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태안 -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아늑한 모래밭
태안군은 길쭉한 해안선을 따라 학암포, 몽산포, 만리포, 연포 같은 이름난 해수욕장과
서해안자락의 대표적 관광지인 안면도가 자리하고 있다.
신진도, 목개도, 거아도, 외도, 장고도 등 아름다운 섬들을 한데 묶어
태안해안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지난겨울, 태안 앞 바다에는 큰 일이 벌어졌다. 유출된 검은 기름이 해안과 바다를 뒤덮은 것이다.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역주민들과 전국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해안은 빠른 속도로 회복됐고 바다도 점차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생태계가 완전히 복원되려면 더 오랜 세월이 흘러야겠지만
사람의 손길로 지켜낸 해안에는 다시 황홀한 노을이 빛을 발하고 있다.
서해, 그 장엄한 노을 속으로 - 안면도
![]() |
태안반도의 끝자락, 길게 이어진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조선 인조 때인 1638년,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물길을 만들면서 섬이 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에 이르러 섬과 뭍을 연결하는 연륙교가 가설되면서
다시 뭍이 되었다.
물이 맑고 모래의 질이 좋아 여름철 해수욕 인파로도 붐비지만
이곳을 찾는 발길은 사시사철 끊임이 없다.
일몰이 특히 아름답고 안락한 펜션들이 밀집되어 분위기 좋아하는 낭만주의 여행자들에게 최적의 여행지이다.
안면도의 중심에 자리한 꽃지 해수욕장은 대천 해수욕장에 이어
서해안 자락에서 두 번째로 큰 백사장을 지니고 있다.
전국 3대 낙조의 하나로 꼽히는 꽃지 일몰은 해안가에 자리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 두 바위에는 애닮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신라 때 바다를 장악했던 장보고가 최전방기지인 안면도에 승언장군을 지휘관으로 보냈다.
승언장군의 부인은 빼어난 미모를 지녔는데 두 사람의 금술이 하도 좋아 부하병사들의 질투가 심했다.
이를 안 승언장군은 바다 위, 두개의 바위섬에 초가집을 짓고 떨어져 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정을 나간 장군이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은 내내 바다만 바라보다 망부석이 되어버렸고
두 바위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다.
![]() |
|
우리의 사랑이 깊으나 언제나 하나가 되지 못하고
물이 차오르면 두 개의 섬이 되고 물이 빠지면 하나가 되니
그래도 내가 행복한 것은
언제나 마주 서서 바라볼 수 있음이다.
나 홀로 기다리는 동안에는 꽃이 아름다운 줄도 몰랐다.
해당화, 매화 눈부시게 피어나면
피어날 수 없는 내 사랑은 깊은 슬픔에 더욱 붉어져
해 저물 무렵마다 온통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내 마음 곱게 갈아 꽃지 백사장의 고운 모래 되고
내 눈물 모두 거두어 서해의 바다가 되고,
내 기다림에 지쳐 죽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천지를 뒤흔들며 나를 찾아와 바위가 된 당신
당신과 내 그림자 사이로 불꽃의 빛깔 물들이며 해가 질 때
사람들이 행복해 하니 이젠 나 또한 행복하네.
세월에 닳아 없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이지혜. 시인 -
태안의 천연기념물 - 모감주나무와 소나무 군락, 신두리해안사구
안면도에 들어서면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시선을 끈다.
이곳은 원래 섬 전체가 소나무 군락지로 조선 왕실에 필요한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만든 인공 숲이었다.
세월이 변모하면서 왕실도 없어지고 솔숲의 면적도 줄었지만 승언리의 숲은 아직도 무성하다.
승언리에는 휴양림이 들어서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훌륭한 산책로를 제공하고 있다.
방포해안에 자리한 모감주나무 군락은 1962년 천연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가 2m 안팎인 모감주나무 500여 그루가 빽빽하게 모여 군락을 이루고 있다.
모감주나무는 원래 중국에서 자생하는 식물인데 6~7월이면 노란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모감주열매는 염주알로 쓰이기 때문에 절에서 정원수로도 많이 심는다.
안면도의 모감주나무는 씨앗이 바닷물길을 타고 중국 산동반도에서 떠내려 와 바닷가에 닿으면서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태안군 이원면의 신두리 해안사구천연기념물 제431호는
우리나라 최대의 사구지대로 알려져 있다.
사구는 육지와 바다의 완충지대로 해안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농토를 보호하고 바닷물의 유입을 자연스럽게 막는 역할을 한다.
신두리사구는 빙하기 이후 약 1만 5천 년 전부터 서서히 형성된 것으로
북서풍과 파도에 의해 모래가 해안가로 운반되면서 오랜 세월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에는 해안 사구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는데,
해당화 군락지, 통보리사초, 모래지치, 갯완두, 갯매꽃을 비롯하여
갯방풍과 같이 희귀식물들이 분포하여 있으며
표범장지뱀, 종다리, 맹꽁이, 쇠똥구리, 사구의 웅덩이에 산란을 하는 아무르산개구리, 금개구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광활한 모습이 우리나라 유일의 사막으로 알려져
태안군 관광자원의 한 축으로도 명성을 높이고 있다.
태안의 문화유적 - 뱃길을 보살피던 마애불과 서해교역의 관문 안흥성
태안읍에 자리한 백화산 등성 바위에는 세부처가 새겨져 있다.
국보 제307호인 태안마애삼존불이다.
서산마애삼존불에 비해 마모가 되어 덜 알려져 있으나 조성연대는 그보다 앞선 시기로 추정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치자면 원조 마애삼존불인 셈이다.
가운데 본존불이 여느 삼존불에 비해 큰 태안마애삼존불은
양 옆으로 2m 남짓한 여래상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는 1.3m 가량의 보살이 보관을 쓰고 서있다.
세 부처의 명칭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았지만
왼쪽이 석가여래, 가운데가 관음보살, 오른쪽은 약사여래로 보고 있다.
태안마애삼존불은 대략 7세기쯤 서산마애삼존불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다.
다만 그 형태가 단순하고 조각수법이 소박한 것으로 미루어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서해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백제 말기 당나라와의 교역길이 평탄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새겨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흥항은 조선시대에 번성했던 항구였다.
바로 앞 섬인 신진도에는 아직도 중국 성인 퉁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중국인들의 왕래가 잦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이 항구를 드나들던 명나라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안흥항에 보기 좋게 성을 쌓고 호화로운 집들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안흥성은 큰 영화를 누렸으나 동학농민전쟁 당시 무너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안흥성은 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 글, 사진 : 남정우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6-30
'찾아 떠나고(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人文기행 - 소래 포구 (0) | 2008.07.07 |
---|---|
人文기행 - 미당 서정주 / 질마재 (0) | 2008.07.07 |
제주도의 삼별초 유적 (0) | 2008.06.12 |
전남 신안군 증도 / 태평염전 - 소금꽃이 피는 마을 (0) | 2008.06.11 |
정조의 개혁정책과 화성 건설 (0) | 2008.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