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불상의 조형미

Gijuzzang Dream 2008. 12. 24. 20:39

 

 

 

 

 

 

 

 우리 불상의 조형미

 

 

 

 

우리 예술의 바탕, 불교

 

 

고대국가의 형성기에는 사회의 구심점과 질서를 위해 하나의 보편적인 사상과 신앙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우리 민족은 그것을 불교에서 구하였다. 4세기 후반, 삼국의 민족국가 형성기에 중국에서 전해진 불교는

우리에게 새로운 철학이자 죽음과 내세의 문제를 인식시키는 새로운 종교였다.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한 자각, 국가 성립의 이념 정립, 광범위한 한자의 사용, 본격적인 조형 활동

등 당시 불교가 우리문화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였다.

당시 불교는 동아시아를 휩쓴 위대한 사상이자 새로운 신앙이었던 만큼

이에 따라 이루어진 우리의 고대 문화도 불교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남아있는 우리의 고대유물 가운데 불상만큼 오랜 시대에 걸쳐 남아있는 미술장르가 드물다.

목조건축은 기껏해야 고려 말기의 것이 몇 있을 뿐이고 조선시대의 건축도 후기 것이 대부분이다.

회화도 고구려고분벽화를 제외하면 조선중기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다.

불화는 고려의 것이 있으나 역시 일반회화와는 뚜렷하게 구별되어 장식화의 성격이 강하다.

이에 비하여 조각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예가 남아 있어

전체의 변화과정과 특색을 규명하기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편이다.

 

 

불상의 생명력

 

조각은 입체의 조형미술이다. 입체적인 형태는 공간을 점유하므로 평면보다는 훨씬 생생한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 불교조각의 전개 과정은 바로 이 삼차원적인 입체에 사실성과 정신성을 불어넣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실성이란 실재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정신과 결부된 이상화된 사실성을 말한다.

얼굴 모습과 신체 굴곡, 옷주름이 실제처럼 표현되었다면 사실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정신성은 결여될 수 있다.

형태가 사실적이라 해도 생명력을 살리지 못하면 세속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형태는 비사실적이지만 거기에 생명력이 표현되어 있으면 생생한 느낌을 준다.

살아있는 듯 생생한 미술품은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성과 정신성이 이상적으로 조화된 불상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아있는 듯한 생명력과 절대적인 존재양식을 느끼게 된다.

 

 

한국적 조형미

 

한 나라 미술의 고유의 특징을 명확하게 규정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한국 불상의 특색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조형 언어로 이루어진 조각 작품의 특징을 문자나 언어로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또 현재 남아있는 불상들도 각각의 시대를 대변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우리의 불상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살펴보면

인도와 중국, 나아가 일본의 불상과 뚜렷이 구별되는 한국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술 사조는 국가적인 후원과 선진으로부터의 신선한 자극이 있을 때 항상 창의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미술 형식과 양식은 처음 영향을 준 선진의 영향을 받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곧 민족성과 풍토성에 의하여 변화되어 독특한 양식을 확립하게 된다.

특정한 불상 양식과 형식을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어서 이를 취사선택하였다.

그 단적인 예가 우리나라 불교조각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연가(延嘉) 7년(539)명(銘) 금동여래입상이다.

 

 

 

이 불상에 보이는 길쭉한 얼굴과 신체, 몸 좌우로 갈퀴처럼 예리하게 갈래진 옷자락의 표현방법은

중국의 북위 양식 불상의 영향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불상에는 외부로부터의 자극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북위시대의 중국 금동불은 지나치리만큼 세부표현에 치밀하고 장식적인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옷자락 끝의 주름이 판에 박은 듯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이 연가명 금동불은 칼로 면을 잘라낸 듯 전체적으로 단순화되어 있고,

옷자락의 끝마무리나 세부 표현도 소홀하다.

그러면서도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듯한 대좌의 연꽃잎과 역동적인 광배의 불꽃무늬는

오히려 상(像) 전체에 강직한 효과를 가져다준다. 마치 고구려인의 상승하는 기세를 느끼는 것 같다.

연가명 금동불은 한국적인 미감이 발휘되기 시작하는 최초의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사람의 얼굴

 

예술은 그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우리의 삼국시대 조상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부처는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초월적인 신으로서의 부처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우리네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불상의 얼굴은 신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 얼굴이다.

 

우리의 삼국시대 불상들은 서산마애삼존불처럼 드물게 함박웃음을 머금은 예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적이고 친근한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미소는 고구려불상이나 신라불상에도 있지만 백제불상의 얼굴이 더 인간적이다.

마치 백제인의 온화한 심성을 엿보는 듯하다.

이 미소를 흔히 고졸(古拙)한 미소(Archaic Smile)라고 한다.

고졸한 미소란 얼굴 전체가 아니라 양 입가만을 살짝 눌러서 표현한 고대 조각의 미소를 말한다.

입으로만 짓는 미소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의 조각이나 고대의 인도불상과 중국불상 모두 이러한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불상의 얼굴 표정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어떤 정형이 없고 얼굴이 제각기 다르다.

한 마디로 너무나 인간적이고 친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순진무구한 미소와 뜬 듯 감은 듯 가녀린 눈매 때문이다.

이러한 얼굴 표정은 동양의 불상을 통틀어서도 매우 이례적이다.

 

인도의 간다라 불상은 눈을 반쯤 감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침울한 표정의 얼굴이 대부분이다.

반면 마투라의 불상들은 깨달은 다음에 맛보는 희열의 순간을 표현한 듯

매우 활달하고 생동감에 가득 찬 모습이지만 어딘지 비현실적이어서 낯선 느낌을 준다.

이 두 지역의 형식과 양식을 융합하여 가장 이상적인 신성(神性)을 구현한 4-5세기의 굽타시대 불상들은

두 눈을 반쯤 감아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중국 불상 가운데에도 천진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불상이 있기는 하지만 눈매가 날카로워

어딘지 억제된 미소처럼 보이며, 반대로 같은 시대의 일본 불상은 항상 딱딱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이처럼 우리의 불상들은 사람 냄새나는 우리네 모습 그 자체이다.

심지어 이 가운데에는 아예 어린아이 모습으로 표현한 것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어린아이 모습의 선정인(禪定印) 여래좌상이다.

깨달은 후 희열에 든 선정인의 모습을 왜 어린아이처럼 표현하려 했을까?

아무 욕심없고 때묻지 않고 순수한 상태 그대로인 동심을 자비로운 불심에 빗대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불상은 사람의 얼굴이면서 설치되는 공간도 인간적이다.

인도나 중국, 일본의 불상들은 유럽의 신상(神像)들처럼 신들만이 존재하는 절대적인 공간에 세워지지만

우리의 불상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에 세워지기 때문에 더욱 친숙하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경주 남산의 수많은 마애불들은 대부분이 오솔길 가까운 바윗면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길 잃은 등산객들을 위한 길라잡이인양 손만 내밀면 다가올 듯 친숙하다.

우리의 불상은 유럽의 신상들처럼 인간이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절대자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살아 숨쉬는 우리의 정서 그 자체였던 것이다.  

- 미술관 불교조각실 곽동석

-2008년 12월3일

 

 

 

 

 

 

 

 서산마애불에 어린 추억

 

 

지지난해던가 유난히도 무덥던 여름, 나는 당분간 미술공예연구실의 책임을 벗고

부여문화재 연구소가 부여군청의 의뢰를 받아 발굴하고 있는 백제시대 절터 군수리 현장에

지원 근무를 나간 적이 있다. 이 때는 연구소가 우리나라 대표적 철불이 출토된 곳으로 잘 알려진

보원사 터에 대한 시굴조사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갈 기회가 있었고,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속칭 '강뎅이 골'로 유명한 서산마애불을 오랜만에 마주 할 수 있었다.

 


이 삼존마애불은 지난 1950년대 우리들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시절만 하더라도

아무런 시설이 없이 노출되어 있던 것이 60년대 중반부터는 보호각으로 막혀 있었고,

이제는 다시 보존상 삼면의 벽체를 없애서 남은 기둥사이로 자태를 드러낸

삼존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감회를 갖게 하였다.
흔히 “위대한 발견”으로 회자되는 이 서산마애삼존불 하면 무엇보다도
발견 당사자이자

부여박물관장을 역임하였던 연재(然齋) 홍사준(洪思俊)선생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만

나에게는 당시 홍사준  선생님과 함께 현장조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초우(蕉雨) 황수영(黃壽永) 선생님이 오히려 기억에 새롭게 다가온다.

그 유별난 기억이 지금도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이유는

대학교 학창시절 불교미술에 초출내기였던 나로서는 황수영 선생님의 백제불상과 관련한 첫 강의에서

받은 깊은 인상 때문이었다. 아울러 단색 넥타이와 어우러진 감청색 정장에 손수 작성하신 강의자료를

들고 열강하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나는 강의를 들으면서 왜 선생님이 그 당시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백제불에

그토록 집착을 하고 있는지 강한 의문이 생겼다. 사실 백제의 본 고장인 공주에서 태어나 자라난 내가

알고 있는 백제불에 대한 상식을 무너뜨리는 강의 내용도 신선했지만

백제불이 갖고 있는 고유의 소박한 자연미, 신라불과 대비되는 반 귀족주의적 자태,

비인위적인 조형미를 가진 백제불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을 토해내는 그 강의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더욱 새로운 사실은 그런 분석과 해석을 가능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선생의 은사인

한국 미술 사학계의 거목인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

우현 선생님은 황수영 선생님으로 하여금 백제불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여 주었고,

연구의 계기를 제공한 참다운 스승이었던 것이다.

황수영 교수님의 그 강의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후생가외(後生可畏)’이었다.

서산마애불 하면 특이한 구도의 삼존형식으로,

그 본존의 상호에 어린 순진무구한 미소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서산마애삼존불을 평생 유지 관리하여온 관리자가 발견한 시시각각 달라지는 미소에 대하여

관람자들이 경탄을 김치 못한다는 사실은

아직도 삼존불의 ‘살아있는 미소’ 에 대한 관찰과 연구가 무궁무진함을 알 수 있다.

 

 

 

나는 불상에 대해 미술사적인 안목이 깊지 않지만 이 삼존불 가운데 협시보살은 차지하고서라도

가운데 주존불의 상호를 보고 있노라면 ‘이와 같이 특이한 모습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곤 하였다.
오죽하면 이미 작고하신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선생님은

“이 같은 얼굴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실재하는 사람을 모델로 쓴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역설했을까.
어떻게 보면 마치 ‘우리네 시골 할아버지처럼 오랜만에 만난 친손주에게 친숙하게 금방이라도

두 손을 내밀며 반겨줄 것 같은 표정’ 이다....

 

작년인가 모교인 동국대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세계의 빛 우주의 빛” 전시회에 다녀왔다.

직장인인 나로서는 대학시절의 전공인 조각분야의 꿈을 접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전시회에 출품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는 극성스러운 전업작가 후배의 등살에 떠밀려

겨우 흙으로 빚어 구운 그다지 볼품없는 작은 소조상(테라코타) 한 점을 낸 터였다.

나중에 안내책자로 전시형편 정도나 알아 볼 요량이던 차에 명색이 미술과 초창기 졸업선배로서

반드시 전시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불화같은 후배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개막식에 나가게 되었다.

전시회 개막 직전에 겨우 도착한 나는 전시장 입구에서 나누어 준 카탈로그에서

황수영 선생님을 오랜만에 뵐 수 있었다.
개교 1세기만의 기념전이었기 때문에 각별히 원로 교수님들의 출품작도 함께 초대한 듯 했다.
그 분의 출품작은 ‘다소곳이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는 불상’ 주위로

발문(跋文)이 한자로 빼곡히 씌어 있는 김원룡 선생님의 실제 작품이었다.


 

 

출품작 바로 위와 옆은 데생식의 연필로 그린 초상과 정장차림의 조그만 사진으로 꾸며져 있었다.

바로 대학시절에 열강을 하시던 열의에 찬 50대의 그 모습을 넘어 ‘이젠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만고풍상을 다 겪은 원숙한 미술학자의 안정된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막 한 장을 넘기고 있는 차에 곧 개막식이 있겠다는 안내방송에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내심 뵐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끝내 오시지 않아 아쉬움을 곱씹어야 했다.

 

지난 어느 날 대전 숙소 방 한 켠에 어지럽게 흩어진 자료들을 정리하던 중 

‘동국대 개교 100주년 기념 전시회 도록’ 에 수록된 황수영 선생님의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소발(素髮 : 민머리) 모양만 제외하면 음영이 짙게 깔린 눈 아래 굵은 주름이며

뭉툭하고 널찍한 콧망울, 적당히 두툼한 입술 등이 서산마애삼존 가운데 본존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나만이 느끼는 그 분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 묘사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황수영 선생님의 백제불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모아져

그 사진이 삼존불의 모습으로 재현된 것은 아닐는지……

- 김선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장

- 문화재청, 문화유산e야기, 2007-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