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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橋), 그 천년의 역사

Gijuzzang Dream 2009. 7. 31. 23:56

 

 

 

 

 


 

 

 

 

다리, 그 천 년의 역사
 

교량(橋梁)이란 하천, 계곡 또는 해협 등을 횡단하거나 도로를 연결 할 때

그 통로를 위하여 축조된 구조물로써 사람이나 차가 다닐 수 있게 걸쳐놓은 시설이다.

이러한 교량에 대하여 경주(經註)에서는 거마가 통행할 수 있는 다리를 교(橋)라 하고,

사람이 많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다리를 량(梁)이라 하였다.

 

인류 초기의 교량은 유량인들이 이동하는 도중에 계곡 건너편으로 이동하거나,

건너편의 동물들을 잡으려고 계곡에 우연히 넘어져 있는 통나무를 이용하는 등의 단순 형태의 다리에서

점차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여 수레나 마차 등의 통과가 필요하게 되었다.

점차 도시로 사람이 모여들면서 교량은

하천의 흐르는 수량이나 수위를 측정하는 기능까지 겸비한 시설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문헌으로 보면 진보된 기술과 형식을 갖춘 다리로는 삼국 시대부터 건설된 것으로 유추되며,

현재에 남아있는 옛 교량은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기능적인 요소 이외에도

조상들의 정신적인 의미를 가진 설화와 전설이 깃들인 교량들이 있다.

교량은 사람과 차의 통행뿐만 아니라 상하수관, 각종 케이블의 통과 및 문화의 교류 등

인류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것이기도 하고, 공간적으로는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고 있다.

나아가 종교적으로는 세속과 영원한 세상을 연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사람과 함께 마음으로 우는 농다리의 전설  
 

사람이 살기에 더없이 좋다는 진천.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 마을 앞 세금천(洗錦川)에 지네처럼 누워있는 농교(籠橋)는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는 매우 진귀한 돌다리이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다리 중 가장 긴 다리이며,

무엇보다 30~40cm의 사력암질을 이용하여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올린 교각이

오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버텨내도록 한 토목공학적 우수성 때문이다.

 

농다리라는 이름은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면 돌아가는 돌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농다리는 언뜻 보아 거대한 지네가 몸을 슬쩍 퉁기며 물을 건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자연석을 축대 쌓듯이 안으로 물려가며 쌓아올린 교각의 너비가 그 위에 올려진 상판보다 넓으므로,

튀어나온 교각의 양끝이 지네발처럼 보이는 것이다.

농다리는 여느 옛 다리와 같이 축조 신화와 함께 그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농다리와 관련된 전설 같은 믿음은 최근까지도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농다리가 운다는 전설이다.

박정희 대통령 유고시 농다리 3칸의 돌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큰 장마에도 끄떡없는 농다리가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소실되곤 한다고 믿는 것도 그것이다.

그 예로 6.25동란이 나던 해

여름 장마에 5칸의 농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전쟁이 터졌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농다리 입구 마을 앞에는 돌을 쌓아 고속도로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게 만들었는데

어느 풍수지리가가 돌로 마을을 막아야 마을을 지킬 수 있다고 해서 쌓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도 농다리에 얽힌 전설들과 무관하지 않게 보인다.

이는 농다리가 이 지역 주민들의 의식에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경외시 되었는가를 말해준다.

 

 



꾸미지 않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 도동리홍교(道東里 虹橋)

영광군은 조선시대에는

“아들을 낳아 원님으로 보내려면 남쪽 옥당골(영광)이나 북쪽 안악골(황해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산이 풍부한 곳으로 소문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영광군은 원불교의 발상지로서 원불교의 교세가 비교적 큰 지역으로,

영광지역의 유교문화재는 영광향교, 내산서원, 연안김씨 종택, 정유재란 열부순절지, 단주리 당간지주,

도동리 홍교등이 대표적이다.

 

도동리 홍교는 조선 성종(1469~1494) 때 불교를 배척하였던 정극인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다리라고 전한다. 실제 다리는 옛 성이 있었을 당시 나주와 함평 등지에서 영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으나, 현재는 본래 모습이 훼손된 채 논밭으로 가는 샛길과 하천 옆길을 잇는 다리로 쓰이고 있다.

 

인위적이고 세련된 다른 홍교와는 달리, 꾸미지 않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이 나는 다리로,

만든 시기는 정극인이 생을 마친 지 16년 후인 연산군 3년(1497)이며,

영조 4년(1728)과 1994년에 다리를 보수한 바 있으며,

지금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악취가 나는 생활오폐수가 흐르고 있는 하천을 잇는 다리로 전락한데다

다리 상단을 시멘트를 발라 처리하는 등 홍교라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상태이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울던 아이도 뚝 그치던 고막천 석교
 

마을에서 떡을 만들어 이 돌다리를 건너 나주와 영산포에 떡을 팔았다하여

일명 “떡다리” 혹은 “똑다리”라고 불린다.

이 다리의 돌쌓기 방식을 살펴보면 좀 투박해 보이면서도 멋 부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운치가 있다.

다듬거나 모양을 내지 않은 화강암 석재 4-개를 척척 포개어 교각을 만들고

네모난 돌을 한두 개 받쳐 굄돌로 삼았다. 그 위에 다시 시렁돌을 올렸는데

이 돌은 노면보다 양쪽으로 50cm 가량 튀어나와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다리의 날개처럼 보인다.

 

교각위에는 넙적한 돌을 얹어 노면(路面)을 만들었다.

양쪽 가에 난간돌을 6개씩 놓고 그 사이에 두 줄로 빈틈없이 판석을 깔았다.

다리의 길이는 25m, 폭 3m, 높이 2m가 넘으며

옛날에는 수수, 조를 널어도 한 알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상판에 틈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이 다리에선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고도 하고

다리 밑이나 다리의 돌을 훔치거나 옮기면 옮긴 사람이나 집에 큰 변고가 생긴다고 한다.

여름에 이 다리에 나가 앉아 있으면 흘러가는 물소리와 별빛이 고요하여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뱀이나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어린아이에게 “너 울면 고막다리에다 버린다” 또는 “똑다리에서 주워왔다”하면

소리 내어 울던 아이가 뚝 그쳤다고도 전한다.

함평군지에 의하면 고막원 돌다리는

옛날의 국도가 나주 함평의 군계를 흐르는 고막천을 통과하는데 가설된 것인데

철도와 신도로가 석교의 바로 전방에 개통되는 1910년대만 해도

곡식 100석을 실은 범선이 고막천을 출입했고

영산강을 오르내리는 선박들이 바로 교하에 정박되어 있었음을 미루어 보아

교통산업상 중요할 일을 담당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도화되는 문명으로 급속히 변모되는 세태는

석교로 하여금 그 무거운 짐을 후배 교량들에게 물려주게 하였으니

이제는 면전에서 들리는 갖가지 차량의 경적과 소음을 푸념삼아 귀에 익히며

볏단을 나르느라 조심스레 아끼며 밟고 지나가는 농부의 발자국에도 긍지와 애착을 느끼고

또 그것으로 자위 자족할 수밖에 없다. 
 

 

        

선경의 어귀, 3백여 년을 견뎌온 승선교(昇仙橋)   
 

승선교는 전남 승주군 쌍암면 죽하리 선암사 어귀의 조계산 계곡의

물소리가 점점 크게 울리면서 하늘을 가린 고목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에워싸는 길목에 놓인 다리이다.

속세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나라는 이상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 멋진 곳에 가려면 무지개다리를 건너가야 하며

무지개는 오작교처럼 신성한 곳에 당도하는 가장 행복한 다리이다.

길다란 화강석으로 다듬은 장대석을 연결, 반원형의 홍예를 쌓았는데

결구(結構) 솜씨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아치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과 같은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좌우의 계곡기슭까지 사이에는 둥글둥글한 자연석으로 석벽을 쌓아 막았는데

모두 냇돌을 사용했으며, 다리 좌우의 측면석축도 난적(亂積) 쌓기로 자연미를 그대로 살렸으며

보수의 흔적이 없는 채 원형을 잘 지니고 있다.

다리의 기단부에는 아무런 가설이 없고 자연암반이 깔려 있을 뿐,

그래서 홍수 때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다.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의 경관을 살리면서 우아하고 견실한 다리를 축조한 선인의 슬기가

새삼 놀랍기만 하다.

 

선암사를 둘러싼 주위의 숲은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다.

봄이면 황홀하게 피는 벚꽃과 가을이면 단풍이 온 산을 뒤덮어 절경을 이룬다.

그 비경 속에 감추어진 주위엔 울창한 숲, 바위 위로 부서지며 뿜어내는 물보라,

아득히 골짜기를 채우는 물소리,

그리고 쌍무지개처럼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반원형의 아치가 한데 어우러져

글자 그대로 선경의 어귀에서 승선교는 마음속 티끌까지 청정하게 씻어주며

3백 여 년을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다산과 풍요의 기원이 담긴 주남돌다리
 

경남 창원시 동읍과 대산면의 경계를 이루었던 주남강에 설치된 주남 돌다리는

옛날 창원에서 밀양으로 가는 큰길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원래 나무다리와 징검다리가 있던 자리에 새로 석교를 놓아서 ‘새다리’ 란 명칭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다리가 설치된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 다리 주위의 판신, 고등포, 주남마을 일부의 지명을 ‘새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주남 돌다리는 모두 자연석을 이용하여 조성한 것이다.

 

자연석을 쌓아서 4개 정도 높이의 교각을 세우고 양쪽에 낮은 교각을 각각 하나씩 세워

그 위에 길이 4m 정도의 판석(板石)을 얹은 판석교(板石橋)이다.

정교하게 다듬은 교면석(橋面石)은 현재 5매가 남아있는데

온전히 남아 있는 크기는 410cm×183cm×40cm이다.

주남돌다리는 지난 1967년의 집중호우로 붕괴되어

강 가운데 교면석 1매와 이를 지탱하는 교각만 온전히 남아있고

그 외 교각은 붕괴 후 매몰되어 있으며 교면석이 포개져 있다.

더 이상 석재 유실이 없다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이 가능하다.

 

그런데 교면석과 관련한 전설이 주남돌다리의 의미를 더해준다.

교면석은 해발 5m의 정병산 꼭대기에서 가져올 때 하나의 돌을 많은 인부들이 움직여도 꼼짝하지 않아

2개의 돌을 포개어 당겼더니 순순히 끌려 왔다고 하는 전설이 그것이다.

한 장수가 2개의 돌을 칡넝쿨로 묶어서 짊어지고 왔다는 전설도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자웅석(雌雄石)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산과 풍요의 기원이 자연석을 옮겨 다리를 놓는 데서도 간절했음을 풍겨주고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암태도와 추포도 사이의 갯벌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암태도는 선인들의 피와 땀, 눈물과 통곡이 서려있는 고장이며,

목포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28.5km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뱃길로 한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돌이 많이 흩어져 있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져 있다고 하여

암태도라 하였으며,

천혜의 자연경관과 청정해역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섬이다.

 

더욱이 정겨운 것은 높고 낮은 산과 골짜기,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 그 속의 얕은 여울물에 누군가가 옮겨다 놓은 듯한 몇 개의 돌덩이에서 느껴지는 선한 마음이 무심한 우리의 마음을 잔잔한 감동으로 물들게 한다.

 

특별히 모양을 내어 쌓지 않아도 물위에 던져진 돌덩이가 다리가 되었다.

이러한 징검다리가 암태도에는 상상을 초월한 무려 36,000여 개의 돌덩이들로

물안개 핀 한 폭의 그림처럼 갯벌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추포도는 원래 추엽도와 포도의 두 섬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간척공사로 인해 하나의 섬이 되었다.

추엽도는 울창한 나무사이로 호랑이의 등처럼 보이다가 가을이면 호랑이의 형태를 보인다하여

추엽도라 하고, 포도는 서해바다에 밀려오는 파도가 섬에 닿으면 잔잔해진다하여 포도라 불렸는데

추엽도와 포도를 연도한 후부터 추포도라는 지명으로 불려왔다.

 

두 섬을 잇기 전에는 수곡리와 추포리를 잇는 징검다리(노두)가 있었다고 한다. 

징검다리는 여느 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명물이다.

썰물 때면 갯벌위에 두 마을을 연결해주는 징검다리가 생겼으며,

이 징검다리는 추포리 주민들에게 오래전부터 전천후 바닷길 구실을 하였다. 

주민들은 징검다리가 갯벌 위에 머리같이 튀어나왔다고 하여 노두(路頭)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천 개가 넘는 커다란 돌멩이로 이루어진 징검다리는 시간이 지나면 이끼가 생겨 미끄러지기 때문에

주민들은 수천 개가 넘는 돌멩이를 매년 음력 7월 8일과 9일 썰물(조금)때에

한 번씩 뒤집고 바닥의 흙을 돋우어 보수하고

어쩔 수 없이 이에 참여하지 못하는 집은 보리, 쌀 등 곡물로 부역을 대신하였다고 하니

섬과 섬을 잇겠다는 일념 하나로 고된 작업을 감내하였을 것이다.

 

이제는 2000년 6월 완공된 시멘트 포장도로의 편안함 속에

고향을 지키고 징검다리를 아름답게 추억하고 계시는 강강철씨 노부부의 옛 이야기를 전한다.

징검다리를 오갈적에 노두(路頭)에 생긴 파래며 물이끼 때문에 미끄러져 실족하여

이웃사촌을 잃어버렸던 아픈 기억과 마을의 결혼식에

신랑 신부의 신행 가마꾼이 선택의 여지없이 건너다녀야 했던 징검다리.

새색시가 가마 안에서 행여나 가마꾼이 실족하지나 않을까 마음 졸이며 가마꾼들이

창(唱) 아니고 구호도 아닌 발자국을 맞추던 음률을 기억하고 구전(口傳)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띄었냐? 띄었다! 띄었냐?

                                               띄었다! (띄었냐 = 발자욱을 띄었냐?)         

                                               뒤쪽의 가마꾼이 띄었냐?

                                               앞쪽의 가마꾼이 띄었다!



그 아련한 가마꾼들의 장단 맞춤은 징검다리를 건너야지만

추포리로 시집 올 수 있었던 새색시들의 추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으리라.

 

다리를 보려면 물때를 잘 맞춰야 한다.

밀물 때는 다리를 볼 수 없으며, 바닷길은 하루에 두 번 열린다. 

또한 다리를 놓은 시대와 내역이 적혀 있는 낡은 비석 노두비가

산모퉁이에 있다. 비문을 소개하려 했으나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마모되어

알아 볼 수 없기에 안타깝다.

 

비록 오지의 산과 들에 방치된 채 사라져가는 다리들이 많지만

다리의 돌 하나하나에 예술과 해학이 있고, 늘 함께하는 사람의 냄새가 있다.

다리는 그냥 다리가 아니다.

수십 번을 찾아가도 늘 그 자리에 있어 반겨주는 그들 다리에서는

천 년 전의 그들과 얘기할 수 있으며 그 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손광섭 청주문화원이사

- 월간문화재사랑,  2009-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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