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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조희룡 - 중인문학동인 '벽오사'

Gijuzzang Dream 2008. 3. 17. 20:10

 

 

(35) 조희룡이 만든 중인 문학동인 ‘벽오사’

 
조희룡(1789∼1866)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많은 중인 친구들과 사귀었다.
그런 교우관계를 통해서 보고 들은 선배 중인 42명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56세에 저술한 <호산외기(壺山外記)>인데,
3년 뒤에 다시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 '벽오사(碧梧社)'라는 문학 동인을 조직했다.
 
6대에 걸쳐 의원 노릇을 한 초산(樵山) 유최진(柳最鎭·1791∼1869)의 집이 시냇가에 있었는데,
우물가에 늙은 벽오동이 있어서 집 이름을 벽오당이라 했고,
그 집에서 모인 시사 이름을 벽오사라 했다.
 
그러나 <의과방목>에 진주 유씨가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집안이 의과에 합격한 의원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날에 만나 시 읊고 그림 그려

 

유최진의 문집인 ‘병음시초(病吟詩艸)’는 연도별로 편집되었는데,

정미년(1847)에 지은 작품들을 모은 ‘정미집’에 ‘벽오사약(碧梧社約)’이란 글이 실려 있다.

 

벽오사를 결성하게 된 취지와 규약 몇 가지를 기록한 글이다.

 

서문에서는 병 때문에 친구들 모임에 참석지 못하고 친구들이 유최진의 집에 모여들다가,

옛시인들이 시사(詩社)를 결성했던 뜻에 따라 벽오사를 조직한다고 했다.

 

옛사람들의 진솔한 뜻을 본받아 몇 가지 조약을 정했는데,

“사철의 아름다운 날을 가려 모인다.”

“밥은 소채를 넘지 않고, 술은 세 순배를 넘기지 않으며, 안주는 세 가지를 넘지 않고,

차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

“마음대로 책을 읽고, 흥이 나는 대로 시를 읊으며, 한계를 두지는 않는다.”는 내용이다.

 

‘진솔한 뜻’이란 글자 그대로 진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송나라 시인 사마광(司馬光)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양에 있을 때

덕망있는 인사들과 결성한 소박한 모임 원풍기영회(元豊耆英會)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들도 먹고 마시려 모인 게 아니라 음식 숫자를 제한했는데,

유최진의 친구들도 사람이 좋아 모이다 보니 진솔한 뜻을 이어받은 것이다.

모인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것까지도 본받았다.

 

 

도화서 화원 유숙이 그린 ‘수계도’의 일부분

1853년 3월3일 중국의 난정모임이 있은 지 1500년 되던 해를

기념해 30명의 중인이 시회를 개최하는 장면이다.

 

 

 

이들은 한 해에 몇 번씩 모였는데, 1855년 단오날에도 모여 시를 읊으며 놀았다.

도화서 화원 유숙(劉淑)을 불러 그 모습을 그리게 하고, 유최진이 그 그림을 설명했다.

 

 

‘을묘년(1855) 창포절에 늙은 친구 석경(石經 · 이기복)과

서원(西園) 송단(松壇)에서 놀기로 약속했는데, 아침에 비가 와서

다섯 노인과 다섯 젊은이가 시냇가 초당에 모이게 되었다.

마침 가랑비가 잠시 그치고, 바람이 부드러우며, 날씨고 맑아졌다.

나란히 시를 읊으며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 즐겁게 이야기했으니,

참으로 쉽게 만날 수 없는 모임이었다.

... (줄임) ...

혜산 유숙에게 부탁해 붓으로 각자의 초상을 그리게 했는데,

마치 등불 그림자가 벽에 비치는 것 같아 수염과 터럭까지 그대로 났으니,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말이 안 될 정도였다.

이 모임에 참여치 못한 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하나하나 가리키며 일러주기가 귀찮아,

‘서원아집서(西園雅集序)’를 모방해 대략 기록한다.

 

주인자리에 방관을 쓰고 담배를 피는 이는 산초 유최진이고,

곁에 앉아 손으로 염주를 세는 이는 한치순이다.

옆에 큰 갓을 쓰고 책상다리로 무릎을 안고 있는 이는 만취 이팔원이고,

검은 감투에 옷깃을 여미고 멀리 바라보는 이는 석경 이기복이다.

가까운 나무 그늘에서 팔짱을 끼고 자세히 듣고 있는 이는 미촌 김익용이고,

얼굴을 돌리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구 떠드는 이는 우봉 조희룡이다.´

 

이 그림을 확인할 수 없어 유감이지만,

6년 뒤 대보름날 그림이 남아 있어 이들이 놀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오로회첩’을 만들면서 그림을 다시 그려

 

신유년(1861) 대보름날은 비가 내려 달구경하기가 힘들었지만,

벽오사 동인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빗속을 걸어 유최진의 집으로 모였다.

 

조희룡이

‘삿갓 쓰고 진창길을 헤치며 오니 / 추적추적 자리에 비가 고였네(笠衝泥至,蕭蕭坐雨深.)’

라는 시를 지었는데, 참석자는 유최진의 아들 유학영까지 포함해 6명이다.

 

 

 

 

유숙이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를 그리고, 참석자 이기복이 서문을 썼다.

 

붉은 누각을 마주해 수염을 비비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김익용이다.

모임을 일으키고, 신선같이 한 폭을 펼쳐 난(蘭)을 치고 시를 짓는 사람은 조희룡이다.

눈썹을 치켜뜨고 담소하며 흔연히 자리에 바싹 앉아

소매를 펼치고 아래를 굽어보는 사람은 이팔원이다.

뜰로 나가지 않고 손에 책을 쥐고 뜻을 즐기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벽오사 주인 유최진이다.

검은 두건에 소담하게 차려입고

숙연히 안석에 기대어 즐겁게 진솔하게 시를 짓는 사람은 이기복이다.

관을 쓰고 채록하며 손을 모아쥐고 서 있는 사람은 작은주인 유학영이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유숙의 그림 ‘벽오사소집도’와 이 설명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림 설명에 의하면 동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누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비가 왔기에, 바깥에서 종이를 펼치고 난을 치거나 그림을 그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유숙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1861년, 종이에 담채, 14.9×21.3㎝, 서울대박물관 소장

벽오사 동인들은 함께 모여 매화로 다린 차를 마시며 밤새워 시서화를 토론하였다고 한다.

빙 둘러앉은 중앙의 마르고 수염이 긴 노인이 조희룡인데 당시 73세이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벽오사소집도’에는 건물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울타리가 화면 중앙을 대각선으로 나누고, 울타리 바깥에는 물결이 표시되어 있다.

종이와 붓, 먹과 벼루 등이 술잔과 함께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시사(詩社)로 모였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누가 조희룡이고 누가 집주인 유최진인지는 분간할 수 없다.

‘손을 모아쥐고 서 있는’ 작은주인 유학영과 차를 끓이는 시동만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송희경 선생은 ‘조선후기 아회도 연구’에서 이 그림에 대해

“화면의 인물상들은 조선 19세기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중국 고사(高士)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고전상들이다.

화중 인물을 조선적 실물상이 아닌 고사적 고전상으로 표현한 것은 오로회(五老會) 모임을

중국의 전통적인 아회에 비유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제작 태도이다.”

라고 설명했다.

 

벽오사 동인들이 중국 노인회를 본받아 모인 것은 사실이지만,

화가는 그림까지도 중국 노인회의 모임처럼 그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은 아회도(雅會圖)를 많이 그린 유숙의 화풍도 아니다.

그래서 송희경 선생은

“신유년 모임 당시에 유숙이 그린 원작이 아니라 8년 뒤 첩(帖)으로 개장할 때,

다른 화사가 유숙의 그림을 보고 간략하게 모사한 방작(倣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 추측했다.

 

 

동인들이 세상 떠나자 ‘오로회첩’을 만들고 회상

 

‘오로회첩’이란 벽오사 동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자,

주인 유최진이 1869년 대보름날에 ‘벽오사소집도’와

다섯 동인의 서문이나 시를 첩(帖)으로 만든 것이다.

 

79세가 된 유최진은 이미 병이 깊어 손자에게 글을 쓰게 하면서

8년 전의 대보름날을 회상했는데,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나 마지막 글이 되었다.

 

 

‘신유년(1861) 대보름날 비가 내렸는데, 네 노인이 잇달아 찾아왔다.

... (줄임) ...

손꼽아 헤어보니, 벌써 9년이나 되었다.

우봉(조희룡)이 먼저 하늘로 갔고, 석경(이기복)도 이어서 세상을 떠났다.

미촌(김익용)은 몹시 늙어 기력이 없는 데다 가는귀까지 먹었다.

만취(이팔원)는 우환이 얽혔다. 나는 빈궁한 홀아비로 살고 있다.

오늘 저녁에 보름달이 환하건만 함께 감상할 사람이 없어, 등불을 걸고 홀로 누웠다.

정신이 또렷해 잠도 오지 않으니, 긴 시를 이어서 지어 오늘 저녁의 감회를 기록한다

 

그 아래에 다섯 동인의 벼슬과 이름, 나이를 소개했다.

 

‘주부(主簿) 이기복(1783-1865)은 호가 석경(石經)으로 나이 79세이다.

동추(同樞) 김익용(1786- ? )은 호가 겸선(兼善)으로 나이 76세이다.

첨추(僉樞) 조희룡(1789-1866)은 호가 우봉(又峯)으로 나이 73세이다.

산인(散人) 유최진(1793-1869)은 호가 초산(樵山)으로 나이 69세이다.

군(護軍) 이팔원(1798- ? )은 호가 만취(晩翠)로 나이 64세이다.´

 

 

이기복은 의역(醫譯) 가문 출신의 의원인데, 헌종의 어의(御醫)였다.

그러나 헌종에게 바친 약이 잘 안들었다는 죄로

강진 고금도에 귀양갔다가 1850년에 돌아와 다시 벽오사에 합류했다.

 

벽오사에는 화원 유숙이나 경아전 나기(羅岐)를 포함해 여러 사람이 모였지만,

중심인물은 이 그림에 나타난 다섯 늙은이였다.

조희룡도 1851년에 스승 김정희의 구명운동을 펼치다가

전라도 영광군 임자도로 귀양갔다 돌아왔으니,

중인은 정권의 핵심이 아닌데도 임금 옆에 있는 전문가였기 때문에

정권의 부침과 함께 자주 유배길에 오른 셈이다,

그랬기에 더욱 친밀하게 사귀었으며,

시사(詩社)로 만나 한시만 지은 것이 아니라 인생을 함께 한 것을 알 수 있다.

-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서울신문, 2007-08-27

 

 

 

 

 

 

 

 

유숙의 ‘벽오사소집도’

 
 
 
동다송 저술 후 茶 저변확대 추정 자료
 
 

 

  

지루한 여름, 짙푸른 나무 위로 쏴아~ 시원하게 내리는 장대비는 유쾌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시는 한 잔의 차는 중후한 품격과 풍류가 있어 좋다.

울창한 송림(松林), 맑은 물에 탁족(濯足)만이 한사(閑士)의 소요유(逍遙遊)이랴 !

 

찻잔 위에 서린 다연(茶煙)의 아름다운 군무(群舞)를 감상하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것도 탁족에 견줄만한 한 여름의 피서법이다.

 

옛 사람들은 시회를 통해 한 여름 더위를 잊기도 하였다.

유숙(劉淑, 1827~1873)의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오로회첩(五老會帖))》은

서울대학 박물관 소장품으로 시회(詩會)를 그린 한 점의 그림이다.

 

어떤 논문집에서 이 벽오사는

유최진의 집 우물가에 벽오동(碧梧桐)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함풍 신유(咸豊 辛酉, 1861) 유최진, 이기복(1783~1863), 조희룡(1780~1866), 김익용(1786~),

이팔원(1798~)의 시회 정경을 1869년 유숙이 그린 것이

바로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자료는 여항인들의 시회를 그린 그림에 불과하지만

필자에게 있어서는 19세기 차 문화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요,

초의선사의《동다송》저술이 후 차가 실제 어느 계층에 영향을 주었으며,

차를 마시는 형식, 방법을 규구할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19세기 여항인의 시사(詩社)에서

(여항인은 주로 기술 잡직이나 미관말직에 종사하는 인물들로 가치관과 취향은 사대부의

의식세계를 따랐다. 이들은 문인들의 일상생활이었던 詩, 書, 畵를 답습, 신분상승을 꾀하고

자아성취의 수단으로 삼았다)

차를 끓이는 장면이 사실에 근거하여 그려졌다는 점과

실제 참여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자세히 알 수 있고,

시회의 성격을 밝힐 수 있는 기록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 벽오사 시회에 참여했던 오창렬, 조희룡, 전기(田琦)는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실학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들로 초의선사와 밀접한 교유가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따라서 여항인들의 모임, 특히 시회에서 차를 마신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사료로써 19세기 중엽의 음다(飮茶) 풍속이

이미 문인사이에 어느 정도 확산되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동다송》이 저술(1837)된 이 후 차는 이미 사회적인 저변 확대가 어느 정도 있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료이다.

- 법보신문, 861호, 2006-07-19 [박동춘의 우리시대 동다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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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략) ...
그러나 그는 중인들의『호산외기(壺山外記)』를 비롯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화구암난묵(畵鷗盦讕墨)』『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우해악암고(又海岳庵稿)』『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海外赤牘)』『우봉척독(又峰尺牘)』등의 책을 저술하여 회화이론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중 거의 대부분의 책이 유배지에서 완성됐다.

1851년(철종 2) 63세의 나이로 영광 임자도(荏子島)에 유배된 조희룡은
그곳에서 3년을 보내는 동안 집 뒤의 황량한 산과 문 앞의 파도가 일렁이는 가운데
크고 작은 대나무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세월을 견뎠다.

“시를 지으매 모두 위태롭고 고독하고 메말라서,
부드러운 글자와 여유로운 글귀의 빼어나고 활발하고 명랑하고 윤택한 것이 없다.
그리하여 시를 덮어 두고 그림에 들어갔다.
손이 가는대로 칠하고 그어 먹기운이 생동하여 가슴 속의 불평한 기운을 표출해대니,
문득 소슬하고 높은 뜻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직 이 한 가지 일이 일체의 고액을 극복해가는 법인 것이다.”

그는 유배 오기 4년 전인 1847년 봄에 ‘벽오사’라는 시사모임을 결성하였다.
‘벽오사’는 유최진을 맹주로 하여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장한 여항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풍류모임이었다. 그곳에서 조희룡은 59세로 가장 나이가 많았고
요절했던 천재화가 전기는 23살이었다.
나이 차이를 떠나 서화를 모으고 감상하는 서화고동 취미와 시서화를 함께 즐기는
문인적 취향으로 결성된 시사회였다.
 

조희룡, 전기, 유재소, 유숙 등 당시를 대표하는 여항문인화가들이 주축이 될 만큼 활발한

활동상을 전개하였다. 이런 활발한 모임을 통해 조희룡은 스스로가 속해있는 중인 집단을

기록할 필요성을 느껴『호산외기』같은 기록물을 남겨야 되겠다는 자각을 하였을 것이다. 

“글씨와 그림은 모두 솜씨에 속한 것이니, 그 솜씨가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 종신토록 그것을 배울지라도 능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손 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단호하게 정의했던 조희룡.

그에 의해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것은 곧 장승업같은 화가가 인정받는 시대가 가까이 와 있음을 의미했다.

... (중략) ...

 

- 조정육의 옛그림 읽기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