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기와 - 부드럽고 단아
백제의 기와는 암, 수키와가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는 기와는 연화문이 배치된 막새와 서까래기와이다.
백제의 기와는 한성시기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사비시기에 이르러
활발한 기와제작(조와, 造瓦)활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종류의 기와가 생산되었는데
그 종류가 17종에 이르고 있다.
한성시기(漢城時代 : B.C.18-A.D.475년)
암, 수키와와 초화(草花), 수목(樹木), 원문(圓文), 능형(菱形), 연화(蓮花) 등의 다양한 문양이 배치된
수막새가 제작되었다. 수막새는 수목이나 원문의 의장이 독특하다.
수목은 네그루를 막새면에 십자모양으로 배치하였는데 나뭇가지에 열매가 매어 달린 것도 있다.
원문은 선각으로 막새면을 4구획하여 작은 원을 배치하고 있는 기하학적인 구도를 보이고 있다.
한성도읍기의 원문(圓文)수막새는 석촌동 4호분과 그 옆에 위치하고 있는 움집자리,
그리고 몽촌토성에서 두 형식이 발견되었다.
석촌동 움집자리에서 출토된 원문수막새는 중심부에 네모난 돌기가 있고
끝이 십자형으로 된 4개의 구획선으로 막새면을 나누고
그 사이에 방형의 소돌기를 지닌 원문을 각각 배치하고 있다.
막새의 주연부는 소문대이며 그 뒷면에는 조정흔(물레로 조정)과 정면흔(손으로 다듬은)이 남아 있다.
몽촌토성(夢村土城)에서 출토된 원문수막새는 석촌동의 움집자리(竪穴住居址)에서도 수집되었는데
작은 파손품이지만 복원된 무늬가 매우 특이하다.
막새면을 크게 4구획하여 그 사이에 십자형( ‘十’자)으로 구획된 원문을 각각 배치하고 있는데
각 원문은 다시 중심부에서 서로 선각에 의하여 연결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원문 수막새는 세부에 있어서는 서로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인 모티브는 서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막새면을 십자형으로 4구획시킨 것이거나
그 제작기법이 낙랑(樂浪) 시기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능형문(菱形紋)수막새는 몽촌토성에서 2점이 출토되었는데 절반 이상이 깨어진 작은 파손품이지만
그 복원지름이 18㎝ 내외로 비교적 큰 막새에 해당된다.
능형문은 볼륨이 없이 선각으로 이루어진 8엽의 화판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이채로운데
연판이 생략되고 있다.
풍납토성 출토 수막새는 막새의 전면부에 다양한 문양을 시문하고 있다.
내부를 날씬한 유엽형의 양각선으로 6분한 상태에서
양 끝에 동그란 돌기 같은 것이 달린 양각선을 시문한
이제까지 알려진 바가 없는 독특한 문양, 그리고 구획 원문 막새편이 출토되었고,
이 밖에 중앙의 작은 원을 중심으로 4분하여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듯한 양각 선문이 회화적으로 묘사한 것도 1점 출토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문양에도 불구하고 삼국시대 이래 가장 전형적인 막새 문양이면서
인근의 몽촌토성에서 몇 점 출토된 바 있는 연화문 막새가 1점도 보이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특히 연화문의 기본 배경을 불교 도입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현재의 통설을 따를 때
풍납토성 출토 막새류가 적어도 불교 전래 시기인 4세기 말 이전부터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수막새 각종(한성시기)
웅진시기(熊津時代 : 475-538년)
독특한 양식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는데,
중국 남조인 양(梁)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막새형이 성립하게 된다.
수막새에는 연화문이 배치되고 있는데,
연화문은 소문(素文 : 문양이나 장식이 없는) 단판(單瓣 : 꽃잎이 한 이중으로 겹치지 않고 한 판으로 된)
양식으로 연판(蓮瓣 : 연꽃잎) 끝의 반전(反轉)수법에 따라
판단융기형(瓣端隆起型 : 꽃잎끝이 솟아오른 형태)과
판단(瓣端 : 꽃잎끝)장식형의 하나인 원형(圓形) 돌기식(突起式 : 돋을무늬)으로 구분되고 있다.
원형돌기식은 연판 끝에 조그만 주문(珠文, 구슬무늬)이나 둥그런 작은 돌기가 달려있는 반전수법을
형식화한 것으로 6세기 초반에 축조된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의 무덤 전돌인 연화문과 관련되고 있다.
웅진도읍기의 수막새는 한성도읍기에 제작된 수막새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제작되어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새로운 와전형(瓦塼形)이
점차 주류를 차지하면서 한성도읍기의 기와전통을 대체하고 있다.
따라서 한성도읍기(漢城都邑期)에 제작된 원문이나 능형문이 배치된 수막새는 이미 사라지고
연꽃무늬가 배치된 수막새도 서로 관련되는 와예(瓦例)가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아
제작상의 단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성도읍기의 기와제작술은 어느 정도 계승되어
웅진도읍기의 기와제작의 기반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웅진도읍기의 백제기와가 수집되고 있는 곳은
공주의 공산성과 대통사지, 그리고 봉황동과 중동, 신원사지와 상용리 산성 등지인데,
공산성 이외는 발굴조사를 거치지 않아 약간의 수집품에 불과하여 확실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부여의 정동리 요지와 구아리 유적, 그리고 부소산성과 용정리 유적에서
웅진도읍기에 제작된 기와의 예로 추정되는 기와와 벽돌이 약간씩 출토되어 주목되고 있다.
따라서 부여에서 수집되고 있는 웅진도읍기의 기와와 벽돌은
백제가 사비(泗批)로 천도하기 이전에 새로운 도성(都城)의 조영(造營)과 관련되고 있는 건축부재로
생각되고 있어서 중요시되고 있다.
웅진도읍기에 제작된 수막새는 모두 연꽃무늬가 배치되고 있는데
양식상 소문단판(素文單瓣)에 국한되고 있으나
판단(瓣端)의 반전수법(反轉手法)에서 다양한 형식적인 변화를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백제의 연꽃무늬수막새에 나타나고 있는 판단(瓣端)의 반전수법은
판단융기형과 판단장식형의 일부가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약간의 변화를 보이면서
사비도읍기까지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웅진시기의 63년은 북방적인 요소를 상당히 없애고, 농경사회의 유연한 문화를 정착시키는 한편
중국 남조와의 교류에 의하여 우아한 남조문화를 수용하여
백제 특유의 부드럽고 세련된 문화를 창조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사비기 백제문화의 특징은
웅진시기에 이미 이룩한 문화기반 위에서 발흥한 것이라는 점에
또 하나의 웅진기 문화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사비시대(泗沘時代 : 538-660년)
연화문수막새, 부여 관북리(사비시기)
불교문화의 본격적인 융성으로 도성 내외에 궁궐과 많은 사원 및 산성이 조영되어
기와 제작(造瓦)활동이 본격화하게 된다.
수막새는 6세기 중반까지 판단장식형(瓣端裝飾型 : 연꽃잎의 장식)의 원형돌기식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그 이후에 삼각돌기식과 곡절소판형(曲折小瓣型)이 새롭게 출현하여 성행하게 된다.
삼각돌기식은 원형돌기식과 함께 부드럽고 단아한 백제의 막새형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초까지 제작되고 있다.
백제의 기와는 600년을 전후하여 수막새는 대부분 연꽃무늬가 장식되고 있는데
파문(巴文)이나, 무문(無文)이 채용되며, 연화문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연꽃무늬수막새는 6세기 중반까지는
백제중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판단장식형의 원형돌기식이 기본이 되고 있으나
점차 삼각돌기식으로 변화된다. 삼각돌기식은 꽃잎끝(瓣端)의 중심부가 삼각형으로 변형되어 있거나
삼각형상의 돌기가 장식되고 있는 반전수법을 형식화한 것으로
6세기 중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며 7세기 전반까지 가장 성행한 막새형이다.
연화문은 연판 끝(瓣端)이 구부러져 각을 이루고 꺾이면서
소엽상(小葉狀)으로 반전되는 새로운 형식의 곡절소판형(曲折小瓣型)이 출현하게 되며,
연판 둘레에 화륜권(花輪圈 : 중앙에 새긴 둥근 중심선)이 점차 형성하게 된다.
수막새에 새겨진 연꽃무늬는 꽃잎의 수가 8엽으로 자엽이 없는 소문단판양식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7세기 초반에 이르면 부소산폐사, 왕흥사, 미륵사 등의 여러 사원이 건립되면서
파문(巴文)이나 무문(無文)같은 새로운 시문단위가 나타나고,
연판 안에 꽃술이나 인동형의 자엽(忍冬子葉)이 배치되는 유문단판양식(有文單板型)으로
새로운 장식성을 띠게 된다.
익산 왕궁리출토 와당
익산의 미륵사지에서 출토한 녹유서까래기와는
삼국시대 기와 가운데 유일하게 녹유를 시유하여 제작한 것으로
7엽의 연꽃잎 속에 인동문자엽(忍冬文子葉)이 장식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출토, 녹유와당
이와 같은 장식성은 부여 외리유적에서 출토한 문양전(塼)과 같이
백제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또 다른 전환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백제후기에 제작한 전돌은
약간의 부전(敷塼)과 외리유적에서 출토한 문양전, 그리고 상자모양의 특수전이 있다.
부전은 무문전과 문양전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문양전은 연꽃무늬가 압인된 예가 있다.
또한 특수전은 요즈음의 블록(block)과 같은 이형의 전돌로 부여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바 있다.
외리유적에서 출토된 문양전은 산경문과 귀형문, 봉황문 등 다양한 전돌이 출토되었는데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경문전은 산과 나무, 그리고 물과 바위가 구름과 함께 잘 묘사되고 있는 한 폭의 산수화와 같다.
그런데 후경이 전경위에 얹혀있는 듯한 백제특유의 원근법이 나타나고 있고,
그 화법이 도식화되고 있지만 백제회화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귀형문전은 무서운 형상을 한 나신상으로 부조되고 있는데
악귀의 침입을 방지하려는 벽사(辟邪)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리고 봉황과 반룡이 새겨진 전돌은 각각 비상하거나 승천하고 있는 모습으로 새겨지고 있는데,
와운문(渦雲文)의 구름과 같이 우측으로 회전하는 듯한 부드러운 감각을 느끼게 한다.
백제의 기와는 그 색조가 연회색을 띠고 있고, 수막새에 새겨진 연꽃잎의 끝이 곡면을 이루면서
약간씩 반전되고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단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이 주요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기와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의 와전(瓦塼) 형태는 웅진시기에 정형화를 이룩하여 백제적인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데,
당시의 신라나 일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 백제계통이라는 또 다른 유형으로 계승되고 있다.
백제기와는 부드럽고 단아하다.
규모가 크지도 않고 연판(蓮瓣)이 낮은 곡면을 이루면서
그 안에 장식이 거의 없는 소박함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백제기와의 특성은
백제인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심성이 기와를 통하여 잘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성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문화재위원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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