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와 731부대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선전포고도 없이 짓밟으면서 시작됐다. 1차대전 이후 겨우 독립한 폴란드는 유대인들의 천국. 폴란드 정부는 300만 명(인구의 15%)이 넘는 유대인들을 위해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시민권과 자치체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씨를 말리려고 했던 히틀러와 나치스에게 폴란드는 눈엣가시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아우슈비츠는 그곳의 대표격.)를 세운 뒤부터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나치스의 친위대(SS)와 국가비밀경찰(게슈타포)의 우두머리였던 하인리히 히믈러(1900~1945)가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설계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약 400만 명. 3분의 1은 유대인이고, 나머지는 폴란드인, 집시, 동성연애자였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을 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는 7600여 명에 불과했다. 첫번째 그룹은 몇시간만에 독가스실로 보내진다. 이렇게 사라지는 사람들은 하루 2만명에 이른 적도 있다. 두번째 그룹은 공장 일꾼. 아우슈비츠에 끌려와서 공장 일꾼으로 일한 사람은 40만명이었는데, 34만명이 기아, 질병, 매 등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 물론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1908~1974)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 사람도 있었다. 그래봤자 고작 100여 명이었다. 마지막 그룹은 실험용으로 쓰일 쌍둥이와 난쟁이들로 ‘죽음의 천사’로 불린 요제프 멩겔레(1911~1985?)에게 넘겨졌다. 그는 기차에서 내리는 포로들을 제일 먼저 맞이했다. 그리고 줄을 선 그들 앞에서 권총을 좌우로 흔들었다. 왼쪽이면 독가스실, 오른쪽이면 강제노동소로 향해야 했다. 그는 200여 쌍의 일란성 쌍둥이들을 모아 그 행동을 관찰하고, 필요하면 그들의 손을 붙잡고 즉시 해부실로 향했다. 그의 실험 중 특이한 것은 홍채 실험. 어린아이들의 눈에 메틸렌 블루를 주사해 눈의 색깔을 푸른색으로 바꾸는 실험이다. 멩겔레가 이와 같은 실험을 통해 꿈꾸는 것은 인종 바꾸기. 다른 인종을 푸른 눈을 가진 아리안 인종으로 새롭게 창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히믈러로부터 매일 3000~4000명 포로들의 생식능력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X선 불임장치. 그는 포로 중에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선발한 다음 그들을 발가벗기고 5~8분 동안 X선을 쐬었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작은 기구를 항문으로 집어넣고 남자의 전립선을 건드려 억지로 사정하게 만들고, 여자의 나팔관 끝에서 난소를 잘라냈다. 이렇게 해서 개발한 그의 거세장치는 매일 1000명의 사람들을 처리해냈다. 그는 방부제로 쓰는 포르말린이나 마취제로 사용하는 노보카인을 여성의 나팔관에 주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여자들은 자궁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었지만 독가스실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실험에 적극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믈러는 이 방법을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감옥에 간 사람은 20여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도망치거나 이름을 감춘 채 활약했다. 슈만은 아프리카로 건너가 수단, 가나 등을 돌면서 병원장 노릇을 했다. 그리고 클라우베르크는 연합국에 체포되자 자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사들은 전승국인 미국과 러시아로 건너갔다.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독일이 보유했던 의학, 로켓, 비행기, 전자공학 등에 관한 지식이 탐났던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1955년까지 760여 명의 과학자들을 흡수했다. 물론 이들에게는 미국시민권이 주어졌고, 동시에 나치스에 협력했던 경력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로켓과학자인 폰 브라운(1912~1977)과 항공우주의학의 선구자인 슈트루크홀트(?~1986)이다. 폰 브라운과 슈트루크홀트는 미국이 달을 정복하는 아폴로 계획을 추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페이퍼클립 계획은 1957년 옛서독이 제지할 때까지 계속됐다. 일본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에 참여한 의사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세균실험
유럽에서 독일의 나치스가 맹위를 떨치고 있을 무렵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선언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만주를 삼킨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이 특별히 관심을 갖는 무기는 생물학무기. 그래서 1936년 만주를 침략할 때부터 세균전에 대비해 만주 하얼빈 남쪽 20km 지점에 관동군 산하 세균전비밀연구소를 세웠다. 그 이름은 전염병을 옮기지 않는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방역급수부대’라고 은폐됐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8월 ‘만주 731부대’(731부대 외 100부대도 같은 역할을 함)로 명칭을 바꾸었다.
731부대는 의사 출신의 이시이 중장이 이끌었다. 그의 부대는 히로히토 천왕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어떤 외부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비록 만주에 주둔하는 일본군이라고 할지라도 접근시에는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731부대는 오랫동안 베일 속에 묻혀 있을 수 있었다.
731부대에는 바이러스, 곤충, 동상, 페스트, 콜레라, 식물 등 생물학무기를 연구하는 17개 연구반이 있었다. 각각의 연구반에서는 이를 연구하기 위해 ‘마루타’(껍데기만 벗긴 통나무라는 뜻의 일본어)라고 불리는
인간을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대부분 만주와 한반도에서 잡혀온 중국인과 조선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학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된 실험들은
눈을 뜨고 볼 수 없고 귀를 열고 들을 수 없을 만큼 잔인했다.
고속원심분리기에 사람을 넣어 생피를 짰고, 혈관에 말의 피를 넣는가 하면, 인체의 70%가 수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루타를 한증막에 넣고 수분을 짜냈다.
또 정맥에 공기를 불어넣거나 거꾸로 매달아 몇시간 만에 죽는지를 알아보는 기상천외의 실험들도 행했다.
세균을 감염시킨 환자들을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막사에 넣고 전염병이 얼마나 빨리 번지는지를 지켜보는 일도 다반사였다. 물론 그러한 실험은 죽을 때까지 진행됐다.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은 채. 나중에 731부대 옆에는 커다란 뼈무덤(骨塚)이 생겼는데, 이는 세균을 옮겨놓고
피부와 내부기관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를 살피기 위해 해부하고 남는 뼈들을 버린 곳이다.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들은 동상에 걸리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동상치료법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동상 연구는 요시무라반에서 이뤄졌다.
이곳에 속한 의사들은 마루타를 영하의 날씨에 세워두고 손발에 물을 뿌려가며
동상이 걸리는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이 마루타의 손발은 얼다못해 나중에는 툭툭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말았다.
이 실험을 위해 동원된 마루타들은 아이를 둔 여자들로, 강한 모성애를 악용해 실험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731부대뿐 아니라 일본 의대에서도 조선인 마루타를 이용해 생체실험을 했다고 한다. 그들이 마루타로 동원한 사람 중에는 항일시인 윤동주(1917~1945)의 이름도 보인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731부대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살아남은 150여 명의 마루타들을 모두 처형했다. 그렇다고 그 만행이 덮어질리 없건만,
2년 6개월 동안 800여 차례에 걸쳐 치러진 도쿄전범재판에서 731부대원들이 처벌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731부대의 생체실험 자료를 미국이 갖는 대신 관련자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비밀 ‘빅딜’(big deal)이 있었던 것이다.
- 홍대길 기자, 동아사이언스 - 2007년 0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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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역사왜곡 ‘세균전 부정’
올해 1월 중순 일본 도쿄(東京) 지방법원에서는
2차대전 중 일본군의 세균전으로 피해를 본 중국인들이 배상을 청구한 소송의 재판이 열렸다.
중국에서 세균전을 전개하고 인체실험을 자행한 부대는
1933년 만주에 창설된 관동군 방역급수부(防疫給水部), 즉 731부대이다.
하얼빈 교외의 감옥과 인체실험실에서 죄수나 정치범은 물론이고
애꿎은 농민들까지 ‘기니피그(실험재료)’로 무참히 죽어갔다.
작은 방에 차꼬를 채운 ‘기니피그’에게 처음에는 건강 유지를 위해 좋은 음식을 먹이고
콜레라 비저병 선페스트 등의 병균을 접종했다.
주기적으로 피를 뽑아 연구하다가 몸이 허약해져서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독살했다.
병균말고도 청산가리 독가스 전기충격 등 1000여 가지에 이르는 인체실험이 강행됐다.
초기 성과에 만족한 일본 육군은
1939년 하얼빈 근처의 핑팡(平房)에 비행장을 갖춘 대규모 세균공장을 건설했다.
종전 때까지 핑팡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 이른바 인간 통나무(마루타)는
중국인, 러시아인, 조선인 등 3000여 명에 이르렀다.
731부대는 개인에 대한 인체실험에 만족하지 않고 병원균의 독성을 야외에서 실험했다.
세균전을 준비한 것이다. 이를 위해 대량으로 생산된 세균은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선페스트, 천연두,
콜레라, 파상풍, 이질, 성홍열, 디프테리아, 폐렴, 성병, 폐결핵 등 거의 모든 질병을 망라하고 있다.
731부대는 세균을 살포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가령 창춘(長春)에서는 사람들에게 콜레라 병균을 교묘하게 접종했다.
난징(南京)의 우물 속에는 갑상선 기능에 이상을 일으키는 세균을 집어넣었다.
닝보(寧波)에서는 하늘에서 밀밭 위로 콜레라와 선페스트 균을 공중 살포했다.
닝보는 상하이(上海) 남쪽에 있는 도시로 저장(浙江)성에 속한다.
올해 1월 도쿄지법에 제소한 사람들이 바로 저장성의 피해자들이다.
증언대에 선 중국 의사들은 2차대전 종전 후 처음으로 일본 군대가 저지른 세균전의 만행을
낱낱이 폭로했다.
1940년 10월 731부대는 전염병의 세균을 지닌 벼룩을 닝보에 퍼뜨렸다.
선페스트가 34일간 창궐해 닝보에서 109명이 죽어나갔다.
같은 달에 저장성의 취저우(衢州)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군용기가 하늘에서 떨어뜨린 종이가방에는 각각 10마리의 벼룩이 넝마와 함께 들어 있었다.
취저우의 생존자인 한 의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 종이가방에는 선페스트, 콜레라, 발진티푸스, 탄저병의 세균이 들어 있었다.
저장성 당국은 닝보와 취저우에서 세균전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병균으로 감염된 주택과 시설을 소각했다.
그러나 중국 세균학자들은 1948년까지 닝보에서 새로운 전염병이 계속 발생했으며
1953년까지 취저우에서 발진티푸스가 창궐했다고 증언했다.
더욱이 일본의 벼룩 투하 직후 취저우를 탈출한 사람들이 주변 마을에 질병을 옮긴 탓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는 것이다.
일본 법정에서 중국 세균학자들은
역사상 한번도 선페스트를 경험한 적이 없는 취저우에서 일본의 세균 공격으로 5만명이 죽었으며
60년이 지나서도 건강한 사람들 중에 발진티푸스를 앓는 사람이 나타난다고 증언했다.
특히 벼룩은 저장성에서 볼 수 없는 종이므로 731부대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731부대가 세균전을 시도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고,
과거의 비인간적 만행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생체실험을 통해 얻은 의료기술로
일본 의학계에서 행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의 후안무치한 세균전 부정은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최근 국제문제로 비화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일본은 태평양전쟁 대신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며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전쟁의 정당화에 광분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려는 그들이 세균전을 인정할 리 만무하다.
-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
- 2001년 04월 19일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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