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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김명국 - '신필(神筆)'의 화원

Gijuzzang Dream 2008. 3. 17. 20:15

 

 

 (21) ‘신필(神筆)의 화원’ 김명국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서 인기 있었던 전문지식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화원이다.
시인들은 한자를 아는 일본 지식인에게만 관심을 끌었지만,
화원은 한자에 조예가 깊지 않은 부자 상인이나 무사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그림은 외국어의 벽이 없어, 누구나 보고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값도 조선보다 몇 배나 높아, 일본에 한번 다녀오면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
 
화원들은 하루에 인물화 3∼4본을 그렸다는데,
산수화나 화조화(花鳥畵), 사군자류까지 포함하면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오간 5∼8개월 동안 적어도 100점은 넘게 그렸다고 짐작된다.
 
부사 김세렴(金世濂)의 일기 ‘해사록(海錄)’ 1636년 11월14일자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박지영 · 조정현 · 김명국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심지어 김명국은 울려고까지 했다.”고 기록했다.
박지영과 조정현은 글씨를 쓰는 사자관(寫字官)이고, 김명국(金明國)은 화원이었다.
일본인들은 그림과 글씨를 한꺼번에 부탁했기에, 김명국은 갑절로 바빠서 울상이 되었던 것이다.
 
 
 

술 취해 살았던 한평생

 

가난에 쪼들렸던 김명국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지금 남은 것은 일본에 전해지는 13점을 포함해도 30점이 안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달마도’도 일본에 있던 것을 사온 것이다.

몇 가닥의 활달한 붓놀림으로 달마대사의 이국적인 풍모와

면벽구년(面壁九年)의 구도심(求道心)을 그려냈기에 신필(神筆)이라 불렸지만,

김명국은 태어난 해나 죽은 해도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생애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다.

 

명국(明國)이라는 이름을 명국(命國)으로 고쳤다는데,

명국(鳴國)이라고 기록된 문헌까지 있는 까닭은

족보 하나 제대로 전하지 않는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취옹(醉翁)이라는 호가 날마다 술에 찌들어 살았던 그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데,

취한 상태에서 그림 그리는 것으로 더욱 이름났다.

 

 

역관 시인 홍세태의 제자 정내교는 그의 전기 ‘화사 김명국전’을 이렇게 시작한다.

 

“화가 김명국은 인조 임금 때 사람이다.

어느 집안 출신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호를 연담(蓮潭)이라고 했다.

그의 그림은 옛것을 본받지 않고도 심중을 얻었는데, 특히 인물과 수석을 잘 그렸다.

수묵과 담채를 잘 썼으며, 풍신(風神)과 기격(氣格)을 위주로 하였다.

세속적인 방법으로 울긋불긋하게 꾸며서 사람들의 눈이나 즐겁게 하는 그림 따위는

절대로 그리지 않았다. 사람됨이 방자하고 절도가 없었으며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다.

술을 좋아했는데, 한번에 여러 말을 마셨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에 반드시 크게 취해야만 붓을 휘둘렀다.

붓을 마음대로 놀릴수록 그 의미가 더욱 무르녹았다. 비틀거리는 속에 신운이 감돌았다.

대개 자기 마음에 든 작품들은 술 취한 뒤에 많이 그려졌다고 한다.”

   

 

 

지옥그림의 죄인들을 스님들로 그려 풍자

 

언젠가 영남에 사는 스님이 큰 비단을 가지고 와서 명사도(冥司圖·지옥그림)를 그려 달라고 했다.

 

지옥이란 한자어는 인도어 나라카(naraka)를 의역(意譯)한 것인데,

나락가(奈落迦), 또는 나락이라고 음역(音譯)하기도 한다.

불교에는 팔대 지옥이 있어

생전의 죄업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지옥으로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이 있으며,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천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명부전(冥府殿)이 있다.

명부전을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도 하는데

지장보살 뒷벽에 지장도, 시왕도, 또는 지옥도 등의 그림을 걸었다.

유가족들은 그 그림을 보며 망자가 고통당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극락왕생하기를 빌었다.

 

지옥그림은 불상 다음으로 중요했는데, 스님은 비단 수십 필을 그림값으로 가져왔다.

김명국은 좋아라 받고는 아내에게 넘기며 당부했다.

“이걸 가지고 술값을 삼게. 내가 몇 달 동안 신나게 마실 수 있도록 말야.”

얼마 뒤에 스님이 찾아오자 ‘맘이 내켜야 그린다.’면서 그냥 보냈다.

 

그렇게 서너 번 돌려보내더니, 하루는 술을 실컷 마시고 몹시 취해 비단 앞에 앉았다.

한참 바라보며 생각을 풀어내더니, 붓을 들어 단번에 다 그렸다.

그런데 건물 모습이며 귀신들의 형색이 삼엄하긴 했지만,

머리채를 끌고 가는 자나 끌려가면서 형벌을 받는 자,

토막으로 베어지고 불태워지는 자와 절구 찧고 맷돌 가는 자들이 모두 스님들이었다.

스님이 깜짝 놀라 말했다.

“어이구 참! 당신은 어쩌려고 내 큰 일을 그르쳐 놓으셨소?”

 

김명국이 두 발을 앞으로 쭉 내뻗고 웃으며 말했다.

“스님들이 일생 동안 저지른 악업이 바로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들을 속이는 짓이니,

지옥에 들어갈 자는 스님들이 아니고 누구겠소?”

 

스님이 ‘그림은 태워 버리고 비단이나 돌려달라.’고 하자, 김명국이 웃으며 말했다.

“스님이 이 그림을 완성시키고 싶다면, 가서 술이나 더 사 가지고 오시오.

내가 스님을 위해 그림을 고쳐 주겠소.”

스님이 술을 사 왔더니, 김명국이 술잔에 가득 담아 마시고는 기분 좋게 취했다.

붓을 쥐더니 머리 깎은 자에게는 머리털을 그려주고, 수염을 깎은 자에게는 수염을 그려 주었다.

잿빛 옷을 입은 자와 장삼을 입은 자에게는 채색을 입혀서 그 빛깔을 바꿨다.

김명국이 붓을 던진 뒤에 다시 크게 웃으며 잔에 가득 담아 마셨다.

스님들이 둘러서서 이 그림을 보며

“당신은 참으로 천하의 신필(神筆)입니다.”라고 감탄하더니 절을 하고 갔다.

 

정내교가 전기를 쓸 때까지도 그 그림이 남아 있었다는데, 스님들의 보물이라고 했다.

김명국의 풍자와 해학, 기발한 그림 솜씨를 전해주는 이야기지만,

이 지옥그림이 지금 어느 절에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김명국의 대표작 '달마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명국의 '심산행려도'

미술평론가 김용준(1904-1967)은 이 작품을 놓고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그린 흔적이 역력하다"고 평했다.

 

 

 

상복을 입고 등을 돌린 채 걸어가는 모습의 '죽음의 자화상'(은사도, 隱士圖)

60.6×391㎝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낮은 신분 때문에 거절 못하고 그려 실패작도 많아

 

조선후기의 화론가 남태응(南泰膺 · 1687∼1740)은

유홍준 교수가 번역한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그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布置)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天機) 아님이 없었다. 

 ... (줄임) ...

그러나 다만 정해진 법도에 들어맞게 하는 데 얽매여 일생 동안 애써서 정성을 다해도

가까스로 소가(小家)를 이루는 자들과는 하늘과 땅 차이도 더 되니,

이것이 어찌 김명국의 결함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술부터 찾았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없었다.

오직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만 잘 그릴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이 잘된 그림은 아주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 중에는 술에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 버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 많아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서로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김명국의 그림에는 걸작도 많지만 실패작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남태응은 그런 이유가 술 때문만이 아니라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이기도 하다고 변명했다.

 

“연담(김명국)은 천한 신분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아낄 수 없었던 것이다.

남이 소매를 끌고 가면 어쩔 수 없이 손에 이끌려 하루에도 수십 폭을 그려야 했으니,

그 득실이 서로 섞이고 잘되고 못된 것이 나란히 나와

공재(윤두서)처럼 절묘하게 된 것만을 단단히 골라낼 수 없었다.

 

만약 연담으로 하여금 그 처지를 공재와 같은 위치에 두게 했다면

이름을 얻은 그 성대함이나 작품의 귀함이 어찌 공재만 못하겠는가.

그러니 이런 식으로 그림을 매기는 것은 진실로 어린애나 가질 소견인 것이다.”

 

 

국부(國富)라고까지 불렸던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는 사대부 양반인 데다 갑부였기에

재물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이 내킬 때에만 그림을 그렸으며,

그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들어야만 남에게 보여주었다.

그랬기에 하나같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중인 김명국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중인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지만,

일본에서는 신분이 아니라 그림으로 평가하였다.

200년 동안 조선통신사가 12차례나 다녀왔지만, 일본 측에서 다시 불렀던 화원은 김명국 뿐이었다.

-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서울신문,  2007-05-21

 

 

 

 

 

'죽음의 자화상'이 '은사도(隱士圖)'?

 

 

조선시대 화가들의 일대기를 엮은 『화인열전(畵人列傳)』을 쓰면서

나는 그림 속의 한문을 해독하느라 무척 고생했다.

그런 중 연담 김명국이라는 17세기 인조 때 신필(神筆)이 그린 명작 '은사도(隱士圖)' 는

마침 다른 책에 그림 속의 한시가 번역돼 있어 조금도 의심하는 일 없이 이에 따르며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은일자의 고고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장황하게 해설했다.

그런데 『화인열전』을 읽은 연세대 이광호 교수가 내게 전화를 걸어

'은사도' 에 쓰여 있는 시는 어떤 은일자를 그린 것이 아니라

화가가 자신의 죽음을 그린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인데                (將無能作有)
내가 그림으로 그릴망정 유언으로 전하겠는가 (畵貌豈傳言)
세상엔 시인이 많고 많지만                            (世上多騷客)
누가 이미 흩어진 넋을 불러주리                     (誰招己散魂)


 

그림 속의 시에 의하건대 이 그림은 '죽음의 자화상' 인 것이었다.

죽음의 자화상이라!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극적인 내용인가.

저승길로 유유히 떠나는 자신의 죽음을 그린 그런 처연한 그림을 두고

그저 냉랭하게 '은사도' 라고 설명한 것은

비록 미필적 고의이기는 하지만 거짓을 세상에 퍼뜨린 죄에 해당한다.

지금은 그래도 이광호 교수처럼 한문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그 잘못을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 누가 이런 오류를 찾아낼 수 있을까.

... (생략) ...


- 2001년 5월 26일, 유홍준(영남대 교수 · 한국미술사)

 

 

 

 

 

연담 김명국의 ‘은사도(隱士圖)’

 

 

 

화폭에 담은 화가 자신의 유언

조선 중기의 화가 연담 김명국(1600∼?)에게는 술에 얽힌 일화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청구영언’의 서문을 쓰기도 한 정내교(1681∼1757)의 ‘화사(畵師) 김명국전’에도
그런 이야기가 전하지요.
어느날 한 스님이 연담을 찾아와 명사도(冥司圖)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명사도란 명부전에 걸리는 불화로 저승에서 염라대왕에게 심판받는
일종의 지옥 그림이지요. 스님은 고운 삼베 수십 필을 사례금조로 건네주었는데,
연담은 아내에게 건네고는 몇 달 동안 마실 술로 바꾸어 오도록 했습니다.
 
 

어느날 통음을 한 연담은 술기운이 오르자 한 붓에 휘둘러냈습니다. 그림은 생동감이 넘쳤지만 불에 타거나 칼로 베이고, 절구에 짓이겨지는 자가 모두 중이었다지요.

 

스님이 깜짝 놀라자

연담은 “일생동안 지은 악업이 혹세무민이니 지옥에 갈 자가 너희들이 아니고 누구겠느냐.”고 일갈했습니다.

그리곤 “술을 더 사오면 그림을 고쳐주겠다.”고 했지요.

취기가 오르자 다시 붓을 잡더니

잠깐 사이에 머리와 턱에는 숱을 그려넣고,

승복에도 빛깔을 넣어 스님을 탄복하게 했습니다.

 

 

평소 호방함 대신 경건한 분위기 풍겨

 

이런 연담이지만 규장각이 소장한 각종 의궤에는

그의 이름이 明國(명국)뿐만 아니라 鳴國(명국)과 命國(명국)으로도 남았습니다.

국가기관인 도화서에 소속되어 있다고는 해도 신분이 낮은 화원(畵員)의 이름쯤은 밝을 명이든, 울 명이든, 목숨 명이든 상관없었던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지요.

 

명사도에 얽힌 일화는 천대받던 환쟁이로서 왜곡된 현실에 대한 연담의 조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연담의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합니다.

명부전의 후불탱을 새로 모시는 불사(佛事)를, 제아무리 도화서 화원이라고는 해도 불교의 교리와 도상을 모르는 사람에게 주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연담은 훗날 신필(神筆)로 떠받들어졌지만 도화서 화원 시절 그의 진면목은 오히려 일본사람들이 알아봤지요.

 

그는 1636년과 1643년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수행화원이란 통신사의 활동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역할을 하는 직책이지만,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선승화(禪僧畵)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힘차게 내닫는 몇 가닥의 붓질로 깊은 정신세계를 형상화해내는 연담의 달마도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요.

 

묵필을 잡은 사람에게는 사람의 본성을 곧바로 가리킨다는 선종의 종지인 직지인심(直指人心)의 경지를,

감상하는 사람에게는 마음 비우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달마도의 의미를 제대로 구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담의 달마도 일본인들이 먼저 알아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연담의 ‘달마도’는

우리나라 달마도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김명국의 이름은 몰라도 이 달마도는 누구나 기억해낼 수 있을 만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지요.

 

국립중앙박물관은 ‘달마절로도강도(達摩折蘆渡江圖)’라는

연담이 그린 또 하나의 달마그림을 갖고 있습니다.

 

달마가 양무제에게 남의 칭송을 바라는 공덕은 이미 공덕이 아니라는 깨우침을 준 대가로

죽임을 당한 뒤 환생하여 서쪽으로 가다가 갈대를 꺾어 들고(折蘆) 강을 건넜다(渡江)는

불교설화를 알지 못하면 손댈 수 없는 주제입니다.

통신사 수행화원 시절 그렸을 두 점의 달마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일본에서 사들여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만년의 작품인 ‘은사도(隱士圖)’에서는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그릴 수가 없었다는 연담의 호방한 기운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달마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철학적 경지마저 느껴지지요.

 

이 그림의 주인공이 제목처럼 속세를 떠난 선비(隱士)가 아니라

죽음을 향하여 무거운 걸음을 내딛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라고 설명한 사람은

이광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입니다.

‘내가 그림으로 그릴망정 유언으로 전하겠는가.’라는 발문의 한 대목을 제대로 해석함으로써

이 그림의 성격을 밝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 그림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전되면,

김명국의 대표작은 ‘달마도’가 아니라

언젠가는 이름이 다시 붙여져야 할 ‘은사도’가 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 서동철 dcsuh@seoul.co.kr

- 서울신문, 2008-03-13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