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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초전불교와 3대 사찰

Gijuzzang Dream 2009. 12. 14. 13:43

 

 

 

 

제주의 초전불교와 3대사찰

 

 

 

제주도에 불교가 언제 전래되고

사찰은 어느 때부터 건립되었는지에 대해 소상하게 전해주는 기록은 없다.

 

<삼국사기> 살펴보면 탐라는 주로 백제와의 교류를 통해서 불교를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476년에 탐라의 왕은 백제의 문주왕에게 방물을 바치고 은솔의 관직을 하사받았으며,

동성왕 20년(498)에는 탐라에 대해 왕이 직접 친정을 실시하려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에서 전래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탐라의 지배층은 백제와의 교류를 통해 일정하게 불교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사서인 구당서에서 ‘오직 귀신만 섬긴다.’는 기록으로 보아

탐라 왕실에서 660년대까지 불사가 행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불교는 탐라가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된 660년대 이후 어느 시기에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즉, 당에 조공사를 보내고(661년), 태산의 봉선의식에 참가하고(665년),

일본에 왕자의 내왕이 있은 후이다.

그리고 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완전히 신라에 예속되던 문무왕 19년(679) 이후

탐라 지배층은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도 받아들여

모든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불교의 흔적이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 정종 원년(1034) 이후 불교행사인 팔관회에 참석하였고

문종 11년(1057) 육지부의 사찰 창건을 위한 벌목과 조영에 탐라민이 동원되었던 일 등이 있어

이를 통해 불교와의 접촉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고려 충렬왕(1275-1308년) 때 활동한 혜일 스님은 묘련사, 서천암, 보문사, 법화사 등에 대한 찬시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충혜왕 4년(1343)에는 王師를 역임한 흑선, 충목왕 4년(1348) 승려 宗範이

탐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고려시대 제주 불교 사찰의 일면을 볼 수 있으며

대표적인 3대 사찰로 法華寺(현 서귀포시 하원동)와 水精寺(현 제주시 외도동 도근천 부근),

元堂寺(현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 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화사(法華寺)

 

法華寺 창건에 대한 기록은 사적기와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발굴조사에 의한 고고학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법화사지 발굴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채집된 명문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始重創十六年己卯畢’이고 다른 하나는 ‘至元六年己巳始…’이다.

두 명문을 합성하면 ‘至元六年己巳始重創 十六年己卯畢’이란 내용으로

至元 6년 즉, 고려 원종 10년(1269년, 己巳)에 중창을 시작하여

16년 즉, 충렬왕(1279년, 己卯)에 마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10여 년에 걸친 대대적인 중창이었다.

 

또한 법화사는 절 안에 봉안했던 동불상 이안 문제로 조선초에 크게 이목을 끌었다.

선왕조실록에는 법화사에 元나라 良工이 주조한 彌陀三尊佛像이 있었는데

조선 태종 6년(1406)에 명나라 영락제가 사신을 보내어 그 불상을 요구해 왔으므로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나주로 옮기게 한 뒤,

명나라 사신에게 불상을 인도하는 과정이 여과 없이 실어져 있다.

 


수정사지 전경 
 

水精寺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처음 나타난다.

‘공민왕 5년(1356)에 釋器라는 사람을 제주 수정사에 보내어 안치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같은 내용이 고려사 釋器傳에도 수록되어 있다.

 

수정사지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옛 수정사는 금당지를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게 하였고,

중정 형태의 건물을 회랑식으로 배치하였으며, 중정 안에 탑과 석등을 두었다.

수정사의 존속 시기는 발굴된 북송 때의 화폐와 11세기 청자류로 보아

12세기 이전에 창건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8세기 중엽 이후의 유물이 거의 확인되지 않아 당시에 훼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당사지(불탑사)
 

元堂寺는 조선시대 효종 4년(1653)에 편찬된 탐라지에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드러나며

문헌상 17세기 중반 이후에야 확인되고 있다.

원당사지에 대한 조사에서도 13세기 이전 도자기와 기와편 등이 출토되며 건물지 등도 확인되고 있다.

대웅전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현무암제오층석탑(보물 1187호)이 자리하고 있다. 

 

 
원당사지오층석탑
 

수정사와 법화사는 각각 제주의 산북과 산남을 대표하는 사찰이며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求心點 역할도 하였다.

또한 이들 사찰은 고려 이후 국가가 보조하는 裨補寺刹로

조선시대 초기에는 노비가 법화사는 280명, 수정사는 13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분위기에 따라 법화사는 17세기 후반 무렵,

그리고 수정사는 숙종 20년(1694년), 원당사는 숙종 28년(1702년)경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관음
 

이후 제주도내에는 안봉려관 스님이 관음사를 창건한 1908년까지

사찰이 없는 무불교시대가 계속 되었다. 

 

   - 김창화, 제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9-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