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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떠나고(답사)

무성서원 - 전북 정읍시 관내 옛 태인현(泰仁縣)

Gijuzzang Dream 2009. 2. 26. 01:05

 

 

 

 

 

 

 전북 정읍시 관내 옛 태인현(泰仁縣) 지역

 

 

 

 

무성서원(武城書院)의 원로인 시산(詩山) 김환재(金煥在)와 전라북도 금석문연구회 회장 김진돈,

태산선비문화사료관 관장 안성렬 등의 자문, 도움을 받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08년 11월 10일-14일까지

조선시대 전라도 태인현 지역의 역사문화유산을 조사하였다.

집중 조사한 곳은 정읍시 칠보면 원촌리(院村里)와 시산리(詩山里)에 걸친 마을인데

이곳은 흔히 고현내(古縣內), 고현동(古 縣洞)으로 불리는 곳이다.

 

고현(古縣)이란 이곳이 백제 때 대시산군(大尸山郡)과

이를 계승한 통일신라시대 태산군(太山郡, 또는 泰山郡)의 관아(官衙)가 있었던 데서,

원촌(院村)은 이 마을에 무성서원이 있음에서 생긴 지명이다.

 

시산(詩山)은 이 마을에 있는 작은 산인

시산(尸山 : 시체가 마치 누워있는 듯한 모습이라는데서 붙여진 이름)을 아화(雅化)시킨 이름이자

태산의 별호이다.

 

태인(泰仁)이란 이름은 태산군과 이웃 인의현(仁義縣)이 태종 9년(1409) 통합되면서 생겼으며

그 관아는 현재 태인면 태창리에 있었다.

 

고현내 또는 고현동에서는 무성서원(武城書院), 용계서원(龍溪書院), 태산선비문화사료관,

필양사(泌陽祠), 성황산의 송정(松亭) · 시산사(詩山祠) · 후송정(後松亭),

정극인(丁克仁)묘소 및 집터로 추정되는 곳, 고현동 향약(보물 1181호)을 보관하는 동각(洞閣),

도봉사(道峯祠), 유상대(流觴臺) 등을 조사하였다.

 

 

 무성서원(사적 166호) 강당(가운데)/ 사당(태산사)

 

 

강당에 걸린 무성서원 편액

 

 

이 가운데 무성서원은 고종 5년(1868) 전국의 서원을 정리할 때 남긴 47곳 가운데 하나.

그 가운데에서도 전북 유일의 서원이다.

이곳의 사당 태산사(泰山祠)의 주벽은 최치원(崔致遠)이며 종향은 신잠(申潛), 정극인 등 7현인데,

최치원은 태산군 군수 때, 신잠은 태인현 현감 때 선정과 함께 유학을 진작시킨 공로로 제향되고 있다.

 

정극인은 고현동에 살며 한글가사의 효시라고 하는 '상춘곡(賞春曲)'을 지었는데

이 문학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 지역에 전승되고 있다.

원촌마을(무성리) 입구에는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의 '불우헌 시가비'가 있으며,

 

 

'태산선비문화사료관'은 최치원 이래 형성된 이 지역의 문학과 유교문화,

조선시대 대표적인 민간도서 출판물인 소위 '태인 방각본(坊刻本)', 항일의병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 정극인은 성종 6년(1475)에 '동중향음주(洞中鄕飮酒)'라는 친목계를 만들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악으로서 최근까지도 계승되고 있는 '고현동 향약'의 발판이 되었다.

도봉사에는 김회련(金懷鍊)에게 내린 조선개국 원종공신녹권(보물 437호) 등의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유상대는 최치원이 고을의 선비들과 함께 유상곡수의 아회(雅會)를 즐길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 유허(遺墟)를 노래한 시액(詩額)들이 걸린 감운정(感雲亭)과 몇 개 돌 등만이

자취를 전하고 있었다.

 

태인면 태창리에서는 태인현 관아의 동헌인 청녕헌(淸寧軒), 향교,

성황사(城隍祠)의 성황신앙(申潛 부부상이라고 하며 현재는 태인면사무소에 전시되어 있음),

호남제일루란 현액이 걸린 피향정(披香亭, 보물 289호),

시사(詩社) 장소인 읍원정(읍遠亭), 신잠 등의 선정비, 이로비(移老碑) 등을 조사하였다.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서는 전라도 유학의 중시조라 일컬어지는 이항(李恒)선생의 묘소와

그를 제향하는 남고서원(南皐書院)을 조사하였는데

이항선생의 묘비 글씨를 쓴 이는 중종의 사위이자 필원(筆苑)에 든 송인(宋寅)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 조원교

- 박물관신문, 449호, 2009년 1월1일

 

 

 

 

 

 

 

 

 무성서원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1483년(조선 성종 14) 중건

 

무성서원은 신라말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과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泰仁縣監)이었던 신잠(申潛)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泰山書院)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사액(賜額)됨으로써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하게 되었다.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신라 정강왕 1년에 태산군수(泰山郡守: 지금의 泰仁)로 와서

있는 8년 동안 치적(治積)이 뛰어나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군수로 떠나게 되니

그를 흠모하는 나머지 선생의 생전(生前)에 월연대(月延臺: 지금의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의

서쪽 능선)에 생사당(生祠堂: 생존하고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이 사당은 고려 말에 훼파(毁破)되었다가 조선 성종 14년(1483. 정극인 선생 사후 2년)에

유림(儒林)들의 발의로 월연대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지금의 자리에는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이 창설한 향학당(鄕學堂)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중종 39년(1544)에 태인 현감(泰仁 縣監)이던 영천 신잠(靈川  申潛)이 부임하여

7년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동 서 남 북 학당(東 西 南 北 學堂)을 세우는 등 업적을 쌓고

명종 4년(1549)에 강원도 간성(杆城)군수로 이임하니 역시 주민들이 그를 사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22년(1696)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이 두 사당(祠堂)을 병합하여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했으며,
사우(祠宇)에 배향(配享)한 칠현(七賢)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주벽(主壁)으로 

영천 신잠(靈川 申潛, 1491-1554),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 1401-1481),

눌암 송세림(訥菴 宋世琳, 1479- ?), 묵재 정언충(默齋 鄭彦忠, 1706-1771),

성재 김약묵(誠齋 金若默, 1500-1558), 명천 김관(鳴川 金灌, 1575-1635)이다. 

그 뒤 정조 8년(1784)에 쌍계사(雙溪寺)로부터 최치원의 영정(影幀)을 모셨다.

 

무성서원은 고종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 때 화를 모면했을 뿐 아니라

전라도에서 제외된 3개 서원[필암(筆巖), 포충(褒忠), 무성(武城)서원] 중 하나이고

전라북도 내에서는 유일의 서원으로서 그 규모가 잘 남아있다.

 

현존 건물로는

사우(祠宇), 현가루(絃歌樓), 명륜당(明倫堂), 동재와 서재(東西齋)로 장수재(莊修齋), 흥학재(興學齋), 고사(庫舍),서호순비각(徐灝淳碑閣), 등이며

1992년에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를 김성년(金成淵) 정읍군수가 세웠다.

 

 

사우(祠宇)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며

성종 15년(1484)에 세워진 것이나 헌종 10년(1844)에 중수(重修)되었고,

강당은 순조 25년(1825)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순조 28년(1828)에 중건하였다.
이 서원에는 성종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 원규(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연구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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