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 최부 '표해록'의 발자취를 따라서 ①
금남 최부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표해록' 답사에 취재차 동행한 기자는 최부 일행 43명이 중국 절강성 영파시에 표착한 뒤 고초를 겪으며 심문장소인 임해시 도저소까지 끌려간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4박 5일 일정으로 답사에 나서면서 1500리 길, 제한된 시공간에서 스치듯 만나는 특별한 과거로 여행을 떠나본다. 금남 최부선생의 517년 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 필자 [오마이뉴스 신광재 기자]주 - |
중국 3대 기행문 <표해록>
우리에게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못지 않은 기행문이 있다.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는 금남 최부의 <표해록(漂海錄)>이 바로 그것이다.
<표해록>에는 중국 명나라의 해안방비 상황과 지리, 민속, 언어, 문화, 조선과 명의 관계사 등 중국 문헌에도 잘 나오지 않는 귀중한 정보가 실려 있다. 중국 본토에서 표해록은 기행문학의 백미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1976년에 번역본이 나왔고, 그나마 학계의 자료에 그쳐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번 답사는 최부 일행이 14일 동안 표류한 뒤 가까스로 영파부 연해에 표착한 뒤 도저성에서 서점, 연산, 서흥을 거쳐 항주까지 도착하는 1500리 길의 발자취를 더듬어 조선 선비의 꼿꼿한 정신세계를 배우기 위해 기획됐다.
최부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이번 답사는 전국에서 올라온 탐진 최씨 일족과 최부의 외손(外孫)인 나주(羅州) 나씨 문중, 그리고 방송대학, 나주시청 관계자 등 총 35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지난 17일 인천에 집결해 중국 항주로 날아갔다.
나주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해 항주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4시였다. 최부 일행이 출항 이튿날 풍랑을 만나 뱃길을 잃고 대양에서 14일간 표류한 뒤 표착해 도저성에서 심문을 받고 항주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34일. 그러나 517년이 지난 지금은 11시간만에 항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는 최부 일행 43명이 영파부에 도착한 뒤 도저성에서 심문을 받고 항주로 올라온 1500리길, 정확히 20일간의 고행의 길을 역으로 거슬러 항주에서 도저성까지 가는 4박5일간 일정으로 계획됐다. 옛 자취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는 최부 일행의 발자취를 더듬기에는 4박5일간 일정이 무리였지만 첫 시도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남달랐다.
최부 연구 1인자 북경대 갈진가 교수 답사팀 합류
120석 규모의 전세기가 찬바람을 가르며 기류를 뚫고 나가는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심하게 기우뚱거리면서도 서산의 낙조를 뒤로 하고 항주로 향하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빗발을 쏟아내리면서 차가운 찬바람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도착과 함께 일행을 맞이한 이는 현지 가이드와 북경대 갈진가(葛振家) 교수였다. 갈 교수는 중국어 번역본을 내는 등 '표해록'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인물로 금남 최부 연구의 1인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비가 내린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며 현지 가이드는 답사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답사팀이 도착한 항주는 절강성의 중심도시로 인구 630만명의 거대도시다.
절강성은 남한과 비슷한 면적이며 인구수 또한 4700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성이다. 1년 365일 가운데 60일 정도 비가 내리는 도시로 이날도 이슬비가 답사팀을 맞이했다.
35명의 답사팀은 중국 시간으로 오후 3시 화려함과 전통이 숨쉬는 항주에 첫발을 내딛었다.
제주도에서 항주까지 가는데 최부 일행은 34일이 걸렸지만 답사팀은 인천에서 2시간만에 날아온 것이다. 4박 5일 일정으로 20일간의 최부 선생의 흔적을 거꾸로 거슬러 내려가기 위해 도착과 함께 곧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답사에 앞서 금남 최부 선생의 <표해록>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 성종 19년(1488) 제주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고향 나주로 가는 뱃길에 올랐다. 여기서 추쇄경차관은 도망간 노비를 찾아 주인에게 되돌려 주던 일을 맡은 관리를 말한다.
43명의 일행은 출항 이틀째, 결국 풍랑을 만나 뱃길을 잃고 대양을 표류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적을 만나 곡식을 뺏기고 매까지 맞은 일행은 표류 14일째, 가까스로 중국 저장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하게 된다.
왜구의 출몰로 골머리를 앓던 명 당국은 최부 일행을 왜구로 간주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것.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진 일행은 이제 군리(軍吏)의 인도를 받으며 항저우를 출발, 운하를 따라 베이징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명 황제를 알현한 일행은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제주를 떠난 지 장작 6개월만에 지옥과 천당을 모두 경험한 뒤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양에서 성종을 알현한 최부는 표류부터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에서 겪고 들은 일을 일기체로 지어 바치라는 명을 받는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표해록>이다.
대양 표류와 중국 내륙 기행의 두 내용을 동시에 담아 다른 연행록들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표해록>은 조선 선비의 꼿꼿한 정신세계를 일관되게 담고 있다.
성리학적 도학관으로 중무장한 선비는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유교적 이치에 닿지 않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예컨대 배가 위태로우니 천신에 대한 기도를 올려보자는 일행의 요청을 단연코 거부하는가 하면 중국 연안에서 해적을 만났을 때도 관복으로 갈아입어 조선 관인의 어엿한 모습을 보이자는 요청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예에 어긋난다는 게 그 이유. 또 베이징에 당도해 명 황제를 알현하는 과정에서도 상중이므로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을 수 없다고 버티며 명의 예부 측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탁상공론만 일삼는 선비는 아니었다. 소흥부를 지나다 수차를 처음 본 그는 논농사를 짓는 조선에 필요한 기술이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그 원리를 배워서 가뭄이 잦은 당시 조선의 농업에 이용한 것.
<표해록>은 '중국의 문화(법)를 가지고 우리나라의 좁은 소견이나 짧은 지식을 변화시키는 뜻에서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등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모화 사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 2005-02-26 오마이뉴스 / 신광재 기자
[표해록 / 최부] 제주도서 고향 돌아오다 풍랑 / 6개월간 대양표류 · 중국 기행
중국여행기라면 으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떠올리지만 우리에게도 이에 못지 않은 기행문이 있다.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는 최부의 '표해록'(漂海錄)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 문헌에도 잘 나오지 않는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접근이 쉽지 않았던 책이 일반인용 완역본으로 출간됐다. '표해록'(한길그레이트북스/조영록 해제). 기행문학의 백미이자 14일 동안의 표류 상황을 담은 '해양문학'으로도 가치를 띠는 책의 내용은 이렇다.
조선 성종 19년(1488), 제주에서 근무하던 최부(1454~1504)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 나주로 가는 뱃길에 올랐다. 바람의 변고가 있으니 배를 타서는 안된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길을 나선 43명의 일행은 출항 이틀째, 결국 풍랑을 만나 뱃길을 잃고 대양을 표류하게 된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도적을 만나 곡식을 뺏기고 매까지 맞은 일행은 표류 14일째, 가까스로 중국 저장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하게 된다. 왜구의 출몰로 골머리를 앓던 명 당국은 최부 일행을 왜구로 간주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것. 우여곡절끝에 목숨을 건진 일행은 이제 군리(軍吏)의 인도를 받으며 항저우를 출발, 운하를 따라 베이징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명 황제를 알현한 일행은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제주를 떠난 지 장작 6개월 만에, 지옥과 천당을 모두 경험한 뒤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일기체로 지어 바치라는 명을 받는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책인 것. 일본으로도 전해져 1769년 도쿠가와 시대에 일반인용 번역본이 출간됐고, 1965년과 1992년 각각 미국과 중국에서 번역본이 나왔을 정도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정작 북한에서는 1964년에야, 남한에서는 1976년에 번역본이 나왔고, 그나마 학계의 자료에 그쳐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상태. 1999년부터 이뤄진 연구자들의 강독 등을 거쳐, 이제서야 한글판 완역이 나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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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최부 '표해록'의 발자취를 따라서 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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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파부에서 하루를 묵은 답사팀은 최부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희망초등학교로 향했다.
이날 임해시 향토사학과 왕금룡씨와 신민만보일보의 방 기자가 답사팀에 합류,
최부 일행보다 2명이 모자란 41명이 최부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향토사학과 왕금룡씨는 북경대 갈진가 교수와 함께 최부 연구에 열정을 바쳤던 인물로
최부 일행의 6개월간의 행로를 3차례에 걸쳐 답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방 기자 또한 답사팀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북경에서 날아왔으며,
얼마전 최부의 묘가 있는 나주까지 내려와 참배했던 인물이다.
3시간 30분 동안 험난한 산길을 달려 최부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희망초등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진 시골 초등학교인 희망초등학교는 최부 일행이
도저성에서 심문을 받고 항주를 향해 지나갔던 곳이다.
2001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최부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지게 됐다.
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려사 터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으나 대우가 부도 나는 바람에 무산됐다.
7년 후 2001년 6월. 최부 일행이 심문을 받았던 도저성 입구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임해시와 계약까지 마친 상태였으나, 중국 정부가 도저성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는 바람에
이 또한 백지화됐다.
다시 자리를 옮겨 신라방이 위치한 임해시에 세우려했지만
이곳 또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7년간에 걸쳐 기념비 사업이 표류하게 됐다.
기념비 사업 7년간 표류
중국에서 한국인과 관련된 기념비는
윤봉길 의사 기념비와 북한 최용건 기념비, 그리고 최부 기념비를 비롯해 6개뿐이다.
즉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국인이 아닌 이방인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마침내 2001년 11월 고 최병일씨가 거금을 투자해 7년간의 종지부를 찍고
희망초등학교 내에 기념비를 세우게 됐다.
희망초등학교에서 답사팀을 맞이한 영파시 홍방청(弘方靑) 당서기는
"500년이 지났지만 최부 후예들이 아직까지도 이 고장을 찾아온 데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며
"500년 전 최부 일행이 월계항을 지나간 이유는 혹시 인연 관계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우연적이면서 필연인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월계항민들과 희망초등학교 학생들이 금남 최부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희망초등학교 교재에 최부 일행의 <표해록>을 2페이지 가량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실제 학생들과 이곳 주민들은 금남 최부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있었다.
이날 답사팀은 희망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학용품을 전달하고 발길을 도저성으로 향했다.
중앙선도 없는 험난한 산길을 2시간 달려
최부 일행이 대양에서 표류하다 처음으로 표착했던 우도외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앙선 자체가 없는 험난한 산길을 달리는 동안 답사팀은 심한 차멀미를 호소했지만
최부 일행이 이 험난한 산길을 걸어서 지나갔을 거라는 생각에 돌연 숙연해졌다.
부문강 우도외양은 500년 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중국의 변화물결이 아직 이곳 중국 남반부까지 미치지 않고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선박들의 모습에서 500년 전 최부 일행의 배를 잠시나마 떠올릴 수 있었다.
푸르고 깊은 물빛을 자랑하는 부문강의 모습에 답사팀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잠시
그곳에 머물러 사는 이들의 가난한 모습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최부는 <표해록>에서 우두외양(牛頭外洋)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서쪽을 보니 연이어져 있는 봉우리는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였고
높은 산봉우리는 하늘을 받친 채 바다를 안고 있어서 필시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을 것 같았다.
최부의 눈에 비친 우두외양의 모습처럼 영파시 우도외양에서 500년이 지난 지금도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최부 일행이 도착한 윤 1월 16일 날씨가 흐려 오후 들어 비가 내렸다.
답사팀이 도착한 이날도 날씨가 흐려 가랑비가 내리고 있어 500년 전의 모습을 재현하는 듯했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
우두외양을 지나 부문령을 넘어 건도성에 도착했다.
부문령 고개를 넘으면서 최부 일행은 발이 부어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지만,
이곳 마을 사람들은 두 팔을 낀 채 앞사람은 끌어당기고 뒷사람은 밀고하여
큰 고개를 넘어 20여 리쯤 떨어져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부 일행은 우도외양에 표착한 뒤 쉬지 않고 이틀 동안 산길을 타고 끌려 왔던 것이다.
최부의 <표해록>에 이 마을 사람들은 난폭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곤장을 휘둘러 일행을 마구치고 마음대로 겁탈하는 등 너무 모질게 굴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최부 일행은
'고개 두 개를 넘어 선암리라는 마을에 인계됐다. 마을에 도착한 일행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팔로 머리를 가리키면서 참수하는 시늉을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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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리에 도착한 답사팀은 마을을 들어가려 했지만 50년 전 중국 정부가 마을을 저수지로 만들어
호수만한 저수지만 볼 수 있었다.
당시 선암리 마을 사람들은 말을 타고 지나가던 최부의 말안장을 빼았는데
최부 일행이 도저성에서 심문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돌려 주었다고 한다.
선암마을은 온데 간데 없고 마을 뒷산 천암문만 그 웅장함을 과시하며 500년 전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천암문은 동굴인데 동굴 안에 4~5층 높이의 집을 지울 수 있을 정도로 큰 동굴이라고 한다.
선암마을 지나 포봉리, 탑두제를 거쳐 최부 일행이 하루 묵은 안성사에 도착했지만
안성사라는 절은 온데간데 없이 절터만 남아 있었다.
안성사는 최부 일행이 도저성에서 항주로 다시 돌아갈 때도 하루를 묵은 곳으로 인연이 깊은 절이다.
안성사 터를 뒤로하고 3시간 이상 산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1500리길의 종점인 도저성이었다.
5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도저성은 500년 전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 2005-05-23 / 신광재 (sjs22)
<표해록>이란 이름은 원본의 이름이 아니라 금남 최부선생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왕의 명에 따라 쓴 <중조문견일기>를 뒤에 활자본으로 간행하면서 붙인 이름이 바로 <표해록>이다.
일반적으로 금남의 외손자 유희춘이 처음으로 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이전에 이미 조정에서 한차례 간행한 바 있다고 한다. 현재 그 원본은 국내에 전하고 있지 않다. 고려대학교도서관에 현재 동활자본 3책중 1책만 남아있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약탈해간 것으로 보이는 3책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 김종윤, 책이있는 마을, 2000, 272-275쪽 일부 발췌
한문이건 한글로 된 글이건 간에 언제나 책 서두의 글은 중요한 대목이다. 책 전체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해록> 원문 맨 앞쪽의 6쪽 내지는 7쪽 안팎의 인쇄상태를 보면 활자의 반 이상을 바꿔치기 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활자의 크기가 두 세가지로 땜질을 한 것이다. 다른 것은 뒤로 미루고 이 사실 하나만으로 이 책은 진본이 아닌 것이다. ……중 략 …… 이 책은 한반도에서 풍랑을 만나 대륙 영파로 떠내려갔다는 맹랑한 이야기책이 아니다. 최부 일행이 탄 배가 나주를 향해 제주를 떠난 것은 1488년 윤1월 3일(성종 19)이었다. 배가 바다에 이르자 동풍이 크게 불어 이미 배는 표류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니까 원문이나 최옹의 번역으로는 제주에서 목포쪽으로 항로를 꺾어야 하는데 폭풍이 불어 배가 서쪽으로 그대로 떠밀려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상학이나 한반도의 해풍에 관한 자료를 보면 음력 정월, 겨울에서 봄까지는 동풍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 그 반대로 북풍이 분다고 한다. 최부 일행의 배가 1월 3일부터 16일까지 13일동안 바다에서 표류한 기록이니까 13일동안 동풍이 불었다는 얘기인데, 이것은 당시의 기상조건 일수가 없으며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가짜의 기록으로서 잘못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 책은 내용이 변조된 것이다.
제주는 제수라는 물줄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산동성 제남, 제령, 거야, 영주가 합해 제주라 하는 곳이다. 제주는 탐라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탐라, 탐로라, 임라, 섭라 등으로도 불렸다고 <명사>나 <원사>등에서도 보이고, 말을 기르기에 좋은 초지를 가지고 있어 원나라가 목마장으로 쓰기 위해 탐을 냈다는 기록도 있다.
만일 한반도 제주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元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던 왕조인데 제주도까지 바다를 끼고 말을 기르러 갔겠는가? ……하 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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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강진 남포 뱃길 대표적 표류기 '장한철 표해록' | |||||||||||||||||||||||||||
청산도 문학 현장 쓸쓸, 강진 남포엔 찬 바람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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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섬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의 촬영현장과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 유명하다. 관광객들이 섬에 오면 꼭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청산도가 우리나라 고전해양문학의 백미라고 일컫는 '장한철의 표해록'의 중요한 무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장한철의 표해록'은 1770년 12월 제주의 장한철이란 사람이 서울에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제주항에서 29명의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강진의 남당포(지금의 남포마을)마을로 항해 하다가 표류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장한철일행의 표류는 강진과 제주사이의 뱃길에서 1770년도에 있었던 우리나라 표류사의 대사건이었다. 장한철은 1770년 12월 25일 일행과 함께 제주항을 떠나 그날 오후 지금의 완도 소안도 인근에서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서쪽으로 밀려 표류하기 시작한다. 배는 흑산도 인근까지 밀려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행 29명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이 일대는 바위투성이인 작은 무인도들이 많아 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모두들 죽는다고 통곡을 했다. 승선자들의 자포자기 속에 배는 그날밤 모도를 지나 청산도의 어느 해안으로 밀려갔다. 배는 바위에 부딛쳐 산산히 부서졌다. 정월 초엿새날 한밤중이었다. 청산도에 오른 10명중에 두명은 산길을 따라 마을을 찾아가다 낭떨어지에 떨어져 죽고 만다. 제주에서 출발한 29명중 단지 8명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청산도에 머무르게 된다. 장한철은 청산도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자신들의 음식을 챙겨주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어느날 장한철은 마을의 당집에 들려 그곳에서 소복을 입고 모친의 일을 거드는 무녀의 딸을 만난다. 소복입은 무녀의 딸은 몇해 전 남편을 잃은 20살의 과부였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장한철이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의식을 잃고 있을때 꿈속에서 나타나 물을 건네주던 여인이었다. 학자들은 이 대목을 장한철 표해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평가한다. 청산도는 이렇듯 1770년 바다에서 동료 21명을 잃은 선비가 죽음의 사선을 넘어 육지에 도착해 현지 여인과 로맨스를 나누었던 연애소설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가치있는 곳이 주민들 조차 모른채 방치돼 있다. 그는 4년 후 다시 과거에 도전해 영조 51년 과거에 합격, 제주의 대정현감과 강원도의 취곡현령을 지낸 것으로 전해온다. 이후 정교수가 1979년 번역본을 출간하면서 강진~제주 뱃길에서 일어났던 이 기구한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다. '처절한 해난사고'가 있은지 189년만의 일이다. 표해록은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나 제주~강진뱃길에서 비롯된 이같은 사실(史實)이 해당지역에서 조차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해양문학사는 물론, 해당지역의 해양사(海洋史)를 다루는데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장한철의 표해록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 아무 가치없이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두 번째는 장한철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였다. 세 번째는 다시한번 가보고 싶어서 갔다. '표해록' 속에 청산도는 분명히 기록돼 있다. 장한철은 표류 열사흘 째인 1771년 음력 정월 초엿새 되던 날 '비바람이 몹시 몰아치니 파도는 산더미처럼 밀려들고 배는 정처없이 떠가는' 생사의 갈림길을 겪으며 흑산도주변에서 완도 소안도 주변을 거쳐 해시(亥時:밤 9시~11시 사이)쯤에 지금의 청산면 행정구역인 모도주변으로 떠밀려 온다. 구글어스에서 모도와 청산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면 8.5㎞ 정도가 나온다. 바람은 다행히 동쪽으로 계속 불고 있었다. 열사흘 동안이나 표류한 끝에 보이는 육지였으나 배를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그냥 떠밀려 가고 있었다. 배는 청산도에 닿으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사람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장한철도 뛰어들다. 발을 내딛자 다행히 바닥에 닿았다. 바윗돌위에 몸이 걸린 것이었다. 약 50 걸음을 걸어 육지로 올라왔다. 큰 파도는 길길이 뛰어 하늘로 치솟으니, 그림자는 설산(雪山)을 뒤집는 것 같다. 마치 생생한 필름처럼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는 듯 한 표현들이다. 일단 섬의 서쪽이 분명할 것 같다. 대모도와 소모대쪽에서 서풍을 타고 오면 배는 청산도의 서쪽에 닿을 것이다. 장한철은 자신의 도착지점을 정확히 기술하지 않았으나 몇가지 추정이 가능한 기술을 하고 있다. 장한철은 자신이 발을 걸친 석서가 바닷물이 들어오면 물속에 잠기고 물이 빠질때면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런 곳이 청산도의 면소재지가 있는 도청리와 가까운 곳에 있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청산도 도청항으로 들어가다 보면 남쪽으로 아주 조금한 돌섬이 보인다. 납다도라고 부르는 곳이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이 섬은 만조가 되면 보이지 않고 간조가 되면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해안벽의 높이는 몇백길이 되는데, 그 언덕 아래는 푸른바다이고 언덕위가 곧 평평한 육지였다. 생존자들은 해안에서 10리정도를 가서 마을을 만나게 된다. 마을로 향하는 길이 평범에 가깝다. 납다도에서 마을이 비교적 가깝고, 주변에 사람이 떨어져 죽을만한 낭떨어지도 없어 보인다. 납다도에서 솔무댕이를 지나 끝머리끝 사이의 해안이다. 최근에 개설된 면소재지~신흥리간 도로를 타고 차를 몰고가면 서쪽으로 비경이 펼쳐진다. 천길 낭떠러지도 많다. 장한철이 어느마을에 도착했는지 정확히 기술돼 있지 않지만 책속에 나오는 당촌등을 중심으로 마을을 측정하면 지금의 청산도 당리와의 거리가 그정도 이다.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것도 같다. 나타나 자신에게 먹여준 환상을 경험한다. 장한철은 그 물을 받아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그날밤 장한철은 이 소복입은 과부와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장한철 표해록이 갖는 백미는 바로 이대목이다. 바다에서 겪었던 처절함을 실감나게 설명하면서도 한여인과의 로멘스를 아름답게 삽입한 장한철의 표해록이야 말로 청산도와 강진의 남포에서 다시 살아나야할 금자탑이다. - 2007년 11월 09일, 주희춘 기자ⓒ 강진신문(http://www.gjo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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