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풍화, 은비령에서 ‘꽃’이 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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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강운구는 1972년에서 79년까지 마을 삼부작을 찍었다. 치악산 아래 원주 황골과 전북 장수의 수분리, 그리고 내설악 자락의 인제 용대리를 몇 년에 걸쳐 찍었다. 그 무렵 ‘새마을운동’의 근대화 촉진으로 마을들은 ‘소멸해가는 기억과 공간’이 됐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들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더 많이 겪었다. 그것을 후배 사진작가 권태균이 다시 찾아가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라는 책으로 찍어냈다.
모든 것이 다만 사라져간 것만은 아니었다. 헐벗은 민둥산이 울창한 숲으로 변하기도 했고 광막한 들판에는 송신탑을 중심으로 해 전신주가 열병을 하고 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됐고 그 세월의 풍화에 어른은 더 늙어 노인이 됐다. 그 마을의 하나인 인제 용대리에서는 너와집들이 다 허물어지거나 사라졌고 시멘트로 된 신작로가 산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은 국내 총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황태 집산지가 됐다.
이중섭의 ‘흰 소’ 같은 눈과 바람
그렇게 사람살이의 여러 면모는 바뀌었지만, 올 겨울 내설악 용대리의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얼마 전 다녀온 용대리 곳곳에는 나무를 엮어 만든 황태 덕장이 설치돼 있었고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바위와 나무와 물과 집을 덮고 있었다. 진부령과 미시령, 그 사이의 덕장에 내걸려 한겨울을 다 지낸 용대리의 1600여 만 마리(매년 평균적으로 그렇다) 명태는 올 3월 말까지 제 몸을 눈과 바람에 맡긴 채 얼었다 녹았다 하며 노르스름한 황태로 바뀌어갈 것이다.
평창군청에 근무하는 이우식 씨는 여러 신문의 신춘문예에 시와 시조 그리고 동시로 당선된 시인이기도 한데, 그는 지난 2006년에 시조 '용대리 황태 덕장'에서 이곳의 눈과 바람과 삶을 이렇게 썼다.
저들은 지금 한껏 목청 돋우고 있다
파도가 울어대고 폭풍이 내달리는 건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다가온
서릿발 맺힌 매듭 한결 풀어젖히고
인제의 용대리는 만해 한용운의 유허(遺墟)가 담긴 백담사와 그것을 기반으로 조성된 만해마을로 인해 깊은 산중의 문학 성소이기도 하다. 만해 한용운은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다 실패하고 설악산 오세암에서 출가했다. 그 후 만주와 저 멀리 시베리아까지 돌아다니다가 다시 백담사로 돌아와 불교 유신론을 썼고, 한국 근대문학의 관절이 되는 시집 <님의 침묵>을 썼다. 백담사 아래에 ‘만해마을’이 조성된 것은 그 때문이다.
깊은 산속 문학의 성소 만해마을
이곳은 만해 한용운의 뜻을 기리고 또한 널리 펴기 위해 조성한 마을로, ‘문인의 집’ ‘만해문학박물관’ ‘만해학교’ ‘심우장’ ‘서원보전’(법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추념의 공간들이 대체로 옛 형태의 단순한 재현에 그치는 데 비해, 이 만해마을 전역은 내설악의 강건한 흐름 속에 들어앉은 단단한 현대 건축물이다. 지난 2003년에 한국건축가협회 대상을 받았다. 그에 걸맞은 문학 행사도 연중으로 열린다.
도회지의 재빠른 생활 패턴이 깊은 산중의 오랜 삶의 관습까지 바꾸는 세태가 되었지만 그래도 내설악 골짜기의 시간은 조금은 더디게 흐른다. 아열대로 변해간다는 이 한반도의 기상 변화에서 ‘따뜻한 겨울’이라는 형용모순도 어느덧 익숙해져가고 있지만, 그래도 내설악 깊은 곳의 바람은 차고 햇살은 귀하다. 그래서 도회지의 여행자는 내설악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러 끝없이 서성대기만 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용대리 일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아니지만, 42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이순원의 <은비령>은 느리게 흐르는 내설악의 시간 속으로 주인공이 사무쳐 들어가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주인공 ‘나’는 소설을 쓰는데, 아내와는 별거한 상태다. ‘나’는 무슨 일로 서해의 격포에 가려다가 목적지를 은비령으로 바꾼다. 은비령으로 향하던 ‘나’는 눈길에 사로잡히고 차까지 고장나게 되는데, 사소한 찰과상 덕에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대설이 내린 설악의 밤하늘, 그 광막한 시간의 별들을 보면서.
“별처럼 여자는 2천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 주간동아, 2009.02.24. 674호(p70~72) - 정윤수의 인문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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