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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이규보의 <동명왕편>

Gijuzzang Dream 2008. 6. 11. 19:29

 

 

 

 

 청년 이규보의 꿈과 「동명왕편」

 

 

 

 

김인호(중세사 1분과)


 

1. 이규보의 꿈과 이름

 

이규보(李奎報)의 나이 26세, 그는 아직 청년이었다. 이 때 그는 유명한 「동명왕편」을 지었다.

당시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그의 바램은 세속적인 것이었다. 벼슬길에 나아가는 일이다.

특히 이규보처럼 지방 출신이 출세하는 길은 당시로는 이것뿐이었다.

 

이규보는 1168년(의종 22년)에 태어났다. 태어난 후 2년 뒤에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후 그는 무신들간의 권력 투쟁과 몽골과의 전쟁을 치루는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의 첫 이름은 인저(仁底)였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이름을 중간에 바꾸는 경우가 많다. 그 역시 그러했다.

이름을 바꾸게 된 계기는 시험과 관련이 있다. 출세의 첫 관문이 과거 시험 중에 하나인 사마시였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던 그에게 사마시 통과는 간단한 일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14세부터 다닌 명문 사립학교에서 그는 모의시험 때마다 매번 일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시는 만만한 관문이 아니었다. 세 차례나 낙방한 그는 벌써 스물 두 살이었다.

시험합격에 대한 중압감은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이 때 꿈에 나타난 것이 규성(奎星)이다.

그가 꿈에 노인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았다.

그들은 하늘의 별인 28수(宿)였고, 이규보는 자신의 합격 여부를 물었다.

그 중 하나가 문장을 담당한다는 규성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이 때 이규보는 잠이 깨었다.

결과가 궁금했던 이규보는 다시 꿈을 꾸어 보니 장원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름을 고치고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 그 결과는 당연히 장원이었다.

규성에게 보답한다는 이름, 그래서 규보(奎報)라고 했던 것이다.

이규보의 소망과 집착이 이렇게 꿈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2. 젊은 날과 「동명왕편」

 

그는 벼슬길에 나아간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선비가 벼슬을 시작하는 것은, 구차하게 자기 한 몸의 영달만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개 배운 것을 정사에 실현하고, 경제시책(經濟施策)을 힘써 만들어

왕실(王室)을 위해 실시해서, 영원히 이름을 전하여 소멸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국이상국집》 상국 최선에게 올리는 글) 



(사진 1) 이규보 무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도 소재)

 

그러나 관직을 얻기 전에 그의 앞에 다가온 불행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1191년(명종 21) 8월,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이 해는 그에게 불운의 연속이었다.

1월에는 자신을 관직에 추천해 줄 수 있는 이지명(李知命)이 죽었다.

그는 이규보의 예부시를 맡았던 시험관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시험관과 합격자 사이에 특별한 인연이 맺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른바 좌주와 문생이라는, 아버지와 아들같은 사이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지명의 사망은 이규보의 앞 길에 청천벽력이었다.

 

여기에 더한 아버지의 죽음, 그에게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는 개경의 송악산 북쪽에 있는 천마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말하며 세속과 거리를 두었다.

흰구름처럼 떠돌아 다닌다는 뜻이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나가고 그는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봄에 그는 『삼국사』라는 역사책을 얻어보게 된다.

이 책에서 이규보는 고구려의 건국자 주몽에 대한 얘기를 가장 인상 깊게 보았다.

 

당시 주몽, 즉 동명왕에 대한 얘기가 민간에 많이 떠돌았다. 그는 이전에는 여기에 관심이 없었다.

유학을 공부했던 그는 공자가 괴이한 힘과 여러 잡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는 뜻을 받들어

기이한 얘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예전에 중국 역사책에서 고구려 건국과 관련된 사실을 보았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기록이 너무 소략했기 때문이다.

 

『삼국사』를 세 번이나 보았던 그에게 생각의 대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전의 기이하고 환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동명왕 얘기가 성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에게 생긴 생각의 변환,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이규보만이 알 뿐이다.

 

그가 느낀 감흥은 곧바로 장편의 서사시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규보는 ‘고려가 성인(聖人)의 나라’라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시를 썼다 주장한다.

성인이란 주몽을 말하며, 이규보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국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했다.

아마도 그는 당시 무인집정자들 앞에 왜소해진 고려 국왕의 존재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아가 자부심을 가져야 할 고려국가의 위상은 동생뻘이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져 있었다. 이렇게 작아진 현실은 그의 좌절된 꿈과 오버랩되었을 것이다.

 

이규보는 혼란스러운 국가를 바로 잡을 영웅의 탄생을 고대했다.

백운거사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온 이규보에게 다시 꿈을 꾸게 하는 것,

그것이 주몽의 얘기라는 뜻이다.

 

3. 「동명왕편」의 노래

 

「동명왕편」은 매우 긴 장편 서사시이다.

형식은 본문에 시를 배치하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삼국사』에 실린 역사적 사실을 붙였다.

이를 살펴보면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와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몽 탄생과 관련된 부분을 보면, 비슷하지만

『삼국사』의 내용이 『삼국사기』보다 과장이 심하다.

 


(사진 2)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 부분

 

주몽의 영웅성은 그의 탄생과정부터 활쏘기 능력, 신비한 힘 등으로 뒷받침된다.

아버지인 해모수와 어머니 유화, 이들은 모두 신(神)과 관련이 있다.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 유화는 강의 신 하백의 딸이다.

두 사람의 결혼은 어딘가 고대적인 약탈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모수와 하백으로 대표되는 두 부족 간의 갈등이 여기에 등장하기도 한다.

 

주몽의 탄생 이후 성장은 전형적인 드라마이다.

부여왕자들과의 갈등과 시련이 있고,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전개된다.

탈출의 백미는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쫓는 부여의 추격부대와 위기의 순간,

주몽은 자라와 거북이로 이루어진 다리를 건너 이들을 따돌린다.

마치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다.

 

주몽이 만든 국가는 확장 단계에서 비류국과 충돌한다.

그는 굴복하지 않는 비류국의 송양과 활쏘기 내기에서 승리한다.

결국 나라를 세운 주몽은 40세에 사망하고, 이후에는 그의 아들 유리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이규보가 이 얘기를 통해 남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군주의 얘기다.

그가 유학적 가치가 아닌 신화적 얘기에 몰입했으면서도, 결말에는 다시 유학적 사고로 돌아간다.

 

창업하는 군주는 성스러워야 한다는 점,

그리고 수성하는 군주는 너그럽고 어짊으로 왕위를 지키고, 예의로 백성을 교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것이 그가 당시 통치자들에게 할 말이었다.

 

젊은 시절의 이규보는 무신 쿠데타라는 큰 변란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고려 국가의 위상 속에

초라한 현재의 자기 모습을 대입시키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필진 : 김인호 / 등록일 : 2007-11-07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민족의식을 드높이기 위해 쓴 것이다 ?

 

 

몽골침입기에 쓰여진 민족서사시 하면

얼른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이승휴의 <제왕운기> 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대해서는 몽골침입기에 쓰인 민족서사시라는 설명이

전적으로 옳지만,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몽골침입이 시작되기 무려 38년 전에 쓰인 것으로

몽골침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규보[李奎報, 1168(의종 22)~1241(고종 28)]가 <동명왕편>을 쓴 것은

고려 명종 23년(1193) 4월,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고려가 몽골과 처음 접촉한 것은 그로부터 26년 뒤인 1219년,

당시 고려는 몽골의 요청으로 몽골군과 함께 거란과 싸워 김취려가 이끄는 고려군이

강동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로부터 다시 12년 뒤인 1231년 고려는 몽골의 1차침입을 맞게 된다.

 

<동명왕편>과 몽골의 침입은 실로 38년이란 시간차를 두고 있는 것이므로

흔히 말하는 몽골침입기의 민족서사시라는 설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쓸 때는 몽골은 물론 거란, 여진, 어느 민족과도

민족적 저항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던 시기이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이미 멸망한 뒤였고, 여진이 세운 금나라와는 이렇다 할 충돌이 없었으며,

몽골은 아직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기 전이었다.

 

 

민족의식과는 별 상관없는 <동명왕편>의 진짜 창작 동기는 무엇일까?

 

당시 고려는 무신정변으로 무신들이 집권한 지 20여 년,

천민 출신의 이의민이 무신정권의 최고정권저가 된 지 10년을 맞고 있었다.

무신정권의 전횡과 관리들의 부패,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 도처에서 일어나는 민란 등으로

고려사회는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었다.

 

20대의 청년 이규보는 3번이나 낙방한 끝에 4번째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으나

때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천마산에 우거하며 백운거사라 자칭하고 있었다.

<동명왕편>은 이같은 상황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동명왕편> 서문에서 이규보는 <구삼국사>에 실려 있는 '동명왕본기'를 읽어보니

그것은 믿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니라 건국을 둘러싼 장쾌한 사적이었다면서

‘귀(鬼)가 아니라 신(神)이요, 환(幻)이 아니라 성(聖)임을 깨닫고,

고려가 본래 성인(聖人)이 도읍한 곳임을 알리려고’ <동명왕편>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 계축년(1193, 명종 23)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 본기'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 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나 환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 반복하여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이 아니고 성이며, 귀가 아니고 신이었다.

하물며 국사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 … 중략 …

동명왕의 일은 변화의 신이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고

시로 나라를 창시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고려 충렬왕 13년(1287)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

중국 역사와 우리나라 역사를 운문으로 읊은 장편 서사시이다.

이규보가 읽었다는 <구삼국사>는 안타깝게도 오늘날 전하지 않으므로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이규보는 당시 고려의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해 젊은이다운 비판을 하면서

아직 펼쳐보지 못한 자신의 기개와 야망을 작품에 담으려 했다.

그러고 보면 <동명왕편>은 고려의 대외적 위기상황이 낳은 작품이 아니라

국내 상황이 낳은 작품이며, 민족의식과는 별 상관없는 작품인 것이다.

 

 

고구려 계승의식의 발로?

 

<동명왕편>을 쓴 지 석 달 뒤,

경주 근처에 있는 운문사를 중심으로 김사미와 효심의 반란이 일어났다.

김사미와 효심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는 경주와 강원도의 농민반란군이 연합하여

‘신라부흥’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이때 이규보는 토벌군에 참가하여 격문과 건의문을 비롯한 각종 문서를 썼다.

토벌군이 출정에 앞서 명산대천에 제사를 드릴 때 이규보가 쓴 발원문을 보면

“옛날 신라가 견훤의 침입을 받았을 때 태조가 구원하여 신라 사람들이 지금까지 번성했는데,

그 은공을 잊고 나라에 반역을 했으니 배은망덕하다”고 성토하고 있다.

때문에 <동명왕편>을 당시 고개를 치켜들던 '신라부흥운동에 맞서는 고구려 계승의식의 발로'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이규보가 신라왕의 외손으로 <역대가(歷代歌)>를 지은 오세문(吳世文)에게

준 시에서는 신라를 한껏 칭송하고 있어

이규보의 고구려 계승의식이 얼마만큼 뚜렷했는지 조금은 의심스럽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이 어떤 동기에서 쓰였는가는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고려의 이런저런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의식,

위대한 영웅 동명왕과 그가 세운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발견,

20대 중반이 되도록 벼슬도 얻지 못하고 거사라 자칭하고 있는 자신의 우울한 처지,

그 모두가 창작 동기일 수 있다.

하지만 몽골침입에 맞선 민족적 저항정신의 발로는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동명왕편>이 몽골침입기에 쓰인 민족서사시로 널리 알려진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면밀한 이해없이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함께 뭉뚱그려 본데서 비롯된 착각과 오해라 할 것이다.

해방 후 한국사의 중심 화두였던 민족 또는 민족주의 열풍이 너무나 강렬했던 나머지

거기에 휩쓸려 섬세함을 놓친 게 아닌가 싶다.

 

(강화도에 있는 이규보의 묘는, 원래 그의 고향은 경기도 여주이나, 몽골침입으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했을 당시 사망했기 때문에 이곳에 묘가 있다.)

 

- 박은봉,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책, 문헌, 사진에 관한 잘못된 상식 33", 2007, eBook

 

 

 

 

 

 

 

 - 바흐 / Brandenburg Concertos, No. 5 in D Major, 1 Alleg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