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난산건의 비밀 | |||||||||
고조선문화 토대로 창조 독특한 발해연안 청동검
주나라 호왕(무왕을 뜻함)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 산신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아주 흥미로운 시사점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시기는 BC 1046년쯤이다. 물론 이 연대는 최근 중국 측의 하·상·주 단대공정으로 결정된 것으로 100% 확신할 수 없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1500년을 더한다면 BC 2600년쯤이 된다. 이게 다가 아니다. 단군 이전, 즉 환인과 그 아들 환웅, 그리고 곰이 변해 사람이 된 웅녀(熊女)의 시대를 감안해보자. 즉 곰신앙이 움텄고, 천·지·인을 소통시키는 무인(巫人)이 지배하는 제정일치 사회가 개막하기 시작한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시대를 연상할 수 있다. 여기서 단군은 물론 지도자, 즉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며, 이 ‘단군’ 가운데 ‘왕검’이라는 분이 단군조선의 시조라는 뜻일 게다. 단군조선 영역에서 출발한 동이족의 일파(성탕·成湯)가 중원의 하나라를 멸하고 은(상)을 세웠다. 그러니까 동이족이 험준한 옌산(연산·燕山)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천하를 양분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다 중원의 동이족 나라인 은(상)이 주(周)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자 은(상)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이른바 종선왕거(從先王居), 즉 선조의 본향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다.
물론 옌산 북부, 즉 발해연안엔 고조선, 즉 단군조선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조선이 단군왕검 이후 1500년 동안 존속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이를 입증해준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기·승·전·결을 갖춘 제국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는 역사”라는 신화학자 양민종 교수(부산대)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즉 선조의 본향으로 돌아왔을 때 단군조선과는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뤘을까. 다시 ‘삼국유사’로 돌아가면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단경으로 옮겨가~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됐다”는 내용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기자가 오자 단군이 장단경으로 옮겨가 결국 산신이 되었다는 것은 정권이 기자에게 돌아갔다는 뜻이 아닌가. 이때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교체되는데 우리는 기자가 단군과 같은 동이족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이형구 교수) 같은 핏줄인 토착세력(고조선)과 은(상)의 유민(遺民)들이 곧 조화를 이루며 살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 답을 우리는 고고학 발굴성과로 풀어야 한다.
난산건(남산근 · 南山根)에서 한 기의 무덤이 확인된다. 석곽이 있고 그 안에 목관의 흔적이 남아있는 무덤에서는 모두 71점의 청동기가 확인됐다. 5년 뒤인 63년 6월, 한 농부가 그 무덤에서 서쪽으로 120m 떨어진 곳에서 2기의 무덤을 더 발견한다. 그로부터 다시 3개월 뒤인 9월14일. 조·중 합동 고고학 발굴대가 이곳을 찾는다. 북한과 중국의 합동발굴이었다. (경향신문 2007년 12월8일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랴오허 동서쪽의 적석총들’ 참조) 그리고 중국 북방의 영향을 받아 만든 청동기들이 쏟아진 겁니다. 청동솥의 다리가 날씬해지고 길어졌다든지, 은말주초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른 항아리(雙聯罐·작은 단지를 이은 항아리), 뼈로 만든 구슬(骨珠), 금으로 만든 고리(金環) 등이 나왔다든지….”(이형구 교수) 청동투구와 청동꺾창, 청동화살촉, 청동검, 청동도끼 등이 쏟아진 것이다. 은말주초의 청동기가 조상신, 하늘신에 대한 제사 위주의 예기였다면 난산건 유물은 다양한 지역 문화가 융합된 예기와, 전쟁에 쓰인 무기가 공반된 것이 특징이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그런데 잘 살펴봅시다. 춘추전국 시대의 도래를 검토해야죠.”(이형구 교수) 무왕의 건국(BC 1046년) 이후 170년 가까이 이어지던 서주는 10대 여왕(려王·재위 BC 877~BC 841년)에 이르러 중대한 고비를 맞는다. 여왕이 부정부패의 화신으로 정권을 농단한 영이공(榮夷公)이라는 인물을 기용한 게 화근이었다. 여왕은 듣기 싫은 직언을 금하고 비방하는 자를 죽이자 백성들은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충신 소공(召公)이 간했다.
치수하는 자는 수로를 열어 물을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을 이끌어 말을 하게 합니다. 백성이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여왕은 체(체 · 산시성 훠셴 : 縣)로 달아났다. 이때부터 소공과 주공(周公 · 무왕때 주공의 둘째아들 후손) 등 두 재상이 나라를 14년간 다스리니 그 시대를 공화(共和)라 한다. ‘공화정’의 시효라 할 수 있다. 두 재상은 14년 뒤 성장한 여왕의 아들 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39년 뒤 다시 강족(姜族)의 침략을 받고 대패한다. 그러다 선왕의 뒤를 이은 유왕(幽王·재위 BC 782~BC 771년)에 이르러 파국을 맞는다. 그만 애첩 포사(褒사)를 너무도 사랑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포사를 정처로, 그가 낳은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으려 획책한다. 용의 타액은 주나라의 손에 망한 포나라 선왕(先王)의 변신물이라 하는데, 일설에는 망한 포나라의 복수를 위해 일부러 주 유왕의 품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쨌든 유왕은 좀체 웃지 않는 포사의 환심을 사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다가 한가지 묘수를 알아냈으니 바로 봉화를 올리는 것이었다. 봉화를 피우자 제후들이 난리가 난 줄 알고 뛰어왔다가 거짓인 줄 알고 투덜댔다. 유왕은 “옳다구나, 이거다” 싶어 계속 봉화를 피웠다. 마침내 제후들은 짜증을 내며 봉화를 올려도 달려오지 않았다. 비극의 서막이었다. 유왕이 포사와 백복을 왕후와 태자로 삼으려 하자 정처인 신후는 증(繒)나라와 견융(犬戎)과 연합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유왕이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양치기 소년’을 믿지 않았다. 그가 바로 평왕(平王·재위 BC 771~BC 720년)이다. 평왕은 BC 770년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 낙읍(洛邑·뤄양 洛陽)으로 동천했다. 바야흐로 동주(東周)시대의 개막이다.
제(齊), 초(楚), 진(晋), 진(秦)이 강대해졌고, 정권은 방백(方伯·제후들의 우두머리)에 의해 좌우된다.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것이다.(사기 주본기)
“이때 무려 170여개의 소국이 난립했다고 합니다. 대혼란기에 접어든 것이죠. 천자를 모시는 예악(禮樂)이 무너지고, 힘이 천하를 지배하는 전쟁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이형구 교수) 이것은 청동예기 시대에서 병기시대로 옮겨졌음을 알려주는 단적인 예가 됩니다.” 이런 형태의 청동단검은 난산건을 필두로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젠핑(建平)·진시(錦西)·푸순(撫順)·칭위안(淸原) ·뤼다(旅大) 등에서 쏟아집니다. 한반도에서는 평양시 서포동을 비롯해 황해북도 연안군 부흥리 금곡동과 충남 부여군 송국리, 전남 여천시 적량동 등에서도 보입니다.” 우리의 전통 묘제에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또한 난산건에서 확인된 유물 가운데는 역시 동이의 전통문화의 하나인 복골(卜骨)이 있다는 것이다. BC 9세기부터 시작된 이 청동단검의 전통은 한반도로 이어져 급기야 ‘한국식 세형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낳는다. 결국 발해연안식 청동단검과 세형동검은 샤자뎬 하층문화~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 즉 고조선이라 토대에서 창조된 독특한 문화인 것이다. |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8. 중산국의 위대한 문명 (0) | 2008.04.13 |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7. 수수께끼의 나라 선우=중산 (0) | 2008.04.13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5. 기자의 본향 '고죽국(孤竹國)' (0) | 2008.04.13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4. 기자, 본향으로 돌아가다 (0) | 2008.04.13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3. 동이가 낳은 군자들(공자, 기자, 백이, 숙제) (0) | 2008.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