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 슬로시티 태평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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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장인에게 듣는 천일염 이야기
다시 만난 반가움도 잠시, 소금장인이 바쁘게 움직인다.
지금 시각은 해가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는 오후 5시.
한쪽에선 염부 6명이 ‘대패’라는 나무 밀대로 염전 바닥에 깔린 소금결정을 긁어모으고,
소금장인은 염전에 바닷물을 새로 채워 넣고 있다. 염전 판에 다가가 소금을 관찰했다.
얕게 깔린 소금물에 반듯한 직육면체 모양을 한 소금 일부가 떠 있다.
소금을 조금 집어 힘을 줬더니 가루처럼 쉽게 으스러졌다. 맛은 어떨까. 윽! 짜다.
“그렇게 우유 빛깔이 나고 잘 으깨지는 소금이 좋은 소금이여. 먹어 봐. 끝 맛이 달제.”
언제 왔는지 소금장인이 불쑥 말을 건넨다.
소금이 달다는 소금장인의 설명에 처음엔 머리를 갸우뚱했지만 다시 한 알을 입에 넣어 보니
그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일반 소금보다는 덜 짜면서 풍부한 바다 내음이 난다.
“저 끝에 큰 저수지 보이제? 저기에 바닷물을 가둬놨다가 저쪽 멀리 있는 염전에서부터
차례로 물을 실어 증발시켜 오는겨. 원래 바닷물은 소금 농도가 3% 정도 되는데
결정지에 올 때쯤 되면 22~25%까지 올라가지.”
안 그래도 이 넓은 염전에서 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네 개의 판만 긁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소금이 생길 수 있는 염전 판은 결정지라고 따로 부른다.
나머지 판들은 모두 소금의 농도를 서서히 높여가는 증발지라고 한다.
얼추 세어 보니 저수지에서 나온 물이 자그마치 18단계나 거쳐결정지에 들어온다.
판과 판 사이에는 물꼬가 나 있는데, 소금물이 일정한 농도까지 증발하면
물꼬를 통해 소금물을 그 다음 단계의 증발지로 이동시킨다.
저수지의 바닷물이 결정지에 도착하는 데 보통 20여 일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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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간에 비라도 오면 어쩌죠?”
며칠 동안 애써 증발시킨 소금물이 빗물에 희석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저기 염전 중간에 지붕 보이제? 저기가 함수 창고여.
비가 올 것 같다 싶으면 소금물을 전부 끌어다 창고에 보관허지.”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 지하실처럼 생긴 창고가 있다.
비가 오면 잠시 소금물을 저장했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염전 판으로 돌려보내는 소금물 창고다.
소금물을 저장하고 다시 돌려보내는 일은 염전 전체에 그물처럼 퍼져 있는 수로를 통해 이뤄진다.
비가 올지, 또는 언제 올지 미리 파악하고 소금물을 대피(?)시키는 노하우는
소금장인의 수십 년 경험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소금 꽃을 피우기 위해선 비만 피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진 소금장인은 이를 “햇빛, 바람, 물 3박자가 맞아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햇빛이 약하면 소금물이 제대로 증발하지 못해 결정이 생기지 못하고,
바람이 너무 세도 소금물이 자꾸 흔들려서 소금이 잘 안 생긴다.
소금물의 염도도 25~27%로 적당해야 소금 알이 굵게 생기지, 너무 높거나 낮으면 알이 가늘다.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6~9시간을 기다려야 소금이 만들어진다.
날씨가 안 좋으면 며칠씩 더 기다리기도 한다. 이 작업은 4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이뤄진다.
그래 봐야 천일염을 제대로 수확할 수 있는 날은 1년에 90일 정도밖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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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예전만 못해. 10년 전만 해도 1년에 100일은 작업했는데, 요즘은 80~90일이 전부여.
염전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딱 알제. 옛날엔 뜨거워서 발도 못 담궜는디, 요즘엔 하나도 안 뜨거워.”
기후변화의 영향이 이곳 증도까지 미친 것일까.
날씨는 계속 더워지지만 일조량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금장인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오후 6시. 해가 많이 기울었다. 바닥에서 긁어모은 소금이 칸마다 수북이 쌓였다.
염부들은 수레에 소금을 실어 염전 바로 옆에 있는 소금 창고로 옮겼다.
따라가 보니이미 창고엔 소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눈처럼 하얀 금이 쌓여 있는 보물 창고 같았다.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는 기자에게 소금장인은
“천일염은 창고에 6개월간 보관하면서 결정체 속에 들어 있는 간수를 빼야 한다”고 설명했다.
“간수를 빼지 않은 천일염은 쓴맛이 강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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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이 키워낸 미네랄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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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가 쓴 이유는 채취한 천일염에서 물이 빠져나올 때
결정 속에 들어 있는 마그네슘 이온이 물에 녹아 함께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천일염에는 마그네슘 외에도 칼륨, 칼슘 같은 미네랄 성분이
전체에서 4~6%나 들어 있고, 우리가 흔히 소금이라고
생각하는 염화나트륨의 비중은 80~85%에 불과하다.
과거엔 이런 미네랄 성분을 불순물이라고 생각해 제거하거나,
순수한 염화나트륨으로만 이뤄진 소금을 인공적으로 합성했다.
하지만 요즘은 미네랄이 고혈압, 심근경색 같은 심혈관 질환을
유발하는 나트륨 이온을 배설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미네랄이 풍부한 천일염은 오히려 건강한 소금으로 환영받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똑같이 바닷물을 햇빛으로 말려서 만든
천일염이라도, 국산 천일염이 외국 천일염보다 미네랄 성분이
3배 가까이 많다는 것. 전문가들은 천일염이 생산되는
비옥한 서해의 갯벌을 그 비결로 꼽았다.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인 서해안 갯벌은
마그네슘 매장지인 황해 주변 중국 해안과 가깝고,
육지로부터 엄청난 양의 식물성 유기물이 유입되는 지역이다.
이런 갯벌 속에는 수많은 미생물이 번식하고 있는데,
염도가 높아지면 소금 속에 미네랄을 뱉어 놓고 죽는다.
“결정지에 가둬놓은 물이 미끌미끌한 이유는
미생물들이 짠물에서 견디기 위해 글리세롤이라는 특별한 성분을 만들기 때문”이라던 소금장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증도의 태평염전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 지역으로도 지정돼 있을 만큼 생물자원이 풍부하다.
염전을 떠나며
벌써 오후 7시. 이 얘기 저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염전에 해가 저문다.
동행한 사진작가는 빨갛게 노을 진 염전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바쁘다.
뭍으로 나가는 배 시간이 바싹 다가왔지만
이곳 증도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시곗바늘에 익숙해졌는지 서두르고 싶지 않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분다. 염부들은 넘어가는 해가 염전에 장관을 그려내는 데도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오늘 수확한 소금을 꾸준히 창고로 나르고 있다.
우직하게 기다려온 태양과 바람의 결실이 창고에 그득히 쌓여간다.
햇빛과 바람과 함께 일하는 그들의 모습은 미련스러우면서도 평화롭다.
진정 슬로시티에 와 있음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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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동아, 2009년 10월호
- 신안=이영혜 기자 · 사진 김인규 ㆍyhlee@donga.com · imagemo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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