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커다란 족적을 남긴 지도자이기 때문에
한국 근대사의 인물과 관련해 유적으로서 등록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해 등록을 추진하게 됐다."
- 2006-06-28
홍명희생가 문화재 등록 논란
문화재청 “독립운동 주도 · 소설 임꺽정 기려”
괴산 보훈단체 “6 · 25 때 北부수상을…”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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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 1888~1968)가 거주했던 가옥(홍명희의 부친, 일완 홍범식가옥)의 문화재 등록 추진을 둘러싸고 보훈단체들이 홍명희의 북한 부수상 경력을 들어 반발해 논란이 일고 있다.
상이군경회, 전몰군경유족회, 전몰군경미망인회 등 충북 괴산지역 3개 보훈단체는 홍명희가 살았던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가옥에 대해 문화재청이 최근 근대문화재 등록을 예고하자 회원 250명의 서명을 담은 반대 의견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했다. 이들은 의견서에서 “홍명희가 6·25 당시 부수상을 지낸 전범(戰犯)이라는 내용을 뺀 채 1919년 괴산 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소설 임꺽정을 발표했다는 근거만으로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과 참전군인, 전몰군경 가족들은 홍명희 우상화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괴산지역에서 6·25를 거친 세대는 홍명희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해 있어 문화재 지정을 반대하고 있다”며 “우리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물리적 행사에도 나설 것” 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1845년 건립돼 일제시대에 홍명희가 거주한 이 집을 지난달 19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공고문을 통해 “홍명희는 1919년 3월 18일 괴산 장날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징역을 산 독립운동가일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조선시대 사대부층의 계급적 우월성을 배격한 소설 ‘임꺽정’을 발표하는 등 식민지 시대에 문학활동을 한 사회운동가이다.”고 밝히고 있다.
문화재청의 입장에 일리가 있다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의 좌우대립, 6·25를 거치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인 독립운동가나 문화예술인의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그 공과(功過)를 편향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1996년부터 ‘홍명희 문학제’를 여는 등 벽초의 문학혼을 기리는 데 노력해온 도종환 시인은 “제월리 고가는 감옥에서 나와 외곽으로 이사간 벽초가 임꺽정을 집필했던 장소”라며 “벽초의 문학정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지, 6·25와 관련된 부분이 아무것도 없는 가옥을 두고 문화재 지정 반대 논리를 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유태종기자, 200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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