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위작 예방 유물학>

Gijuzzang Dream 2009. 9. 22. 13:02

 

 

 

 

 

 

 

 

 

 

 

 

위작 예방 유물학」

 지금 시작해도 이르지 않다.

 

 

 

 

역사적 유물이 소중한 까닭은 우리 역사를 정립해 나갈 사료(史料)이자

세계로부터 대한민국의 국력과 문화수준을 밝힐 증거물이요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부수적으로 관광효과에 따른 경제적 부가가치도 지닌다.

따라서 유물이 갖는 연대적 의미(年代的 意味)란 유물의 최대 가치이기도하다.

문화가 발전될수록 역사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며

따라서 역사연구에서 유물은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

특히 유물(골동)은 옛것에 대한 향수, 고전취미에 따른 수집가의 증가,

혹은 역사교육의 자료로 다양한 수요층으로부터 소장욕구가 증가하면서

쉽게 소장하기도 어려워졌다.

이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희귀해져가는 유물은 구매가(價)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문제의 발생은 여기서 시작된다.

근대 이전까지는 고상한 역사물로 혹은 하찮은 헌 물건 정도로 알고 있던

우리 주변의 유물이 환금성(換金性)을 가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투기의 한 분야가 되었다.

위작은 이러한 한정된 유물에 대한 수요가 공급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나타난

모조품으로, 골동계의 필요악이 되고 말았다.

 

「위작(僞作)」의 시작은 「복제품(複製品)」과 「모조품(模造品)」에서 출발하였겠지만

복제나 모조품 자체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 목적이 남을 속이기 위함에 있을 때만 「僞作」이 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僞作」의 거래는 예술품이 금전적 가치를 지녔을 때부터라고 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의 「僞作」의 제작과 거래는

골동품의 금전적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로 해방과 6.25 동란을 거치면서 50여년 소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위작 유물의 폐해가 확산된 것은

한중수교(1992년)로 모조품의 대국(大國)이자 북한유물의 통로인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다양화되고 대량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물의 환금성을 부추기는 방송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위작의 폐해는 사소하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크게 일어나기도 한다.

 

두 점의 예를 든다면,

1997년에 있었던 임진왜란 때 거북선에 장착했다고 한

귀함별황자총통(龜艦別黃字銃筒)’ 위작사건이 좋은 본보기다.

1992년 해군이 인양한 이 총통은 형태도 온전하고 명문까지 있었으므로

국보로 지정되었다가 제작자의 실수로 위작임이 밝혀진 사례이다.

출토지가 확실하고 발굴기관이 해군이어서 의심 없이 진품이란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또 한점은 육군박물관에 보물로 소장되어있던 금고(쇠북)도 위작임이 밝혀졌다.

이후 이런 방법의 위작은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였다.

 
                     
사진1. 위작으로 밝혀진 '龜艦別黃字銃筒'과 명문 부분


위작(僞作)이 진작(眞作)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진화하면서

진위(眞僞)를 확인하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일부 유물에 국한하지 않고 유물 전반으로 확산되어 거래시장도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2008년 171개국이 가입된 국제 관세 기구(WCO)의 발표에 따르면,

일반상품에 대한 위조 상품의 통계는

세계 교역량의 6%가 유명브랜드의 '위조 상품'이라고 하며,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유물의 위작유통도 통계치를 내어 본다면 어떨까?

골동에 취미를 가진 이들의 말을 빌리면 일반유명 브랜드의 모조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위작들이 유통시장을 차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어떤 이는 「현대는 위작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필자가 아는 한 수집가의 천여 점의 소장 유물은 확인 결과 그 중 3~4점만 연대가 있는

유물이었다. 이 수집가는 전시관까지 건립하면서 고전 문화를 공유하고자 한

사회기여의 좋은 취지(여민해락, 與民偕樂)마저 박탈당한 것이다.

 

해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교묘해지는 유물의 위작술(僞作術)은 환금성(換金性)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유물까지 제작되고 있으며

권위 있는 경매 시장에서부터 일반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목격되고 있는 실정이다.

시대적 추세라고 방관하기엔 그 폐해가 일반화되어 유물(문화재)분야에

어떤 혼란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또한 경제적 측면이 아니더라도 다가오는 미래역사연구의 입장에서

1,000년 후, 현대에 만든 15세기의 위작이 15세기의 진작(眞作)으로 환생(還生)하는 오류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따라서 지금이라도 위작에 대한 근원적 해결책으로 객관적이며 과학적 장치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이 위작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유물계의 영원한 과제가 되겠지만

필자가 고민한 결과 나온 결론은,

 

우선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위작을 눈으로 익히게 하는 방법이다.

즉 지방마다 갖추고 있는 국, 공립 박물관(전시관)에 위작 전시실(1~2실)을 두어서

진품의 사진이나 복제품과 함께 나란히 위작을 전시하고

진품과 위작에 대하여 각각 자세한 설명을 해 두는 것이다.

이 일은 소액의 예산으로도 가능하므로 크게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본다.

 

또한 위작 박물관 건립에 일반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사립 위작 박물관(전시관)》을

허가, 장려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즉 위작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와 과학적 감정기기의 발명을 지원해 나가는 것이다.

이와같이 세간의 위작들 중에 대표성을 가지는 위작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남겨진다면

미래 역사 연구에서 유물의 진위시비(眞僞是非) 방지효과와 더불어

현재 일반화되고 있는 위작의 대량화를 막을 수 있는 매우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위작연구는 역사연구에 있어 절실히 요구되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위작 예방 유물학」연구를 시작해야 할 시대가 왔음을

유물 소장자와 유물 연구자 모두가 공감하고 있음이다.

당장의 유물 연구에도 필요하지만 미래에 일어날 유물의 진정성(眞正性) 분쟁을

막을 수 있는 예방차원에서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로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사진 2. 金銅如來坐像> 6세기, 높이 8.8cm  <사진2-1. 사진 2의 위작>높이 9.0cm

그림 1은 국보로 지정된 진품으로

이   불상의  특징은 나발이 없는 소발(素髮),

의자를 덮어 내린 상현좌(裳懸座)와 간결한 통견의(通肩衣),

양손을 복부에 겹쳐서 댄 수인(手印=선정인, 禪定印) 등

중국 6조 시대 말기에 유행했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우측의 그림 2는 그림 1의 모작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중요 문화재도록에 있는 도판의 작품들이 모조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위작 자료의 고갈을 느낀 위작자들이 최근에는 거의 거들떠보지 않던

이 작은 불상에까지 위작을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예이다.

<사진. 3〉은 1222년에 조성된 고려시대 동종이다.

신라종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고려적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고려종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데,〈

사진3-1, 2〉는 이와 비슷하게 모작하여 진작인 것처럼 거래된 종들이다.


왼쪽 : <사진 3. 내소사 동종, 고려 13세기>

가운데: <사진 3-1. 사진 3의 위작> 

오른쪽 : <사진 3-2. 사진 3의 위작〉




- 문년순, 문화재청 김해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09-09-21 문화재청 문화재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