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산학서'에 깃든 겨레의 자취를 찾아서

Gijuzzang Dream 2009. 5. 15. 01:33

 

 

 

 

   


 

 

 

수를 나타내고 계산하기 위한 도구, 산대
    
요즘은 계산을 하려면 으레 계산기를 꺼내들거나 컴퓨터 앞에 앉게 된다.

계산기가 없던 시절의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계산을 했을까?

지금과 같이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쓴 것도 아닌데, 종이와 연필을 써서 계산을 한 것일까?

 

그 답을 산대가 제공한다.

산대는 나무 혹은 상아로 된 10안팎의 막대로, 수를 나타내고 계산하는 데 이용한 도구이다.

오늘날 열이 될 때마다 한 자리를 올리는 자릿값의 개념을 이용하여 수를 나타내는 것과

동일한 원리를 따르되,

다만 인도-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산대를 배열하여 수를 나타낸 다음

계산 법칙에 따라 산대 배열을 변형시켜 계산 결과를 얻었던 것이다.

간단한 사칙계산은 물론이거니와 10차방정식의 풀이까지 다룰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산대라는 도구를 이용한 덕분이었다.

 

산대의 기원은 중국에 있지만 명나라 때 주판이 산대의 자리를 대신한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의 산대는 19세기 말까지도 우리 서민들의 생활 속에 깃든 셈 도구였다.

 

러시아 장교들이 19세기 말 조선을 여행하고 남긴 기행문을 보면,

통역을 담당한 조선인들이 아침마다 자신의 수입을 계산하면서 막대기를 이용하였고

그 계산법이 독특하다고 적고 있는데 그 도구가 바로 산대이다.

 

더욱이 18세기 초 조선의 수학책인 <구일집九一集>에는

산대가 중국으로 역도래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을 정도니

조선 수학에서 산대의 역할을 가히 추측할 만하다.

 

 


 

 

산원과 산학서


그 장면은 1713년 청나라의 역서 편찬을 담당한 사력 하국주가 조선의 위도를 측량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조선의 젊은 수학자 홍정하(洪正夏, 1684~?)와 수학적 문답을 나누는 기록 속에 들어 있다.

당시에는 수학을 산학(算學)이라 불렀고, 국가의 산학 관련 업무를 담당할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치른 산학 취재에 합격한 산원이 있었다.

그들은 종9품 ‘회사’로부터 시작하여

종6품 ‘산학교수’나 ‘별제’까지 오를 수 있는 중인 계급이었다.

그 합격자를 기록한 <주학입격안>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의 산원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 산학서를 남긴 이는 몇 명되지 않는다.


그 하나가 바로 <구일집>을 저술한 홍정하이며

그를 중심으로 <주학입격안>에 기록된 남양 홍씨 집안 산원의 혈연관계를 추적해가면

그 수와 관계의 방대함에 놀라게 된다.

산원 역시 가문의 가업으로서 대물림되는 현상이 역력하며

가문의 자손들은 어렸을 때부터 산학을 공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산원의 길을 걷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구일집>은 서로 상이한 주제를 다룬 아홉 개의 장에 470개가 넘는 문제를 담고 있어

조선 산학 입문서로서의 진면목을 보이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산대를 이용한 고차방정식의 표현이나 해법은

다른 어느 산학서에서도 보기 힘든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학서는

중인 산원 경선징(慶善徵, 1616~?)의 <묵사집산법>이다.

<묵사집산법>과 <구일집>은 문제-답-풀이로 이어지는 문제집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틀은 중국 최고의 산학서인 <구장산술>로부터 내려온 형식이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론적 설명과 함께 그것을 뒷받침하는 예를 제시하는

집필 형식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전통 산학서가 채택한 구성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문제마다 번호가 매겨있는 것은 아니고

‘今有(지금 …이 있어)’로 시작하는 문두 어구 덕분에 새로운 문제의 시작을 알 수 있다.

책 안에 담긴 내용으로 보면 산학서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입문서의 성격을 띤 <묵사집산법>이나 <구일집>과 같은 책은

산대 놓는 법, 산대로 하는 계산법, 분수의 사칙계산법 등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서부터 시작하여

비례식, 수열, 고차방정식, 연립방정식, 연립합동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학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한편 직각삼각형에 관한 문제를 다룬 <유씨구고술요도해>,

서양 대수의 방정식 해법을 다룬 <차근방몽구>, 삼각법을 주 내용으로 한 <산술관견> 등

특정 주제 중심의 전문 산학서도 있다.

신분을 초월한 공동 연구     

중인 산원의 산학 관련 업무와 더불어 사대부 계층의 박학다식한 지식 탐구의 일부로서 산학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황윤석, 남병길과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당시 사회의 특권계층이었고, 따라서 중인 산원에 비해 폭넓은 학문 영역이나 중국 산학서 및 산학자와의 높은 교류 가능성 등 산학 연구에 있어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자신의 다작 속에 산학서도 포함시켰으며

그 집필 방식도 전통적 방법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사대부는 예외적인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사대부들은 대개 산학 연구를 부끄럽게 여겨서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산학을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로부터 전해진 문헌이 적음을 무릅쓰고 산학서를 어렵게 구하는가하면

산학 관련 저술에도 남다른 애착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있다.

 

산학이 사대부의 학문 분야를 벗어난 성질의 것으로 취급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산학 연구를 좋아하고 산학의 필요성을 인식한 사대부들 면모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특히 남병길(南秉吉, 1820~1869)은

중인 이상혁(李尙爀, 1810~?)과의 공동 연구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신분 계층 간의 교류가 꺼려진 당시 사회 구조도 수학 탐구에 대한 열정을 이기지는 못했다.

남병길은 수학적 재능이 탁월한 중인 산원 이상혁을 알아보고

기꺼이 연구 파트너로 삼음으로써 서로의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서로 상대방이 저술한 산학서의 서문을 작성해줄 정도의 친분 관계를 맺으며

서로의 수학적 능력을 극찬하였다.

남병길은 수학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신분과 무관하게 인재를 보는 혜안 또한 지녔으며,

덕분에 이상혁은 당시 중인 산원들에게 접근의 한계가 있었던 서양수학을 접할 수 있었고

그에 관한 연구 결과를 <차근방몽구>, <산술관견>과 같은 책으로 남겼다.



세종의 산학에 대한 열정     



이와 같이 산학에 대한 열정은 사회적 신분과는 무관하였다.

조선 초로 거슬러 오르면 조선을 통틀어 가장 학문을 즐길 줄 알았던 임금인 세종이 산학 공부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알게 된다.

세종의 과학 기술 방면의 훌륭한 업적을 염두에 둔다면 그 기초학문으로서 수학에 대한 그의 태도를 기대할 만하다.

 

실제로 세종은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무리한 업무 속에서도 없는 시간을 쪼개어

산학을 공부하는 데 솔선수범한 임금이다.

세종은 원래 학문하는 것을 좋아하는 임금이었고

특히 산학 공부의 필요성을 몸소 깨달아 실천하고 아랫사람들에게 권하였다.

중국에서 들여온 산학서 <산학계몽>을 부제학 정인지를 스승삼아

스스로 배우고 익혔을 뿐만 아니라 관리들에게 산학을 공부할 것을 권하고

수학교육 방법에 대한 연구도 독려하였음을 세종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관노 장영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로 하여금 학문을 갈고 닦아

임금의 큰 뜻을 펴는 데 가까이서 보필하게 함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인재를 가려 쓸 줄 알았던 세종의 신념을 보여준다.

이러한 임금 스스로의 학문하는 자세와 인재 등용관은

조선의 르네상스기인 정조 대에 다시 한 번 재현된다.



전통수학을 찾아서
    
명나라 말기 상업용 수학의 유행과 더불어 서양 수학의 전래로 인해

쇠퇴하기 이전의 중국 전통 수학은 서양의 것보다 앞선 수준의 것이었다.

오늘날 그 위상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수학교과서에서도 보인다.

중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보면 보통 ‘카발리에리의 원리’라 불리는 원리가

‘조긍 원리’로 기술되어 있다.

흔히 입체도형의 부피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이 원리가

17세기 이탈리아의 카발리에리에 의해서 정립되었지만

중국에서 그보다 일찍 5세기 조긍에 의해 주목되고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수학에 문외한일지라도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가우스와 같은 이름은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홍정하, 이상혁, 경선징은 생소하다.

우리 전통 수학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가 간과하고 알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수에 대해 열정적이고 지혜로웠는지 이제는 주목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 장혜원 진주교육대학교 교수

-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양대학교 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 월간문화재사랑, 2009-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