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찾아 떠나고(답사)

경주 만석꾼 - 최부잣집

Gijuzzang Dream 2008. 3. 26. 21:54

 

 

 

 

 9대 진사,10대 만석꾼 경주 최 부자의 가훈이 주는 교훈

 



부자가 존경을 받으려면 대체로 세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재산을 모으는 방법에 있어서 정당성이 있어야 하며,
둘째 그 재산을 행사하고 지킴에 있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며,

그 재산을 처분함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유익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10대 300년간 만석꾼의 부를 지켜오면서 수많은 이웃과 함께 ‘나눔’을 실천하여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된 ‘경주 최 부자’는 바로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킨 사람이다.


‘경주 최 부자’는

조선시대 1600년대 초부터 경주 지방에서 가문을 일으킨 정무공 최진립에서부터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한 최준에 이르는 12대간의 사람을 말한다.

 

오늘에 다시 경주 최 부자를 들먹이고 존경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단순히 오래토록 부(富)를 지켰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가문에서 찾기 어려운 덕(德)이 있었고,

그것이 독특한 가훈 속에 녹아 있어

의(義)를 지키려는 정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정(情)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집에는 크게 세 종류의 유훈이 있었는데,

그것은 집안에서 지켜야할 ‘가거십훈(家居十訓)’이란 것과,

이웃과의 관계를 강조한 여섯 가지의 ‘가훈(家訓)’

그리고 특수 상황에서의 개인의 행동 요령을 제시한 ‘육연(六然)’이란 것이다.


임진 · 정유 · 병자 삼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 때 공주 영장을 지내며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장렬히 전사한 영웅인 정무공 최진립이

가문을 세워 자손에게 남긴 유훈 중에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독특한 여섯 가지의 가훈이다.

 

그 첫째가 ‘진사는 하되 벼슬은 하지마라’는 값진 가훈이었다.

그의 후손 중에는 조상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58세의 고령에도 갖은 고초 끝에 진사시에 합격한 최언경이라는 이도 있다.

최 부자들은 이렇게 정치와 멀찌감치 거리를 둠으로써 정쟁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의미로 해석하면 정치적 중립 즉, 정경분리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흉년에는 땅을 사지마라’는 또 다른 가훈에 따라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재물을 축적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4년마다 한 차례 꼴로 흉년이 들었고, 이때는 땅을 내놓는 소농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을 사지 않고 오히려 양식을 꾸어주었다.

남의 약점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적대적 M&A가 횡횡하고 있는 오늘의 사례를 볼 때

이는 재산 축적의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참으로 본받을 윤리경영의 한 측면이라 하겠다.


적정이윤으로 중용의 도를 알았다


경주 최 부자,

그들은 재물을 지킴에 있어서도 남달랐다.

 

조선시대의 재산 개념은 정태 개념이 아니라 동태

개념이었다. 그래서 ‘만석재산’이라 함은 1년에 만석의 소작료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가훈인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는 유훈에 따라 최 씨 가문에서는 1년의 소작료를 만 석 이상 받지 않았다.

 

경주지방 항간의 이야기로 ‘경주 최 부자는 2만석 맞잡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경주 최 부자가 병작반수(지주와 소작인이 반반씩 나눔)로 소작료를 거두면

2만석은 족히 거둘 수 있는데 실제로는 1만석 밖에

안 걷는다는 말이다.

 

‘가진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만

최 부자가 욕심의 한계를 정하고 적절히 지킨 것은

참으로 놀라운 지혜요 인내라 할 수 있으며,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노나라 환공의 ‘의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공자가 노환공(魯桓公)의 묘에 있는 ‘의기(倚器, 한쪽으로 기운 그릇)’를 보고 묘지기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엇이오?”
“이것은 유좌(宥坐, 앉는 걸 돕는)란 그릇입니다.”
“내가 듣건대 이 그릇은 속이 비면 기울게 되고, 중간쯤을 채워 놓으면 반듯하게 되고,

가득 차면 뒤집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현명한 임금은 이것을 지극한 교훈으로 삼아서 늘 좌석 옆에 둔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며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면서 ‘물을 부어 보라!’고 말했다.

 

제자가 물을 붓자 과연 중간 정도를 채웠을 때 그릇이 바르게 서고,

가득 채웠을 때 그릇이 뒤집어졌다. 공자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아! 세상에 어떤 물건을 막론하고 가득 차고서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경주 최 부자도 이처럼 재물을 가득 채우지 않음으로써 중용의 도를 실천한 사람이라 하겠다.

최 부자의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적게 내므로

누구나 최 부자가 더 많은 땅을 사서 더 큰 부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들은 만석꾼 부자로써 한 도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한 큰 부자였다.

그러나 그 집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에는 무명옷만 입도록’ 하는 가훈을 따라

근검절약 정신을 몸에 배도록 하였으니 만석꾼 며느리가 이럴진대

그 집 하인이나 이웃은 감히 사치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웃의 흉년구제 위해 곳간을 활짝 열다


이러한 절약 가운데서도

최 부자는 ‘과객을 후히 대접’하고 ‘사방 백 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여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여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경주 최 부잣집의 과객 대접은 소문이 났었다.

만석 소득 중에서 10분의 1인 천석 가까이를 접빈에 썼다고 하니 이 집 손님 수를 짐작할 수 있다.

하루에 수십 명의 손님이 사랑채에 유숙하며 마음대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담론을 하였으니 최 씨는 가만히 앉아서 지식을 넓히고 정보를 얻으며 고급 교제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훈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사방 백 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이다.

흉년구제는 나라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 때 최 부자는 과감히 곳간을 열고 굶주린 이웃을 구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백 리’라고 했을까? 에 의문을 품은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최 부자의 논밭이 사방 백 리에 걸쳐 있기도 하였고,

하루에 걸어 왔다가 갈 수 있는 거리가 백 리라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어쨌든 최 부자는 사방 백리에 걸친 주민을 생활공동체인 ‘이웃’으로 생각하였고,

어려울 때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적 사례라 하겠다.


재물을 옳게 쓸 줄 아는 부자 중의 부자


경주 최 부자는 10대 300년 동안 부를 지켜오다가

최준(1884~1970)에 이르러 마감한다.

 

나라가 망하는 불우한 시대를 살았던 마지막 최 부자 문파 최준은 망한 나라에서 어떻게 돈을 써야 좋을지를 여러 모로 검토해보았다. 그는 부산에서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그 결과 회사는 어려워지고 부채를 사장인 자신이 몽땅 떠안는다.

일제는 여러 벼슬을 제시하며 갖은 방법으로 유혹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버티면서 해방을 맞았다.

 

그는 나라가 망한 것이 부족한 교육 때문임을 깊이 깨닫고

300년 묵은 그의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대학(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였다.


경주 최 부자는 결코 망하지 않았다. 다만 대학의 주춧돌로 변신했을 뿐이다.

최 부자의 손때 묻은  5천여 권의 서적은 현재 영남대학교 도서관 문파문고에 남아있고,

그가 살던 교동의 아흔 아홉 칸 집은 이제 새롭게 단장되어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준다.

이것이야 말로 재물을 옳게 쓴 표본이 아닐까!


경주 최 부자의 이러한 훌륭한 선행의 뿌리는

독특한 ‘가훈’에서 볼 수 있는 ‘의(義)와 중용(中庸)’의 철학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가훈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매우 구체적이어서 실천할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철학이라도 후손들이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고 싶은 벼슬을 참고, 하고 싶은 사치를 참고, 하고 싶은 외입을 참고,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묵묵히 조상의 뜻을 지키며 실천한 후손들의 노력 또한

잊어서는 안 될 덕목이다.    
글 :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 / 사진 : 이지북

- 월간문화재사랑,  2008-02-28

 

- 답사이야기 함께보기

 경주 최부자댁

경주 최 부자의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는 버금감- 둔차(鈍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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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불3대(富不三代)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이

    부와 권력은 고금을 통해서 오래도록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아주 가끔 내가 하는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목표에 미달 되었을 때,

    또는 남과 비교하여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내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다산(茶山) 정약용의 시(詩)를 떠 올린다.

     

    독소(獨笑, 홀로 웃다 ) --- 정약용(丁若鏞)

     

    有粟無人食(유율무인식) - 양식 많은 집엔 자식이 귀하고

    多男必患飢(다남필환기) - 아들 많은 집엔 굶주림이 있으며

    達官必憃愚(달관필창우) -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才者無所施(재자무소시) - 재주 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으며

    家室少完福(가실소완복) - 집안에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至道常陵遲(지도상릉지) - 지극한 도는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翁嗇子每蕩(옹색자매탕) -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婦慧郎必癡(부혜랑필치) -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며

    月滿頻値雲(월만빈치운) -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花開風誤之(화개풍오지) -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物物盡如此(물물진여차) -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獨笑無人知(독소무인지) -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걸.

     

    경주 최 부자 역시 가실소완복(家室少完福)이란 말처럼

    완전한 복을 갖추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후손이 없어 양자를 들이기도 하였고 과거에 낙방하는 대(代)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안이 오랜 기간 부와 명예를 지키며

    남들로 부터 칭송을 받아 온 연유는 무엇일까?

     

    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하는가?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 특권계층의 사회적 책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집안이 경주 최 부자다.

    경주 최 부자 집안에 관한 이야기 중 기억에 남은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집안의 가훈(家訓)이었다.

     

    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의 가훈 '육훈'(六訓)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 '육연'(六然)이 그것이다.

    '육훈(六訓)'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 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마라.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내용이다.

    '육연'은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자처초연: 自處超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대인애연: 對人靄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무사징연: 無事澄然),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유사감연: 有事敢然),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실의태연: 失意泰然) 이다.

     

    내가 경주에 머무른 지 2달여 동안 최 부잣집을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햇살 고운 5월 어느 날 작정을 하고 길을 나섰다.

    일반적으로 "경주 최 부잣집"하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대로

    경주 교동에 소재해 있는 "교촌댁"을 일컫는다.

    그러나 최 부잣집의 집안 내력을 사전에 인지하였다면,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충의당(忠義堂)"을 먼저 찾아가는 일에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경주 최 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선으로부터 28세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다.

    엄청난 재산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경주 최 부자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의 1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장군이다.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순국하니 그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평소의 생활도 청렴하였던 최진립은 이렇듯 일생을 장렬하게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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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으로 울산광역시 두서면 활천리에 서 있는

 경주최씨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묘지안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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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해 있는

최 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 최진립이 살았던 "충의당(忠義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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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忠義堂)" 의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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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 되어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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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채에 걸려있는 멋진 글씨의 현판과 안뜰에 둘러쳐진 담장.

현판의 글은 중용(中庸)의 신사명변(愼思明辨)을 인용하였다.

-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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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담 사이의 문양들. 귀면(鬼面), 천년(千年)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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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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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교동의 최 부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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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과 행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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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

본래 최 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1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는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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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부잣집의 가훈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용(中庸)과 의(義)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 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지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뼈에 심기 위한 듯,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조부(祖父) 최만희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친부(親父)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다.

퇴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유필(儒筆)의 품격(品格)이 드러난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글씨는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이며

높은 품위와 忠과 義의 가풍을 잇는 21세기 선비인 충의당(忠義堂) 주인 최채량(崔採亮) 글씨다.

최채량의 아호 역시 '어리석은 산, 우산(愚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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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되어있다.

집안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물음에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라 답하신다.

 

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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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를 이야기하던 시절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고 죽고 싶다던 시절에 쌀이란 백성들에게 하늘이었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 이런 곳간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 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 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면 동(東)으로 동해바다를 접하는 감포일대,

서(西)로 영천, 남(南)으로 울산,북(北)으로는 포항을 포함하는 광대한 면적이다.

이렇듯 최 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에,

나머지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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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부잣집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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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법주의 담장길...
      최 부자집과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주(家酒)를 빚는 교동법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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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최 부잣집 자손들은 옛날만큼의 부(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최 부잣집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걸려있는 한정식집 '요석궁' 의 플래카드는

      보는 이에 따라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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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식집 " 요석궁 "우측 길 끝 너머가 경주월성이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은 호(號)가 문파(汶坡)이다.

      호(號)는 의친왕 이강이 이 집에 며칠 머물면서 지어준 것이라 한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1947년에는 대구에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재단이 사장으로서 현대교육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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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자형이

      국내 항일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독립운동가 고현(固軒) 박상진(朴尙鎭)이다.

      그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결사대인 대한 광복회를 조직,

      총사령관으로써 주권회복 및 광복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휘하인 부사령에 김좌진 장군이 있기도 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구속된 박상진은 결국 3년6개월의 옥살이 끝에

      1921년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돼 3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교동 최 부잣집을 다녀온 며칠 후 이른 아침에 그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묘소는 경주 내남면에서 외동읍 사이를 잇는 도로를 약 2km 따라가다가

      우측에 서 있는 "울산청년회" 에서 세운 안내간판을 따라 농로와 산길을 500m쯤 오르면

      참나무와 소나무가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있다.

       

      박상진의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최 부잣집 구성원 당사자들은 물론 그들과 인연이 된 사람들도

      사회 지도층으로서 지켜나갈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다 했음은 물론

      구국의 영웅으로서의 역할도 높이 평가받고 추앙되어야 함에

      인색함이 없어야 될 것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최 부잣집의 금언(金言)을 되뇌어 본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 이사오 사사키 / "Amapo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