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쇄(曝曬), 책에 바람을 쏘이다
|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보장지처(保障之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강화도 바닷가에 진보(鎭堡)와 돈대 등의 국방 시설을 마련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건물이 세워졌고, 국왕이 와서 머물 수 있는 행궁도 지어졌다. 강화도 경영은 군사 시설과 궁궐 뿐 아니라 왕실의 중요한 자료를 보관하는 문제도 함께 고려되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강화도에 왕실과 관련된 서적들을 한 벌씩 옮겨두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 그리고 각종 의궤와 열성어제 · 어필 등이 그것이다. 군사시설만이 아니라 왕실의 업적과 계통을 밝히는 기록물을 보관하는 시설도 함께 건립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 사고본 실록의 원본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실록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으로, 완질의 분량은 1,707권 1188책(정족산사고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의궤와 함께 조선시대 기록문화유산의 진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춘추관을 비롯한 전국 4대 사고에 보관되던 실록들은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바람 쏘이는 등 매우 엄격한 규정대로 관리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의궤는 왕실의 중요한 의식 행사에 대한 규칙과 진행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왕실의 혼례,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장례, 궁궐의 건축과 같이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이중 국왕이 보는 어람용 의궤는 단 1부이다. 규장각에 납품된 어람용 의궤는 왕이 열람한 뒤에는 강화도의 외규장각으로 보내 영구 보관 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던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이었다.
암록색 비단 표지에 연한 녹동 고리 장정으로 되어 있으며, 종이도 초주지를 사용하여 부본의 저주지와는 질이 달랐다. 그림도 어람용은 실제로 그린 것이지만 부본은 사람이나 말의 형상을 나무에 새겨 도장처럼 찍고 색을 칠하는 방식이었다.
1813년(순조 13) <외규장각도서포쇄형지안>에 보면 당시 외규장각의 도서는 1,042종 6,130책으로 모두 온전한 상태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 의해 거의 대부분이 불에 탔고, 6,000여 책 중에 겨우 약 300책만 프랑스로 가져간 사실을 이 포쇄형지안을 통해 알 수 있다.
반드시 정기적으로 포쇄(曝曬)를 실시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포쇄(曝曬)는 책에 바람에 쏘여서 습기를 제거함으로써 부식과 충해를 방지하기 위한 작업이다.
봄 · 가을에 청명한 날을 택하여 춘추관에서 파견된 사관이 실시하였다. 사관이 사고에 도착하면 관복의 하나인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네 번 절한 다음에 사고의 문을 열었고, 사고의 내부를 살펴본 뒤 책이 들어있는 궤짝을 열었다. 책들을 한권 한권 점검하고 바람을 쏘인 후에 다시 궤 속에 넣고 봉인을 하였다. 보존 상태의 점검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이것이 ≪포쇄형지안≫이다. 이 형지안에는 사고를 연 시기, 사고별 · 궤짝별로 보관된 서책의 종류와 수량, 그곳에 파견된 사관과 실무자들의 명단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당시의 철저한 도서 관리 태도와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문화재칼럼, 2008-12-08 | ||||||||||
|
'느끼며(시,서,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희지 집자비석(集字碑) (0) | 2008.12.20 |
---|---|
조선왕조 의궤 - 500년 왕조의 넋을 담다 (0) | 2008.12.08 |
조선 화가 조희룡, 매화에 미치고 그림에 미치다 (0) | 2008.12.08 |
파격적이어서 더 재미있는 불화(佛畵) (0) | 2008.11.30 |
불교사찰의 지옥도 (0) | 2008.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