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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京畿道)는?

Gijuzzang Dream 2008. 2. 16. 13:14

 

 

 

 

 

경기문화재단

 

 

 경기도(京畿道)는 ? 

 

 

 

- 고대부터 이어온 나라의 심장 -

경기도는 한반도의 요충이다.

아시아 대륙을 향한 우리의 지형, 이것은 마치 호랑이가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형상이다.

동물과 인간의 포효는 심장의 박동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경기도!  이곳은 한반도의 맥박이 고동치 는 가슴이다.

 

살아 숨쉬는 5천년 민족사의 박동이 고려의 삼한(三韓) 통합 같은 역사적 교훈을 새기며

21세기의 새 지평 통일 한국의 청사진을 펼치고 있다.

 

한반도의 여명을 장식한 경기도의 지형,

 

이미 이곳은 자연의 태생적 안식이 가능했던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인의 생활 터전이었고,

역사의 시작인 철기 · 삼한시대에는 마한과 진한의 무대로서 한강 · 임진강 · 예성강을 품었다.

그리고 삼국 정립기 역사의 꽃 백제시대에는 주위를 아우르는 왕도의 땅이 되었으니,

태초 이래로 경기 오악이 하늘을 받친 경기도 땅은

역사와 문화를 잉태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품이었다.



- 꼭 지켜야만 할 역사의 땅 -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을 놓고 치열한 쟁패의 각축을 벌인 것은

웅혼한 민족사의 일대 장관이었다.

이 시기 대륙을 향한 호랑이의 포효는 절정을 장식하였다.

한강을 포함한 경기 땅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지던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오늘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민족사의 도도한 흐름은 한강처럼 계속 흐를 것이다.

경기인 왕건의 삼한 통합으로부터 고려 건국 이후 오랜 역사의 궤적에서

단 일 민족의 통일을 유지하며 민족 문화의 동질성을 지켜오기까지,

경기 땅은 '니체'가 말한 대로

'한반도에 비치는 저 찬란한 태양이여

거기에 고려의 민족통합이란 대역사(大役事)가 없었다면

그 빛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 는가'를 되짚어 음미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경기 땅은 민족통일의 지렛대로서

그 생명력을 일깨우는 고난과 시련, 영광으로 점철된 역사의 현장이다.

임진 · 병자년의 양란을 겪은 혹독한 시련의 땅,

강화도 함락, 광교산 승전, 남한산성의 항전, 삼전도의 수모 등등

역사는 결코 경기 땅을 외면할 수 없었다.

광복의 기쁨을 비집고 들어온 1950년대의 남북 분단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흘러가고 있다.

통일이라는 대전제 아래 맺어진 미국과의 관계는 기지촌으로 대변될 흔적을

역시 이 땅에 남겨놓기도 하였다.

경기 산하에 펼쳐진 역사의 궤적을 추적, 그 곳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은

역사 발전의 주역인 인간의 삶을,

문화의 역동성과 과거의 흔적에서 원초적 생명의 근원을 찾는 데 있다.

 

이는 21세기 디지털 문화의 새 장을 열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고려와 조선의 왕도를 포용하면서 천년의 역사를 이끌어온 이 땅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은,

이 시대가 지향해야 할 통일의 대역사를 민족의 자존심으로 대변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 문화 예술의 마당에서 새로운 기전학(畿甸學)까지 -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가교로서 전통 문화의 독창적 토양도 경기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항몽 40년의 팔만대장경 판각, 불교 유적을 비롯한 문화재의 보고,

민족사를 이끌어온 사상의 보고는 바로 경기였다.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려온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의 송악, 감악, 운악, 북악, 관악 등 경기 5악,

그리고 한강, 임진강, 예성강, 안성천 등의 물길,

서해의 섬들과 서해안의 포구와 개펄 등은 경기문화 예술의 터전이다.

민중의 애환을 말해주는 양주별산대, 이천거북놀이, 안성남사당, 평택농악 등의 뿌리는

자연의 혜택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경기 땅의 풍요가 곧 문화 예술의 모태가 되었다.

고려 말 공민왕의 외세를 배격한 자주 노선과 정몽주의 성리학 정립,

조선 왕조의 유교를 바탕으로 한 수기치인과 민본주의 정치는 500년을 지탱해온 정신적 지주였다.

 

정도전의 정치적 이상 철학과 율곡 이이의 창업, 수성, 경장,

조광조의 개혁정신, 강화학 등의 바탕은 모두 경기에서 형성되었다.

실학의 근간 또한 경기에서 출발하였거니와

경기 실학자들의 치열한 현실론은 근세 민본주의의 초석을 다졌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굳건한 토대를 구축하는 토양이 되었다.

특히 화성 축조에 경기 실학자들의 이론이 뒷받침되어

경기 문화, 사상, 경제, 사회 등을 대변하는 백미적 금자탑이 되게 하였다.

 


- 행정 중심지이자 저항 정신의 표상 -

경기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상징하는 이른바 4대 유수부(개성, 강화, 광주, 수원)는

한국사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4개의 기둥이다.

 

개성은 고려왕도 500여년의 보금자리였고,

강화도는 항몽 40년의 임시 수도로서 자존 의식의 표상이었다.

광주 역시 경기 관찰부가 있었던 행정의 중심지였고,

신라 통일의 중심 무대 한산주의 전략 기지로서

고려와 조선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지리의 중요성이 인식되어온 국토의 요충이다.

 

수원은 삼남의 요충에 버티고 앉은 화성의 웅자도 그러하거니와

조선 후기 민족문화의 요람 그 자체를 보존한 세계문화유산으로서도 그러하다.

더구나 경기 관찰부가 있었던 도시에 이어

1967년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이 뜻하는 수부도시의 역사적 맥락도

서울을 에워싼 행정중심지로서의 경기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이다.

서세동점기 외세의 침략을 온몸으로 버틴

병인 · 신미양요, 운양호사건과 강화도 조약, 제물포조약 등의

현장을 지켜온 격동의 역사 무대에서 경기인은 늘 전면에 섰다.

 

일제 강점기 안성의 3·1운동을 비롯한 경기인의 저항,

양평 여주 광주 양주 가평 강화 등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의병 활동과

의병장들의 목숨을 건 투쟁도 간과할 수 없는 경기인의 표상이다.



- 미래지향적인 첨단 산업 -

서해안 시대의 주역으로 다시 한 번 대륙을 향한 포효가 기대되는 곳,

산업 경제 첨단 산업의 보루로 새로운 비약을 준비해야 하는 곳이 또한 이 땅이다.

지난 60년대 수출지향형의 경제 개발은 독재라는 비판까지 받아가며 경기의 한 축을 이루어왔다.

또한 그 부작용으로 노동쟁의가 끊임없이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이 더욱 단단해지듯

지난한 과정을 겪었기에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땅 경기도의 어제와 오늘에서

우리는 내일을 향한 정신적 풍요가 역사 발전의 버팀목이 되어야 하고

그 정신을 민족 자존 의식으로 승화하여 내일의 진로를 개척하여야 한다.

또 분단의 현장에 두른 휴전선이 경기도 가슴을 압박하고 있지만

 경의선 최북단 도라산 역에서 우리는 망향의 한이 아닌 통일의 희망을 노래하여야 한다.

다시 보는 경기 산하!

그 자체가 우리의 역사이고 문화이며 생활이고 정신 세계의 실상이다.

- 강대욱 (경기문화재단 편집위원)

 

 

 

  

 - 글 순서 -

 

(1) 경기도 문화는 서울의 주변문화인가?

 

(2) 경기도의 나이는 몇 살일까?

 

(3) 경기도의 지리와 경기문화의 형성

 

(4) 하천수운과 경기도의 문화권

 

(5)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경기도

 

(6) 경기도의 인구 특성

 

(7) 변화와 발전의 중심에 선 경기도와 경기학인들

 

(8) 경기도와 떡만둣국  

 

  

(1) 경기도 문화는 서울의 주변문화인가 ?

 

 

경기도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다.

전곡의 구석기 유적은 경기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깊은 뿌리를 보여준다.

백제의 찬란한 역사는 광주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고려 때 경기도는 큰 변화를 겪는다.

현종 때인 1018년에 경기도(京畿道)란 명칭과 구역이 정해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명칭이나 구역의 변화 이상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경(京)이란 왕이 살고 있는 서울이란 뜻이고

기(畿)란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백리 이내의 땅을 가리키니, 지금의 수도권이란 뜻이다.

 

그 뒤 전개된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보면,

고려시대에는 개성, 조선시대에는 한성의 권역 속에 수도권으로서 역할을 숙명적으로 맡아왔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등 서울을 방어하는 산성들이 건설되고,

고려궁궐, 화성 등 새로운 궁궐이 조성되며,

임금의 능과 유명한 사대부의 무덤이 즐비하게 자리 잡았다.

 

이들 문화유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경기도 고유의 문화라기보다는

대부분 서울문화와 연관된 유산이란 점을 알게 된다.

현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특히 신도시가 생긴 이후, 경기도는

“서울 주변 지역”,  “서울에 버금가는 지역”,  “서울과 비슷한 문화를 간직한 지역”이란

이미지가 더욱 굳건하게 자리 잡아 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경기도 문화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경기도 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지금처럼 “수도권의 문화”로서의 방향을 유지해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경기도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선택의 문제들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경기도 문화를 너무나 당연하게 서울 문화와 연관 속에서 파악하여 왔다.

경기도 문화가 어느새 서울 문화의 영역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버렸다.

경기도에 드리워진 서울이란 그늘은 고려 이후 경기도에서는 숙명처럼 되어버렸다.

과연 경기도 문화를 곧 서울의 주변 문화로 치부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경기도는 경기도이고, 서울은 서울이다.

서로 인접해 있고 관련이 깊다고 하여 경기도의 모든 것을 서울과 관련지을 필요는 없다.

경기도는 경기도 나름대로 고유의 문화를 가꾸어나가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경기도의 역사 가운데 서울과 관련 있는 시기는 천년이 채 안되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는 그 몇 배에 해당한다.

 

경기도가 서울에 의존하면, 서울의 경제나 문화의 여러 가지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서울의 화려한 우산 속에만 안주하면,

경기도는 서울 다음의 2인자의 지위를 벗어날 길이 없다.

지금도 무엇이든지 일류는 서울에서 구하고 일류가 아니어도 되는 것은 경기도에서 구한다.

반석처럼 굳어진 2인자로서의 틀을 깨트리려면,

적어도 문화에서만이라도 경기도의 색채를 짙게 나타내려는 의식과 노력이 앞서야 할 것이다.

 


'제주도'하면 제주도만의 독특한 문화가 강한 섬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제주도만의 지리적인 특성이 제주도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것이다.

서울을 품으로 싸안고 있는 경기도는 제주도와 지리적 여건이 다르다.

그렇다고 경기도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서울을 받들거나 기대는 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이다.

 

서울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경기도만의 특색있는 문화를 모색하는 일에도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항상 서울의 주변 문화로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기도의 독특한 문화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기도의 문화유산에 정확한 이해와 깊은 애정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서울과 다른 경기도 고유의 문화를 역사와 전통 속에서 적극 발굴하고, 이를 깊이 연구하며,

그 성과들을 토대로 경기도 문화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 정병모(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교수)

 

 

 

 

(2) 경기도의 나이는 몇 살일까?

 

우리 사회에서는 대체로 나이를 중히 여긴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 간에 서로의 나이를 재거나 심지어는 생년의 월일까지 따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나이를 부풀리기도 하는데,

이는 은연중에 자기가 연장자임을 과시함으로써 ‘대접’을 받으려는 경향 때문으로도 이해된다.
요즘 이러한 현상은 점차 변화하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우리문화 속에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관념이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게 사실이다.


지방자치제가 정착되면서 각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천년고도(千年古都)는

천년 동안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慶州)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지만,

요즘은 단지 ‘오래되어 전통 있는 고을’의 의미로 여기저기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정도(定都) 600년’ 하면 자연스레 서울을 떠올리게 되는데,

서울시에서 ‘서울 600년’ 기념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역사학계에서는 조그마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여기서 600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왕조를 건국한 지 2년만인 1394년에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지역에 수도를 정한 것은 한성백제가 처음이었으니,

이로부터 계산하면 ‘서울 2000년’으로 해야 하는데

왜 서울의 나이를 줄이려고 하느냐는 의견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경기도의 나이는 몇 살일까?
경기는 본래 중국에서 황제가 살고 있는 도읍과 사방 1천 리의 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당나라 때 와서 그 지역적 범위가 축소되어 도성의 안과 도성 밖 인근지역을 뜻하게 되었다.

역사를 통하여 경기지역은 도읍이 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해 설정한 지역으로서

일반지방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위상을 가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왕도의 주변지역을 ‘경기(京畿)’라 칭한 것은 서기 1018년의 일이다.
995년(성종 14)에 수도인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6개의 경현(京縣)과 7개의 기현(畿縣)이 특별행정구역으로 설치되었는데,

1018년(현종 9)에 경현과 기현을 묶어 정식으로 ‘경기’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경기지역은 하나의 지방행정조직 개념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경기지역은 확장되어 고려 말에는 44개의 현을 통할하게 되면서

경기좌도, 경기우도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조선 태종대에 이르러 다시 경기로 합칭되었고,

수안 · 곡주 · 연안 등 경기 서북지역은 풍해도(豊海道; 황해도)로 환속되고,

광주, 수원, 여주, 안성을 비롯한 동남지역이 경기로 이속되는 등

대체로 오늘날의 경기지역과 비슷한 영역이 형성되어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개정하면서 한때 경기도라는 명칭이 폐지되었지만 이듬해 부활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4년 개편 당시 경기도는

경성부, 인천부 등 2부를 포함하여 20개 군으로 정리되었다.

 

해방 이후 서울시가 경기도에서 분리되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기 북부지역의 행정구역이 일부 개편되었으며,

비교적 최근에는

인천(1981) · 강화(1995) · 옹진(1995) 등이 경기도에서 이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경기도의 나이는 이제 10여 년 뒤면 1000살이 된다.
도민 1천 만 시대를 맞아 ‘경기 1000년’이 가지는 상징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고 본다.
경기도는 이제 지난 1000년을 뒤돌아보며 그 동안의 역사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1000년을 대비해야 할 시기에 와있다.
1000년 경기의 역사를 정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1000만 도민이 참여하여 ‘경기도를 상징하는 1000가지’를 선정하는 것은 어떨까 한다.

 

역대 경기관찰사, 경기감영, 고려궁지, 남한산성, 청일전쟁 발발지, 강화도조약 체결지,

경기도내 국보 · 보물 · 무형문화재, 개성인삼, 수원갈비, 이천 · 여주 쌀, 안성맞춤 유기,

양주별산대놀이, 바우덕이와 남사당패,

경기도의 마스코트 · 나무(은행나무) · 새(비둘기) · 꽃(개나리),

광릉의 크낙새, 분단의 상징 임진각…….

역사가 1000년인 만큼 경기를 상징하는 상징물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경기 1000년이 되는 2018년을 맞아 타임캡슐에

‘경기도를 상징하는 1000가지’를 묻었다가 1000년 후에 개봉한다는 계획은

그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김호일(경기도 도사편찬위원회 위원장)

 

 

 

(3) 경기도의 지리와 경기문화의 형성

 

자연환경은 지역문화를 형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의 하나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자연환경 또한 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각 구성요소를 개별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이해할 때

지역문화의 실체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학자들은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구환경을,

기후권(atmosphere) · 암석권(lithosphere) · 수권(hydrosphere) · 생물권(biosphere) 등

모두 네 영역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지구의 한 구성물인 인간은 당연히 생물권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각 영역은

‘산천토목(山川土木)’이라는 용어로 쉽게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천토목이라는 말에는 기후요소를 나타내는 글자가 빠져있지만,

어찌 보면 사실 이 말은 이미 4계절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후 조건 아래에서 그러한 지세를 이루게 되고 그러한 토양이 형성되며

그러한 나무와 풀이 자라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여러 자연환경요소 가운데

우리의 일상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요소로는 지세와 기후가 대표적입니다.

지세는 땅의 생김새를 뜻하는데 일상과 관련해서는 산지와 평야,

그리고 하천과 해안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으며,

이 중에서도 하천 연안의 충적지는 우리 민족과 가장 친밀한 지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한반도라고 불리는 이 땅 위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이래, 조선시대와 일제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1960년대까지 이 땅에 발붙인 사람들 중 최소한 60% 이상은,

충적지가 핵심을 이루는 평야지대에서 쌀을 재배하는 일에 종사하였습니다.

쌀이 우리의 주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벼가 생육할 수 있는 지세 및 기후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동시에 수 천년 이상 이른바 ‘수도작문화(水稻作文化)’를

형성해왔음도 알려줍니다.

이제 범위를 경기도로 좁혀보면,

이곳의 전반적인 지세는 한강이 중간을 동서방향으로 흐르면서

전체 지역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형상을 띠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경기도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나누는 형상이기도 합니다.

경기도 최대의 산지는 강원도 화천에서 춘천을 지나 가평에까지 이르는데,

북한강과 임진강의 분수계(分水界)를 이루는 일련의 산줄기로서

오래전부터 불리던 이른바 한북정맥(漢北正脈)입니다.

 

이밖에 양평군 일대의 경기동부, 안성군 · 용인시 일대의 경기남부,

그리고 북한 소속의 삭령군 · 장단군 일대의 경기북부에서 비교적 넓은 산지가 분포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형세를 띱니다.

 

이 가운데 경기 남부 안성 · 죽산에서 시작해서

용인-수원-의왕-군포-안양-시흥-부평을 지나 북서부의 김포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이른바 한남정맥(漢南正脈)입니다.

한북정맥과 한남정맥 사이에서 한강이 동서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왕숙천 · 중랑천 · 경안천 · 탄천 · 안양천 등이

각기 남북방향으로 흐르면서 한강본류에 합수됩니다.

이제 다시 경기도의 지세를 크게 보면,

한강 수로를 중심으로 그 연안에 저지대가 형성된 반면

분수계를 이루는 외곽지역은 산지를 이루고,

한북정맥의 위쪽에서는 임진강이,

한남정맥의 남서쪽에서는 진위 · 안성천이 형성시킨 충적지가 넓게 펼쳐지면서

다시 저지대가 분포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충적지는 쉽게 농경지로 이용되면서 일찍이 주변에 취락을 형성시켰으며,

이에 조선시대의 읍치와 오늘날의 주요 시가지들도 모두 이들 하천 연안에 입지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도회로 임진 · 예성강유역에서는 개성이,

한강유역에서는 당연히 서울이 수 백년 이상 가장 큰 중심지로 기능해왔으며,

진위 · 안성천유역에서는 수원이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기후환경은 자연환경의 다른 어떤 부문보다도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는 가옥 · 음식 · 의복 · 놀이 · 의례 등의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 속에 녹아 있습니다.

경기도는 대부분의 지역이 가장 추운 달인 1월달 평균기온이 -3℃보다 낮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후학자인 퀘펜(Koppen)에 따르면

1월평균기온 -3℃는 온대기후(C기후)와 냉대기후(D기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결국 경기도는 온대기후가 아니라 냉대기후에 속합니다.

그만큼 경기도의 겨울이 춥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후환경과 문화형성의 관계를 논의할 때,

기후요소 중에서 여름기후보다는 겨울기후가 더 연관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실정이므로,

위의 사실은 경기도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추운 겨울기후는 치명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여름기후에 비해 훨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과정 자체가 하나의 문화형성과정이었으며 그 결과 경기문화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기도의 자연환경은 공교롭게도 산지와 하천으로 대표되는 지세의 측면은 물론

기온 · 강수량 · 바람 등으로 결정되는 사계절의 기후변화가 모두

한반도의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의 중간적인 성격을 띠는,

이른바 점이 지대적 성격을 지닙니다.

여러 많은 요소를 동시에 고려해야 결정될 문제이지만,

특정 지역의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 속에는

그 지역을 둘러싼 자연환경이 일차적으로 관여되거나

또는 기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이 점에서,

즉 경기도가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의 점이적 자연환경을 이루는 점에서

경기도 문화정체성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바로 이 점이지대적이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이에 대한 얘기를 더 진행하기 위해

필자는 아무래도 편집부에게 다음 지면과 시간을 요구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울러 지역문화에 관심있는 독자님들께도 삼가

이에 대한 넓고 쉬운 마음을 권유해드리고 싶습니다.

-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조교수, 역사지리학)

 

 

 

 

 

(4) 하천수운과 경기도의 문화권

 

전통시대에 하천은 지금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금은 잘 인식되지 않지만 하천이 수행한 가장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하천수로 자체가 바로 교통로였다는 것입니다.

 

수운은 부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대량의 화물을 운송할 때 육운보다 훨씬 유리합니다.

이에 오늘날에도 국가간 무역이나 중국ㆍ유럽ㆍ북미 대륙에서는 해운과 더불어

내륙수운이 중요한 운송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20세기 중반까지

전국의 대하천에서 화물을 나르는 선박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천 수운은 기본적으로 해안과 내륙의 생산물을 교환하는 활동이었습니다.

해안에서 생산된 소금 및 수산물과 내륙의 곡물 및 임산물을 유통시키는 과정이

곧 내륙수운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한강의 경우, 해빙이 되고 보통 3월경에

소금과 새우젓 등을 실은 상선이 상류지역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미 주문된 물량을 운반하는 경우도 있으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주요 기항지에서 며칠 이상 정박하면서

주변 지역의 산물과 교환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기항지에 근거하고 있는 여각이나 행상들에게 판매하기도 하였습니다.

 

행상들은 소금과 젓갈 등을 더 깊은 내륙의 장시(場市, 5일장)에서 내다 팔기도 하였고,

주변 지역의 산물을 매집하여 이를 선상들에게 팔기도 하였지요.

이러한 유통구조는 최소한 조선후기에 전국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내륙수운은

동일한 하천유역권 안의 하류지역과 상류지역 사이에서 벌어진 중요한 상업활동이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도모합니다.

따라서 이들도 끊임없이 쇄신(刷新, innovation)에 관심을 두었고,

또한 이들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역정보를 포함한 새로운 각종 정보에 밝았습니다.

 

이에 하천수로와 내륙의 도로망, 그리고 이들과 연계된 장시망을 통해

쇄신과 지역정보가 하천유역권 안에서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상행위는 일년 내내, 수백 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하천유역권은 문화속성(文化屬性, cultural trait)이 비슷해지는 과정을 거쳐,

물론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른바 문화등질지역(文化等質地域)으로 전화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한강유역권은 한강수로를 매개체로 하여 하나의 등질지역을 형성하였고,

론적으로 조선후기의 수운활동은 총체적 의미에서의 지역간 문화교류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20세기 중후반까지 한강유역권에 속하는 지역에서

김장을 담글 때 사용하는 젓갈은 거의 대부분 새우젓이었습니다.

이에 학계에서는 한강유역권은 새우젓문화권이라는 등식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약간 다른 예로서, 같은 충청도라도 한강유역권에 속하는 충주의 말이

금강유역권에 속하는 부여의 말보다는, 도(道)는 다르지만 하천유역권이 같은 서울의 말과

더 비슷하다는 것은 이러한 매커니즘으로 이해됩니다.

 

비슷한 예로서 강원도 소속의 인제의 말 역시 속초의 말보다 서울의 말과 유사성이 더 큽니다.

이러한 예는 전국적으로 나타납니다.

황해도의 황주말이 해주말보다는 평양말에 더 가까운 것 역시

황주와 평양이 모두 대동강유역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경기도는 크게 임진강ㆍ예성강, 한강, 진위천ㆍ안성천 유역으로 구분됩니다.

이 가운데 임진강ㆍ예성강은 한강 하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교류가 많았고,

진위ㆍ안성천 역시 황해안 뱃길이든 육로든 쉽게 연결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등질한 문화속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같은 논리로 해주를 중심으로 한 황해도 남부지방과 강원도의 영서지방,

충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북도의 북부지방,

리고 안성천과 같이 아산만으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서로 연계되는 충청남도의 북부지방이

상당히 비슷한 문화전통을 형성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황해ㆍ강원ㆍ충청 일부지역이 한강 등의 수운활동에 기반하여

중부지방문화권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의 등질한 문화속성을 공유하였고,

이와 관련된 결론부와 같은 정황을 지난 호에서 떡만둣국으로 풀어 기술하였던 것입니다.

 

약간 조악한 면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논리로 경기도의 문화정체성을 구현하는 데에는

북부지방문화와 남부지방문화의 점이적 성격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물론 중부지방문화권이라는 독자적인 문화권 설정이 가능하며,

그 안에 중심은 경기지역이 될 것입니다.

-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조교수, 역사지리학)

 

 

 

 

 

(5)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경기도

 

경기도의 행정구역 변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전국적으로도 그렇지만,

15세기 초에 39읍으로 정립된 경기도의 행정구역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에 전국 8도를 23개의 부로 재편성한, 이름하여 23부제가 실시될 때입니다.

 

경기도는 이때 총 6개의 부로 나뉘어 편입되었습니다.

그 중 한성부 11읍과 인천부 12읍은 구 경기도의 군읍만으로 편성되었고,

양근과 지평이 춘천부로, 여주ㆍ용인ㆍ죽산ㆍ음죽ㆍ이천ㆍ양지 6군이 충주부로,

안성ㆍ진위ㆍ양성이 공주부로, 개성ㆍ풍덕ㆍ삭령ㆍ마전ㆍ장단이 개성부로 나뉘어

각기 강원도ㆍ충청도ㆍ황해도 일부 지역과 더불어 하나의 행정권역을 구성하였습니다.

 

23부제가 시행된 이듬해에 다시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습니다.

요체는 23부제에서 다시 8도제로 환원하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하고

함경ㆍ평안ㆍ충청ㆍ전라ㆍ경상도를 북도와 남도로 나누어 전국을 13도로 재편한 것입니다.

이로써 1896년 행정구역은 총 13도 8부 1목 332군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이 때의 부(府)는 오늘날의 시(市, city)와 비슷한데,

수도 한성부를 비롯하여 과거 유수부였던 광주ㆍ강화ㆍ개성, 통상(通商)의 요지인

인천ㆍ동래ㆍ덕원ㆍ경흥이 포함되었습니다.

이중 후자의 네 부는 1903년에 다시 군이 되었고,

다른 변동 사항으로 여수ㆍ성진ㆍ진남군 등이 분리ㆍ신설되었습니다.

제주는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목을 설치하였다가 1908년에 군이 되었습니다.

 

이 두 행정구역 조정이 지니는 큰 특징의 하나는

어느 것도 군현 간 통폐합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1896년의 13도는 23부를 조정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8도를 13로 재편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들어 8도제가 실시된 이후 도를 바꾼 군현으로는

1434년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옮긴 철원군,

1914년에 충청남도에서 경기도로 옮긴 평택군,

1963년에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옮긴 금산군,

같은 해에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옮긴 울진군만 있을 뿐입니다.

 

이밖에 울릉도는 대대로 강원도에 속해 있다가 1907년에 경상남도로,

1914년에 경상북도로 이속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해방 후에도 시군간의 행정구역 조정은 잦았지만 도 단위에서는 큰 변동이 없었습니다.

 

15세기 초에 정립된 8도체제는 근 6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기간 유지된 행정구역은 1914년 상전벽해의 변화를 맞이합니다.

제국주의 입장에서 식민지 경영의 기초 사업 중의 하나는 영토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일제는 강점 후 만3년 4개월만인 1913년 12월 29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안을 공포하고

1914년 4월 1일부로 시행하였습니다.

 

개편의 방향은 식민 통치의 편의를 위해 거점도시 12부를 두는 것과 더불어

전국의 군을 통폐합함으로써 면적ㆍ인구ㆍ경제력의 규모를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국의 군수가 332읍에서 220읍으로 줄었습니다.

 

12부로는 수도 경성부를 비롯하여, 경기도 인천, 전라북도에 군산, 전라남도에 목포,

경상북도에 대구, 경상남도에 부산ㆍ마산, 평안남도에 평양ㆍ진남포, 평안북도에 신의주,

함경북도에 청진, 함경남도에 원산 등을 두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조정으로 경기도는 2부 20군이 됩니다. 

2부는 경성부와 인천부로 수도 서울은

이때 조선 건국 이래 경기도에 소속되는 초유의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경성의 영역은 도성 내부와 남대문에서 용산까지의 지역으로 국한되고

나머지는 고양군에 흡수되면서 규모가 크게 축소되고,

인천 역시 제물포를 중심으로한 일부 지역에 한정됩니다.

부천은 옛 인천의 나머지 땅을 흡수하며, 시흥은 안산과 과천을, 이천은 음죽을,

수원은 남양을, 진위는 충청도 소속의 평택을, 용인은 양지를, 김포는 양천과 통진을,

강화는 교동을, 파주는 교하를, 연천은 적성과 마전을, 개성은 풍덕을, 포천은 영평을,

안성은 양성과 죽산을 병합하였습니다.

이때 없어진 군현을 학계에서는 구읍(舊邑)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표  / 1914년 군현 통폐합

 


변화 없는 군현

통합; 폐합되는 군현

비고

경기

한성 인천 고양 부천 시흥
이천 광주 양평 양주 가평
여주 장단

수원 ; 남양/ 진위 ; 평택/ 용인 ; 양지/ 강화 ; 교동
김포 ; 양천+통진/ 연천 ; 적성+마전/ 파주 ; 교하
개성 ; 풍덕/ 포천 ; 영평/ 안성 ; 양성+죽산

한성→경성부. 인천→인천부
양근과 지평은 1908년 통합
2부 20군

   자료 :  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越智唯七, 1917)

 

한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경기도는 14세기 말 이후 수도를 품고 600년 이상 지내오면서

늘 문화적으로나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한국의 선진지역임을 자부해올 수 있었습니다.

경기도는 수도 서울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일찍 근대화를 경험했지만,

그 반대 급부로서 준비되지 않은 전통의 해체로 인해 고민해야할 일도 많았습니다.

이 해체는 지역주민들에게 지역 정체성의 상실감 또는 모호함을 주었고,

이제 서서이 그 정체를 다시 찾으려 노력하고 있는 듯합니다.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을 복원하는 일은

한국 전통문화, 또는 지역문화의 정통성을 찾는 데에 일차적인 과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계열적으로 복원된 경기도의 행정관할도는

분포ㆍ밀도ㆍ입지 등 역사지리정보를 구성하는 기본 개념들이 다양한 형태의 주제도로 

공간화ㆍ시각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줄 것이며, 복원 단위가 면ㆍ리경계까지 세세해질수록

경기문화는 좀더 정밀하고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조교수, 역사지리학)

 

 

 

 

(6) 경기도의 인구 특성

 

그동안 한국의 근대화 또는 산업화에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여러 분야에서 다각도로 논의해 왔지만 합의된 결론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산업화가 지역적으로는 서울이나 부산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8도 가운데에서는 경기도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급격하게 그 변화를 맞이하였다는 것에 대해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합니다.

 

한국 사회가 농업사회의 태를 벗어나는 시점은 1970년대로 생각됩니다.

가시적인 측면에서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집도 없애’면서

1970년대에는 한국의 농촌 경관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쏟아부은 각고의 노력이 십 여년 지나

1970년대에 서서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산업화의 정도를 알려주는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증거는

인구특성의 변화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국가 또는 지역의 인구는

그 사회가 겪어온 중요한 사회ㆍ경제ㆍ정치적 변동과 긴밀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인구분포, 인구밀도, 연령별ㆍ성별ㆍ산업별 인구구조와 시기별 인구규모 등의 인구특성은

사회변동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지표가 됩니다.

앞으로 두 세차례에 걸쳐 경기도의 인구변천과정을 통해 경기도를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한국에서는 민적법이 시행된 1909년부터 거의 정확한 인구규모가 파악되고,

1925년부터는 근대적인 인구조사가 시작됩니다. 합병 당시 한국의 인구는 약 1,750만명이고,

1930년에는 2천만명을 넘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해외 동포가 귀환하면서 3천만명에 조금 못미치는 수준까지 늘어나는데,

곧이어 남북한으로 분리되면서 1949년 남한만의 인구가 다시 2천만명으로 떨어집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일시적으로 인구를 감소시켰으나,

휴전 후 다시 금방 예전의 수준을 회복하여

1955년에 2,150만명에 다다르게되었고, 이후 남한에서는 베이비붐이 일어 인구가 급증하였습니다.

 

이때부터 1960년까지 전국적으로 346만명이 증가함으로써 총인구는 2,500만명이 되는데,

이 기간 연평균 인구증가율 3%는 역대 최고의 수준입니다.

 

전쟁 이후 일시적으로 헤어졌던 부부가 상봉하고 미뤄두었던 결혼이 성사되면서

출생률이 크게 높아진데다가

전쟁을 계기로 도입된 항생물질 및 의학의 보급이 사망률을 크게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인구는 1960년대에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포착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하나는 이전보다 출생률이 떨어지면서 인구증가 속도가 완화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인구가 급격이 증가한 것입니다.

 

출생률의 저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아들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를 표명한 가족계획사업이었고,

아울러 여성의 혼인연령이 높아지고 사회참여가 늘어난 것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도시인구의 증가분은 자연증가보다는 사회적증가에 의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회적증가란 거주지 이동에 따른 인구수의 증감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1960년대 이후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향집을 떠나

서울이나 부산 등의 대도시 또는 가까운 중소도시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1960년 이전까지 한국의 산업구조는 여전히 농업이 중심을 이루었고,

정치적 변동이나 한국전쟁과 같은 사회변동도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경기도만의 특별한 인구특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경기도는 다른 도와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하더니

1970년대부터는 그 양상이 훨씬 강화됩니다.

 

1960년에서 1965년 사이에 2.6%였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1

966년에서 1970년 동안 1.9%로 급격히 저하되지만,

같은 기간 서울은 173만명, 부산은 45만명이 증가하여

두 도시가 전국 총인구증가수의 76%와 20%를 차지하였습니다.

5년 동안 증가한 총인구수의 96%가 서울과 부산으로 집중된 것입니다.

 

나머지 4%의 증가는 제주ㆍ경기ㆍ경상북도에서 일어나는데, 그 중 70%를 경기도가 차지합니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거의 대부분 상ㆍ공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데,

이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제2차 개발계획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었음을 방증합니다.

이 시기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도시인구의 집중기였습니다.

 

1970년대에 한국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약간 둔화되는 추세를 보이는 가운데

도시화율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전국적으로는 서울과 부산이 여전히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이지만

그 이전에 비하면 증가세는 크게 감소한 수준이었습니다.

 

1970-75년 사이에 도별 인구증가율은 경기도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65년에서 1970년까지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1.9%로 전국의 평균 수준에 불과했던 경기도는

불과 5년이 지난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3.8%라는 급격한 신장세를 보입니다.

1970년대 이후 경기도의 인구증가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이때처럼 급등세를 보인 적은 없습니다.

 

1980년대에 한국은 인구변천의 모든 단계를 다 겪은 인구의 안정기를 맞이합니다.

1985년에서 1990년 동안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1.4%로 낮아지는데,

지역적으로는 서울ㆍ부산ㆍ대구ㆍ인천ㆍ광주ㆍ대전 등의 6대 도시와

경기도가 전국 평균 이상의 인구증가를 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이 시기에 인천의 증가율이 5.6%로 가장 높고,

이어서 5.1%의 경기도가 두 번째로 높았습니다.

 

인천도 이전에는 경기도에 속했으므로

넓은 의미에서의 경기도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은 1980년대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외 경남이 0.9%, 제주가 1.0%로 평균 이하의 증가율을 보였으며

나머지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북 등 7개 도는 모두 마이너스(-)를 기록, 인구가 감소하였습니다.

 

경기지역의 인구 증가 추세는 1990년대에 들어 더욱 부각됩니다.

연평균 0.6%로 매우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인구센서스 이래 1990-95년 사이에 서울은 처음으로 -0.7% 인구감소를 경험하고,

부산도 1995-2000년 동안 처음 -0.75% 감소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1990-95년 사이에 도시 인구는 연평균 1.64%로 증가한 반면

각 도의 군부지역에서는 연평균 -2.9%라는 높은 감소율로 인구가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경기도만큼은 계속 높은 증가율을 보입니다.

 

1990-95년 사이에 4.4%, 1995-2000년 동안 3.2% 증가한 경기도의 인구증가율은

전국 최고 수준에 이릅니다.

1995년 이후 5년 동안 늘어난 경기도의 인구 129만명은 전국 총인구증가수의 94%에 해당하는데,

이 정도면 1990년대 한국의 인구증가가 경기도에서만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습니다.

 

1970년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의 인구는 성장세가 둔화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경기도만큼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높은 인구증가율을 기록합니다.

이러한 인구증가의 주요 원인은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정책이 시행되면서 수반된 이촌향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최근 40여 년 동안 한국민들이 새로운 거주지로

가장 많이 선택한 곳이 경기도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경기도 인구증가가 지니는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이로 인해 경기도의 토지이용 양상이 다른 지역에 비해 광범하고 급격하게 변화하였다는 점입니다.

경기도로 몰려든 사람들이 살 집이 새로 지어졌고,

생계를 꾸려주는 새로운 산업시설이 유치되었으며,

전에 없던 새로운 길이 생겨났고,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고층건물이 들어섰습니다.

 

경기도 전역이 도시화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 결과 경기도는 2005년 인구센서스에서

인구가 남자 519만명과 여자 515만명으로 1,034만명을 기록,

전국 최고의 인구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도내 31개 지차체 가운데 연천ㆍ가평ㆍ양평ㆍ여주 등 4개 군(郡)을 제외한 27곳이

모두 시(市)로서 도시화율도 가장 높습니다.

-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조교수, 역사지리학)

 

 

 

 

 

(7) 변화와 발전의 중심에 선 경기도와 경기학인들

 

통계청은 서울, 인천, 경기도를 포괄하는 수도권의 인구가

2001년에 2,200만 명을 돌파했고

2020년이 되면 2,500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는 전국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이다.

통계청은 또한 1999년에 수도권의 제조업 생산액과 제조업체의 수가 전국의 50%에 이르며,

특히 경기도의 고용 규모는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인구와 경제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인구와 경제가 수도권에 집중된 것은

이미 조선후기에도 나타난 현상이었다. 
조선 사회가 왜란과 호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이었다.

조선후기 수도권의 성장은 인구의 증가, 교통의 발달, 상업도시의 발달 등으로 나타났는데,

경기도는 농업 분야의 생산력이 높아지고 유통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 지역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의 중심에 있었다. 
 
 


수도권의 성장과 함께 조선학계에서는 서울과 지방으로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남인은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嶺南)과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경남(京南)으로 분화되었고,

노론은 서울과 근교 지역에 거주하는 낙론(洛論)과 충청도에 거주하는 호론(湖論)으로 분리되었다.

 

18세기 이후 중앙학계는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양명학과 고증학을 수용하는 소론계 학인,

서울 주변에 거주하면서

주자학 일변도의 노론 학풍을 비판하고 고학(古學)을 주장하는 남인 경남계 학인,

오랜 서울 생활을 통해 문벌을 형성하고 정계를 주도한 노론 낙론계 학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의관, 역관, 서얼들처럼 전문적인 지식과 경제력을 갖춘 중인계 학인들도 그 일원이 되었다.

이들은 자제의 교육과 혼인까지도 수도권 안에서 해결하면서 지방의 학계를 완전히 압도했다.

 


필자는 조선후기에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학계의 변화를 주도한 학자들을

‘경기학인(京畿學人)’이라고 부른다.
경기학인들은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의 역동적인 변화를 경험했고,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과 일본을 방문하거나

사신단과의 교유를 통해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교식 예제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어야 했고,

학계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경기학인은 가장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정약용은 15세의 나이에 처음 서울에 와서

이가환 · 이승훈과 같은 경남계 학인을 만나 이익의 저술에 접할 수가 있었다.
또한 22세에는 성균관 유생이 되어 서울 유학 생활을 하면서 정조의 눈에 띄어 벼슬길이 열렸다.

정조가 사망하자 그는 천주교 사건에 휘말려 강진에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유배지의 고통을 이겨냈다.

정약용이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찾자,

고향인 남양주 마재에 살던 자식들이 강진으로 이주를 하겠다고 나섰다.

죄인의 자식으로 수도권에 살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낀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물론이고 그의 형인 정약전도 자손들이

시골 무지렁이와 섞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이주를 반대했다.
정약용은 사대부가 벼슬길이 끊어지면 문화에 대한 안목을 꾸준히 키워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도성 내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지만 경제적 이유로 서울에 살 수 없다면

근교에서 과실과 채소를 가꾸며 생활하다가 형편이 좋아지면 서울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폐족(廢族)이 되어 무너져 버린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면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문화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경기도는 변화와 발전의 중심지에 있었다.
이곳에 거주하던 경기학인들은

청이나 일본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학문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당대의 정계와 학계를 주도할 수 있었다.

-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8) 경기도와 떡만둣국

 

경기도의 자연환경은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의 점이적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북부지방은 남부지방에 비해 지형의 측면에서는 평야보다는 산지가 넓게 분포하고,

기후의 측면에서는 온대보다는 냉대기후에 훨씬 가깝습니다.

 

이에 따라 북부지방에서는 밭농사문화가

남부지방에서는 논농사문화가 전통문화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기도를 포함한 중부지방의 자연환경과 문화형성의 기저는 그 중간적 형태를 나타냅니다.

 

얼마전 양력 설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동요에서도 들어 익숙한 설날의 대표적인 풍습이

‘떡국 한그릇 먹고 한 살 더 먹고’입니다.

설날은 한 해가 시작하는 날로 요즘도 설날 아침[원단]에 조상께 예를 갖추어 차례를 지냅니다.

이때 올리는 음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떡국입니다.

기제(忌祭)에서는 흰 쌀밥[메]을 올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설날에는 쌀을 찌고 치대고 빚는 오랜 과정을 거쳐 정성들여 떡을 만든 후,

이를 곱게 썰어 쇠고기를 넣어 우려낸 국물과 함께 새해 첫날 아침에 조성님께 바쳤던 것입니다.

 

단순히 쌀밥만으로는 정성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아무튼 조상을 대접하는 데에 음식[main dish]만으로 보면

기제사보다는 설날을 더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우리 집안에서는 설날에 떡국을 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매년 봐왔으면서도 한참이 지나 서른 즈음에 깨달았으니

어찌보면 참으로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놀랄 일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처음 이러한 의문을 품은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매우 다양한 답변이 나오는 데에 저는 더욱 놀랐습니다.

결론만 얘기하면 떡국은 주로 남부지방에 국한되어 있으며,

북한이 고향이신 분들은 대체로 만둣국을 올리십니다.

한편 해안지방에서는 동ㆍ서ㆍ남해안을 막론하고 메를 올리는 사례가

떡국이나 만둣국을 올리는 사례보다 더 많은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집에서 올린 것을 말씀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 역시 서울입니다.

완전히 다르진 않지만 우리 집에서 설날에 올린 것은 떡국이 아니라 떡만둣국입니다.

 

약간 허탈해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떡국과 떡만둣국은 일단 같은 음식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매년 섣달 그믐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그렇게 많은 만두를 빚고서는

왜 떡국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결국 주변 분들로 들은 다양한 대답을 정리하면,

만둣국, 떡만두국, 떡국, 떡국+떡만둣국, 메로 정리됩니다.

떡국+떡만둣국 형태는,

차례를 지낼 때는 떡국을 올리는데

차례가 끝나고 세배 후 가족들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을 때에는

만두를 넣어 떡만둣국으로 만드는 집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간혹 있습니다. 설날 아침 차례상 메인디쉬를 지역별로 정리하면,

남부지방의 떡국과 북부지방의 만둣국이 중부지방에서 떡만둣국으로 만나는 형국입니다.

 

해안지방은 예외적으로 메를 올리고요.

앞에서 언급한 북부지방의 밭농사문화와 남부지방의 논농사문화가

중부지방에서 점이적 형태로 만나는 형국과 같습니다.

 

경기도는 당연히 떡만둣국문화권에 속합니다.

저는 어떤 이의 출신지가 어딘지를 알면

그 집안에서 설날 아침에 무엇을 올리는지 거의 다 맞출 수 있습니다.

 

지금껏 90% 이상 정확도를 보여주고 있을 정도로 이 문화속성은 꽤나 신통한 지표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경계가 어디쯤인지가 궁금해집니다.

결국 떡만둣국문화권의 남ㆍ북한계선을 알면

만둣국문화권과 떡국문화권이 자연스럽게 구분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결론만 얘기해야하겠습니다.

그간 제가 수행한 인터뷰와 답사에 근거하면

설날 차례상에 떡만둣국을 올리는 지역은

산경표(山經表)에서 소개된 해서(海西)정맥(正脈)과 금북정맥(錦北正脈) 사이의 지역입니다.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남부지역, 경기도, 강원도 영서지방, 충청북도 동북부와 충청남도 북부지방이며,

하천유역으로는

예성강ㆍ임진강ㆍ한강ㆍ진위천ㆍ안성천ㆍ삽교천ㆍ곡교천유역권이 이에 해당합니다.

 

제가 경기도 문화특성의 핵심을 점이성에서 찾는 논리적 근거가 바로 이 떡국론과 관련됩니다.

-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조교수, 역사지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