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에 대해 개방적이었던 추사 김정희의 제자는 여러 갈래였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사대부들도 많았지만 중인 쪽에 특별히 많았다.
이상적 같은 역관 제자는 중국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새로운 문물을 전해 주었으며,
조희룡 같은 화가는 그의 글씨를 그대로 배워
웬만한 호사가들도 구분치 못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다.
조희룡은 중인 시인들의 모임인 직하시사(稷下詩社)와 벽오사(碧梧社)의 동인이었으며,
중인 42명의 전기를 지어 중인문화를 정리 평가하였다.
조선후기의 중인문화는 그에게 와서 중간 결산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묵란도' / 종이에 수묵, 23.5x28.5cm
난을 그리는 것이 비록 조그만 기술이지만,
사람의 성령(性靈)을 기쁘게 길러준다는 조희룡 자신의 화론을 썼다.
조희룡은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대담한 구도의 난을 잘 그렸다.
그는 완당에게서 난을 배웠으나 청의 정판교법이 많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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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 조희룡 <홍매도 대련>
족자, 종이에 담채, 127.5×30.2cm,
심하게 몸부림치던 용이 격렬하게 몸을 뒤채이며 승천하고 있다. 온몸에서 불을 뿜듯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꿈틀거린다. 조희룡은 죽어 있는 듯 뒤틀린 채 서 있는 매화나무에 붉은 꽃이 피어오르자 마치 승천하는 용을 보는 것 같았다. 심하게 각지고 꺽인 고목에 꽃이 피자 붉은 기운이 확확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겨울 추위를 삽시간에 몰아내 버릴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그 뜨거운 정념을 조희룡은 화면 가득 쏟아 부었다. ‘미친 듯이 그리고 어지럽게 긋는다(狂塗亂沫)’는 표현에 어울리도록 격정적인 발화의 충동을 덜썩 내려놓았다. 오랜 세월 승천을 꿈꾸던 용의 붉은 마음은 그렇게 조희룡의 손 끝에 사로잡혀 두 폭의 매화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용을 화폭에 사로잡으면서 조희룡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줄기 하나를 치더라도 용을 움켜잡고 범을 잡아 매듯이 해야 하며, 꽃 한 송이를 그려 넣더라도 구천에서 현녀(중국 고대의 여신으로)가 노닐 듯이 해야 하며, 한줌의 벼룻물은 푸른 바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찍이 원나라 사람이 용을 그린 것을 보았는데, 먹을 뿌려 구름을 만들고 물을 머금어 안개를 만들었다. 매화를 그리는데 얽히고 모인 가지와 만가지 꽃의 향배 정할 곳에 이르면 문득 이 생각이 떠올라서 크게 기굴(奇崛)한 변화가 있게 한다. 용을 그리는 법을 매화그림에 도입했으니, 그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한시할 것이다.”
날카로우면서도 거칠고,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움을 다치지 않는 <홍매도 대련>은 조희룡이 지향했던 조형 세계가 정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장식적이면서 자유분방한 그의 필치에서 탄생된 매화꽃잎. 그 꽃을 조희룡은 신선들이 먹는 단약(丹藥)으로 생각했다. 혹은 화난 미인의 뺨이라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부처가 현신한 것으로 생각했다. 매화 꽃송이에 점을 찍으면 보살상이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오직 매화 자체에서 느껴지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몰입했다. 붓에 먹을 묻혀 툭툭 찍어 내리듯 표현된 매화 등걸은 오랜 세월을 절치부심하며 기다려온 용의 비늘처럼 까칠하다.
용의 비늘을 뜯어내어 만든 듯한 제화시 끝에 ‘소향설관(小香雪館)’이란 관지가 있어서 유배기인 1860대 초반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독기 서린 바다, 적막한 물가, 황량한 산과 고목 사이에 달팽이집같이 작은 움막 속에서 움츠려 떨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한묵의 능사에 손을 대어 온갖 돌과 한 떨기 난초를 때때로 그려내었다. 되는 대로 붓을 놀리고, 먹을 튀겨 빗물처렴 흩뿌려서 돌은 흐트러진 구름처럼, 난초는 젖혀진 풀처럼 그리니 자못 기이한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알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애오라지 스스로 좋아할 따름이다.” - 조정육의 옛그림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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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서옥도' / 서울대박물관 소장
조희룡의 그림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
매화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초가집 창가에 앉은 선비가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
보연재에게 보내는 편지(우봉 조희룡) / 35.5x55.3cm, 학고재 소장
조희룡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거의 구별이 안될 정도로 비슷하다.
어떤 면에서는 추사의 거친 면이 사라진 부드러움이 더 잘 드러나는데
그만큼 금석기가 덜 느껴진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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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화를 그린 덕분에 병골이 장수하다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둥근 머리와 모난 얼굴, 가로 찢어진 눈에 성긴 수염을 한 6척 장신이었다고 한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에서 마치 학이 가을 구름을 타고 훨훨 날아가듯이 길을 걸어다녔다고
묘사했는데, 신선이 아니라 병자였다.
조희룡은 수많은 호를 사용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수도인(壽道人)이다.
그는 ‘수도인’이라는 호를 짓게 된 사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키만 훌쩍 크고 야위어, 옷을 걸치기에도 힘겨울 만큼 약했다.
그래서 내 스스로 수상(壽相)이 아닌 줄 알았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14세 때에 어떤 집안과 혼담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는 내가 반드시 일찍 죽을 것이라고 하여 퇴짜를 놓고 다른 집안과 혼인하였다.
그런 지 몇 년이 안 되어 그 여인은 과부가 되었다.
내가 이제 70여 세가 된 데다 아들 딸에 손자 증손자까지 많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노인이라고 큰소리를 칠 만하다.
그래서 스스로 수도인(壽道人)이라고 호를 지었다.>
일찍 죽을 것이라 여겨 혼담까지 깨졌지만, 칠십을 넘겨 장수했기에,
“장수할 상이 아닌데 늙은 나이 되었고, 매화를 사랑하여 백발 되었다.”고 그림에 썼다.
매화의 맑은 향과 기운을 그리다 보니 몸까지 깨끗해져 장수했다는 뜻이다.
● 문자기(文字氣)가 없다고 비판받았던 난(蘭) 그림
중인 조희룡은 사대부 학자 김정희에게서 글씨뿐만 아니라 문인적인 삶의 자세를 배웠다.
스승인 추사는 난을 좋아했는데 조희룡은 매화를 좋아해서
“좋은 종이와 먹이 있으면 가장 먼저 매화가 생각났다.”고 할 만큼 매화를 많이 그렸다.
8폭 병풍 가운데 1폭인 ‘홍매도(紅梅圖)’에
“종 모양의 옛벼루에 시험하다(試古鐘硏)”라고 썼는데,
좋은 종이나 먹뿐만 아니라 기이한 벼루만 보여도
그 벼루에 시험삼아 매화를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뒤틀린 가지가 비스듬하게 뻗어내리며 붉은 꽃이 만발한 고매(古梅)를 그렸다.
가지는 수묵 농담(濃淡)으로 처리하고 담홍색 꽃송이를 넉넉하게 그려,
8폭을 다 펼치면 부귀익수(富貴益壽)라는 제화 그대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는 중국을 드나들며 옹방강 등 당대 최고 서화가들과 교류했던 추사를 통해
서화 문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이란 책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많이 기록했다.
직업적인 화가들은 그림 그리는 솜씨만 익혔는데,
조희룡이 박학다식한 서화관으로 체계를 이룬 것은 추사 같은 학자를 스승으로 모신 덕분이다.
그러나 추사는 그의 난 치는 법에 대해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아들 상우(商佑)에게 편지를 보내 난 치는 법을 가르치면서, 조희룡같이 하지 말라고 했다.
<난을 치는 법은 예서(隸書)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다음에야 난 치는 법을 얻을 수 있다.
또 난 치는 법은 화법(畵法)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대로 하려면 일필(一筆)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조희룡은 내가 난 치는 솜씨를 그대로 배워 화법 한 가지만 쓰는 폐단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그의 가슴 속에 문자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추사 수준에서 볼 때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그림 솜씨에 비해 떨어진다는 뜻이지,
그림 자체가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산수나 매화는 조희룡의 그림이 추사보다 더 낫다.
이는 자기의 글씨를 너무 똑같이 배운 조희룡에게 대한 경고인 동시에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중인 화단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추사의 글씨 제자 8명과 그림 제자 8명이
1839년 6월과 7월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서 추사에게 품평을 받았다.
추사의 품평은 글씨를 제출했던 전기(田琦)가 기록해 두었다가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이라는 책으로 만들었다.
화루(畵壘)에 출전했던 화가 8명의 작품이 호암미술관에 병풍으로 소장되었는데,
그 화제를 모두 조희룡이 썼으니 추사 제자들 사이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조희룡의 글씨는 추사 글씨를 빼박은 듯해 구별하기 힘든데,
추사 글씨보다 부드러워 금석기가 덜 느껴진다는 평을 받았다.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갈 때에 연루되어 임자도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했으니,
추사를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그림 제자라고 할 수 있다.
● 사대부의 문인 취향 몸에 익혀
그는 중국 서화에 조예가 깊었다.
중국을 직접 가보지 못했던 그가 이 정도의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혼자서 끊임없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문형산(文衡山)과 진백양(陳伯陽)은 난초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나하고 천년이나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같았다.
나는 오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난 30폭을 쳤다.
기울어지거나 바른 모습 하나하나에 저마다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두 선생에게 그 풍격을 묻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 18>
그는 송나라 시대의 서화가 문천상과 진백양을 사숙한 셈인데,
그가 먼저 배운 것은 충신으로 이름났던 그들의 마음이다.
그런 뒤에 하루 종일 30폭이나 난을 칠 정도로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 난초를 잘 그린다고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문인들은 간략하면서도 정돈된 구도로 묵매화를 그렸는데,
조희룡의 매화는 복잡하면서 웅장하다. 소박하던 꽃잎이 활달하고도 화려해졌다.
난초를 치면서 문천상과 진백양을 본받았는데, 매화를 그릴 때에는 그러한 경지를 넘어섰다.
“나의 매화는 동이수와 나양봉의 사이에 있는데, 결국 그것은 나의 법이다.”라고 제화에 썼으니,
사람들이 그가 그린 매화를 보면 “이건 조희룡의 매화이다.”라고 말하게까지 되었다.
그는 그림공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대부 문인들의 문화적 취향과 이념을 공유하기 위해서도
많은 골동 서화들을 수집하고 감상했다.
“나는 약간의 책을 소장했고, 골동과 서화를 모으는 버릇도 있었다.
평상시에 늘 좌우에 벌여놓고, 잠시도 떨어져 있지를 않았다.”고 했다.
홍선표 교수는 위항시인들에게 가장 많이 그림 청탁을 받은 화가가 바로 조희룡이라고 했다.
중인들이 사대부 화가에게 그림을 부탁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있겠지만,
같은 중인 화가들 사이에서도 그의 그림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직업적인 화가와 구별하였다.
사대부들이 수양의 여기(餘技)로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그도 문인화가로 자처했던 것이다.
그가 ‘해외난묵’이란 글에서
“(직업적인) 화가의 사생법(寫生法)은 우리 (위항시인) 무리들이 할 바가 아니다.
매 · 난 · 석 · 죽과 같은 그림은 오로지 그 뜻을 옮기는 데 있고, 유희로 이루어진다.”
고 말한 것도 자기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 베껴내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한 포기 난을 치는 것은 단순해서 그림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대부도 칠 수 있지만,
8폭 병풍의 ‘홍매도’에 이르면 문인화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여기(餘技)가 아니라, 일삼아 그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희룡은 전문적인 화가이다.
그는 직업적인 화가가 되기를 거부했지만, 중인들은 그에게 많은 그림을 부탁했다.
중인이면서도 사대부의 문인 취향을 즐겼던 위항시인들이
직업적인 화원보다 사대부의 문인 취향을 몸에 익힌 조희룡에게 그림을 많이 부탁한 것이다.
-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서울신문, 2007-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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