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시끄러워도 연곡사에는 꽃사태
강 길을 따라 구례 쪽으로 달리면서 섬진강의 넓은 모래톱과 대나무 숲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본다.
강이 산을 만나다 내달리고 또 산이 강과 다시 만나 어우러지는 섬진강과 지리산의 조화는
꽃이 피고 또 피는 봄에 더욱 빛난다.
비가 내리는 봄길에 물먹은 벚나무들이 붉은 빛을 띠고 꽃봉오리를 키우고 있다.
아마도 3~4일 내에 꽃이 피기 시작할 것이고 3월 말에서 4월 초순에는 절정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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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곡사 들어가는 피아골 초입의 풍경 ⓒ 들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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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중간쯤에서 화개장터를 지나고 다시 서쪽으로 가다보면
구례군 토지면에 소재 한 연곡사로 들어가는 피아골 초입에 이르게 된다.
피아골의 봄은 강가에 비해 조금 늦게 온다.
드문드문 보이는 차밭을 제외하면 척박한 계단식 논은 아직 비에 젖은 흙의 무채색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동네마다 핀 매화나무가가 곱고 흐르는 물소리가 맑다.
지금도 눈앞에는 좁은 산비탈을 억척스럽게 일궈 만든 수십 층의 계단 논이 보이고 이 깊은 지리산 속에까지 들어와 살아야 했던 고달픈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건강함을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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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곡사 일주문 지나 대적광전 가는 길 ⓒ 들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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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최고봉인 왕시루봉을 볼 수가 있는 연곡사, 빨치산의 중심무대 중 하나인 이곳에도 봄은 와서 인간에 대한 무서움에 길들여지지 않은 개구리들이 길가 고인 물에 알을 낳아 두었다. 생명이란 어쩌면 참 모진 것이어서 잎도 피기 전 어느새 겨울잠을 깬 동물들이 먼저 봄맞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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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적광전 앞 위풍당당 산수유 ⓒ 들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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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의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아마도 골짜기에 단풍이 물드는 늦은 가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풍경을 본 적이 없다. 매 해 이른 봄에 다녀가서 아직은 겨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황량함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오늘 찾은 연곡사에는 봄이 무르익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절 입구부터 온 마당 가득히 매화와 수령이 오래된 산수유가 만발이다. 절에 온 것이 아니라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뜻하지 않게 계절이 준 선물로 절로 발걸음 가벼워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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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자나불이 내 뿜는 빛을 받은 듯 만개한 산수유 ⓒ 들찔레 |
사찰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고 한 것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지세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고 그 연못자리를 메우고 법당을 지으면서 붙여졌다고 한다.
연곡사는 지리산 주변 사찰 중 가장 먼저 자리 잡은 절로서 6.25의 빨치산과 토벌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부도의 대표 격으로 '부도의 꽃'이라 불리는 동부도(국보 53호, 신라말기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와, 북부도(국보 54호, 고려 초기), 서부도(보물154호, 조선시대)가 있다. 그리고 몇 몇 예쁘고 아담한 부도를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으며 그 외 삼층석탑(보물 제151호), 현각선사탑비(보물 제152호), 동부도비(보물 제153호)를 볼 수가 있다.
이 절의 중심 당우인 대적광전 앞마당에는 오래된 산수유나무 몇 그루가 멋스럽게 피어있다. 밑둥치부터 갈라져 쭉 뻗어 오른 가지는 10여 미터가 넘고 좌우로 도열한 같은 크기의 나무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귀한 멋을 보여준다. 마치 대적광전에 앉은 비로자나불이 그 광명을 세상에 전하려 발한 빛을 일시 산수유가 받아 빛나는 듯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절 뒤 산길에 있는 나의 최종목적지인 동부도로 오른다.
'부도의 꽃'이라 불리는 동부도(국보 53호)는 그 비례미도 좋지만 마치 밀가루로 빚은 것처럼 정교한 조각이 일품으로 같은 전라도 땅에 있는 쌍봉사 철감선사부도탑과 더불어 아름답기로 따지면 우리나라 부도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것이다.
동부도의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위받침돌을 올렸고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또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위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이런 가릉빈가는 불교적 장식으로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합천 영암사지 금당계단의 소맷돌이나 동리산 태안사의 광자대사비의 이수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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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도에 새져진 상륜부 ◇ 동부도의 사천왕상 ⓒ들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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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도 - 가릉빈가 ◇ 동부도 - 천인주악상 ⓒ 들찔레
몸돌은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 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또한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동부도와 유사한 동부도비의 한 부분을 이루는 귀부는 등이 날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이채로운데 나말부터 고려시대에 조성된 귀부의 대부분은 험상궂고 무섭게 생긴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래쪽에 있는 현각선사탑비 역시 고려시대의 것으로 동부도비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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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도비의 귀부와 이수 ⓒ 들찔레 |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북부도는 조성 양식이 동부도와 거의 같으며 이는 조선시대에 만든 서부도도 마찬가지다. 다만 부도에 새겨진 조각의 기법이 갈수록 많이 떨어져 서부도가 북부도에 못 미치고 북부도가 동부도와 견줄 수 없다. 서부도 뒤에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만들어진 종형부도와 간소한 모양의 팔각원당형 부도가 모두 세 기 있는데 그 중 작은 머릿돌을 이마에 얹은 팔각원당형부도 하나는 균형미와 더불어 앙증맞은 귀여움이 있어 개인적으로는 가장 예쁜 부도라 생각한다.
◇ 북부도 ◇ 서부도 ⓒ 들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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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간소하지만 예쁜 부도들 ⓒ 들찔레
절 뒤 부도들을 보고 돌아 내려오는 산길은 비에 젖어 촉촉이 젖어있고 푸른 조릿대가 빗물을 몸으로 받으며 토독거리는 소리를 낸다. 봄에 비에 젖은 낙엽 위를 걸으며 땅으로부터 전해오는 부드러운 느낌이 참 좋다. 더구나 멀리 숲 바깥에서 전해오는 바람 한 줄기가 봄냄새를 그대로 전해준다. 지리산 피아골에도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절 마당에 가까운 서부도 가까이에 오래된 동백나무 서너 그루 붉은 꽃을 매달고 싱싱하다. 떨어진 동백꽃이 비에 젖어 더 붉고 잠시 들른 과객은 봄기운에 흥건히 마음이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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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곡사 삼층석탑 ⓒ 들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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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 삼층석탑은 절 중심의 오른편 아래쪽, 서부도의 왼쪽 아래에 있다. 법당과 떨어져 늘 홀로 덩그러니 서있는 것이 애처로웠는데 오늘은 탑 주위에 활짝 핀 산수유나 매화나무에 둘러싸여 탑 얼굴이 여린 신부의 얼굴처럼 곱고 곱다. 연곡사 삼층석탑은 특이하게 기단이 삼층으로 만들어 졌는데 이층 기단까지는 신라탑의 형식을, 넓이에 비해 과장되게 높은 셋째 기단은 전형적인 3층의 백제 탑 형식을 하고 있는 혼합양식을 보인다. 몸돌도 넓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이가 높아 산지 절에 놓이는 탑의 형식 혹은 백제탑의 양식을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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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곡사 종루 앞 풍경 ⓒ들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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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을 지나 대적광전 아랫마당 종루 앞이 봄의 풍경 중 가장 압권이다. 절 입구부터 이곳까지 돌계단 양 옆으로 피어난 매화의 군무, 종루를 지키는 늠름한 권속 같은 산수유, 괘불대 옆에 가지를 활짝 편 또 다른 매화, 그리고 앞, 옆, 뒤에 둘러 산 지리산의 조망은 다시 한번 봄기운을 내 온 몸에 적시는 기회를 준다.
다시 길을 잡아 섬진강 물줄기로 내려오는 시간, 왕시루봉 있는 계곡을 자꾸 뒤돌아보는데 아래로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그냥 가란다. 언제고 또 오면 될 것을 아쉬워 말라며 그 때는 그때대로 지리산의 고운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 타이른다. 멀리 산 위로 시루떡 쌓아 놓은 듯 층층이 높은 층계논 사이로 실핏줄 같은 길이 돌아 오른다. 저 산 깊숙한 곳에 봄이 닿을 날도 머지않았을 것이다. 가을 단풍들 때쯤 다시 찾아와 조락의 의미도 배워갈 것이다.
- 데일리안 배강열 <들찔레의 편지 218>
- 2008.03.30 Copyrights ⓒ (주)이비뉴스
(2) 거조암을 찾아서
거조암을 찾은 것은 연전에 다른 곳을 답사하러 가는 길에 잠시 들른 일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고 오늘이 두 번째다.
내가 살고 있는 대구 북구 태전동에서 거조암으로 가는 지름길은
국우터널을 통해 백안 삼거리에서 갓바위 방향으로 가다가 84번 도로로 바꿔 타고
919번 도로에서 좌회전하여 신령방면으로 곧잘 가다가 101번 도로로 좌회전하여 약 4km쯤 가면 된다.
대략 50km 거리다.
가장 쉽게 찾으려면 경부고속도로에서 포항고속도로로 바꾼 뒤 청통, 와촌 나들목으로 나와
919번, 101번으로 바꾸면 된다.
대형차까지 절 마당에 갈 수 있으나 마지막 300m가 약간 무리가 따를 것 같다.
팔공산 동쪽 자락에 있는 거조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본사 은해사의 말사로 되어 있지만
창건은 은해사보다 60년 정도 빠르다. 거조암 창건은 신라 효성왕 2년(738년)이거나
경덕왕(742~764)때라는 주장이 엇갈리지만 은해사의 809년보다는 훨씬 앞선다는 것이다.
그 명칭에서 풍기듯 큰 스님이 머문 곳이며 고려 때만해도 거조사로 불리었고,
우리고장의 건축물로는 보기 드문 국보로 지정된 영산전(국보 14호)을 보유한 곳이기에
한층 애정이 쏠리는 발걸음이다.
‘영산루’ 란 현판이 걸린 누각 좌우에 2단으로 된 돌담장이 든든하게 둘러쳐져 있고
맨 위에 흙 담장이 기와를 이고 나그네를 맞는다. 영산루 밑으로 만든 돌계단을 올라서면
정면에 영산전과 그 앞에 삼층석탑 그리고 좌우에 부속건물이 나타난다.
탑은 높이가 3.15m, 고려시대 탑의 특징을 잘 갖고 있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 많이 지나지 않아 연등으로 곱게 단장하고 있어 영산전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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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거조암 영산전(국보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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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그 비율이 3:1정도 되며
양팔로 그 길이를 측정해보니 대략 30m 와 10m 쯤 되는 것 같다.
원통형 기둥은 지름이 50cm 정도 되는 것 같고
이런 기둥이 처마 쪽에 선 것은 짧고 건물 가운데 선 것은 길다. 이런 기둥이 모두 28개가 된다.
주심포에 맞배지붕이며 측면에 비바람을 막기 위한 판자막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주심포는 순전히 지붕을 떠받치는 역할만을 생각한 듯 전혀 기교를 부리지 않았고,
동향으로 앉은 정면과 양 측면에 살창이 있는데 측면 살창은 아래 위 두 군데 나 있다.
벽은 회와 황토를 섞어 발라서 누르스름한 자연색이 눈에 거슬리지 않았으며
실내외 어디에도 단청을 하지 않았으니 절집에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단순하면서도 튼튼하게 그리고 환기를 적절히 고려하여
내부의 문화재를 오래 보존하겠다는 생각이 가득한 건축물이다.
영산전에 들어서면 중앙 연꽃좌대(높이 약 70cm)위에 왼손은 선정인,
오른손은 오른쪽 가슴가까이에 대고 손가락은 대체로 오므린 특이한 모습을 한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이 수인은 법화경을 설하는 모습이라는 정광스님의 말씀이다.
옷은 잘 익은 감색에 고운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통견을 하고,
눈은 거의 감은 모습에 살아있는 사람과 흡사한 호분을 입혀 생동감 있는 불상(높이 약 70cm)이
광배의 도움을 받아 그 빛을 더욱 발하고 있다.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는데 좌대는 약간 낮으나 입상으로 모셨기에
중앙의 불상보다 약간 높고 양손을 다소곳이 앞으로 모은 자세에 호분의 색깔이 불상과 조화를 잘 이룬다.
불상 뒤의 탱화는 붉은 색 바탕에 석가여래와 4명의 보살, 4명의 불제자, 2명의 천왕만으로
영산회상을 단순하게 표현했다.
영산전의 명칭에 걸맞게 이곳에는 526나한상이 모셔져 있고
그 모습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이 표정이나 시선이나 차림이 제각각이다.
깨달은 사람답게 근엄한 표정도 없지는 않지만
익살스럽고 재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노라면 웃음이 절로 난다.
부처님의 10대 제자(① 사리불(舍利弗 Suriputra) ② 목건련(目建連 Maudgalyayna) ③ 가섭(迦葉 Kyapa) ④ 수보리(須菩提 Subhti) ⑤ 부루나(富樓那 Prna) ⑥ 가전연(迦延 Ktyyana) ⑦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⑧ 우바리(優波離 Upli) ⑨ 라훌라(羅羅 Rhula) ⑩ 아난(阿難 Ananda)와 빈두로파라타(賓頭盧頗羅墮, Pi olabharad ja)를 비롯한 16나한과 500나한이 한자리에 모셔져 있는 것이다.
나한상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한분의 무게가 60~80kg이며 청석을 다듬어서 형태를 만들고 채색을 했다는 설과,
청석이 아니라 경주 남산돌인데 나한 스스로가 제 모습을 나타냈다고도 하니
제작과정에 신통력이 발휘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에서는 선뜻 믿어지지 않는다.
청석은 시루떡처럼 층이 나는 돌이어서 얇게 쪼갤 수는 있지만 이런 모습으로 다듬을 수는 없을 것 같고,
아무래도 화강석이 재료가 된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어떤 나한은 어깨위로 다리를 뻗쳐 있고 얼굴은 안쪽으로 들어간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면
호랑이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도 있다. 지금 이 절에 주석하고 계신 세분 스님 중 한 분인 정광(正光)스님이
처음 만난 나그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신 내용이다. 나한(羅漢)이라면 부처님의 제자를 일컫는다.
아라한에서 온 말로 아라한(阿羅漢)은 범어 아르한(arhan)의 음역으로 보통 줄여서 ‘나한’(羅漢)이라 한다.
아라한을 응공(應供)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번뇌를 끊고 불생(不生)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진리에 상응하는 이’로
모두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렇든 깨달음을 얻은 성자인 만큼 그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마침 휴일이라 절을 찾은 신도중에는 일일이 한 분 한 분 나한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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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영산전에 모셔진 526나한의 일부. 거조암에서 제작한 달력에서 스캔 |
어떤 절에서나 불상이나 탱화 등을 촬영하지 못하게 하지만 더러는 몰래 찍어 활용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당당하게 허락을 얻고 촬영을 하리라 생각하고 마침 법당 보살에게 취지를 이야기하고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고 몇 장만 찍겠다고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는다.
종무소에 부탁해 봐도 같은 대답이다. 그 대신 절에서 만든 달력에 나한상이 있다면서 한부 주었고,
인터넷에서도 ‘거조암 나한상’이라 입력하면 나한상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그것을 이용함이 좋겠단다.
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사찰 당우 중에 처음 지은 그대로 있는 것은
예산수덕사 대웅전, 영주부석사 무량수전, 안동봉정사 극락전, 그리고 영천거조암 영산전 뿐이라 하니
이 건물이 국보가 되지 않을 레야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중간에 부분적인 중수는 거쳤겠지만 말이다.
영산전도 약 5년 전에 보수를 했다고 하는데 지표면에 맞닿은 벽의 흙이 약간 떨어지기도 했고
장마철도 아닌데 뒷담장이 무너져 내렸고 일부는 곧 무너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 거조암이 유명한 이유는 보조국사 지눌이 33살 때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공포하고
8년이나 머물면서 이 운동을 주도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정혜결사란 선정(禪定: 참선)과 지혜(智慧: 경전)를 근수(勤修)하는 결사(結社)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 닦는 일과 지혜를 깨우치는 일은 함께 해야 하며(정혜쌍수: 定慧雙修)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 나와 남에게 이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눌 스님은 그 뒤 많은 신도들이 운집하자 협소함을 느껴 송광사로 옮겨 이 운동을 계속하였고
오늘날의 조계종이 있게 한 큰 스님이 된 것이다.
거조암이 위치한 곳은 골짜기의 끝자락이다.
앞뒤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으로 둘러싸였고 절 입구에 작은 저수지가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아늑한 숲속에 안긴 이런 곳에서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삶이 참으로 값지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저수지에는 방생하기 좋도록 물위에 시설물을 설치해 두었다.
방생의 진정한 의미는 죽음에 처한 물고기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명체를 존중하는 마음이 방생을 통해 더욱 돈독해지고 우리네 삶이 자비로워지기를 비는 마음이다.
오늘 하루 거조암에서 정광(正光)스님으로부터 유익한 말씀을 많이 들었다.
“산은 산이 아니기에 산이요, 물은 물이 아니기에 물이다.”
“마음수행에 더욱 정진하는 생활인”이 되어야겠다는 말씀을 새겨들으며 다시 찾을 날을 기약해 본다.
거조암이여, 영산전이여! 오늘의 이 모습 그대로만 간직해 다오.
정결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여유롭고 익살 넘치는 나한의 모습을 두고두고 볼 수 있도록 말이다.
526나한상이 지금은 비록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럴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면서 글을 맺는다.
- 이종원, 사진 : 조성봉, 남정우
- 2008-09-08, 문화재청, 문화재답사기행
(3) 고달사 터 / 흥법사 터
- 여행은 가끔 시간의 흐름 역행을 허락한다(신희정)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숨어있는 이수와 귀부 그리고 석불좌 !
여주시내에서는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북내면에 위치한 이곳을 가는 길은
골프장이 인근에 있어 그런지 시원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가로수 길이다.
어디를 봐도 모나지 않은 길을 달리다보면 40여 대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주차장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부터가 만남의 시작이다.
표지판만 아니면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주변은 평범한 농촌의 모습.
눈앞에는 늦은 모내기를 하는 농부와 이양기가 분주하고,
멀리에는 몇 년을 지탱한 지 가늠이 힘든 나무 한 그루가
커다란 자신의 몸과 팔을 벌리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농부도, 지나는 나그네도, 햇빛에 열이 나는 경운기도 그곳에서 쉬어가는 모습이
마냥 나도 그 속에 잠시 머물렀다. 그렇게 이른 더위를 피하고 나서 고된 일에 잠시 잠을 청하는 듯 보이는
농부를 비켜가니 아직 개발이 안 되어 어찌보면 황량한 벌판이 눈앞에 시작 되었다.
여기저기 질서없이 있는 돌들은 주춧돌들이리라 생각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니
소문으로만 듣던 고달 사지 석불좌와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려시대의 석조대좌로 보물 제8호인 석불좌는 높이 157cm.
상 · 중 · 하대와 지대석을 모두 갖춘 4각대좌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라고 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연잎의 형태가 좌우로 갈수록 비스듬히 배열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고려 초기 석물(石物)에서 보이는 연화무늬의 시대적 특징으로
같은 고달사지에 있는 부도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원종대사혜진탑과 비슷한 10세기에 제작된 불상의 대좌로 추정되며,
대좌의 규모나 제작수준으로 보아 그 위에 놓였던 불상의 규모가 어떤 모습이며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를 궁금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거대한 불상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감출수가 없게 만들기도 했다.
신륵사가 고달사의 입구격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생각한다면
이 석불좌위에 있던 불상은 신륵사를 통해 고달사로 들어오는 불자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내마음대로의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불자를 내려다 보던 불상은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언제 폐사된 지 알수 없는 지라 일제시대때 수탈된 것인지
아니면 땅속에서 누군가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형체도 알아볼수 없을 만큼 조각나 버린건지!
바람이라면 그 불상이 이 터 어딘가에 잠들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다시 석불좌 위에 있는 모습을 볼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석불좌를 먼저 봤지만
진입로에서 보면 먼저 보이는 것은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인데
보물 제 6호로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975년에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했는데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하는데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 · 출생 · 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 학덕 및 교화 ·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이수를 보면 정면의 제액 글씨도 선명하고,
좌우로 조각된 용의 모습도 선이 굵으면서도 생동감이 있으며, 꼭 용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이수의 옆면 또한 용이 몸을 비꼬고 있는 모습이 환상적이며,
이수 옆면의 두께도 다른 이수에 비해서 상당히 두꺼운 모양이
비몸이 온전하게 남아있다면 어느정도인지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거북의 네 발과 발톱 끝은 사실적(寫實的)이고도 예리하게 조형되어 있는 것이
마치 살아있는 거북의 모습을 그래도 보는 듯하다.
반면 용형(龍形)의 귀두에 비해 면상이 너무 커보이고 조금은 기이한 모습인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고려의 기상과 용맹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것은 고달사라는 절과 혜목산이라는 자연이 품고 있는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 석조 문화재들이 많았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어,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으며 언제 어떻게 폐사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규모면에서는 최고를 자랑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뒷받침 하듯 다양한 보물과 국보 그리고 자료들을 후손에게 남겼는데
이수와 귀부 그리고 석불좌 외에도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보물7호),고달사지 부도(국보4호) 등이 그것이다.
차례차례 돌계단을 오르고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만나는 이들은 세월을 거슬러
우리를 그시대 석공을 만나게 하고, 신라시대 경덕왕을 느끼게 한다.
높지 않은 혜목산을 오르고 등산로 입구에 자그마한 현대식 고달사에서 제공하는 차 한잔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통로 같다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여기에 서있었던 것 같은 느낌,
어쩌면 간혹 생기는 데자뷰 현상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잠시 일탈을 꿈꾸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이수와 귀부위에 앉아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나를 꿈꿔보는 것도 멋질 듯하다. 여행은 과거와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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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고달사지의 화려한 영광을 기억하면서(이재영)
2008-12-08, 문화재청, 문화재답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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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꼭 한번 가고픈 곳 --- 높을 때 외롭고! 낮은 때 처량한! 그 화려하고 위대한 선원을 정복하겠다는 작은 소망은 뚝뚝 떨어지는 장대비 속에
대구에서 고달사지로 향하는 발걸움에는 모두에게 기대감으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고달사! 신라 경덕왕부터 고려광종까지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고 권력과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결정체로
사방 30리가 모두 절의 땅이며 혜목산의 따뜻한 보살핌속에서 백성들 위에 하염없이 군림한
고달사의 현재는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아픔으로 답사객들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고달사지, 석불좌, 고달사지부도, 원종대사혜진탑(비) 등 유적 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등은
답사자료집과 그 외의 정보들로 충분하게 무장 한 채 고달사지 정복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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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이수(보물 제6호) |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웅장하다는 석불좌(보물 제8호)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이 고달사지의 영광을 답사객들에게 노래하고 있다는 느낌속에서
동호인 모두가 이 거대한 석불좌에 대하여 한 마디씩 외치는 것은
과연 불상은 어떻게 없어지고 누가 없앴는지 저마다 가슴속에 품은 한마디를 자기 자신에게 하면서
그래도 화려하게 대칭적으로 장식된 연꽃들의 앙련, 복련 방식을 조각한 위대한 석공들의 화려함에
잃어버린 불상의 위대함을 대신하고 있었다.
석불좌 중간대의 안상(眼象)은 코끼리의 얼굴과 귀의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주로 불교예술품(석탑, 석등, 불상대좌 등)에 많이 남아 있으며
대체적으로 9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석조물 장엄양식이라는 사실은
그 간의 답사를 통하여 현장에서 느낀 산지식이었다.
한 동호인의 외침! 석불좌를 조각한 석공의 이름은 누구인지 왜 기록에는 남겨놓지 않았는지? 과거나 현재나 진짜 주인공들의 이름들은 왜 빠져 있는지?
석불좌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원종대사혜진탑비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모두 다 내내 불상, 불상, 불상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그 간의 답사를 통하여 쌍봉사의 철감선사탑비, 영암사지탑비 등을 보아 온 경험으로 다가가서나
그 장엄하고 위대함에는 과거의 그것들은 재 빨리 기억속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거북머리의 험상궂은 모습과 땅과 하늘을 진통시키는 발톱의 사실적 표현과 구름, 용무늬,
이수부의 전액 “혜목산 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와
그리고 해밝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도깨비상의 해학적 표현은
고려 석공들의 여유로운 삶을 엿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남아있지 않는 비신은 귀부, 비좌, 이수등을 통하여 그 크기를 짐작 할 수 있었는데
비신이 무슨 죄를 짓고 무슨 연유로 인하여 대다수의 비신이 없어진 까닭에 대해서는
답사 초보자들의 생각으로는 종교문제, 조선의 유교이데올로기, 깨뜨리기 쉬워서 등
다양한 해석을 유추할 수 있는데 정답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것은 숙제로 남겨두기로 하였다.
그 인근에 귀부부분의 거북 목이 잘라져 나간 채 남아있는 탑비는 원종대사혜진탑비와 같이
위대한 고승의 탑비로 추정되었으며 고달사지 부도로 접근 해 보면 원감국사탑비가 아닌지
무지한 동호인들의 의견을 피력하여 보았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역사로 목이 잘라진 귀부를 보면서
세상에는 다양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사회가 영유되고 있다는
의문을 머릿속에 남겨 둔 채로 석축 흔적, 석불좌, 탑비 등을 돌아 본 후
고달사지 답사의 하이라이트인 부도를 찾아 나섰다.
부도는 고승들의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탑 또는 유골을 안치한 묘탑이라는 점과
우리나라의 부도는 통일신라 하대 선종과 관련 있으며
부도의 종류로는 팔각원당형과 석종형부도가 있다는 점과 진전사지 부도가 우리나라 부도의 시원이며
선종과 연계된 지리산 인근에 많은 고승들의 부도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동호인과 간략하게 의견을 나누면서 우산속의 남자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연곡사 동부도 · 북부도,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등 그 동안 보아 온 팔각원당형부도의 참맛을
고달사지 부도에서 찾을 수 있는 기대감으로 내리는 비와 함께 재빠른 발걸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먼저 고달사지부도를 보고 원종대사혜진탑을 보는 것이 순서인 것 같은데
그 동안 실생활에 베어있는 있는 습관대로 움직있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원종대사혜진탑은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탑신과 옥개석등은 정형적인 8각을 보여주고 있으나,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둘러 새기고 있으며,
중대석은 아래 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 조각에 4마리의 용들이 구름속을 활보하고 있는 모습으로
특이하게도 거북이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즉 고달사지부도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전 시대의 부도에서는 가릉빈가가 많이 새겨져 있었는데
고려시대 부도에서는 가릉빈가가 일부분 사라지고
사천왕입상, 비천상과 화려한 옥개석 추녀와 막새보다는 투박한 장식의 옥개석에는 커다란 조각들이
주로 조각되어 있어 장식적인 측면에서는 떨어지는 특색이 있는 것 같았다. 무척 고양된 분위기를 가슴속에 담고 고달사지 부도를 향한 발걸음은 한층 가벼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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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 부도(국보 제4호) |
확 트인 넓은 공간과 부도, 석등(흔적), 배례석으로
완전한 배치가 부도의 가치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한 점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부분을 먼저 볼까 한참 망설이다가 문득 아래에서 본 혜진탑의 방형 지대석과
고달사지 부도의 팔각 지대석에서 서로 뚜렷한 차이점을 느끼면서
그 차이점으로 제작 시기를 비교 할 수 있었다.
고달사지부도는 거북, 용, 구름무늬, 연꽃무늬등의 장식과
옥개석 밑면에서 조각된 날아오는 듯한 비천상의 신비로움이
무척이나 덩치가 큰 부도의 세밀함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과 문짝모양, 사천왕상등이 모두 다 범인들이 함부로 접근 할 수 없도록
예술적인 기교를 마음껏 폼 내면서 우리들에게 나쁜 유혹에 빠지지 말도록 일장 훈시하는 것 같았다.
부도는 통일신라 하대 풍수사상과 연계하여 가람의 중요지점에서 벗어난 풍수에 의거
산세, 지세 등을 고려하여 자리 잡은 사실만으로도
고달사지부도와 원종대사혜진탑의 위치를 비교하는데 무리가 없는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는지 몇 번이고 되돌아보면서
원종대사혜진탑을 한번 더 감상하면서 먼저 같은 유적(물) 일 경우에는 볼 순서를 정하는 것도
답사에 있어 중요한 사실이라는 점을 현장에서 실감하였다.
- 흥법사지에서 오늘을 보다(이양무)
2008-08-04, 문화재청, 문화재답사기행
어제 가뭄을 해갈하는 비가 내린 탓인지 유난히 오월의 하늘은 무척 깨끗하고 날씨 또한 쾌청하다. 갑자기 어디론가 횅하니 가고 싶은 유혹에 한산한 외곽 88번 지방도로를 달려 찾아간 곳.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흥법사지다.
내가 사는 원주 인근에는 유난히 다른 곳보다 폐사지가 많은데
법천사지가 그렇고 거돈사지가 그렇고 또 여주에 있는 고달사지가 그러하다.
다른 곳에 비해 유독 이곳 흥법사지만 자주 접하지 못했던 터라
오늘은 벼르던 참에 이곳 생각이 나서 다시 찾은 것이다.
처음 흥법사지를 찾았던 것이 삼년 전 이맘때. 그때 기억이 새삼 다시 떠오른다.
당시 물어물어 찾아간 그 곳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폐가 한 채와
나즈막 하고 소박하게 생긴 탑 하나 그리고 귀부 및 이수만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때의 황량함이란! 그리고 그때 폐사지터는 왜 그리도 작아보였던지. 거돈사지와 같은 크고 웅대함도 법천사지와 같은 잘 정비된 아기자기함도 없는
초라하기까지 한 첫 인상이 내가 기억하는 흥법사지에 대한 모든 것이다.
숨 막히는 권태로 십분 이상을 견디기 힘들었던 경험을 했던 그곳에 내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도로에서 흥법사지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수백 년은 족히 됨직한 커다란 느티나무와 김제남 신도비가 있고
좁은 포장농로 꾸불꾸불 한 오 분간 가다보면 낮은 언덕위로 탑의 모양이 흠칫 보이고
이내 올라서면 스무 평 정도의 면적위에 보물 제463호 삼층석탑과 보물 제464호 귀부 및 이수가
찾아간 이를 조용히 반겨 맞아준다.
삼년 전 근처에 있던 밭들이 이젠 탑 바로 옆에까지 차고 들어와 있고 주변에는 잡초와 토끼풀이 무성하다. 이런 곳에 보물이 두 개나 있는 유적지가 있으리라고 누가 감히 생각을 하겠는가.
삼층석탑을 말없이 한동안 바라본다. 높이 3.2m. 이층의 가단위에 삼층의 몸 체부를 갖췄다는 일반적인 고려시대의 탑. 땅으로부터 연꽃이 솟아나는 모습을 새겨 연화세계를 표현하고, 다소 빈약하게 보이는 이 탑의 매력은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은 많지만 후세사람들의 손을 덜 탄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데 있다.
약간은 기우러져 있는듯한 모습에 세월의 묵은 때를 그대로 고스란히 안고
쇠에 붙은 푸른 녹처럼 풍화된 이끼를 그대로 간직한 삼층석탑에서
무릇 폐사지에서만 유독 느낄 수 있는 고색창연한 어떤 처연함 같은 것을 느낀다.
또한 우리나라 모든 사찰 터가 다 그러하듯 이곳도 뒤로는 용봉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섬강, 좌우로는 낮은 산을 낀 전형적인 풍수지리의 배산임수 길지인 듯 보이며
특히나 용봉산의 세봉우리는 대웅전 안의 삼존불을 연상시킨다.
새삼 옛 선인들의 땅을 보는 안목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인삼밭이 보이는 탑 앞쪽으로는 진공대사 탑비의 귀부 및 이수가 위에 얹어야할 탑비는
타지에 빼앗긴 채 묵묵히 그리고 말없이 잡초사이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거북이라기보다는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입에 문채 금방이라도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은
그런 꿈틀거림이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무척이나 정교하고 세심한 조각 작품이다.
많은 세월의 풍파를 거쳐 왔음에도 이수에 새겨진 진공대사란 글씨는
새긴지 얼마 안된듯 또렷한 모습으로 선명하기까지 하다. 옛 선조들의 예술적 우수성을 보여주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원주의 다른 폐사지 두 곳에서처럼 이 흥법사지에도 어김없이 큰 느티나무 하나가 한편에 우뚝 서있다. 나는 이런 큰 나무들을 각각의 폐사지를 지키는 지킴이라고 늘 생각을 해왔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신비롭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에 지어져 임진왜란 때 폐사된 걸로 추정되는 이곳 흥법사지를 저 지킴이나무는
묵묵히 오랜 세월 비바람 속에서 지켜봤을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밭길을 이리저리 휘적휘적 걸어 다니다보니 절의 주춧돌로 사용했음직한 암석이
밭 한켠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한때는 큰 사찰을 지지하고 든든히 버티고 섰던 돌들이
이젠 세월의 흐름과 무관심속에 제 역할을 잊어버린 채 버려지고 잊혀 진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싸하게 아려져 옴을 감출수가 없다.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는 속에서도 그 역사의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아직 버티고 있는
이 주춧돌 하나의 역사라도 과거는 남아 있어야한다고 생각해본다.
그 과거가 바로 우리들의 조상이고 전통인 까닭에.
그리고 역사란 단순히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 역시 다가올 오늘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 내게 볼 것도 많고 구경꺼리도 많은 유적지가 많고 많은데
하필이면 왜 그리도 쓸쓸하고 황량하기까지 한 폐사지를 찾아다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나무는 뿌리만큼 자라는데 뿌리보다 웃자란 나무는 키가 크고 멋있게 보이지만
그 뿌리는 약해서 조금만 강한 비바람이 불면 쉽게 넘어진다고. 또한 크게 무엇이 있어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퇴락해간 세월을 생각해보고 흔적만 남은 폐사지이기에
더 신비하고 경건한 그 무엇이 있을 것 같아 찾는 것뿐이라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 국토는 좁고 인구는 많은 그래서 어느 한군데
도시사람들이 휘젓고 다니지 않는 곳이 없는 요즈음에
화려한 문명 속에 취할수록 더 조용하고 한적하고 잊혀져가는 소박한 그 무엇을 찾는 것이
어쩌면 도시인들의 마음속에 한결같은 바램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인적도 없고 바람소리 새소리만 오고가는 이곳 외딴 흥법사지에서
없어지는 것은 무엇이고 또 우리의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준 상상의 시간은
누가 그랬던 것처럼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 남아있는 것들을 제대로 살아있게 하는 법”
이라는 교훈을 나에게 다시 일깨워 준 것같아 마음이 뿌듯해짐을 느꼈다.
이곳을 찾았던 나는 앞으로도 이 역사의 잔존물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쓸 것이고
어제 어떤 이가 이곳을 찾아왔던 것처럼 오늘은 내가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이가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흥법사지는 영원히 우리들에게 잊혀 지지 않는 역사의 장소가 될 것이다.
내려오는 길... 따스한 봄의 햇살 속에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아카시아 꽃이 좋고
유난히도 크게 우짖는 이름 모를 새소리가 정겹다.
(4) 양동마을 관가정
아파트는 사람을 정형화시키는 반갑지 않은 마력을 갖고 있다. 우리 집과 옆집, 아래층과 위층을 동일하게 만들어주는 아파트에서는 ‘내 집 만의 매력’을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우리의 전통가옥인 한옥은 ‘내 집 만의 매력’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어,
한옥 여행은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맛을 항상 느끼게 해 준다. 옛 여인들의 삶을 더듬으며 추억 쌓기를 할 수 있기에 나는 딸과 함께 한옥 여행을 즐겨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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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정의 향나무 |
11월의 초입에 찾아갔던 관가정은 작고 소박한 한옥이었다.
관광객을 위해 경주 양동마을은 옛 것을 표방한 새 건물이 많이 들어왔다.
기와집, 초가집, 흙과 돌로 이루어진 담벼락까지 양동마을은 전체적으로 새옷을 입었다. 새옷을 입은 양동마을에서 원래의 모습대로 고목을 보유한 채 서있는 관가정은
오히려 색다른 맛으로 다가왔다. 관가정의 현판에는 '觀稼亭'이라고 씌어 있었다.
관가정이라면 ‘觀嘉亭-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는 정자’이라는 이름이 아닐까 하는
선입견이 작용해서인지 처음에는 현판의 한자표기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관가정에서 마을 아래를 굽어보니 현판이 절묘하게 씌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관가정은 전경을 볼 수 있는 정자가 아니라, 기분 좋은 전경에 한몫을 하는 정자로
화룡점정의 건축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관가정은 양동마을의 언덕 즈음에 자리를 잡고 있다. 뒤로는 야트막한 산을 끼고 아래로는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형태이면서도 위압감을 주지 않은 규모라
친근감이 든다.
관가정의 사랑채는 누마루의 형태를 띠면서도 절반만이 누마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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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정의 사랑채 |
아마도 건축물의 안전성을 위한 조치 겸, 사랑방에 군불을 때야 하는 관계로 이렇게 만들어진 듯 했다. 마루의 팔걸이는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조각의 유려한 맛은 사그라져가고 있었다. 아마도 풍파에 시달리며 지탱해오느라 닳아버린 것이리라. 그래도 손상을 입은 곳 하나 없이 버티는 것을 보면 단단하게 지어진 건축물이기도 하거니와,
관리하는 후손의 경건한 마음가짐도 한몫을 한 듯 하여 감사하다는 생각을 갖고 볼 수 있었다. 화려한 단청도 없고, 기기묘묘한 건축기술이 발휘된 부분도 없는 사랑채인 관가정은
그래서 ‘유행’이라는 것과는 관련이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앞뜰에 굳건히 버티고 서있는 고목이 된 향나무의 향기보다 더 짙은 삶의 향기를 품고 있다. 인근에 있는 건축물인 [향단]과 비교하여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마루에 얌전히 올라앉아 마을을 바라보며 다른 집들에 대한 품평을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딸은 우리의 전통 가옥인 한옥에 대한 애정을 여지없이 드러내주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한옥과는 달리 이 집의 대문은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는 대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보는 색다른 경험을 해 보았다. 나는 딸아이와 함께 한옥을 탐방할 때면 항상 부엌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내가 주부이기도 하거니와, 딸아이와 함께 예전의 삶을 돌아보며
현재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관가정의 안채는 ‘좁다’는 느낌이 절로 드는 좁은 마당을 ㅁ자로 하여 형성되어 있었다. 다른 한옥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크기이다. 안방에서도 부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앉아서도 볼 수 있는 근거리였다. 동선이 짧게 연결되는 이점을 누리고 싶어서였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딸아이는 ‘집 지을 땅이 부족해서 그럴 거예요’하면서 앞장서서 걸어가는 딸의 뒤에서
나는 내 의견을 말했다. ‘아마도 이 집의 안주인은 아랫사람에게 부엌일을 전적으로 맡기기보다는 자신도 부엌일을 했을거야.
한마디로 마음씨 좋은 주인이라 이렇게 짓지 않았을까?’ 안채의 대청에 앉아 부엌쪽을 바라보던 딸은 ‘엄마 말씀이 맞을 수도 있어요’하며 내 옆에 앉았다.
안채의 대청에서 보이는 정경은 계절을 따라 한폭의 그림처럼 변해주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의 초입이라 조금은 황량하지만,
봄 여름 가을이면 수시로 변하는 나뭇잎의 색상에 따라 색다른 느낌으로
집안에서 자연을 느끼지 않았을까. 굳이 액자를 걸어놓지 않더라고 눈을 창으로 돌리면
보이는 자연이 주는 절묘한 아름다움. 목조건축물이 아니면 느낄 수 있는 묘미이다.
소박한 관가정에서는 더욱 더 실감되게 느낄 수 있는 묘미를 느끼며 우리 모녀는 방들을 둘러보았다.
방들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신 일렬로 죽 배치가 되어 있어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한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큰 행사를 치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 전기에 지어진 고택이었지만,
청렴하기 이를데 없었다던 집주인의 실용성이 많이 가미된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실용성은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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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정의 대들보와 천정보 |
관가정의 대들보와 천장의 나무들은 그 크기가 들쭉날쭉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루며
집을 지탱하고 있었다. 획일화된 굵기로 다듬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자연 속에 자연스럽게 앉은 관가정의 의미를 나타냈다. 매사에 물이 흘러가듯 순응하는, 충절로 기억되는 우재 손중돈의 충절만큼이나
다소곳하고 검소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규범을 중시하는 대칭의 묘를 살린 집이라 내 집같은 편안한 느낌도 들었다.
대청에서 대문을 바라보면 좌우의 대칭이 한 눈에 쏙 들어오는 집이라
대청에 한참동안 앉아 낯선 사람들과도 일상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용을 추구하는 집의 개념에 딱 들어맞는 집. 편안하고 밝고 어지럽지 않은 배치와 구조는
‘크고 화려한 집’을 꿈꾸는 현대인들에게는 분명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집을 찾아오는 것을 보면
이 집이 주는 ‘집의 본래적 의미’를 잊지 않고 싶어서는 아닐까 싶었다.
이제 여자들의 전유물인 후원을 보기 위해 부엌 뒷문으로 나왔다.
부엌문은 나무를 덧대어 색상이 각각이었다. 좋게 보면 조합의 미를 볼 수 있는 문이었지만, 삐딱한 시선으로 본다면 누더기같은 문을 보며
우리 모녀는 한참동안 웃었다. 그러나 이것도 목재를 아끼기 위한 집 주인의 근검함이었으리라 생각하니
우리가 배워야 할 물자 절약의 표본으로 보여 소중한 마음으로 부엌문의 질감을 직접 음미해보았다.
이런 것을 보면서 딸은 ‘절약’을 배우는지 꼭 한마디를 덧붙였다. “엄마! 이것도 유행이 된다면 좋겠어요. 그러면 너도 나도 절약이 몸에 밸 텐데.” 후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안채의 답답함에서 잠시 벗어나 바깥 공기를 쐴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면적이
이 집의 건축적 의미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은 채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래도 여성을 배려한 집 구조를 잊지 않은 선조들의 배려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산에서 내려온 시원한 공기를 한껏 마시니 속이 탁 트이며, 또 다시 한옥 한 채를 마음속에 지을 수 있었다. 우리 모녀가 손을 잡고 관가정을 떠나올 때, 관가정의 짙은 향기가 우리의 후각을 자극했다. 세월의 무게를 안은 향나무와 백일홍, 그리고 뒷산에서 풍겨오는 만리송의 향기와 어우러진
관가정의 소박한 목재들이 옛것의 향기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 관가정 (보물 442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50 시대 : 조선시대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관리로서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언덕에 자리잡은 건물들의 배치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된다. - 2008-12-29, 문화재청, 문화재답사기행
- [2008년 문화유산답사기 금상, 1위], 박혜균
(5) 운현궁(雲峴宮) - 고매한 과학적 건축미
지나가는 완연한 가을날에 서울 도심 속 조용하고 담담하게 자리한 운현궁(雲峴宮)으로 향한다.
경복궁에서 약 20분이면 갈 수 있고 창덕궁에서 도보10분 거리에 위치한 운현궁(雲峴宮).
경건한 마음을 갖고 어떠한 모습으로 마주할 지 호기심 어린 질문을 품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많은 문화유적지 중에서 운현궁(雲峴宮)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의 중심에서 큰 규모를 자랑하는 4대 궁궐과 비견 될 만큼
한 켠에서 소리 없이 자신의 모습을 알리는 곳. 그곳이 바로 운현궁(雲峴宮)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목조문화재를 대변하는 한옥의 묘미는 자연과 어울려
조용한 운치와 함께 고매하면서도 과학적인 건축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운현궁은 조선의 옛 정취와 함께 구축적이고 복합적인 한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적지라고 판단했다.
운현궁(雲峴宮)은 조선후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석파 이하응 (李昰應 1820~1898) 즉,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조선의 임금인 고종(高宗 1852~1919)이 유년시절을 보낸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곳이다.
근처의 고개이름 혹은 관현의 이름을 따서
지금까지 운현궁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하며
자연스레 운현궁(雲峴宮)은 역사의 중심무대로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진 곳이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맑은 푸른빛 하늘 아래
고고하게 자리한 운현궁(雲峴宮)이 한눈에 들어오며 전체적으로 고풍적인 왕실의 분위기에 매료된다.
분위기에 취해 첫 건물지인 노안당으로 출발한다.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그 전에 노안당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솟을대문을 지난다.
솟을대문은 문의 종류로 문이 설치되는 행랑채나 벽보다 대문의 높이를 더 높게 한 건축양식이다.
평대문이 아닌 솟을대문을 세운 이유는 지체 높은 왕실집안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쉽사리 출입하는 곳이 아님을 각인한 뒤 노안당과 마주한다.
순간적으로 ‘아!’하고 탄성과 함께 그 위용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저 하늘까지 닿으려는 팔작지붕의 기세가 느껴지는가.
조용하면서도 웅장한 무게감은 표현하기 어려울 만치 강한 힘이 지니고 있었다.
노안(老安)이라는 명칭은 논어에서 인용한 것으로
편안한 노년을 위함과 노인을 편히 모셔야 한다는 치국의 뜻을 담아 노안당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이름 하나도 큰 뜻을 새겨 나라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담아내고자 한 정신에 다시금 놀란다.
노안당의 현판은 당대의 최고의 글씨를 자랑하는 추사체를 집자한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차양(遮陽)의 존재였다.
차양은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이 되며
추운 겨울에는 햇빛이 더욱 깊게 들어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조선후기건축의 시대적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 하나의 부재 사용도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계획함으로써
‘한옥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는 편견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대원군은 평소 난(蘭)을 잘 쳤다고 한다.
그것은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대원군의 묵란도(墨蘭圖)가 여러 작품 남아 있어
그가 추구했던 예술성이 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차양(遮陽)은 그러한 대원군의 미적 향유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운현궁 곳곳에 있는 정원을 통해서도 대원군이 공간에 대한 심미안이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노안당의 후면으로 들어서면
앞으로 보게 될 노안당의 측면과 함께
노락당과 이로당이 하나의 길로 연결된 장관을 볼 수 있다.
건물의 구조와 배치가 정교한 계획에 의하여 앉혀졌음에
감탄하고 잘 구획된 복합적인 구조미에 새삼 놀라워
말을 잃는다. 또한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각 공간에 맞춰진 장식적인 벽체들로 인해 눈이 즐겁기까지 하다.
노안당을 지나 행각을 통해 노락당(老樂堂)으로 향했다.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에 해당되는 곳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졌던 곳이다.
노안당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단정하게 지어진 한옥의 모습이었다.
한옥은 모든 자제를 자연으로부터 얻으며 기단에서 기와까지 하나하나 다듬어 조립한 구조이다.
예로부터 한옥은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모든 부재들이 서로 맞물리도록 이를 맞추고 끼워 넣어 만들어진 하나의 완전한 결정체인 것이다.
노락당은 겹처마의 구조로 진중함과 깊이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답답하거나 무거워보이지 않음은 공포(栱包)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초익공의 구조를 취하는 점이다.
익공 양식이란, 한옥에서 볼 수 있는 기법으로 주두 밑으로 익공이라는 부재를 끼운 것으로 새의 날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기법이다.
종묘의 정전, 경복궁의 경회루와 같은 권위있는 건물이나 궁, 사대부집안에서 볼 수 있는 한옥의 구조 중 하나로, 장식적이면서도 정적이고 단아하다. 그런 점에서 노락당은 한층 격이 높고 고귀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한동안 정신 없이 사진을 찍다가 내부공간으로 눈을 돌렸다.
실내는 한옥의 탁월한 통풍의 비법으로 설명되는 잘 발라진 창호지의 문과 창이 정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구성은 정성과 성의가 담겨서 만들어졌으며
특히 잘 짜여진 불발기창은 한옥의 담담한 맛과 멋스러움을 한껏 살려내고 있었다.
옛 조선은 반상뿐만 아니라, 남녀간의 엄격한 규율과 제한이 있었다.
운현궁 역시 남자의 공간인 사랑채 노안당이 있다면,
여자들의 공간으로 바로 마지막으로 보게 될 운현궁 이로당(二老堂)이 그곳이다.
어쩌면 여자들의 공간이기에 소극적이며 조용하겠구나 하고 마음에 단정을 짓고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로당은 앞마당이 비교적 넓게 틔여서 한껏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실, 노안당과 노락당은 많은 공간 구획이 지어져 있기에 조용하고 사색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이로당은 또 다른 차원의 공간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여자들의 공간이기에 같은 여자로서 나도 모르게 본연의 자취에 빠졌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로당에서 시선을 끌었던 것은 노락당과 연결되는 행각이 있는데 그 사이에 문의 형태이다.
구조적으로 문이 설치된 행각의 높낮이를 달리 지은 것이다.
기존의 한옥의 배치가 대칭을 선호했다면 이러한 운현궁의 비대칭적인 구조는 원칙을 지키되,
발상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고도의 건축미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건축미와 더불에 문에 새겨진 당초문 조각은 가히 예술적인 한 폭의 조각작품을 보는 듯 하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목조조각이 정갈한 한옥 안에서 충분히 큰 빛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문을 통과하면 후원으로 들어선다.
앞서 말했던 노안당 후면으로부터 연결된 그 길의 끝에 해당되는 곳이다.
후원에는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우물을 비롯하여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도입에서 잠시 말했듯이 운현궁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보고싶을 때 언제든지 찾아가서 건축적 아름다움과 옛스러움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조선 왕실가문의 품위와 궁으로서의 고매한 면모를 여실히 갖추고 있는 운현궁.
높은 권위를 상징했던 웅장하고도 과학적인 구조에서도 한옥이 갖는 소박함과 섬세함도 잃지 않았다.
이처럼 아름다운 우리 목조건축. 그 정점에 서있는 운현궁!
다시 돌이켜 생각하니 무한한 기쁨이 찾아온다.
많은 연구와 보존을 통해 세계가 자랑하는 목조문화재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 [2008 문화유산 답사기] 은상(2위) 라수진
- 2009-01-12, 문화재청, 문화재 답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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