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동인들은
모일 때마다 시를 짓고 서문과 발문을 붙여 시첩을 엮었는데,
목판이나 활자로 간행하지는 않고 저마다 필사하여 간직했다.
팔기 위해서 만든 책이 아니라, 동인들이 돌려가며 읽고 즐기기 위해 만든 책이다.
사대부들의 모임을 기념하는 계회도(契會圖)를 참석자 숫자만큼 제작한 것처럼,
송석원시사의 시첩도 한번 모일 때마다 여러 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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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원시사 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1791년 유두절, 밤에 열린 송석원시사 모습, 단원 김홍도
32×25.5cm, 종이에 수묵담채,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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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석원시사 시첩에 그림까지
그날 지은 시와 산문만을 보통 편집했다.
하지만 규장각 서리 임득명(林得明 · 1767∼?)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그날의 모습을 자신이 직접 그려 시첩을 만들었다.
재산이 넉넉한 시인들은 이름난 화원에게 그림을 부탁해 앞에 싣기도 했다.
비점과 도서를 붉은 색으로 찍고 비평을 붉은 글씨로 덧붙여,
시첩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풍조가 생겼다.
김의현의 시에는 “비록 적지만 또한 넉넉하다(雖少亦足).”라는 평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다.
표지를 명필의 글씨로 꾸며 호화로운 서화첩(書畵帖)을 만들었다.
자연히 송석원시사 동인들은 시뿐만 아니라 그림이나 글씨에도 공을 들였다.
1791년 6월15일 유두절, 무더운 여름밤에 펼쳐진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광경이다.
모임의 장소가 천수경의 후원인 松石園[송석원은 천수경(千壽慶)의 집]이었고,
또 송석원은 서울 서쪽 인왕산 옥류동(玉流洞)에 있었으므로
'玉溪詩社' '西園詩社' 또는 '西社'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날 송석원시사에는 9명이 옥계에 모여 시를 지었다.
이날 지은 글들을 김의현(金義鉉)이 모아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이라는 시첩을 만들었다.
이 시첩 앞에는 도화서의 동갑내기 화원인 이인문과 김홍도의 그림이 실려 있다.
첫 장에 실린 이인문의 그림 오른쪽 위에 “단원 집에서 그렸다(寫於檀園所).”라는 글이 씌어 있다.
이인문이나 김홍도 같은 화원들이 시인들의 모임에 직접 참석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김의현의 부탁을 받고 두 사람이 김홍도의 집에 모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원로 위항시인 마성린이 1797년에 김의현의 집에 놀러 갔다가
책상 위에 놓인 ‘옥계청유첩’을 보고 발문을 덧붙여 써주었는데,
그때 이미 두 사람의 그림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단원이 그린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9인의 모임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구도상의 대담한 생략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그림의 주문이 시사(詩社)의 야회(夜會)에 있던 때문으로
9인의 모인 뜰 주위는 잎이 무성한 울타리로 감싸고
넓게 열린 왼쪽은 보름달, 밤안개, 냇물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우리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모임의 장면으로 유도하면서
그윽한 아회(雅會)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성공하고 있다.
'단원(檀園)’이라는 관서 아래의 도서는 주문방인(朱文方印) ‘弘道’와 백문방인 ‘士能’이다.
그 우측에 마성린(馬聖麟, 1727~1798 이후)이 1797년에 추서(追書)한 화제는 다음과 같다.
“6월 더위 찌는 밤에 구름과 달이 아스라하니, 붓끝의 조화가 사람을 놀래켜 아찔하게 하는구나"
화제 머리에 찍은 백문 타원인은 ‘游藝(예술에 노닌다)’ 이고
아래는 백문방인 ‘馬氏’와 주문방인 ‘景義’이다.
화제를 1797년에 썼다는 점은 마성린의 다음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내 어느날 김의현(金義鉉)의 유죽헌(有竹軒)에 들러 보니
책상에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한 권이 있었다.
펼쳐 보니, 단원 김홍도가 맨앞의 그림을 그렸고, 고송유수관 이인문이 이어서 그렸으며,
그 다음은 여러 군자가 각기 시를 짓고 썼는데,
무릇 그 화법의 신묘함과 시와 글씨의 맑고 참됨이
난정수계(蘭亭脩계)나 서원아집(西園雅集)에 비길 만한 것이었다…
71세 미산옹 마성린이 쓰다.
한편, 조선 후기, 중인들의 모임을 주도했던 송석원시사에 참여했던 시인들은 다음과 같다.
천수경 · 장혼(張混) · 조수삼(趙秀三) · 차좌일(車佐一) · 김낙서(金洛瑞) · 왕태(王太) · 박윤묵(朴允默) · 최북(崔北) · 엄의길(嚴義吉) · 엄한빈(嚴漢賓) · 엄한명(嚴漢明) · 엄계승(嚴啓昇) · 엄계흥(嚴啓興) · 엄계응(嚴啓膺) · 지도성(池道成) · 지덕구(池德龜) · 지한상(池翰祥) · 박영석(朴永錫) · 서경창(徐慶昌) · 임득명(林得明) · 노윤적(盧允迪) · 이경연(李景淵) 등이다.
● 김홍도 그림 한 점은 900만원
이인문은 송석원에 중인들이 낮에 모인 모습을 그렸고, 김홍도는 밤에 모인 모습을 그렸다.
김의현은 당대 최고의 화가 두 사람의 그림을 같은 주제로 부탁해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다.
유홍준(현 문화재청장) 교수는
“이인문이 구도를 잡을 때 항시 시야를 넓게 펼치는 반면,
단원은 대상을 압축하여 부상시키는 특징이 있다.”
고 평했다.
이인문은 화면 전체를 그림으로 꽉 채우지만,
단원은 주변을 대담하게 생략한,
그래서 똑같은 풍경을 그려도 이인문의 산수가 평수에서 훨씬 넓어 보인다는 것이다.
김의현은
평생 인왕산에서 서화와 음악을 즐기며 살았던 위항시인 시한재(是閒齋) 김순간(金順侃)의 아들로
자는 사정(士貞), 호는 용재(庸齋)이다.
대대로 경아전 생활을 하며 집안이 넉넉했기에
당대 최고의 화원 두 사람에게 그림을 부탁해 시첩을 장식했다.
강명관(부산대, 한문학) 교수의 계산에 의하면
김홍도는 그림값으로 쌀 60섬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송석원시사의 후배격인 직하시사(稷下詩社)의 동인 조희룡(趙熙龍 · 1789∼1859년)이
위항인 42명의 전기를 지어 ‘호산외기(壺山外記)’를 엮었다.
여기에 실린 ‘김홍도전’에 의하면 3000전을 주면서 그림을 부탁한 사람이 있었다.
상평통보 하나가 1푼, 열푼이 1전,10전이 1냥이다.
3000전은 300냥인데, 18세기 쌀 한 섬의 평균시세가 5냥이었으니,
김홍도는 쌀 60섬을 받고 그림 한 폭을 그려준 셈이다.
2006년 평균 산지 쌀값이 한가마에 15만원이었다고 하니,
요즘 시세로 치자면 900만원쯤 받았던 셈이다.
이 그림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다른 그림들은 얼마를 받고 그렸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강세황(姜世晃 · 1713∼1791년)이 지은 ‘단원기(檀園記)’에 의하면
“단원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날로 많아져
비단이 무더기로 쌓이고 재촉하는 사람이 문에 가득하여,
미처 잠자고 밥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김홍도의 그림값 자체가 당시 위항문화의 수준을 보여 주지만,
그러한 그림값을 지불해 가며 시첩을 장식했던 김의현의 태도에서도
송석원시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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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한양에 중인들이 대거 모여 살던 경복궁과 인왕산 자락 사이의 오늘날 모습. 현재 종로구 옥인동 · 통인동 · 누하동 등이 이에 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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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은혜 기려 시첩 제작
그림을 부탁한 김의현은 규장각 서리이다.
문예부흥을 꿈꾸었던 정조는
규장각의 검서(檢書)는 물론 서리까지도 우대하여 대대로 문장을 하는 집안에서 뽑았다.
또한 이들에게 쌀이나 돈도 자주 내리며 격려했다.
규장각 서리들을 다른 서리와 구분하여 사호(司戶)라 부르고,
그들이 근무하는 건물에는 사호헌(司戶軒)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정조는 무예에도 관심이 많고 활쏘기를 즐겼다.
정조가 1792년 10월30일 창덕궁 내원(內苑)에서 활을 쏘고
고풍(古風)으로 쌀 한 섬과 돈 10냥을 사호헌에 하사했다.
고풍이란 예에 따라 상관이 하관에게 돈이나 물건을 내려주는 것이다.
규장각 서리들은 이 일을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당시 규장각 직각이었던 서영보에게 그 사연을 기문(記文)으로 받아 판각하여 사호헌에 걸었다.
이 현판 끝부분에 규장각 사호와 서사관(書寫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덕구, 김의현, 박윤묵, 임득명, 김낙서 등이 모두 송석원시사 동인들이다.
규장각 서리 가운데 송석원시사 동인들이 많으며, 임금이 이들의 글재주를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규장각 사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임금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시첩을 만들었다.
서영보의 기문을 판각하게 된 경위를 박윤묵이 쓰고, 유상우 · 김의현 등이 시를 지었다.
이 글들을 모은 시첩이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이다.
즉 “임금께서 활을 쏘시고 고풍을 내려주신 은혜를 감사하여 지은 글들을 모은 첩”이란 뜻이다.
송석원시사 동인들은 모일 때마다 시첩을 엮었다.
김의현은 당대 최고의 화원들에게 그림을 부탁하여 호화스러운 ‘옥계청유첩’을 만들고,
임금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어사고풍첩’을 만들었다.
일년 사이에 인왕산과 창덕궁에서 만들어진 이 두 권의 시첩은
송석원시사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서울신문, 2007-01-09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1786년 여항시인들에 의해 결성되어 1830년대까지 존속했던 여항시사(閭巷詩社).
송석원시사는 구로회(九老會) · 금란사(金蘭社) 등 경아전(京衙前)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시사(詩社)의 전통을 이어받아, 여항시사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
〈옥계사(玉溪社)>에 따르면 맨 처음 동인은 13명이었고
처음엔 시사의 이름을 옥계사(玉溪社)라고 했다.
옥계란 인왕산 동쪽을 흘러내리는 계곡의 이름으로
시사 구성원의 거주지이자 재래의 여항시사의 본무대였다.
그뒤 이 시사의 중심이었던 천수경(千壽慶)이 이곳에 있던 자신의 집에
자기의 호를 따서 '송석원'(松石園) 세 글자를 암벽에 새기면서 송석원시사라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매우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어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경승지였다.
송석원을 비롯한 서울 일대의 경승지에서 동인들이 모여
산수를 즐기고 술을 마시며 한시를 지었다.
점차로 동인들이 늘어나서 1793년의 모임에는 73명이 참여했고,
그뒤 백전(白戰)이라는 한시 창작대회에는 수백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서울의 순라군(巡邏軍)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잡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에도 송석원에 모이는 사람들은 30~50명 정도였다고 한다.
1818년 천수경이 죽자 쇠퇴기에 접어들어 1830년대까지 그 명맥만 유지했다.
동인들은 서울 중앙관서의 서리인 경아전들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시사를 주도한 것은 규장각 서리들이었다.
규장각 관직이 정조 이후 문신들의 최고의 명예직이었던 것처럼
규장각 서리직 역시 서리직으로서는 최고의 명예직이었고
높은 문식(文識)을 소유한 지식인에 속해서 이들에 대한 대우도 여느 서리와는 달랐다.
주요구성원은
천수경 · 장혼(張混) · 김낙서(金洛瑞) · 박윤묵(朴允默) · 지덕귀(池德龜) · 김의현(金義鉉) · 김태욱(金泰郁) · 임득명(林得明) · 노윤적(盧允迪) 등으로,
거의 규장각 서리이자 서리명가(書吏名家) 출신들이다.
이들은 풍부한 시문집을 남겼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난 예인(藝人)들이었다.
〈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을 펴내
여항문인들이 정사년마다 그들의 시문집을 펴내는 전통을 만들었다.
송석원시사가 해체된 뒤
비연시사(斐然詩社) · 서원시사(西園詩社) · 직하시사(稷下詩社) 등이 생겨 그 전통을 이었다.
- 출처 : 다음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