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무왕릉비 조각 200년만에 재발견
신라 문무왕릉비 조각, 가정집 빨래판으로 사용
국립경주박물관은 경주시 동부동의 한 주택에서 신라 문무왕릉비의 상단 부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http://img.seoul.co.kr/img/upload/2009/09/03/SSI_20090903172753_V.jpg)
![](http://news.donga.com/photo/news/200909/200909040129.jpg)
경주 사천왕사터 문무왕릉비 편(片) 발견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년)의 치적을 기록한 문무왕릉비는
경주 사천왕사터에 남아있는 동서 귀부 가운데 서쪽 귀부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건립연대는 681년과 682년 이후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능비는 왕릉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문무왕릉비는 왜 사천왕사에 세워졌을까?
현재까지는 사천왕사가 문무왕이 창건한 사찰이기 때문이라는 추정만 할 뿐, 과제로 남아 있다.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진 문무왕릉비가 언제부턴가 비가 부서졌는데
기록에 등장한 것은 1,100년 뒤인 조선시대 1796년(정조 20)에
‘낭산 선덕여왕릉 아래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비석 하단부와 우측 상단부 조각이 발견했다’는 기록이
당시 경주부윤 홍양호(1724~1802)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 전하고 있다.
그 뒤 1817년, 1824년에 추사 김정희는 두 개의 비편을 발견하고 <해동비고(海東碑攷)>에
문무왕릉비편을 선덕여왕릉 아래 신문왕릉 사이에서 발견했다고 기록했으며,
또한 비편을 비좌에 꽂아보니 크기가 일치했다고 했으나
동서 귀부 어느 쪽에 꽂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한편 추사는 이 비편을 탁본하여 청에 보냈으며
그 탁본은 청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 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비문 내용이 전하고 있다.
<해동금석원>에 따르면
문무왕릉비 앞면에는 신라 왕실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치적, 신라의 백제 평정 사실,
뒷면은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 절차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국학(國學) 소경(少卿)인 ‘金○○’가 지었으며, 글씨는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쓰고,
글씨는 구획선 내에 2㎝ 안팎의 구양순체 해서(楷書)로 단아하고 활기찬 느낌을 준다.
이 비편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능비 가운데 가장 연대가 이른 것이며,
비문을 짓고(撰者), 쓴 사람(書者)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된 중요한 금석문이다.
조선시대 때 발견됐다가 이후 비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신라 문무왕릉비(碑)를
1961년 경주박물관에 근무하던 이종성이 경주시 동부동의 경주문화원 인근 민가에서
발견 당시 가정집 빨래판으로 쓰이고 있던 비편 하단부(94×60㎝)를 재발견하여
집주인에게는 3만5천원의 보상금을 지급한 후 1961년 9월11일자로 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이 지역은 조선시대 경주부 관아가 있던 곳으로
문무왕의 비석이 세워진 사천왕사와 2㎞ 가량 떨어진 곳이다.
경주박물관 진정환 학예연구사는
“비석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원래 있던 자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신라 최대의 전성기인 문무왕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말했다.
![](http://photo.donga.com/udata/photonews/image/200909/04/20090904006/200909036235072_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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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kukinews.com/online_image/2009/0903/090903kc2.jpg)
그 뒤 48년 만에, 같은 지역 경주 동부동 한 주택에서
당시 찾지 못한 비(碑)의 상단부 조각이 한 가정집 마당의 수돗가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비(碑) 조각은 9월1일 수도검침원이 마당 수돗가에서 검침을 하고 있었는데,
수돗가 바닥에 시멘트로 박혀 빨랫돌 등으로 사용되던 50㎝ 가량 돌출돼 있는 돌에
한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평소 알고 지내던 김윤근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에게 제보하였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현지 조사 결과, 이영훈 관장과 김승희 학예실장이 비문을 살펴
한쪽 면에서 200여 자의 한자를 확인했는데
한자의 서체, 음각한 형식이 경주박물관에 있는(1961년 발견) 문무왕릉비의 하단부분과 동일했다.
이 비(碑) 조각이 그동안 실물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던 문무왕릉비의 상단 부분인 사실을 확인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9월2일 경주 동부동의 한 주택에서 문무왕릉비 우측 상단부 조각(40×66㎝)을 확인했으며,
이번에 발견된 상단부 비편은 표면이 훼손되고 모서리 부분이 마모됐으나,
비문의 전체 내용을 읽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어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에 대해서도 실제 비편과 비교하면 추가적인 판독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뒷면은 아직 땅 속에 박혀있어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의 잔존 상태도 주목된다"고 밝혔다.
- 2009/09/03 일간신문기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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