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록(燕行錄)'이란
청의 수도인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北京])에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이다.
원래 사신이 돌아오면 서장관(書狀官)이 임무수행 기록을 등록하여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 외에도 사행에 참가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기록한 글들이 상당히 많다.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다. 이를 총칭하여 '연행록'이라고 한다.
명나라와 교류하던 시기에는 사대관계에 따라
천조(天朝)에 조근(朝勤)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조천록(朝天錄)'이라고 불렀다.
명이 망한 후 조선에서는 계속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했으므로
제목을 폄하하여 '연행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행록은 총칭이고 실제 명칭은 연행록 외에
연행일기 · 연행기(燕行記) · 연행잡기 · 연도기행(燕途紀行) 등 다양하다.
이런 명칭 앞에 자신의 호를 붙이거나 그해의 간지를 붙이기도 한다.
잘 알려진 <열하일기>도 연행록의 일종이다.
이런 연행록은 등록(謄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도 있고,
단행본으로 간행되거나 사본으로 전해지는 것도 있다.
개인의 문집에 수록되어 간행되거나 도서관, 문중에 소장되어 있는 것도 상당수이다.
'조천록'은 형식과 내용이 엄격하고 규격화되어 있는 데 반해,
'연행록'은 분량과 형식이 상당히 다양하다.
여로, 연경에서의 활동, 견문과 교우한 사람들과의 기록 등을 차례로 기록한 것도 있으며,
왕래하는 동안 사적·풍물 등을 보고 느낀 바를 시로 읊어서 편집한 것도 있다.
이중에서도 각종 연행록의 모델이 되었던 것은
김창업이 쓴 〈노가재연행록 老稼齋燕行錄〉(1712), 홍대용의<담헌연기>,〈연행잡기〉(1765),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 (1832) 등이 있다.
[新연행록] 1. 다시 밟아 본 역사속의 길
200여년 전 嚥巖 박지원의 탄성 실감
신문물 넘나들던 '韓中 2천년 실크로드'
급격한 공업화에 옛 영화 찾기어려워
연행(燕行)이란 중국 청나라의 수도였던 연경(燕京)으로 가는 길을 뜻한다. 연경은 지금의 베이징(北京)이고, 조선의 연행 사신들이 남긴 기록이 '연행록'이다. 조선시대 연행 사신들이 갔던 길을 다시 밟으며 '신(新)연행록'을 연재한다.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소장 유홍준 교수)와 공동 기획한 이 시리즈를 통해 한.중 문화교류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요동 평야를 에돌아 산하이관(山海關) 너머 오늘날 베이징이라 불리는 연경(燕京)에 이르는 길은 한.중 문화교류의 대동맥이다. 조공(朝貢)을 통한 교역과 함께, 새로운 학문과 사상과 예술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수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것도 이 길이었다. 우리는 그 역사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조선시대 3대 연행록(燕行錄)이라 불리는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老稼齋)연행록', 홍대용(洪大容)의 '을병(乙丙) 연행록',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를 기본 텍스트로 삼고, 김태준 교수가 그들이 밥 먹고 잠잔 곳을 빠짐없이 작성해낸 일정표에 따랐다. 계속 북으로 올라간 다음 요동평야를 가로질러 만리장성이 발해만과 맞닿은 산하이관에 다다르고 여기서 곧장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우리는 그 길을 전세 버스로 9박10일간 다녀왔다. 호산의 장성(長城)에 올라 강 건너 남쪽을 바라보니 길게 뻗은 산자락 끄트머리 능선에 오롯이 서있는 의주의 통군정(統軍亭)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연경으로 가는 이들은 누구든 저 산마루 정자에 올라 이역 땅을 바라보며 감회를 읊었다던 곳이다. 의주의 통군정을 바라보며 불가불 건너뛴 서울~의주 천리길을 망연히 그려볼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신의주와 단둥을 잇는 철교가 우리를 세계와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슴 속에 담으며 봉황성을 향해 떠났다. 구련성(九連城)과 책문(柵門)이라는 국경선에서 하루씩 묵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박태근 선생은 당시의 국경은 선(線)의 개념이 아니라 지역개념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박지선 선생은 '노가재연행록'을 이끌어 책문 근처에서는 양국 상인들의 교역이 암암리에 성행했다고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봉황산은 아무리 보아도 한반도 어느 한쪽을 뚝 떼어온 것만 같다. 여기를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으로 추정하며 양만춘이 활을 쏘아 당태종의 한쪽 눈알을 빼버린 그 기상을 시로 읊곤 했다. 산길이 끝나고 태자하(太子河)라는 아련한 전설의 강이 나타나자 우리의 눈앞에는 옥수수밭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광활한 요동평야가 끝간 데 없이 이어진다. 연암 박지원도 그 장대함에 감격하여 "참으로 울 만한 곳이요, 울어야 할 곳이다(好哭場,可以哭矣)" 라고 했다. 그러나 항시 무엇을 그릴까 긴장하고 있던 임옥상 화백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야! 이건 너무 그릴 게 없다"고 외쳤다. 고구려와 피터지게 싸우던 연(燕)나라 모용씨(慕容氏)가 수도로 삼은 이후, 거란족의 요(遼)나라, 여진족의 금(金)나라 모두가 도읍에 준하는 거점으로 삼았고 청(淸)나라가 처음 도읍한 곳도 여기였다. 오늘날에는 화학공장이 들어선 인구 1백만명의 공업도시로 바뀌어 고도(古都)의 정취나 품격은 찾을 수 없었다. 11세기 요나라 때 세워진 이 팔각 13층 대리석 전탑(塼塔)은 우리 사신들에게 대륙적 스케일과 이국 정취를 한껏 심어준 요동의 명물로, 안목이 까다로운 안병욱 교수조차 정교한 조각과 가지런한 비례감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붉은 큰 돼지'라는 뜻으로 홍태시(紅泰豕)라고 부른 청태종 황타이지(皇太極)의 소릉(昭陵)이 건재하고 있다. 그 모두가 만주족의 옛 영광을 말해주는 유적이다. 인구 7백만명의 중국 4대 도시로 급성장하면서 마구잡이 개발과 도시 빈민의 처절한 삶으로 뒤엉켜 마치 30년 전의 서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만주족의 서러운 처지가 마치 내 일인 양 다가온다. 중화정책(中華政策)을 써왔다. 그 결과 요나라의 거란족, 원나라의 몽고족,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모두 오늘날 변방의 소수민족으로 겨우 자치구를 만들어 사는 차별을 받고 있다.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모국(母國)을 갖고 있는 민족은 몽고족과 조선족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민족적 자립을 위해 대국과 벌인 완강한 저항과 투쟁, 그리고 현명한 외교적 처신의 선물이었다. 삼학사(三學士)와 병자호란 때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의 비극적 삶을 감동적으로 강의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그런 아픔의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던가를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단호히 말하련다. 바로 그분들의 그런 희생 속에 우리 민족은 독립국가로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답답한 마음을 씻어내는 통쾌감이 일어날 때도 운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는 "참으로 울 만한 곳이요, 울어야 할 곳이다." - 중앙, 2002. 09. 27 |
|
[新연행록] 2. 한중 문화교류의 대동맥
山海關 열린 문엔 韓流 흐르는데…
선양 아파트엔 '한국식 공법' 현수막
이젠 뒤바뀐 문명의 물줄기 느껴져
나는 미쟁이, 너는 넝마주이. 나는 자전거, 너는 인력거. 나는 호미, 너는 대패.
"삶은 천형인가? 16억 인민이 떠돈다. 인민은 황사(黃砂)다. 하루가 왜이리 긴가.
부자는 더욱 부자되게 한다는 중국인민공화국. 가난한 자는 이젠 스러져 없어지는 종족인가.
[글, 그림 임옥상]
선양(瀋陽)에서 베이징(北京)까지는 7백70㎞의 징선(京瀋)고속도로가 뚫려 8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연행(燕行) 사신들은 나귀로 20일이나 걸린 1천5백리 길을 우리는 버스로 가면서도 대능하(大凌河)의 진저우(錦州)에서 하루, 산하이관(山海關)의 친황다오(秦皇島)에서 하루를 묵고 난 후에야 다다른 긴 여정이었다.
그리하여 연행 사신들이 연경(燕京)의 조양문(朝陽門)으로 입성하면
옥하관(玉河館)이라는 조선관에 여장을 풀고 보통 두 달간 사신은 외교 활동을,
학자들은 유리창(琉璃廠)을 드나들며 학예 교섭을 벌였다.
그런 중 18세기 건륭제는 곧잘 연경에서 동북쪽 2백56㎞ 떨어진 승덕(承德)시 열하(熱河)에 있는
피서산장(避署山庄)에 가 있는 바람에 몇차례는 거기까지 가야만 했으니
박지원과 서호수의 연행록이 '열하일기'로 나오게 된 것이다.
우리의 여정은 거기를 종점으로 삼고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선양을 떠나 헤이산(黑山)을 거쳐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는 베이닝(北寧)으로 향하는데
랴오허(遼河)를 건너면서 우리는 요서(遼西) 땅으로 넘어선 것이었다.
요서평야 또한 광활하기 그지없었다. 사방이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채 그 한 가운데를 달리니
차창 밖 풍광이 변하는 것이라곤 어느 순간부터 옥수수밭이 논으로 바뀐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는 '요야'(遼野)라는 시를 지으며
"하늘 끝은 어디메로 돌아갔는가/ 여기에 와서 보니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겠네" 라고 읊었다.
그렇게 세시간을 달려 헤이산에 이르니 들판 저 너머로 검푸른 산맥이 낮은 포복의 자세로
모습을 드러냈고 반시간쯤 뒤 북령시에 다다랐을 땐 준수하고 신령스런 의무려산이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 상쾌한 기쁨을 연암 박지원은
"진한 음식에 지쳐 있을 때 문득 밥상 위에 오른 야채 한 접시" 같았다고 했다.
의무려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베이닝시 한쪽 언덕받이에는
북진묘(北鎭廟)가 궁궐처럼 권좌를 틀고 있다.
먼 옛날 순(舜)임금이 중국의 명산 12곳에 진묘를 세우면서 의무려산을 동북지방의 진산으로 삼고
산신령에게 제사지내는 묘당으로 세운 것이다.
우리로 치면 계룡산 중악단(中岳壇) 같은 것으로
중원의 입장에서 보면 만주땅을 경영하는 거점 진지였던 것이다.
묘당 안에는 건륭제가 연경과 선양을 오갈 때마다 여기에 들러 지은 시를 새긴 56개의 비석이
정전(正殿) 앞마당에 3열 횡대로 늘어서 있다. 이광호 교수는 그 중에서도 의무려산엔
"조선인들이 새긴 글이 많다네" 라는 구절이 새겨진 비석을 바로 찾아내 우리를 흥분케 했다.
베이닝시는 오늘날 중국인조차 별로 찾아오지 않는 만주족 자치구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답사처로는 보고(寶庫) 같은 곳이었다.
시내에는 요나라 때 세운 숭흥사(嵩興寺) 쌍탑이 그림처럼 서 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로
영원백(寧遠伯)을 지낸 이성량(李成樑)의 묘도 있다.
더욱이 한국인으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있는 곳이다.
김창업은 '노가재연행록'에서 고구려 석관묘 얘기를 들은 대로 기록하며
후대 학자가 규명해 달라고 했는데 1974년에 발견된 평양 덕흥리 벽화무덤은
바로 이곳 유주(幽州) 자사의 무덤이고 보면 여기가 고구려의 영역이었음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는 홍대용의 명저 '의산문답(醫山問答)'의 무대다.
꽁생원 같은 허자(虛子)라는 인물이 허세를 떨치다가 결국은 이곳 의산(의무려산)에 와서
실옹(實翁)을 만난 뒤 깨우침을 얻는다는 철학적 소설의 고향인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있기에 열하가 우리 뇌리에 살아있듯이
홍대용의 '의산문답'이 있는 한 베이닝의 의무려산은 우리의 가슴 속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여기는 연행록 답사의 하이라이트였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홍채를 짙게 뿌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온갖 상념을 뒤로 하고 베이닝을 떠났다. 그리고 밤늦게 진저우에 다다랐을 때
어둠 속의 긴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섰다.
지나고 나서 보니 우리는 역사의 강, 대능하를 건넌 것이었다. 대능하!
역사학자들은 여기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 아니다, 경계선이었다 라며
제각기 학설을 펴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비파형동검으로 상징되는 중국과는 완연히 다른
동북아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던 지역이다.
대능하의 진저우부터 산하이관까지는 줄곧 발해만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다.
길은 육지 쪽으로 들어와 있어 바다를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혹 나타날까 싶어
나는 고개를 한시도 오른쪽으로 돌리지 못했다.
산하이관은 천하제일관이라는 명성에 값하는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진시황이 처음 쌓고 명나라 서달(徐撻)이가 새로 축성한 이 산하이관은 만리장성의 출발점으로
우뚝 솟은 각산(角山)을 타고 올라 연산(燕山)산맥을 따라 치달려 베이징 북쪽 팔달령 장성을 거쳐
둔황(敦煌)의 옥문관(玉門關)까지 1만리로 뻗어 있다.
그중 유독 산하이관만이 바다와 맞닿아 장성의 성벽이 발해 바다 속까지 뻗어
노룡두(老龍頭)가 되고 징해루(澄海樓)라는 망해루를 낳았다.
만리장성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일찍이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고 했듯이, 중국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그러나 각산장성에 올라 발해만을 굽어보는 내 심정은 달랐다.
당신네들은 장성을 쌓으며 중원을 보호해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그렇게 2천년간 누렸지만
당신네들이 잠자는 동안 동아시아의 세계적 위상이 낮아진 것은
결코 중국만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은 문화의 주도권이 계속 바뀌었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17세기 스페인과 영국으로, 18세기엔 프랑스로, 19세기엔 독일로,
그리고 지금은 아마도 미국으로, 그러나 동아시아는 잘 하나 못 하나 중국이 쥐어왔다.
20세기 들어와 일본이 그 위치를 차지했으나 그들은 제국주의로 변질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동아시아 문화를 이끌어갈 자격을 상실했다.
더욱이 그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한 주변국들이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한국은?
한중 수교 10주년. 이제 세월이 바뀌어 산하이관 열린 문으로
이미 한류(韓流)가 깊이 들어가 있다. 문명은 강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선양의 한 고층 아파트에는 '한국식 공법'이라고 자랑스럽게 쓴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모두들 말하기를 중국은 우리보다 10년 이상 뒤떨어졌다고 한다.
그것은 연행사신과 우리의 길 사이에 있는 뚜렷한 차이였다.
그 사실의 의미를 지금 중국도 한국도 올바로 간취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만리장성 밖의 문명을 존경해본 적이 없어
우리의 월드컵 축구 4강 진출을 그렇게 시기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중국에 영향을 주어본 역사적 경험이 없기에
중원에 부는 한류를 어떻게 살려내 동아시아 문화에 기여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전환하기엔 너무도 준비가 모자랐다.
이제 동아시아의 생존과 영광을 위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
홍대용의 '의산문답'은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허자(虛子)의 허상을 버리고 실옹(實翁)이 되라고.
- 유홍준 <명지대 교수.국제한국학연구소장>
- 2002. 10. 4
조선 포로들이 걸었던 길 걸으니 그들의 절망이 눈에 밟히는 듯
淸나라 역량까지 빨아들인 중국 다시 무서운 波高되어 용틀임
◇ 풍경 1 :
압록강엔 눈물이 더해지고=압록강 너머 요동 벌은 가고 싶지 않은 '오랑캐의 땅'이었다. 만주족 오랑캐! 1636년의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그들은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였고, 그저 '무좀 같은' 하찮은 존재였다. 병자호란 이후 처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만주족의 청(淸)은 명(明)을 대신하여 조선의 '상국(上國)'이 되었고, 조선은 해마다 상국을 찾아 황제를 알현해야 했다. 더욱이 그 오랑캐의 땅에는 포로로 끌려간 부모와 형제, 아내와 자식들이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는 높다랗게 쌓은 수항단(受降壇) 위에 거만하게 앉은 청 태종 홍태시(紅泰豕)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홍태시란 '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하지만 인조는 '인간'이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무조건 항복이었다. 이윽고 홍태시는 사로잡은 조선인 포로들을 이끌고 귀국 길에 오르면서 인조에게서 다짐을 받아낸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졌지만 인구가 부족했던 그들에게 농경 기술이 뛰어난 조선인 포로들은 귀중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던 포로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왔다. 목숨을 걸고 수천 리 길을 탈출해온 혈육과 다시 헤어져야 하는 처참한 풍경이 빚어졌다. 그렇게 도로 선양으로 보내진 사람들은 청나라 군인들에게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선양을 탈출하여 압록강을 건너 천리 길을 도망쳐온 혈육들을 도로 보내야 하다니…. 이윽고 청은 '사람 장사'를 벌인다. 혈육을 데려가고픈 조선인들에게 은(銀)을 싸들고 선양으로 오게 만들었다. 선양에서는 정기적으로 '인간 시장'이 열렸다. 몸값을 치르고 귀환했던 포로들의 것이든, 몸값이 없어 그저 만주 쪽을 바라보고 통곡했던 이산 가족의 것이든 압록강에는 슬픈 눈물이 더해지고 있었다. 단둥(丹東)을 찾은 여느 한국인들처럼 중국인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압록강 물 위로 보트를 띄운다. 강 건너 북한 땅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다. 문득 베이징(北京)의 '외교 거리'에서 중국 공안원들에게 끌려가는 탈북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도 분명 눈물을 뿌리고 압록강을 건넜을 것이다. 압록강에 뿌려지는 민족의 눈물은 언제나 마를 것인가.
선양에서 던지는 질문 = 청군에게 끌려가거나 목숨을 걸고 도망쳐오면서 조선인 포로들이 걸어야 했던 길, 몸값을 마련하여 혈육을 데리러 가던 길, 내키지 않지만 청 황제에게 문안을 드리러 조선 사신들이 걸어야 했던 길. 그 길을 따라 나도 걷는다. 조선 사신들의 연행록(燕行錄)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시 보니 반갑다. 봉황성을 지나면서 주변 풍경과 산세가 낯설지 않다. 전형적인 우리네 시골의 옛 풍경이로되 가끔 눈에 띄는 '차이나 텔레콤'의 이동통신 중계탑이 달라진 오늘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 전체에서 다섯번째로 큰 도시이자 동북지방 최대의 공업도시인 선양. 한때 '동북의 텍사스'로 불릴 만큼 일본, 러시아 등 제국주의 침략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선양에도 예외 없이 개혁과 개방의 바람은 찾아들고 있다. 북릉에는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 태종이 묻혀 있고, 고궁에는 당시 잡혀온 소현세자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사대부의 기개를 지켰던 삼학사(三學士)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북릉을 다녀간 어느 한국인 문사가 했던 말이라던가. 3백60여 년 전 포로로 끌려와야 했던 선조들의 쓰라림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청태종의 무덤. 봉분의 나무는 땅과 하늘의 기(氣)를 이어주기 위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조선 사람들은 청 태종을 '홍태시'라 불렀고, 한족들은 "오랑캐의 운수는 백년을 가지 못한다"고 만주족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 오랑캐가 세운 청은 중원을 차지하고, 2백60여 년 동안이나 한족들의 머리 위에 군림했다. 오늘날 중국이 자랑하는 광대한 영토도 사실은 만주족의 지배 아래서 획득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청의 융성을 이끈 원동력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먼저 꼽는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내정은 건전했고, 대외정책은 탁월했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 아들들은 토의를 거쳐 가장 '능력 있는' 홍태시를 옹립했고, 이후 두말 없이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 당시 어지럽고 혼란했던 명을 탈출해 많은 사람들이 만주족에게 투항했다. 가렴주구를 못 이겼던 농민과 기술자들, 열악한 대우에 시달리던 병사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낀 지휘관 등등…. 만주족은 그들을 우대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해 농사짓는 기술, 대포 만드는 기술 등 선진 기술을 모두 습득했다.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명을 쓰러뜨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원을 차지한 뒤에도 고유의 문자를 철저히 지키고, 만주족 본래의 근거지에는 한족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개방을 하면서도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 그것이 바로 만주족이 중원을 차지하고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오늘 중국에서 만주족은 소수 민족이 되었고, 한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홍태시도 그저 역사 속의 인물일 뿐이다. 무시무시하게 밀려오는 중국의 파고(波高)를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넘을 것인가? 선양 북릉의 홍태시 무덤 앞에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이다. - 2002.10.11 중앙 |
|
|
[新연행록] 4. 연행사들의 혼이 담긴 의무여산(醫巫閭山)
바람에 실려오는 홍대용의 탄식
조선 연행사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길을 떠난 '신연행록' 답사5일째,
우리는 선양을 떠나 랴오시 지방을 가로질러 베이전현에 있는 의무려산으로 향했다.
선양에서 3백20리가 넘는 이 길은 무성한 옥수수 밭이 무작정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로
조선의 학자들이 그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무한한 감동을 받으며 걷고 또 걸은 길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의무려산까지 풍광 하나 변하지 않는 길을
나귀를 타고 닷새 동안 길을 재촉하자니 지루함조차 느끼기도 했단다.
그래서 마침내 벌판 위에 우뚝 솟은 의무려산의 장중한 산세를 만나면
저마다의 감동을 말하곤 했다.
의무려산 부근 북진묘에는 청의 건륭제가 조선 사신들에 대해 언급한 비석이 있다.
노가재 김창업(1658~1721)은
"닷새를 가도 벗어날 줄 몰랐더니 이제야 그 끝에 이르게 되었구나"라고 감탄하면서
"자연이 인간을 만든다더니 이 광활한 대자연이 중국인의 그 여유로움을 낳았는지 모르겠다"
고 말했다.
의무려산은 그 이름 자체가 이채롭다.
의(醫), 무(巫)는 모두 '무당' 또는 '치료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만주어로는 '크다'(大)는 뜻이 된다.
굳이 새기자면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의무려산은 3천년 전 주(周)나라 시대부터 시작해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열두 곳의 진산(鎭山) 가운데 하나였다.
아울러 장백산(長白山), 천산(千山)과 더불어 중국 동북지역의 3대 명산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또 의무려산은 기자(箕子)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며,
한편 고구려의 옛 영토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연행사들은 이래저래 옛 고향을 찾는 심정으로
이 산을 탐방하였던 것이다.
조선 연행사로서 처음 이 산을 올라 기행문을 남긴 사람은 월사 이정구(1564~1653)였고,
그로부터 1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 노가재 김창업이 1712년에
이정구의 유람기를 손에 들고 의무려산에 올랐다.
김창업은 의무려산에 오른 감상을 그림을 그리듯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관음각(觀音閣)을 지나 산 정상의 절벽에 잇대어 있는 조그만 절 관음사(觀音寺)에서
숙박을 하였고, 샘물이 달고 이슬 같다는 감로암(甘露庵)을 찾았으며,
바위틈으로 난 나무뿌리를 휘어잡고 있는 관제묘(關帝廟) 옛터로 올랐다.
특히 '도화동(桃花洞)'이라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여기가 바로 조선에는 없는 선경이라고 감격했다.
도화촌은 의무려산의 남쪽에 있으며,
예전에 1천 그루의 복숭아꽃이 있어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데,
우리는 실제로 1만 그루도 넘을 복숭아가 농원에 즐비한 것을 보았고
막 따온 싱싱한 복숭아를 한바구니 사서 함께 먹으며 그 옛날 김창업의 기행문을 상기해 보았다.
김창업은 시. 서 .화(詩. 書. 畵) 모두에 능했고,
특히 화가로 일가를 이뤄 겸재 정선(鄭)의 그림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의무려산 마루에 걸터앉아 이 아름다운 절경을 함께 할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일기장에 여섯 겹의 의무려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감로암의 스님은
그의 그림을 보면서 어떻게 산 깊은 곳까지 이렇게 그릴 수 있냐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김창업은 그 스님에게
"아름다운 여인은 미운 아이를 낳지 않고, 한 종지 국으로 온 솥의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니,
어찌 산을 두루 다 편력하고 나서야만 이 산의 본 모습을 알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여유롭게 그림을 그렸단다.
김창업 이후 50년이 흐른 뒤
담헌 홍대용(1731~1783)이 이 산을 또 유람하고 돌아와 '의산문답(醫山問答)'이라는
철학소설을 남김으로써 의무려산은 연행길의 명소가 됐다.
'의산문답'은
18세기 실학파 지식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실옹(實翁)이라는 선비와
명분, 공론만을 일삼는 허자(虛子)라는 두 상반된 캐릭터 사이의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허자는 숨어서 독서한 지 30년 만에 우주의 원리와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의 진리를 깨우치고
세상에 나온다. 허자는 자신의 학문의 깊이가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라 자부하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학설을 폈다. 그러나 허자는 가는 곳마다 오히려 비웃음만을 사게 된다.
그러자 허자는 '작은 지혜와 더불어 큰 것을 이야기할 수 없고, 비열한 세속사람과 더불어
도(道)를 말할 수 없다'고 탄식하고는 자신의 학문을 알아 줄 선비를 찾아 중국의 연경으로 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아주는 선비를 만날 수 없었다.
이에 허자는 '철인이 말랐는가, 나의 도가 잘못되었는가'라고 탄식하고는 세상을 도피하리라 생각한다.
바로 그때 허자가 찾은 곳이 이 의무려산이었다.
의무려산에서 허자는 실옹이라는 선비를 만나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마침내 자신이 30년간 해온 공부가 허학(虛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고
실학(實學)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실옹과 허자의 대비는 곧 실학사상의 본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홍대용은 왜 이 소설의 무대를 굳이 의무려산으로 했을까.
아마도 홍대용의 눈에 비친 당시 조선의 현실은 허자들이 온통 들끓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세계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무대를 중국과 조선의 경계라 할 의무려산으로 택한 것이 아닐까.
아울러 의무려산은 바로 의사처럼 병을 치료하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의산(醫山)'이라는 제목이 더없이 적절했을 것이다.
실옹과 허자의 경계, 중국과 조선의 경계,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서 의무려산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현실적 이해득실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21세기에도 명분과 공론만을 일삼는 허자는 여기 저기 존재하고 있다.
신연행길을 가는 우리 답사 여정도 허자가 아닌 실옹을 찾는 과정이리라.
홍대용 이후 2백여 년이 흘러 이곳을 다시 찾은 우리는 산의 입구에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친필로 '醫巫閭山'이라 새겨진 웅장한 돌기둥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의무려산 중턱까지 올라 성수분(聖水盆)에서 케이블카(閭山索道)를 탔다.
사전 지식이 없어 그냥 산 정상으로 오르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이 케이블카는 왼쪽 능선을 타고 옥천사(玉泉寺)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조선 연행사들이 즐겨 탐방했다는
망해사(望海寺). 도화동(桃花洞). 관음각(觀音閣)은 보지 못했고,
김창업이 직접 남겼다는 이름 석자와 홍대용이 옛 선배를 따라 새겨 놓았다는 글귀도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옥천사에서 남쪽으로 아스라하게 바라보이는 발해(渤海)를 볼 수 있던 것은 큰 기쁨이었다.
나는 의무려산의 소나무 숲길을 따라 난 등산길을 거닐며
어쩌면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 의무려산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번 신연행록 답사에서 무엇보다도 또 다른 '대지(大地)'를 볼 수 있었던 것이 내 나름의 성과다.
1931년 펄벅 여사가 그려낸 왕룽의 아내 아람의 고단한 삶의 현장,
바로 끝도 없이 펼쳐진 고난의 대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오늘날 중국은 어찌됐던 남녀가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보수를 받는 '동공동수(同工同酬)'의
남녀평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그야말로 하늘과 대지의 절반을 여성이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곳곳에는 '인인유책(人人有責)'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사람마다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이 표어대로 중국이 남녀의 구분을 넘어 사람마다 국가의 번영과 운명에 책임을 지는 사회로 간다면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감회를 속으로 새기고
의무려산 산자락을 타고 넘어가는 빛 고운 저녁노을을 보며 산하이관(山海關)으로 향했다.
- 박지선 박사 (경희대 강사. 국문학)
- 중앙일보/ 2002년 10월 24일
'신연행록' 답사 여섯째 날, 일행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하이관(山海關)으로 갔다. 선양과 베이징의 중간에 위치한 산하이관은 중국 제일의 국경 관문(關門)도시였다.
'삼국사기'에도 '패수'(浿水)에서 출병한 고구려의 대군이 갈석산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으니 갈석산이란 표지는 '삼한'의 여행자를 무한한 감회에 젖게 했다.
연암 박지원이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이 큰 나라임을 모를 것이며,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라며 산하이관과 만리장성에 대한 체험을 토로한 바 있다. 우리나라가 읍성(邑城)을 쌓았고 일본이 성주(城主)의 집을 성으로 쌓았던 데 비해서, 중국은 나라를 성으로 쌓은 것이다. 이 산하이관에서부터 저 둔황(敦煌)이 있는 간쑤성(甘肅省)의 자위관(嘉關)까지 만리를 장성으로 쌓았다. 조선의 연행사들이 남긴 일기에 '조대수와 오삼계(吳三桂)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조대수는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조선에 출병한 일이 있는 명나라의 장수 조승훈(祖承勳)의 아들이다. 또 성을 지키는 총병(摠兵)이었던 오삼계는 스스로 문을 열어 주며 청나라를 끌어들였다. "산해관의 남쪽에는 만리장성이 무너진 곳이 있고 지금도 보수하지 않고 있다"고 기록하면서 거대한 장성을 쌓아 놓았지만 결국 내치(內治)에 구멍이 뚫려버린 역사의 아이러니를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바다로 뻗은 노룡두에서 두꺼운 유리로 막아 놓은 헐려진 옛 성을 볼 수 있다. 청나라보다 2백50여 년 전에는 북으로 여진과 몽골족이 장성을 넘어 중원을 침략했다. 이렇게 보면 중국의 기나긴 역사의 만리장성은 주기적으로 헐렸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 일행은 동쪽에 있는 강녀묘(姜女廟)를 찾았다. 그녀는 남편을 찾아 헤매다 이곳 장성의 끝자락에 와서 울다 지쳐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고 했다. 송나라 시인 문천상(文天祥)의 시를 자세히 해설하며 강녀를 기리고 진시황을 비판하는 긴 글을 일기에 남겼다. 이처럼 조선의 연행사들은 만리장성 한 편에 자리한 강녀묘를 통해 중국 문명을 보는 나름의 객관적 안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달리는 차안에서 급히 쓴 간략한 제문에서 "고국의 어포와 소주로 조촐한 제사상을 차리는 뜻은 역대 조선 사신들이 제사해 온 옛 자취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고 "길이 만대에 역사를 되돌아보도록 가르치는 역사의 증거로 남으시라"고 했다. 함께 음복을 하고 망부석이 자리한 언덕에 서니, 사방 풍경이 한눈에 잡혔다. 각산에서 시오리나 뻗친 이 해변의 장성은 발해를 막고 있다. 한국의 서해와 맞닿아 역사를 머금고 출렁이고 있었다. 담헌 홍대용이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九連城)에 들어가면서 읊었다는 시심을 알 만했다.
홍대용은 자신이 남긴 '을병연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중국도 세계의 중심은 아니며 나라마다 모두 각각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역사관을 뚜렷이 했다. 중국 이외의 나라도 야만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이른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이다. 대개 이 길을 따라 여섯달씩 걸려 베이징을 오갔다. '북학'이란 말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볼 것이 아니라 선진 문물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대표적 실학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은 모두 연행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을 주장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93년 11만여 명에서 지난해 1백67만 명으로 15배나 늘었다. 하지만 베이징이나 백두산 부근에 집중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조선 연행사들 발자국의 비석을 찾는 연행의 추체험, 이런 역사의 정신이 이어졌기에 오늘의 당당한 한ㆍ중 관계가 있고, 한류(韓流)가 있는 것이겠다. 북학의 길이었던 이 산하이관을 다시 찾는 뜻도 여기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친황다오 부근 베이다이허(北戴河) 해변에 있는 별장에는 장쩌민(江澤民) 주석을 비롯한 중국 현정부의 수뇌들이 모였기에 다소 긴장이 감돌기도 했다. 하지만 옛 연행사들도 보았을 발해는 여전히 우리 앞에서 옛날과 마찬가지로 철썩이고 있을 뿐이었다. |
사회주의 집권 후 봉건 잔재라며 홀대하며 방치
'신연행록' 답사단 가운데 나의 역할은 색다른 것이었다. 도시와 유적지 곳곳에서 만나는 간판. 현판. 비문의 판독과 해석을 통해 다른 교수들의 이해를 도왔다. '百事可樂'(펩시콜라). '肯德基'(켄터키치킨) 같이 한국인들에게 익숙해진 말들과 함께 '熱狗'(핫도그). '愛思'(에이즈) 등의 외래어를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을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함께 웃고 즐겼다. 단둥과 선양(瀋陽)의 중간에 있는 봉황산 정문 양쪽 기둥에서 볼 수 있었다. "신주람승무쌍지(神洲攬勝無雙地), 화하역험제일산(華夏歷險第一山)"이라고 씌어 있었다. "중국의 빼어난 경치를 다 가져와도 이와 짝이 될 곳이 없으며, 중국의 험난한 곳을 두루 다녀보아도 이곳이 제일이다"라는 내용이다. "이름을 알고 싶으면 말을 멈추시고(問名應駐馬), 향기를 맡고 싶으면 마차를 세우시오(尋香且停車)" 라는 멋드러진 글귀가 휘날리는 술집을 아무리 바쁜 연행길이라 해도 차마 그냥 지나치지는 못했으리라. 박지원이 "정전 앞뒤에는 역대의 큰 비석이 나란히 서서 마치 파 이랑과 같다"고 소개한 것처럼 커다란 비석들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새겨둔 글귀가 많으니, 기자의 홍범구주 문화가 지금도 전해오네 (多有朝鮮人勒句, 箕疇文化至今漸)"라고 쓴 시비를 먼저 찾아보았다. '여산시선(閭山詩選)'(遼寧人民出版社)을 들고 나와 이곳의 비문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다고 자랑했다. 뜻밖에도 건륭제의 이 시가 실려있지 않았다. 단순 착오일까 아니면 조선이라는 문구 때문에 빼버렸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의심하는 사이에 조선의 연행사신들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한편의 시가 눈길을 끌었다.
건륭제 자신도 이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사실 나 역시 중국과 한국의 '문자가 같았다'는 것 때문에 이번 여행단의 일원이 되었고, 연행 사신들의 풍성한 기록도 '문자가 같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산하이관(山海關)을 지나 루룽(盧龍)현의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묘에 갔던 일이었다. 그런 묘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당혹스러운 경험의 시작에 불과했다. "해도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당혹스러움을 넘어 가슴이 아파오기까지 했다. '이제정(夷齊井)'이라 쓴 녹슨 안내표시판이 서 있었다. 조금 돌아 들어가니 언덕이 나왔다. '이제고리(夷齊故里)'라고 쓴 조그마한 비석과 '청절묘(淸節廟)'라고 쓴 글씨조차 없었다면 이곳이 쓰레기장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지조와 청렴의 대명사로 꼽혔던 백이숙제의 묘는 쓰레기 더미에 둘러싸여 있었다. 타락한 폭군을 몰아낼 혁명의 의지를 키우던 문왕을 찾아 수만리 길을 찾아간 현자가 바로 백이와 숙제가 아니었던가. 공자는 그들의 마음을 읽어 "인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인을 실현하게 되어 원망할 것이 없던 분들"이라고 칭송하였으며, 맹자 역시 "맑은 성인(聖之淸者)"이라 부르며 그들의 덕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이후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에 의해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자기와 비슷한 처지를 당한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이나마 후세에 전하고자 '사기 열전(列傳)'을 저술한 사마천은 '백이 열전'을 열전의 제1권으로 삼아 그의 원한을 대변하며 자신의 원한을 쏟아놓았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충절의 화신으로 추앙되어 봉건군주와 지배귀족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전의 왕조에 대해 충성을 다하거나 이전에 섬기던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있으면 백이와 숙제를 예로 들어 포상했다. 그들의 충성은 백이의 충절에 비길 만하다는 것이 포상의 이유였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굶어죽을지언정 고사리는 왜 먹었느냐"고 꾸짖으며 자신의 충절을 자랑하기도 했다. 자신의 충절은 백이와 숙제의 충절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묘(夷齊廟)는 중수되었고 건너편에는 행궁(行宮)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황제가 머물던 행궁터라도 보기를 기대하며 언덕 위로 올라가니 높다란 건물 위에는 총을 든 초병이 서 있었다. 동아시아의 철학과 사상과 문화, 그리고 역사와 정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현대 사회주의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맑고 깨끗한 삶의 표상이었던 이들의 혼을 쓰레기더미와 감옥에 머물게 해서야 되겠는가. |
자금성 유리 기와 만들던 공장 터… '이빨 나란히 하듯' 서점들 즐비
[新연행록] 8. 열하에서 만난 박지원과의 대화
多민족 통치 고민 담긴 황제의 피서지
[新연행록] 9. 200년 전에도 문명 교류
조선 선비- 러 正敎 신부 '北京의 조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나면 무엇이 될까. 지금 중국에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있다.
공공조형물이다. 거대한 아파트촌, 초대형 공원, 광장 등 그 중심에는 하나같이 큰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다. 모두 너무 크고 이유없이 화려하고 무조건 낙관적인 추상적 형태들 뿐이다.
미술이 시대의 거울임을 인정한다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만남은 전혀
만날수 없는 것의 만남임을 중국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글·그림=임옥상]
[新연행록] 10. 연행사들의 비판적 역사의식
事大의 길에서 `脫中華` 깨우친 역설…성리학으로 사회를 통제한 조선
중화사상 절대적 가치로 신봉…연행이 다른 세계관 접할 길 터
|
'알아가며(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행길, 연행사, 연행록 (0) | 2008.01.25 |
---|---|
열하일기 (0) | 2008.01.25 |
금남 최부 '표해록'의 발자취를 따라서 (0) | 2008.01.25 |
[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15. 발해연안의 돌무덤과 동이족 (0) | 2008.01.25 |
역관 원민생 - 충녕대군을 세자로 明의 승인 받음 (0) | 2008.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