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찾아 떠나고(답사)

옛 싸움터였던 옛 고개, 길

Gijuzzang Dream 2008. 3. 26. 21:42

 

 

 

 옛 싸움터이자 격전지인 고개와 길을 찾아서

 

문경새재의 교귀정(경상도 신,구 관찰사가 임무를 교환하던 곳)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

<진도아리랑>에도 나오는 구절이다.

 

구비 구비 돌아가는 인생의 노정에서 넘어야 하는 그 고개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영(嶺), 현(峴), 치(峙), 점(岾), 항(項) 등의 한자이름과 함께 고개, 재, 목, 티 등  순수한 우리말 이름들도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죽령, 새재, 육십령, 팔량치 등을 '대재'라고 부르고,

나머지 고개들을 '소령(少嶺)'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그 당시의 교통량을 참고해서 부른 것이다.


영남과 호서지방을 잇던 죽령

옛 길을 걷다가 보면 수없이 넘어야 하는 고개는 우리 역사 속에서 크고 작은 격전의 현장이며, 수많이 사연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 고개와 길 중 몇 곳을 문화재청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백두대간의 고갯길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랜 것은

하늘재라고 불리는 계립령과 그리고 죽령(명승 제30호)이다.


삼국시대 초인 신라의 아달라왕(156~158) 때에 개척된 이 고개들은 고려시대까지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초에 계립령 왼쪽의 새재를 개설함에 따라 계립령의 기능은 점차 쇠퇴하였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고개인 죽령은 높이가 689m로 대재, 죽령재라고도 부른다. 신라의 충신 죽죽이 개척한 고개라고 알려져 있지만 신라의 영토가 그 부분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이 고개는 예로부터 영남과 호서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격전지였다.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새재

우리나라의 옛길 중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문경새재(명승 제32호)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 관도로 개통되면서 죽령, 추풍령과 함께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그러나 영남지역에서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나 벼슬을 받아 가던 사람들은 한사코 문경새재를 넘었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었고,

죽령은 ‘쭉 미끄러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한사코 문경새재를 넘고자 했던 것은 문경(聞慶)이라는 이름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인 문경새재에는 3개의 관문과 원터 등 주요 관방시설이 잘 남아 있으며,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어서 역사와 민속적 가치가 큰 길이다.

임진년인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선산과 상주를 함락시키고 문경으로 진격해왔다.

그 당시 신립은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시킨 뒤 작전회의를 열었다. 새재와 탄금대 두 곳 중에 어느 쪽이 유리할 것인가를 논의했고, 결국 탄금대쪽으로 결정하였다.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들판에서 기마로 짓밟아버리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술이다.

또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되었으니, 배수의 진을 쳐야한다”라고 한 뒤에

탄금대 앞에 배수진을 쳤다. 결국 왜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재를 넘었다.

 

왜군들은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냈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안도한 왜군은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이 고개를 넘었으며 곧바로 왜군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친 조선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유성룡은 『서애집』에서 신립이 새재에서 적병을 막았다면 전란의 양상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진란에 조정에서 변기(邊璣)를 보내어 조령을 지키게 했는데,
신립(申砬)이 충주에 이르러서 변기를 위하로 불러들여 조령 지키는 일을 버리게 되었다.
적이 조령 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수일간을 접근하지 못하고 배회하면서

여러 번 척후로 자세히 살펴 복병이 없음을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조령을 통과했다.
이제독(李提督, 명나라의 이여송)이 조령을 살펴보고 탄식하기를,

“이 같은 천연의 험지를 적에게 넘기다니, 신총병(申總兵)은 참으로 병법을 모르는 자”라고 하였다.

 

토끼가 지나간 토끼벼리


문경새재를 지나 영남대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아름다운 길이

암벽을 파내어 조성한 관갑천(串岬遷) 잔도(遷道 :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이다.

“관갑천은 용연 동쪽에 있고 토천(兎遷)이라고도 부른다. 돌을 파서 사다리 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7리에 이른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길이 없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북쪽의 깎아지른 벼랑에 돌로 쌓은 성터가 있는데 옛날에 지키던 고모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글이다.

이 잔도를 지나던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수도 없이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밟아서 반질반질한 바위로 된 고개를 넘으면 영강의 물길이 그림처럼 휘어 돌고, 깎아지른 절벽 위에 고모산성이 있다.

고모산성은 1천5백여 년 전에 축조된 신라와 고구려 접전지로, 둘레가 1.6㎞ 가량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모성(姑母城)은 일천 서쪽의 단봉(斷峰) 위에 있으며, 두 골짜기가 중반(中盤)을 묶은 것 같아서, 큰 내(大川)와, 큰 길(大路)이 그 아래성(下城)을 경유하는데, 둘레가 9백 90척이다. 모두 신라 때 방어하던 곳이다”고 실려 있고, 일명 할미성이라고도 부른다.

 

그 아래에 경상북도 팔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진남교반(鎭南橋畔)이라고도 부르는 진남관문이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불에 타서 사라졌다고 한다.


사라진 작천잔도


영남대로 상의 또 하나의 중요한 잔도가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儉世里)에 있던 작천잔도(鵲遷棧道) 이다. 영남대로 상의 요새 중의 요새였으며 동래에서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중요한 요충지였던 작원관(鵲院館)이 『신증동국여지승람』밀양 ‘역원’ 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부의 동쪽 41리에 있다. 원으로부터 남으로 5~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의 연못인데 물빛이 짙은 푸른빛이고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서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부터 교통과 국방의 요새지였던 이곳은 평상시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는 역할을 했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군사적 전략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朴晉)이 왜장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와 맞붙어 싸우다 병사 삼백 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그러한 아픔을 간직한 작원관은 경부선 철도가 지나면서 사라져버렸고 지금의 작원관(작원관지, 문화재자료 제73호)은 이곳 주민들이 1990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여럿이 모여 넘었던 고개들


예로부터 ‘십리 간에 말이 다르고 백리 간에 풍속이 다르다(十里不同音, 百里不同俗)’라는 말도 있으며 ‘여럿이 모여 있으면 안전하다’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한 말들이 제대로 들어맞는 곳이 백두대간을 사이에 둔 전라도 남원과 경상도의 함양이다.

 

불과 십여 리 사이를 두고 백두대간이 지나는 팔량치가 가로막혀 있어서 팔량치를 사이에 두고 말씨부터가 틀렸고 생활양식까지 틀렸었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되어 오고가면서 서로 비슷해지고 있지만 말씨는 여전히 틀리다.


이곳에서 여원재를 넘어온 이성계가 팔량치를 넘어온 아지발도와 지금의 인월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여 크게 이겼다. 황산대첩이라고 부리는 싸움이 벌어졌던 길이 전라도 삼례에서 전주 남원 함양, 산청 진주를 거쳐 통영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9대로 중 하나인 통영대로이다.

 

팔량치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올라간 곳에 고개 길이 하도 험해서 육십 명이 모여야 함께 넘었다는 남덕유산 자락의 육십령이다.

 

백두대간에 있는 고개들 중 대관령은 관동대로가 지나는 곳이다.

동해에서 잡아 올린 생선들을 이고 지고서 대관령을 넘어 온 보부상들의 가쁜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은 대관령 옛길을 지나면 구룡령에 이른다.

 


영서와 영동을 잇던 구룡령 옛길


'구룡령 옛길(명승 제29호)’은 강원도 홍천군 내면 광원리에서 양양군 서면 갈천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큰 구렁이가 지나간 자국을 따라 길을 냈다고 해서 구룡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상품 교역로였고 양양, 고성지역 사람들이 한양을 가기 위해 넘나들던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사람들은 산세가 험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보다 고갯길이 평탄하여 이 길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아직 명승지로 지정되지 않은 역사 속의 생생한 고개가 정읍과 장성을 잇는 갈재(노령)와 부여와 공주를 잇는 우금치이다.

입암산 아래에 있는 ‘갈재’는 ‘노령(勞岺)’이라고도 불리는데, 옛날, 서울에서 남도로 오거나 남도에서 서울로 갈 때면 꼭 넘어야 했던 고개이며, 1894년에 남하했던 동학농민군이 넘었던 고개이기도 하다.

 

1894년 9월 삼례에서 재기포(再起包)를 하여 논산을 거쳐 북상한 농민군이 무장한 일본군, 관군과 한판 싸움을 벌였던 고개가 그 유명한 우금치(牛金峙)이다.

 

이 길들이 바로 조상들의 피와 땀이 어리고 전설도 많은 길이며 고개들을 주차간산이 아닌 두발로 걸으면 옛 길이 다시 살아나 그 이야기들을 들려 줄 것이다.

그 이야기들을 들으러 길을 떠나보시지 않으려는가? 
- 글 · 사진제공 / 신정일 문화사학자, 황토현문화연구소장

- 월간문화재사랑, 2008-02-04

 

 

 

 

   -  When you and l were young(메기의 추억) /  Jean Redp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