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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창종자들] 원불교 - 소태산의 깨달음은 '일원(一圓)의 이치

Gijuzzang Dream 2008. 6. 19. 23:39

 

 

 

 

[한국의 창종자들]  원불교(圓佛敎)

 

 

 

 

원불교 소태산 박중빈 ➀ 

 

 

소태산의 깨달음은 ‘일원(一圓)의 이치’

 

원불교라는 교명, 여기서 비롯… “불교와는 큰 관계 없어”

 

육대도령(원기 17년 4월 1일 발간)에

실린 소태산 박중빈의 진영.

원불교를 창종한 이는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이다.

원불교에서는 그를 대종사(大宗師)로 칭한다.

그는 구한말이라는 격변의 시기에 태어났다.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용리 영촌. 벽지의 마을이 그의 고향이다. 어려서 이름은 진섭(鎭燮)이었고 결혼 후 처화(處化)라는 자를 썼다.

중빈(重彬)은 종교적 각성을 이룬 후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그의 시대는 민족사의 격변기로 갖가지 종교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던 시절이다.

민족종교의 대표 격인 천도교, 증산 계열의 종교, 대종교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태어났다. 게다가 그 종교의 창종자들은 민족 침탈이라는 현실의 해결책으로 종교적 대안을 제시했다.

그만큼 현실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가 모든 이의 관심사였다. 소태산 박중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 무렵 종교를 창종한 이들이 대체로 강렬한 사회적 관심을 가진 데 비해 그는 처음부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사색에 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저축조합 세우고 간척사업 시작

 

소태산은 열 살을 전후해서 2년 남짓밖에는 글공부를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철학적 의문과 종교적 관심이 컸다고 한다.

 

원불교 경전인 대종경(大宗經)에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소태산의 육성이 남아 있다.

“나는 또 어렸을 때부터 우연히 진리 방면에 취미를 갖기 시작하여, 독서에는 별로 정성이 적고,

밤낮으로 생각하는 바가 현묘한 그 이치여서, 이로 인하여 침식을 다 잊고 명상에 잠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그로부터 계속되는 정성이 조금도 쉬지 않았다.”

글 공부를 하던 11살 무렵 산신 이야기를 듣고는 직접 만나보겠다고 집 뒤 마당바위에 올라

5년 동안 열렬히 기도했다는 행적은 그의 강렬한 종교적 호기심을 보여준다.

시대 상황은 그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산신령이나 도사에 대한 환상이 밤낮으로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를 해도 산신과 도사를 만날 수 없자 그는 깊은 회의와 사색에 빠져들었다.

대종경에는 ‘이 일을 장차 어찌 할고?’라는 의심에 잠겼다고 전한다.

일상은 안중에 없고 오직 그 생각에만 잠겨 있어서 주변에서는 폐인이 됐다고 그를 피하기까지 했다.

1916년 4월 28일은 원불교의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이다.

그날 새벽 오랜 의심 끝에 소태산 박중빈의 깨달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깨달은 궁극의 경지를 ‘일원(一圓)의 이치’라고 표현했다.

원불교(圓佛敎)라는 교명은 이로부터 비롯됐다.

원불교라는 이름을 들으면 갖게 되는 의문이 있다.

원불교는 불교인가 아닌가. 불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그 물음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불교와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원불교의 핵심은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개벽(開闢)’의 사상입니다.

원불교도 19세기 말 천도교, 동학, 증산교로 이어지는 새시대에 대한 종교적 열망의 흐름 속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불교적인 언어와 사상이 약간은 있을지라도 원불교의 중심은 아닙니다.”

소태산은 개교를 선언하면서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세웠다.

세상이 바뀌니 정신을 바꾸자는 선언이다.

물질문명의 시대가 닥쳐오므로 그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로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묵은 세상의 끝이요 새 세상의 처음’이니 ‘동방에 밝은 해가 솟아오르는 때’가 됐고

모두 이에 대비해야한다고 천명했다.

그가 깨쳤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방에서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몰려든 사람 중에는 후에 그의 법통을 이은 정산종사도 있다.

박중빈은 그 중에서 아홉 명의 제자를 두고 독창적인 종교적 실험을 펼친다.

우선 저축조합을 세우고 금주금연, 허례허식 폐지, 미신타파, 근검저축이라는 생활개선과

사회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비현실적 구원의 추구가 아니라 현실적 삶의 개선을 실천한 점은

분명 당대의 종교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원불교는 이후에도 사회운동을 지속해간다.

 


“함께 일하는 사람을 부처로 섬겨라”

 

저축조합을 기반으로 박중빈이 시도한 것은 갯벌을 막는 간척사업이었다.

방언공사라고 표현하는 간척사업을 통해 8만5950여㎡(2만6000평)에 이르는 농지가 생겼다.

하나 둘씩 모인 교인들이 오직 맨몸으로 이룬 대역사였다.

정관평이라고 부르는 간척지와 인근 기도처 등은 영산성지로 원불교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초기 방언공사로 만든 간척지.


교인들은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박중빈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정신수양을 했다.

육신과 정신이 모두 온전해지는 ‘영육쌍전(靈肉雙全)’의 교의를 실천했다고 한다.

최초의 교당인 구간도실도 만들어졌다. 이로부터 원불교는 교단이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이 생겼고

세간의 신뢰를 얻었다. 그와 함께 일제도 이 ‘정체불명’의 집단을 주목하고 있었다.

공사가 끝날 무렵 박중빈은 영광경찰서에 소환돼 일주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배후가 있는지 불온한 세력은 아닌지,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 샅샅이 검사했다.

경찰서에서 풀려나자 박중빈은 곧바로 처소를 옮겨버렸다.

영산에서 칠산 바다 건너 변산반도가 그가 찾은 곳이다.

이곳에서 원불교의 초기 경전과 교리, 그리고 수행체계가 완성된다.

박중빈은 ‘조선불교혁신론’을 지어 불교를 포함해 당시 기성 종교의 무기력을 지적했다.

그가 제시한 원불교의 방향은 “외방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 과거의 불교를 현재와 미래의 불교로,

산중승려 몇 사람의 불교를 일반대중의 불교로 혁신”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때부터 불교의 수행법이나 용어를 적극수용하게 된다.

당시 박중빈은 철저히 생활과 밀착되는 종교적 실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불공하러 가는 노인을 불러 절에 있는 부처보다는 주변의 가족에 더 공을 들이라는

실사불공(實事佛供)의 가르침이라든가, 함께 일하는 사람을 살아 있는 부처로 섬기라는 일화 등이

이때 주로 나온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파격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변산반도 거쳐 익산에 보금자리


사상의 모색기를 거쳐 원불교가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곳은 전북 익산.

지금의 원광대학교가 있는 원불교 중앙총부가 위치한 곳이다.

1924년 박중빈은 이곳에서 ‘불법연구회’라는 교명으로 제자들을 이끌어 활동을 시작한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 모여 낮에는 엿장수나 소작농, 고무공장 여직공 등으로 일하고

밤에는 함께 공부하는 생활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소태산 박중빈이 깨달음을 얻은

전남 영광의 영산성지 대각터에 만고일월비가 세워져 있다.


1925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의 유사종교 현황 자료에는

불법연구회의 인원을 1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른 종교에 비해 출발 당시의 교세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 열렬한 핵심 신자들이었다.

1929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는 “불법연구회는 전국 대표 150명이 모인 가운데 정기대회를 개최했다.

불법연구회는 이상왕국을 건설하고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의 3대 강령을 내세웠으며

400여의 회원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어 교세가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윤이흠 교수는 당시 민족종교가 선택할 수 있었던 상황을 돌아보면

일상생활과 종교생활을 적극 통합하려는 원불교의 시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일제하에서 다른 민족종교들이 탄압을 받고 있던 실정입니다.

원불교는 그 탄압을 피하려고 사회운동에 힘쓴 점이 있습니다.

증산교나 대종교처럼 항일의 성격은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사회의 모순을 개선하고 물산과 인성의 개발에 헌신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불교의 이런 접근은 조용히 교세를 확산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익산의 총부에는 교육시설과 필요한 갖가지 시설이 들어서고 있었다.

활동 초기부터 생활태도와 종교 활동의 모습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1925년 5월 16일자 동아일보는 ‘100명의 회원이 영농조합을 이루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하는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특히 ‘일정한 규율하에 상호 협력하여 정신을 수양하는 태도는

가톨릭 교회의 수도원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 앞날이 주목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그전까지 볼 수 없었던 종교적 실천임을 시사하고 있다.

소태산 박중빈은 원불교를 통해 새로운 종교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이 병들었고

그 병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병든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라고 했다.

육신의 병은 의사를 찾아가 고칠 수 있지만 마음의 병은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고칠 수 있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개벽의 시대에 새로운 종교의 기틀을 만들어놓고 그는 1943년에 원적에 들었다.

그 이후부터 소태산 박중빈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인 정산종사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맞아 발전한다.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2008 06/24, 경향  뉴스메이커 780호

 

 

 

 

 


 

원불교 소태산 박중빈②

 

 정산종사, 소태산의 법통을 받다

 


9인 제자 중앙위에 임명… 집단적인 실천수행 틀 세워

소태산의 법통을 이어받은 정산종사.

 

소태산 박중빈은 새로운 종교를 만든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받아 파란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다.”

그 실천을 위해 초기부터 공동생활과 공동실천을 내세웠다. 초기 교단은 9명의 제자를 중심으로 출발했다. 처음 모인 제자는 8명. 소태산은 그들에게 상수제자는 곧 올 누군가를 세울 것이라고 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정산종사 송규(鼎山宗師 宋奎, 1900~1962)다. 그는 소태산의 법통을 받은 제2대 종사로 교단의 틀을 세우고 교법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토굴 수행 등 혹독한 수련시켜

 

정산종사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송도군(宋道君)이란 이름을 썼지만 소태산을 만나 규(奎)라는 이름을 받았다. 열세 살 때 결혼을 했고, 실생활보다 도인을 만나겠다는 열망이 강해 집 뒤쪽에 있는 거북바위 아래 정화수를 올려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그는 열여덟 살에 도인을 만나 크게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가야산에서 증산교인을 만나 태을주(太乙呪)를 배우고 공부를 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전라도에 도(道)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전라도 일원을 돌아보기도 했다.

강증산의 부인 고수부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해 증산의 여동생 선돌부인을 집으로 모셔왔다. 석 달 동안 함께 기도를 하고 다시 증산의 고향 손바라기로 가 수도를 계속한다. 전하기로는 이때 증산의 딸 강순임으로부터 ‘정심요결’이라는 비서를 받아 품에 안고 밤낮으로 수련했다고 한다.

강증산이 도를 이루었다는 모악산 대원사에 머물며 주문과 기도로 수련을 하자 주변에 도인이 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번졌다. 당시는 죽은 강증산이 10년 만에 다시 온다는 열망이 있던 때라 송도군의 주변에도 사람들이 몰렸다. 그를 찾아온 증산교 신자를 따라 원평으로 거처를 옮겨 기도와 수련을 계속할 때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소태산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둘은 단박에 마음이 맞아 그 자리에서 형제의 의를 맺었다. 정산종사의 언행을 모은 ‘정산종사법어’에서는 당시의 소회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8, 9세 때부터 보통 인간의 길을 벗어나 모든 것을 다 알고 살 수는 없는 것인가 하고 마음 고통이 심하여, 집을 뛰쳐나와 이인을 찾기도 하고 혹은 하늘에 축원도 하여 9년간을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다행히 대종사를 뵌 그날부터 그 모든 고통이 일소됐다.” 도인을 만나겠다는 오랜 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북 익산시 원불교 중앙총부에 있는

정산종사 성탑.

후에 영산의 간척지 공사장을 찾아가 둘은 다시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소태산은 9인 제자의 중앙위에 송도군을 임명했다. 소태산의 신임은 각별했다. 정산종사를 두고 제자들에게 “이제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 만나려던 사람이 왔으니 우리 회상 창립의 일이 반이나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선언하며 종단의 법을 일으킬 사람이라고 예고한 것이다.

한국종교학회 김탁 박사는 둘의 만남이 갖는 의미를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민족종교 계열의 신종교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소태산도 나름의 종교적 구원을 골몰하고 있었고 정산도 도를 찾아 골몰하던 때였습니다. 둘의 만남은 이전의 종교와 다른 독자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계기가 됩니다. 원불교는 그 무렵의 신종교와는 확실히 다른 노선을 선택합니다.”

여타 종교가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여 교세를 넓혀갔다면 소태산과 정산은 개인을 넘어 집단적인 실천 수행으로 교단의 틀을 세워간 것이다. 소태산은 송도군에게 혹독한 수련을 시켰다. 간척지 공사장의 밥을 하여 사람들을 섬기거나 영산 옥녀봉 토굴에서 수행하기를 시켰다. 그는 소태산의 지시를 묵묵히 따랐다. 간척지 공사가 완공되자 소태산은 그에게 정산이라는 법호와 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산종사는 소태산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대종사를 뵈온 후로는 일호의 이의가 없이 오직 가르치시는 대로만 순종했으며, 다른 것은 모르지만 이 법으로 부처 되는 길만은 확실히 자신했다”고 하여 오직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소태산도 주변에 “정산을 대하길 나를 대하듯 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절대적인 신뢰를 주었다.

이후 소태산의 지시대로 변산의 월명암, 진안 미륵사 등지에서 종교적 수행을 계속해간다. 이후 스승의 부름으로 정산종사는 교단의 초기 역사를 모으고 소태산의 가르침을 정리했다. 초기 교단의 역사와 교리체계는 정산종사가 확립한 것이다.

유일학림, 원광대학교로 발전


정산종사가 초기에 강증산을 쫓아 수행하고 절에서 공부한 것은 원불교의 교리 안에 증산의 가르침과 불교적 요소가 혼재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종교학계에서는 이것이 원불교가 발전하는 데 힘이 되기도 했고, 반대로 정체의 원인으로 작용한 점도 있다고 지적한다. 외부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융통성이 있는 반면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데 부족한 점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잘 되면 모든 가치를 다 포용하지만 잘못될 경우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한계에 빠질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정산종사가 개성지부 봉불식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가운데가 정산종사). 사진에는 1947년(단기 4280년) 7월 3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1943년에 소태산은 입적했다. 정산종사는 곧바로 원불교의 법통을 이어받아 종지를 세워갔다. 갑자기 닥친 광복은 종교계에도 일대 충격을 주었다. 일제의 패망은 종교인들에게 이전과 다른 방식의 삶과 수행을 요구했다. 정산종사는 건국론(建國論)을 지어 새로운 사회에 맞는 종교적 실천을 제시하고 광복 직후의 혼란 속에 사회구호 활동에 역량을 모았다.

대외적으로 고아원을 설립하고 구호소를 만들었다. 교단 내부에는 유일학림이라는 교역자 전문교육기관을 만들어 교직자 양성에 교단의 명운을 걸었다. 유일학림의 전문부는 후에 원광대학교로 발전했다.

김탁 박사는 원불교에서 교역자 전문 교육기관을 세운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학이나 증산교 등에서는 교역자를 키우는 기관이 없었습니다. 일시적으로는 교세가 커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이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원불교는 일찍부터 교역자를 키워내고 교리를 체계화했습니다. 그것이 원불교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유지되는 배경 중 하나입니다.”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역자를 양성한 것은 정산종사의 역할이라는 분석이다. 교주 한 명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데서 벗어나 종교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정산종사가 초기 교단의 공동생활, 공동생산, 공동수행의 정신을 후대에서도 잃지 않고 지속하는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얘기다.

종교적 가르침은 삼동윤리에 집약

 

원불교는 지금도 교단의 중요한 방향을 정하는 데 집단의 의사를 반영한다. 간부회의를 거치고 대중의 공의를 거쳐 모든 일을 결정해가는 것이다. 교학 연구는 원광대학교의 원불교학과뿐 아니라 영산대학과 원불교 연구자의 모임인 신룡교학회의 논의와 검토도 거친다. 신룡교학회는 박사급 이상의 학자만 해도 수백 명에 이르러 원불교 교역자 양성의 결실인 셈이다.

정산종사는 다시 제2의 개교에 해당하는 교명 변경에 나섰다. 1948년 1월 16일부로 익산 총부 설립 때부터 임시로 써오던 ‘불법연구회’라는 명칭을 버리고 ‘원불교(圓佛敎)’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소태산이 얻은 원각의 가르침을 교명에 본격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불교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종교로서 정체성을 드러낸 다.

정산종사의 종교적 가르침은 ‘삼동윤리(三同倫理)’에 집약돼 있다. 세상 모든 종교와 생명과 사람들이 하나라는 동원도리(同原道理), 동기연계(同氣連契), 동척사업(同拓事業)이 그것이다. 그는 삼동윤리를 집약하여 밝히기를 “한 울 안 한 이치에 한 집 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를 건설하자”고 했다.

정산종사는 일생을 종교적 탐구에 바쳤다. 모순과 혼란이 극대화된 시기에 일찍부터 세상을 구원할 무엇인가를 찾아나선 점은 당대의 창종자들과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그는 스승을 만났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자신이 얻은 바를 쌓아올렸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평생에 기쁜 일 두 가지가 있노니. 첫째는 이 나라에 태어남이오, 둘째는 대종사를 만남이니라”고 말했다. 가혹한 역사의 현실에서 태어난 것도 기쁨이고 스승을 만나 자신의 뜻을 펼 수 있었던 것도 행복이라는 것이다. 소태산의 종교적 깨달음과 정산종사의 가르침은 원불교의 활동 속에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원불교가 펼치려 했던 일원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2008 07/01, 경향, 뉴스메이커 781호

 

 

 

 

 

 

 

원불교 소태산 박중빈③

 

“불법이 생활이고 생활이 불법이다”

교리와 경전에 담긴 핵심, 이론 중심 떠나 현실적인 실천 행동 강조

1924년 전라북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현 익산시 신룡동)에 세워진 원불교 총본산에서 소태산 박중빈 종사가 종무를 보던 집무실.


한 개인의 각성은 교리와 조직과 의식을 더하면서 종교로 발전한다. 원불교는 비교적 일찍부터 교리를 체계화하고 성직자 조직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소태산 박중빈과 함께 초기 교단을 만든 아홉 명의 제자는 각자 일산(一山)부터 팔산(八山)과 정산(鼎山)이라는 법호를 얻었다. 초기 교단은 이들에서 비롯되고, 이로써 교리의 기본과 교단의 역사가 시작된다.

원불교의 교의를 담은 기본 경전은 교전(敎典)이다. 교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정전과, 소태산의 언행을 모으고 초기 제자들의 해석을 담은 대종경(大宗經)으로 이루어졌다. 정전은 소태산이 직접 지은 것이다. 총독부가 출간을 저지하자 불교정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간행했다. 교전을 기본으로 불교경전을 모은 불조요경과 원불교예전, 정산종사법어, 원불교교사 등을 합하여 7종교서 혹은 9종교서를 기본 교과서로 삼는다.

교단 초기부터 여성 교역자 양성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원불교학과 박희종 교수는 원불교 교리와 경전에 담긴 핵심 가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불교는 이론 중심을 떠나 현실적인 실천 행동을 강조합니다.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생활시불법(生活是佛法)’, 즉 불법이 생활이고 생활이 불법이라는 대종사의 가르침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와 소통하는 종교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어 발전해갑니다.” 종교적 허례보다는 실제 생활을 바꾸어가는 것이 원불교의 지향점이라는 것이다.

소태산은 개벽(開闢)을 내세우며 종교를 세웠다. 당시 동학과 증산의 가르침, 천도교 등에서도 개벽을 주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모든 질서가 재편되는 사회혁명적인 후천 세계를 기다렸지만 현실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 지속되어 가난과 억압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국종교학회 김탁 박사는 소태산의 개벽은 당시 팽배하던 개벽관과 양상을 달리한다고 지적한다. “개벽이 이루어진 새세상이 곧 온다는 주장에 민중들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실패하고 좌절이 깊어진 상황에서 소태산은 개벽의 성격을 달리 규정했습니다. 세상의 변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개벽으로 보고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벽은 갑자기 닥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애써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원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소태산 박중빈이 직접 지은 불교정전.

원불교는 교역에 전념하는 출가자를 전무출신(專務出身)이라고 한다. 그중 여성교역자는 원불교 교단이 정착하는 데 비교적 큰 힘이 되었다. 당시 시대상은 남녀불평등이 극에 달한 때였다. 원불교에 앞선 천도교 등도 남녀평등을 주장했으나 여성이 실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비하면 원불교는 교단 초기부터 여성 교역자를 적극 양성했다.

원불교 여성 교역자는 정녀(貞女), 즉 정절을 서약한 여성이다. 이들은 익산총부가 생기면서 낮에는 고무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교리공부를 하며 초기 교단을 이룬 주인공이다.

1920년 소태산이 주요 교리로 발표한 사요(四要) 중 첫 번째는 남녀권리동일의 조항이다. 남녀는 모두 자체로서 일원의 성품을 갖추고 있으므로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는 남녀가 동등하지 못하고 서로 의존적인 것이 세상의 병 중 하나라고 보았다. “나는 남녀권리동일 과목을 내어 남녀에게 교육도 같이 시키고 의무 책임도 같이 지우며 지위나 권리도 같이 주어서 서로 자신의 힘을 장려한다.”

선언적인 의미뿐 아니라 교단의 실제 운영에도 남녀권리동일이 반영됐다. 소태산이 제정한 교단규약에는 최고의사결정기구로 수위단(首位團)을 두는 데 남녀 동수로 구성했다. 교단제도부터 남녀평등제로 확고히 만들어간 것이다.

미주선학대학원 세워 포교 세계화


여성 교역자들은 5년에 한 차례씩 정녀선서라는 독신선언을 하고 있다. 2001년 11월 정녀선서를 앞둔 교무 64명 중 31명이 선언을 거부했다. 여성에게만 선서를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남녀 차별이라는 것이다.

원불교 여성회 한지현 회장은 정녀선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철저한 양성평등이 교조의 교리입니다. 원래의 교리에는 정녀선서가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마음을 다잡고 결심하는 의미로 정녀선서를 하는 것이 관례가 된 것입니다.”

남성 교역자의 90%가 결혼을 한 현실에서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는 문제 제기다. 그러나 정녀들의 선언 거부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고 말았다.

원불교는 교단의 주요 사항을 수위단 회의에서 논의하여 결정한다. 교역자로 구성된 정수위단은 남녀 각 9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재가자는 남녀 4명씩으로 호법수위단을 구성해 교단 운영에 참가한다. 정녀의 선언 거부는 원불교 개혁의 한 지표로 사회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교단 내에서는 논의가 없었다. 수위단 회의에 상정하면 결정해야 하는데 아직은 거론 자체가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원불교의 집단적인 의사 결정은 민주적이고 이상적이지만 한편에서는 추진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종교 조직의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서 활력을 잃고 현실에 안주한다는 지적도 받는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원불교가 초창기에 가지고 있던 혁신적인 동력을 잃었다는 자성도 나오고 있다.

소태산의 창교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내부의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나 없이 모든 이를 위해 헌신하자는 무아봉공(無我捧供),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이룬다는 이소성대(以小成大), 여한 없이 행한다는 사무여한(事無餘恨)의 근본정신이 옅어지면서 교단이 정체됐다는 반성이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최근 원불교 학자들이 교리에 대해 새로운 정립을 모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발전의 전거를 마련하기 위해 젊은 학자들은 불교적인 모습에 더 주목하자고 주장합니다. 그 이전 세대는 원불교만의 독창적인 부분이 더 강하므로 그것을 더 살펴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학자들 사이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치열한 자기 점검의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원불교의 주된 교리를 연구 교육하고 교역자를 양성하는 기관은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와 영산선학대학, 원불교대학원대학이 있다. 최근 들어 원불교의 세계화를 내걸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미주선학대학원을 세웠다. 미주 지역에 교역자 양성의 기반을 만들어 국제 포교 활성화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개벽이 외부에서 갑자기 닥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준비되고 만들어지는 것인 것처럼 원불교의 활로도 안으로부터 시작될 전망이다. 건강한 집단이라면 구성원의 고뇌와 문제 제기가 거듭될수록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힘은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2008 07/08, 경향,  뉴스메이커 782호

 

 

 

 

 


 

원불교 소태산 박중빈④

  

 창종 100주년 앞두고 새 도약 준비

 


포교와 사회사업 집중… 원음방송 세우고 군종장교 배출

현재 원불교를 이끌고 있는

제 5대 종법사 경산 장응철 종사.

전국 520개 교당, 해외 19개국 60개 교당, 현직 성직자 1500명, 입교자 70만 명, 2005년 통계청 인구조사 원불교 응답자 13만 명.

창종 93주년이 된 원불교의 현재 모습이다.

원불교가 지나온 역정을 살펴보면 큰 영광도 없고 큰 좌절도 없다.

소리 소문 없이 일하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원불교는 창종 100주년을 앞두고 올해부터 7년 동안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정했다.

2년 전 원불교의 수장을 맡은 경산 장응철(耕山 張應哲) 종법사는 무엇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체제와 제도의 개혁에 힘을 모으겠다고 밝혔다.

 

원불교를 적극 포교하고 신앙생활에 힘을 기울이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종교적 실천에 앞설 것을 권했다.

포교와 사회사업에 힘을 집중하여 활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교단의 내적으로는 창립 정신으로 돌아가 원불교적인 문화를 만들어가자고 강조한다.


어린이집 등 복지기관 184곳 운영


앞서 종법사를 맡았던 좌산 이광정(左山 李廣淨) 종사가 내세웠던 기치가 ‘밖으로 미래로 사회로 세계로’였던 점과 많은 부분에서 대비된다.

 

좌산 종사는 6년 임기의 종법사를 두 번 연임하면서 원불교의 대외적인 위상을 높였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원음방송을 세우고 원불교 교무의 군종장교 진출을 성사시켰다.

원음방송은 총부가 있는 익산과 서울, 부산에 이어 올해부터 광주에서 방송을 시작했고 대구에서 개국을 준비하고 있다.

“원불교가 군소 종단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방송과 군종장교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것이 좌산 종사의 강렬한 의지였다. 결국 꿈을 세운 지 20년 만에 방송국을 설립하는 데 성공했고, 원불교만의 특색 있는 전파를 발사한 지 10년이 지났다. 원음방송은 진행자를 비롯해 방송 제작 대부분을 교역자인 교무(敎務)들이 전담하고 있어 종교방송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원불교역사박물관에 모신

소태산 박중빈 좌상.

원불교는 여성 교역자의 비중이 크다. 전체 교역자 중 정녀(貞女) 비율은 60% 정도이며 교화 현장에서는 80% 정도를 차지한다. 이들은 초기부터 절대적인 헌신으로 교단의 발전과 안정을 이끌었다.

변화된 시대 상황은 여성 교역자들이 개혁을 이끄는 역할에 나서도록 한다.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 쪽진 머리의 전통적인 정녀의 모습도 변화의 요구를 맞고 있다.

발단은 미국 포교 현장에서 시작됐다.

동양의 전통적인 모습은 이국적인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평등이라는 원불교의 가치를 전하는 데 장애가 됐다.

결국 현장 정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머리를 자르고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바꿔 입도록 했다. 3년의 실험기간이 끝나가자 복식을 원위치해야 한다는 교단 원로들의 보수적인 주장과 변화를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격론을 벌이고 있다.

원불교는 매년 9월 출가교화단총단회라는 이름으로 전체 교역자가 모여 현안을 논의한다. 제도 개선이나 복식 문제 등 민감한 사안을 주제로 삼아 1박 2일 동안 토론하고 교단 전체의 방향을 정해가는 것이다. 제시된 의견을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수위단 회의에 올리면 투표로 결정하는 방식이다.

원불교가 초기부터 주력한 것은 사회사업이다.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새로운 시대를 맞자는 원불교의 이념은 개벽의 실천으로 사회운동에 주목했고, 민족종교 중에서 특히 사회 개발에 헌신한 특성이 두드러진다”면서 “다른 민족종교가 항일에 나섰다가 급격히 탄압받은 데 비해 사회운동에 전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박해를 피해가는 원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저축조합과 간척사업, 양잠운동과 선농일치의 농업활동 등 사회운동적인 원불교의 활동은 해방 이후 적극적인 사회구제와 교육사업으로 이어졌다.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은 20개, 어린이집 150개를 비롯해 전체 184개의 복지기관이 있다.

전국 14개에 이르는 노인복지법인은 한 곳에서 수용과 치료, 요양보호사 교육까지 모두 이루어진다.

원불교의 교세에 비하면 과할 정도로 복지기관을 운영하고 있어 종교가 사회를 위해 실천해야 할 역할을 보여준다.


시국대법회 통해 사회적 관심 동참

교육사업은 교단 초기부터 힘을 모은 영역이다.

원광대를 비롯해 6곳의 중·고등학교와 교당마다 운영하는 유치원, 기타 교육기관 등 인재 양성과 교육은 원불교의 역량을 보여주는 또 다른 분야다.

교육기관 중 특히 주목할 곳은 8개의 대안학교다.

원불교의 영산 성지고등학교는 국내 최초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대안학교로 교육계의 눈길을 끄는 곳이다. 인성교육을 목표로 제3의 교육을 제시하고 모범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다.

일례로, 원불교는 탈북 청소년을 교육하기 위해 안성 한겨레중·고등학교의 운영을 맡고 있다.

탄탄한 활동에 비추어 밖으로 드러난 원불교의 분위기는 보수적이고 은둔적이다.

지난 10년 동안 원불교의 교세는 크게 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정체기인 것이다.

 

원불교 중앙총부 나상호 기획실장은 전망이 나쁘지만은 않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단 원불교의 의사결정 과정이 민주적인 만큼 복잡합니다. 규모에 비해 조직이 방만한 면도 있고 예산 집행도 중복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교단 내부에서 공감하고 있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조정해나갈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행한 대로 교육·교화·자선에 힘쓰면서 시대에 맞춰간다면 원불교 진리의 가르침을 널리 펼 수 있을 것입니다.”

6월 8일 오후 6시 서울시청광장에 300여 명의 원불교 교무와 2000여 명의 신도가 모인다.

‘국민주권회복과 평화를 위한 원불교 시국대법회’를 위해서다. 좀처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원불교 교무들이지만 사회적 관심에 적극 동참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원불교 내부에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같은 성격의 단체가 있다. 사회개벽교무단이다.

그들은 1987년부터 통일과 평화, 생명운동의 현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종교는 반드시 평화와 생명 존중과 인간의 가치에 대해 나서서 대답해야 합니다. 원불교의 사명은 평화와 생명과 은혜입니다. 그것을 현실에서 이끌기 위해 나설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갈등과 폭력이 가득할 때 폭력을 멈추고 꽃을 들게 하는 것이 종교의 힘입니다.”

원불교 사회개벽교무단 정상덕 교무의 이야기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대각 이후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끊어지지 않고 흘러온 법맥이 발전과 쇠락의 기로에 서 있다.

원불교 교단은 다시 개교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세기 전처럼 지금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기치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앞둔 정신의 개벽은 과연 어떤 것인지 자신과 세상을 향해 진지한 질문을 던질 때다.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2008 07/15   뉴스메이커 7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