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립박물관 소장
<임진왜란도 병풍(壬辰倭亂圖屛風)>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연구원인 노영구 박사가 최근 ‘한국문화 31집'에 기고한
'임진왜란 초기 양상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검토’란 논문에서,
조선시대 군사관계를 천착해온 노씨는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립박물관 소장
<임진왜란도 병풍(壬辰倭亂圖屛風)>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해 의병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다.
노씨는 오늘날 의병에 대한 높은 평가가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충신과 열사를 대대적으로 현창하던 조선후기 임진왜란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이 끝난 뒤 유성룡이 자기반성적 시각에서 서술한 <징비록(懲毖錄)>이
조선과 일본의 임진왜란 인식에 영향을 끼치면서
조선군의 무기력한 초기 대응과 의병에 대한 과도한 평가가 형성됐으며
일제 식민시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근대 학문 체계에 의해 정교화 됐다는 것이 노씨의 설명이다.
광복 이후에도 이같은 인식은 일본 학계의 민중사관과 우리의 국난극복사관, 북한의 주체사관 등의
영향을 받아 다른 시각에서 확대 · 재생산됐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노씨가 인용한 상주(尙州) 지방 사족(士族) 조정(趙靖)의 ‘임진일기(壬辰日記)’나
이탁영(李擢英)의 ‘정만록(征蠻錄)’ 등에 따르면 부산포 전투가 벌어진 1592년 4월 14일
왜선 수백척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는 내용이 당일 경상도 내륙지방인 상주까지 관보로 전해지고
이 지역 군사의 출동명령이 내려져, 16일 이전 대구에 집결하는 등
‘선조실록’과는 달리 조선의 군사동원 양상이 매우 신속히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동래성 전투를 앞두고도 군현에 따라 수백명에서 수천명에 달하는 군사가 동원돼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동래부사 송상현과 동래부 백성들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것으로만 단순히 기억되던 이 전투를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또 그동안 <제1차 진주성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던
일본 와카야마현립박물관 소장 <임진왜란도 병풍>을 '동래성 전투' 상황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
노씨는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도 의병의 구원이 아니라
진주 수성군의 충실한 방어준비와 진주부사 김시민의 적절한 전투지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의병의 구성원 대다수가 일반 농민이나 노비가 아닌
기존 관군출신이었다는 것도 흥미를 끄는 내용이다.
- 2003-08-20 문화일보, 최영창 기자
역사가의 인식과 역사적 사실
노영구(중세사 2분과)
역사를 하는 학자들은
언제나 엄격한 사료 비판과 이에 입각한 객관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존재로 생각된다.
그것이 소설가나 몽상가와 다른 역사학자들의 존재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역사학자들은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사료에만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을 구성하는 것일까?
아래 한 장의 그림의 해석을 두고 나타난 해석상의 논란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그림 1> 임진왜란도 병풍
위의 그림은 와카야마현립박물관(和歌山縣立博物館)에 소장 중인 「임진왜란도병풍」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어느 읍성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조선의 세 부대가 읍성 서쪽에서 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중 앞의 조선군 부대는 일본군과 조우하여 궁시(弓矢)로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래 이 그림에 대해서는
구원병을 존재로 인해 제1차 진주성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는 성과가 제출되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도 인정하고 있듯이
육군박물관에 보관 중인 「동래성순절도」와 「임진왜란도병풍」을 비교해보면
읍성의 전체적인 윤곽이나 주변 산세가 매우 유사할 뿐만 아니라
읍성을 방어하는 조선군이나 공격하는 일본군의 모습 등이 거의 흡사하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구원병의 존재로 인해 제1차 진주성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구원병의 존재만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로 단정하기에는
이 전투의 실제 양상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
이 전투에서 조선이 승리한 원인으로는 수성군(守城軍)의 분투와 함께
성 밖에서 응원한 여러 의병부대의 적극적인 외곽 지원에 힘입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그러나 실제 여러 의병 부대의 양상을 보면
대부분의 부대가 진주성 근처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도중에 일본군에게 저지되었다.
일부 부대가 진주성 근처에 도달하였으나 그 응원 활동도 일본군을 직접 공격한 것이라기보다는
모두 야밤에 진주성 근처 산에 올라 횃불을 들거나 호각을 불어 일본군을 놀라게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상황은 낮에 상당한 규모의 조선 응원군이
일본군과 직접 교전하는 모습을 묘사한 「임진왜란도병풍」과는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논란이 되는 조선 구원병의 존재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조선군의 대응 양상을 보면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경상도 내륙 지방인 상주(尙州)까지
일본군 수 백척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는 내용의 관보(官報)가 전해진다.
이 지역 군사의 출동 명령이 내려진 것은 부산포 전투가 벌어진 그날 4월 14일이었다.
또한 동래에 인접한 밀양부 부사 박진은 부산포 함락을 듣고 곧바로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동래까지 진출하였고 15일 동래성이 함락되자 곧바로 동래성 북쪽인 소산역(蘇山驛)에서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경상도 전역에 일본군의 침공 사실이 당일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경상좌병영 소속 군사들이 체계적으로 신속히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전쟁 초기 조선의 군사 동원 체제는 실질적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도병풍」에 나타난 구원병은 이러한 양상의 한 반영으로 보인다.
많은 의문과 다양한 반증 자료에도 불구하고
역사학 전공자마저 구원병의 존재 하나만으로 「임진왜란도병풍」을 제1차 진주성 전투로 판단한 것은
임진왜란에 대한 기존 인식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역사가가 가지는 기존 인식은 경우에 따라 역사적 사실(fact)마저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자료에 근거하여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우리의 인식도 근본에서 재점검하고
그 오류를 점검할 필요성이 있음을 이 한 폭의 「임진왜란도병풍」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필진 : 노영구, 2008-06-06
'울산성 전투도 병풍’ 국내 들여온다
임진왜란 전투 장면을 그린 국내외 작품 가운데 가장 세밀하게 묘사된 ‘울산성 전투도 병풍’ 세 틀(총 18폭 · 17, 18세기 일본에서 제작)이 곧 국내에 들어온다. 특히 이 중 두 틀은 존재 자체가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 병풍은 임진왜란 막바지 최대 승부처였던 13일간의 울산성 전투(1597년 12월23일∼1598년 1월4일) 장면을 사실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해 사료 가치가 큰 데다 일본인이 그린 조선의 승전도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북촌미술관(관장 전윤수)은 25일 “일본 도쿄(東京) 한 소장가의 컬렉션에서 이들 병풍의 존재를 새로 확인했으며 세 틀 모두 구입해 8, 9월경 국내로 들여오기로 했다”고 밝혔다.
세 틀 가운데 하나는 1999년 국립 진주박물관이 대여해 전시한 적이 있지만 나머지 두 틀은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존재 자체를 몰랐던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1597년 조선에 급파됐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가문이 울산성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간 뒤 각종 기록과 증언 등을 토대로 17, 18세기경 제작한 것이다. 병풍 하나의 크기는 세로 173cm, 가로 375cm.
일본인이 그린 작품이지만 임진왜란 전투도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세밀해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울산성은 1597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북진이 막히자 남해안에 주둔할 목적으로 1만6,000여 명의 병사를 동원해 지은 일본식 성곽.
당시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5만여 명은 울산성을 완전히 포위해 일본군 1만6000여 명을 고립시켰고 이로 인해 왜군들은 흙을 끓여 먹고 말을 잡아먹고 지내야 했다. 왜군 구원병 때문에 조명(朝明) 연합군이 철수했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도주하는 등 실질적인 왜군의 패배로 이어져 임진왜란 종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새로 공개된 병풍 두 틀 가운데 하나는 수천 명의 조선군과 명군이 말을 타고 울산성으로 질서정연하게 진격해 들어가고, 왜군이 성곽 주변에서 방어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또 다른 6폭 병풍의 그림엔 왜군에 밀려 조선군과 명군이 퇴각하는 장면이 매우 세밀하고 긴박하게 묘사되어 있다. 국내에서 99년 공개된 병풍은 조명 연합군이 수십 겹으로 울산성을 포위해 왜군을 고립시키는 장면이 담겨 있다. 성 안에서 왜군이 말을 잡아먹는 장면까지 나올 정도로 상세하다.
이 병풍 세 틀이 국내에 들어오면 관련 기록이 절대 부족한 울산성 전투는 물론 임진왜란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동아,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울산전투도 병풍 / 사진제공 : 북촌미술관
- 동아일보 2007-06-26
'알아가며(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13년 계축옥사의 발생 - 광해군이냐, 영창대군이냐? (0) | 2008.06.11 |
---|---|
임진왜란 당시 전세를 바꾼 의병들의 활약 (0) | 2008.06.11 |
초의선사에게 준 다산의 당부 (0) | 2008.06.04 |
한반도 땅덩어리, 현재의 모습 이전에는 (0) | 2008.06.03 |
거북선 변모 : 임진왜란 때 2층 - 18세기 3층으로 (0) | 2008.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