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문화유산 17 ] 전남도청 본관 | ||||||||||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적 현장
광주광역시를 방문해보지 않은 타 지역 사람들에게도 ‘금남로’라는 이름이 낯설게 들리지 않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금남로라는 이름이 광주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그리고 한국 현대사와 뗄 수 없는 어떤 상징성을 갖는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금남로의 시작점에 하얀색 3층 건물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분수대 넘어 금남로를 바라보고 있는 이 건물이 전라남도청 본관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광주’라는 상징적 의미와 연관된 역사적 사건들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 금남로이고 전남도청 본관 앞 광장이다.
전남도청은 전라남도의 행정적 중심이기도 하지만 광주광역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일제강점기로부터 7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광주·전남과 연관된 역사적 사건들의 증언자가 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과 건축”이라는 건축 잡지(1931년 2월호)에 실린 기사를 보면 건립 당시 전남도청 건물은 벽돌조 2층 건물로 바닥과 계단 등에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였고 외장은 붉은 벽돌과 화강석, 인조석 등으로 마감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준공 당시 건축면적은 126.5평이었고 연면적은 262평이었다. 공사기간은 대략 5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1930년 6월 23일에 기공하였고 같은 해 12월 5일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3만 3천원이 소요되어 평당 공사비는 120원 정도였다. 건물의 시공은 일본 건설 회사였던 오쿠라토목주식회사(大倉土木株式會社)에서 담당하였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성재판소(1928년)나 충남도청 본관(1932년)과 같은 동시기에 지어졌던 관공서 건물과 유사한 형식을 띄고 있다.
건물 정면 중앙의 출입구는 기하학적인 요철을 둔 사각 기둥의 캐노피로 처리하였고, 건물의 중앙 부분을 좌우측 보다 높게 하고 좌우 대칭으로 설계하여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건물의 좌우측 부분이 단순한 수직창으로 처리된 것과는 달리 현관 위쪽에는 3개의 아치창을 장식적으로 처리하여 좌우측의 날개 부분과 구별되는 위계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설계 수법은 건물에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기 위한 관공서 건물의 전형적인 수법들이었다. 붉은 벽돌의 외관과 화강석 및 인조석의 장식이 대조를 이루는 건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이 건물은 백색 도료로 도색되어 준공 당시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1975년 3층으로 증축되었고 신축건물과 연결되면서 확장되었다. 증축된 3층 부분은 건축가 김태만이 설계한 것으로 1, 2층에 비해 단순화되기는 하였으나 초기 설계와 유사한 형식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 지방의 관공서 건물은 일반적으로 해당 지방 관청에서 직접 설계하였다. 전남도청 본관 역시 전라남도 회계과 영선계에서 설계하였는데, 당시 이 건물의 설계를 담당했던 사람이 김순하(金舜河, 1901∼1966)라는 한국인 건축가였다.
김순하는 일제강점기 한국 내에서 최고의 공업 교육기관이었던 3년제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1925년에 졸업하고 1933년 총독부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전라남도에서 근무하였다. 전라남도에서 근무하는 동안 김순하는 전남도청 본관 건물 뿐만 아니라 현재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전남도청 회의실을 설계한 대표적인 한국인 건축가였다.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6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향후 백색 도료를 벗겨내어 본래의 외관을 되찾을 수 있다면 소중한 우리의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 ||||||||||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대문화유산] 15. 舊 대구사범학교 본관 및 강당 (0) | 2008.06.18 |
---|---|
[근대문화유산] 16. 여수 애양교회 (0) | 2008.06.18 |
[근대문화유산] 18. 나주 노안천주교회 (0) | 2008.06.18 |
[근대문화유산] 19. 舊 호남은행 목포지점 (0) | 2008.06.18 |
[근대문화유산] 20.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 (0) | 2008.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